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조선의 기록의 나라였다. 왕조와 국가 운영에 관한 촘촘한 기록들은 조선을 지탱한 국가적 시스템이었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왕조실록》이 이를 웅변한다. 당연히 이런 ‘국가 기록’들은 역사학 연구의 핵심 자료가 된다. 한데 이것들만으로는 역사를 제대로 그리는 데 한계가 있다. 거대사ㆍ제도사 속에 묻혀 있던 개인의 가치, 일상의 삶을 입체적으로 되살리기 위해 미시사, 생활사 연구가 필요한 이유다.
목차
책을 내며
수록 일기 해설
1부 조선이라는 ‘국가’에 살았던 사람들
1 _ 시대의 아픔, 개인의 비극
두 감사의 불편한 술자리|고약한 별 태백성이 대낮에 뜨니|화려한 공작새, 전쟁을 예고하다|흉당의 집을 부수어라, 인조반정의 여파는 지방까지|백성들을 쥐어짜면서 의량이라니|‘환향녀’, 병자호란보다 더 가혹한 현실 앞에서|명분 없이 이뤄진 영남 유림 탄압2 _ 신분,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오죽했으면 ‘투탁’해서 노비신공을 바쳤을까|노비와 결혼한 여자, 그 뒤웅박 같은 삶|사람이 먼저! 첩의 삼년상을 지내다|“노비는 재산”, 추노를 부린 이유|종이 부역, 하삼도 사찰의 몰