[소감] 기독교 관련 통사. 이 책에 따르면 기독교가 대중의 지지를 얻은 건 요한 23세(1958~63 재위). ]본명은 Angelo Giuseppe Roncalli. | 역대 교황들 가운데 가장 좋은 평판을 얻은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때의 일이다. 그 이전의 교황들은 세속인과 다를 바 없었다. 아니 오히려 더 타락한 것일 수도 있겠다. 약술한 책이라 통사-입문서- 정도로 보면 되겠다.
책소개:저자 프로필, 목차는 책 제목을 클릭하면 볼 수 있습니다.
세계사를 이해하기 위한 비결 중 하나는 기독교의 역사를 아는 것이다. 기독교 역사가 유럽의 역사이자 바티칸에 있는 교황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세속적 권력과 얽히게 되면 바로 인간적인 역사로 탈바꿈한다. ‘신의 대리인’인 교황이 정치와 연관되었을 때는 어마어마한 권력 투쟁의 역사로 바뀌었다.
중세 시대의 교황은 황제와 국왕 위에 있는 지배자였고, 유럽의 역사는 교황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한 전쟁의 역사였다. 교황ㆍ황제ㆍ국왕이 서로 경쟁했으며 16세기에는 프로테스탄트가 교황에게 반기를 들었다. 과학이 진화하면서 국왕도 민중도 교황을 떠나갔다. 프랑스 혁명은 반가톨릭 운동이었고, 민주화와 근대화가 진행될수록 교황은 반근대의 상징이 되었다. 교황에게 거리를 두게 되면서, 정교분리를 택한 근대 국가가 형성되었다.
-서문 중에서-
●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에 호의를 보인 이유
● 로마 황제의 ‘밑’이 되는 것을 거부하며 공의회에 결석하다
● 몰락한 서로마 황제를 대신해 교황이 로마의 수호자가 되다
● 이단인 아리우스파 게르만족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다
● 교황 스테파노 2세의 속임수가 피핀의 기증을 탄생하게 했다!
● 마침내로마교황에게의존하기시작한카롤루스대제의자손들
● 황제가 없는 시대, 교황은 이탈리아 귀족의 꼭두각시가 되었다
● 유력가의 여자들이 교황을 차례로 갈아치우다
● 교황 그레고리오 7세에게 완전히 굴복한 신성 로마 황제 하인리히 4세
● 교황과 신성 로마 황제의 대결 제2라운드는 황제의 역전승으로 끝나다
● 교황청은 왜 로마와 아비뇽으로 분열되고 말았는가?
● 로마 교황청의 금고지기로 번영하기 시작한 메디치 은행
● 가장 타락한 교황이 이탈리아의 위기를 기적적으로 구하다
● 이탈리아 국민을 실망시킨 교황 비오 9세의 배신
● 교황과 나치의 연결고리는 반공주의였다!
책 속으로
[책을 내며]
기독교의 역사를 알면 세계사의 진상(眞相)이 보인다
세계사를 이해하기 위한 비결 중 하나는 기독교의 역사를 아는 것이다. 기독교 역사가 유럽의 역사이자 바티칸에 있는 로마 교황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수많은 사람이 믿는 종교다. 예수의 가르침에는 자비가 넘치고, 가톨릭 세계를 통합하는 로마 교황은 ‘평화’를 이야기한다.
하지만 기독교가 세속적 권력과 얽히게 되면 바로 인간적인 역사로 탈바꿈한다. 특히 ‘신의 대리인’인 로마 교황이 정치와 연관되었을 때는 어마어마한 권력 투쟁의 역사로 바뀌었다. 교황은 카리스마와 권위, 나아가 거대한 부를 소유했고, 그 힘을 이용해 폭력 행사를 마다하지 않는 국왕과 귀족을 상대해왔다. 그 중에는 그레고리오 7세처럼 황제를 굴복시킨 교황도 있고, 나폴레옹에 의해 감금당하는 비극을 맞은 비오 7세 같은 교황도 있었다.
중세 시대의 로마 교황은 황제와 국왕 위에 있는 지배자였고, 유럽의 역사는 교황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한 전쟁의 역사였다. 교황, 황제, 국왕이 서로 경쟁했으며 16세기에는 프로테스탄
트가 교황에게 반기를 들었다. 과학이 진화하면서 국왕도 민중도 교황을 떠나갔다. 프랑스 혁명은 반가톨릭 운동이었고, 민주화와 근대화가 진행될수록 교황은 반근대의 상징이 되었다. 교황에게 거리를 두게 되면서, 정교분리를 택한 근대 국가가 형성되었다.
그 후 교황의 지위는 땅에 떨어졌다. 하지만 최근 교황의 중요성을 다시 주목하는 것은 여전히 교황이 가톨릭의 통합자이며, 유구한 역사를 짊어지고 왔기 때문일 것이다.
로마 교황보다 오랜 역사를 가졌던 로마 제국 황제나 고대 중국 황제는 옛날 옛적에 멸망했다. 교황과 격전을 벌였던 신성 로마 제국(독일) 황제와 프랑스 국왕의 모습도 이제는 찾아볼 수 없다. 거의 이천 년에 달하는 교황과 엇비슷한 역사를 가진 존재는 일본의 천황가 정도지만, 교황은 천황가와 달리 국제적 위상을 지니고 있다.
게다가 로마 교황 같은 구심력을 가진 종교적 존재는 이 세상에 오직 교황뿐이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신도를 가진 이슬람교의 경우, 무슬림 전체를 통합하는 종교적 지도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가톨릭의 대항마인 개신교에서도 프로테스탄트를 통합하는 지도자는 없다. 오직 로마 교황만이 가톨릭을 통솔하며 이천 년에 걸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그래서 로마 교황의 역사를 알면 세계사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책에서는 기독교, 특히 로마 교황의 역사에 초점을 맞추어 세계사를 탐구해 나가고자 한다.
출판사서평
[본문 중에서]
초대 교황 베드로의 순교
- 로마 교황이 가톨릭에서 특별한 존재인 이유-
가톨릭의 총본산은 오랫동안 로마에 있었다. 시대에 따라 로마가 아닌 도시에 교황청이 있었던 적도 있지만, 그래도 로마는 기독교인에게 특히나 신성한 도시였다. 베드로가 순교한 땅이 바로 로마이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예수의 최초의 제자였으며, 예수를 따르는 제자 중에서도 각별한 존재였던 열두 제자, 12사도의 중심에 있었다. 그뿐 아니라 예수가 기독교를 맡긴 인물이기도 했다. ...
기독교 탄압
-왜 로마 황제들은 기독교인에게 위해를 가했는가?-
3~4세기 기독교가 로마 제국으로 퍼져나가던 무렵에 기독교는 자주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기독교를 탄압하던 막시미누스 트락스 황제(재위 235~238년), 발레리아누스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시대에는 순교자가 끊이지 않았다.
로마 황제가 기독교를 탄압한 것은 황제 숭배에 방해가 되었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유일신을 믿는 종교이며, 다른 종교의 신들을 신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기존에 로마인들이 믿던 신들도 인정하지 않았다. 이것이 로마 황제 숭배에 대한 거부로 이어지자, 이에 격분한 로마 황제는 기독교인에게 보복을 가한 것이다. ...
교황 실베스테르 1세의 허영
-로마 황제의 ‘밑’이 되는 것을 거부하며 공의회에 결석하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니케아 공의회를 주최했을 때 로마 주교 실베스테르 1세는 출석하지 않았다. 그저 대리 특사를 보내는 데 그쳤을 뿐이다.
실베스테르 1세가 공의회에 출석하지 않았던 까닭은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회의의 주역이 되는 것이 싫어서였다. 만일 그가 출석한다면 로마 주교가 로마 황제의 아랫자리에 앉게 되어, 기독교 세계를 지배하는 자는 로마 황제라고 인정하는 셈이 된다. ...
로마 제국의 와해
-몰락한 서로마 황제를 대신해 교황이 로마의 수호자가 되다-
4세기에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콘스탄티누스 대제, 율리아누스 황제 등 강한 힘을 가진 황제 덕분에 로마 제국의 해체에 일시적으로 제동이 걸렸다. 그러나 황제가 무력하면 해체는 한층 빨리 진전되는 법이다. 더구나 게르만족이 로마 제국을 향해 본격적인 침공을 시작하고, 발렌스 황제가 아드리아노플(현재 터키의 에디르네) 전쟁에서 고트족 군단에 패하여 사망하는 사태까지 일어났다.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사망한 뒤, 로마 제국은 동서로 분열되고 만다. ...
랑고바르드족의 침입
-로마 교회를 괴롭힌 두 개의 족쇄-
동로마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에 의한 ‘로마 제국 회복 사업’은 그의 치세에서 끝난다. 서방 세계의 정복과 경영 사업은 크나큰 지출을 초래했고, 동로마 제국의 재정은 삐걱거렸다. 알보이노Alboino(*이탈리아를 정복하고 랑고바르드 왕국을 세운 전설적인 왕)가 이끄는 랑고바르드족(롬바르드족)은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사망한 틈을 타 다시 이탈리아반도를 침공했다. 랑고바르드족 역시 게르만족의 일파였으며, 568년 북이탈리아의 파비아를 수도로 삼아 랑고바르드 왕국을 건국했다. ...
콘스탄티누스의 기증
-교황 스테파노 2세의 속임수가 피핀의 기증을 탄생하게 했다!-
로마 교황 스테파노 2세는 ‘피핀의 기증’이라는 큰 수확을 얻는 과정에서 세기의 속임수를 썼다.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을 날조하여 피핀을 영향력 아래 둔 것이다.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이란, 4세기에 밀라노 칙령을 공표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교황 실베스테르에게 보냈다는 서신이다. 콘스탄티누스의 서신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
시체 재판
-황제가 없는 시대, 교황은 이탈리아 귀족의 꼭두각시가 되었다-
카롤루스 대제가 카롤링거 제국을 세운 이래, 로마 교황의 권위는 전 유럽에서 상승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렇게 위엄을 갖춘 교황이었지만 9세기 중반부터 10세기까지는 수난의 연속이었다.
먼저 846년 교황 세르지오 2세 시대에는 이탈리아반도에 이슬람 세력이 상륙하여 로마를 습격했다. 성 베드로 대성당도 약탈의 대상이 되었다. 거기다 로마 교황들이 단명하기 시작했다. 891년 즉위한 교황 포르모소부터 931년 요한 11세까지 약 40년 동안 20명이 넘는 로마 교황이 등장했다. 심지어 살해당한 로마 교황도 여럿이었다. ...
노르만족이 날뛰다
-바이킹의 습격 때문에 신앙심이 깊어지다-
로마 교황의 수난이 이어지던 10세기, 유럽 전체를 공포의 밑바닥으로 몰아넣은 것은 노르만족이다. 다시 말해 바이킹의 습격이었다. 스칸디나비아반도나 유틀란트반도에서 살던 바이킹은 뛰어난 항해 기술을 이용해 동프랑크, 서프랑크, 대브리튼섬(영국 본도), 아일랜드 등을 습격하기 시작했다. 노르만족의 습격은 9세기부터 이미 시작되었으나, 동프랑크, 서프랑크의 황제와 국왕은 대부분 무력했다. 노르만족은 강을 거슬러 올라와 내륙 도시까지 습격했기에 안전지대는 어디에도 없었다. ...
카노사의 굴욕
-교황 그레고리오 7세에게 완전히 굴복한 신성 로마 황제 하인리히 4세-
1073년 이제까지 교회 개혁을 주도해온 힐데브란트가 교황 그레고리오 7세로 선임되어 대대적인 교회 개혁에 나선다. 이는 로마 교황과 신성 로마 황제의 본격 대결의 시작이었다. 1075년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공의회를 개최하고, 일반인에 의한 성직자 임명을 성직 매매로 간주하여 세속 권력에 의한 성직자 서임을 금지했다. ...
십자군 파탄
-십자군의 잇따른 실패로 인해, 교황의 권위 상승도 한계에 부딪치다-
유럽을 열광시킨 제1차 십자군에 이어서 1147년부터 제2차 십자군이 시작된다. 제2차 십자군은 중동에서의 열세를 만회하려 했다. 제1차 십자군에서 탈환한 에데사 백국은 그 후 이슬람 세력에 다시 빼앗기고 말았으며, 안티오키아 후국도 위태로워졌다. 그래서 로마 교황 에우제니오 3세는 제2차 십자군을 일으키기로 했다. 제2차 십자군에서는 처음으로 유럽의 국왕급이 참전했다. 바로 신성 로마 황제 콘라트 3세와 프랑스 국왕 루이 7세다. 하지만 제2차 십자군은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하고 실패로 끝난다. ...
교황의 친족 경영
-타락과 절정을 동시에 의미하는 이유-
로마 교황 인노첸시오 3세 시대를 전후하여, 로마 교황을 둘러싸고 ‘네포티즘(친족 등용 정책)’이 두드러졌다. 네포티즘이란 교황이 추기경이나 대교회의 직책을 임명할 때 혈연관계가 있는 자를 등용하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 친족들로 요직을 채우는 바람에 한 집안에서 몇 명씩 되는 교황이 등장한다.
인노첸시오 3세 자신부터 그랬다. 그는 이탈리아 세니 백작가 출신이자 교황 클레멘스 3세의 조카였다. 숙부였던 클레멘스 3세가 그를 부제 추기경으로 지명하며 그는 교황 자리에 한 걸음 가까워졌다. 그 뒤 인노첸시오 3세 또한 추기경 자리에 조카를 앉혔고, 그 조카는 로마 교황 그레고리오 9세가 되었다. ...
기벨린 대 겔프
-황제당과 교황당의 대립이 이탈리아를 내전으로 몰아넣다-
12세기에서 14세기에 걸쳐 프리드리히 2세를 비롯한 신성 로마 제국 황제들이 이탈리아 정복에 열중하던 무렵, 이탈리아 내부에서는 당파 대립이 심각했다. 바로 기벨린(황제당)과 겔프(교황당)의 대립이다.
이는 신성 로마 황제와 로마 교황의 대립에서 어느 쪽 정책을 지지하느냐를 뜻하기도 했다. 황제를 지지한 ‘기벨린’은 독일의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황제들이 거주했던 ‘바이블링겐(이탈리아어로 기벨리노)’에서 유래했다. 교황의 지지 세력인 ‘겔프’는 호엔슈타우펜 왕가에 대항했으며 교황에게 협조적이었던 바이에른의 ‘벨프’ 가문에서 유래했다. ...
국왕의 신성과 민족의식이 싹트다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가 교황에게 굴복하지 않은 이유-
아나니 사건에서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가 교황 보니파시오 8세에게 치욕을 선사할 수 있었던 것은 프랑스 국왕을 지지하는 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유럽의 주교와 성직자들 사이에서는 로마 교황의 절대 권위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었다. 그들이 반드시 현역 교황의 절대적 지지자라고는 할 수 없었다.
교황을 대신해 성직자와 일반 민중의 지지를 얻었던 것은 국왕이었다. 10세기 후반 카롤링거 왕조의 로마 제국이 붕괴한 후에 생긴 프랑스에서, 처음에 왕은 무력한 존재였다(75페이지 참조).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의 왕들은 교황과 기독교의 권위에 기댈 수밖에 없었지만, 그들은 봉건 영주에게서 토지를 빼앗고 수면 아래로 힘을 길러 갔다. ...
메디치 가문과 유착하다
-로마 교황청의 금고지기로 번영하기 시작한 메디치 은행-
교황청의 아비뇽 시대와 교회 대분열의 시대는 14세기 초부터 15세기 전반까지 약 1세기 이상 이어졌다. 그 사이 이탈리아에서는 르네상스가 진행되었다. 도시 국가가 발달한 이탈리아에서도 특히 피렌체의 성장은 두드러져서, 초기부터 중기까지 르네상스의 역군이기도 했다. 그런 피렌체에서 권력을 쥔 것이 메디치 가문이었는데, 메디치가는 로마 교황과 결탁하면서 급부상하기 시작했다.
조반니 디비치 데 메디치의 시대에 이르러 메디치가는 로마 교황청을 잠식하는 데 성공한다. 조반니는 추기경 시대의 대립 교황 요한 23세(본명 발다사레 코사)에게 접근했다.
종교 개혁
-교회의 권위를 실추시킨 종교 개혁의 원동력은 인쇄 혁명이었다-
레오 10세는 교황이 되기 전 향락적인 생활을 하며 그리스 로마 문화에 대한 학식을 쌓았다. 이교 문화에 능통하고 향락을 즐긴다는 점에서 교황에 적합하지 않은 인물이라고도 할 수 있었지만, 그는 훌륭한 인품 덕분에 교황이 되었다.
레오 10세는 교황으로 선임되었을 때, “자, 신께서 내게 주신 교황의 자리를 마음껏 즐겨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말했다고 한다. 실제로 그는 자신의 말대로 향락에 열중하고 문화에 투자했다. 당연히 교황청의 자금도 바닥이 드러났고, 면죄부나 추기경의 지위를 팔아 수입을 얻어야만 했다. ...
바티칸의 죄수
-이탈리아 왕국을 인정하지 않던 교황 비오 9세가 고립되어 바티칸에 틀어박히다-
이탈리아의 리소르지멘토는 한번 좌절을 겪지만, 1850년대가 되자 다시금 열기를 띠게 되었다. 그 중심에 선 것이 사르데냐 왕국의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다. 그는 재상 카보우르의 협력을 얻어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나폴레옹 1세의 조카)와 거래하여 오스트리아에 승리하고, 1861년 이탈리아 왕국을 건국한다.
이때 이탈리아는 완전한 통일을 이루지 못했고, 교황령과 베네치아는 포함되지 않은 상태였다. 왕국의 수도는 토리노였으며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가 국왕으로 즉위했다. ...
히틀러에게 접근하다
-교황과 나치의 연결고리는 반공주의였다!-
로마 교황 비오 11세는 무솔리니와 정교 조약을 맺은 후, 독일의 나치 정권에 접근한다. 세계 공황으로 인해 매우 혼란스러웠던 독일 사회에서는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스(국민 사회주의 독일 노동당)와 공산당이 크게 부상한다. 공산당과의 경쟁에서 승리한 히틀러는 1933년 수상으로 임명된다. 이후 히틀러는 일당 독재 체제를 굳혀가지만, 교황 비오 11세는 나치 정권을 승인한다.
이후 교황 비오 11세와 나치 정권은 정교 조약을 맺는다. 나치 정권이 국내 가톨릭을 보호하는 대신, 국내 가톨릭은 나치에 충성을 맹세한다는 내용이었다. ...
순례자 교황
-교황의 부정적 이미지를 새롭게 바꾼 바오로 6세의 세계 순례-
요한 23세의 사망 후, 새 교황이 된 바오로 6세도 교회의 근대화를 추진했다. 그리하여 바오로 6세 때부터 교황의 세계 순례가 시작되었다.
그전까지 교황들은 대개 교황궁 안에 틀어박혀 있었고, 외국으로 순례를 다닌 교황은 거의 없었다. 교황 바오로 6세는 세계 각지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종종 순례 여행을 떠났다. 과거 초대 교황 바울이 여러 지역으로 전도 여행을 떠났던 이야기를 본받은 것이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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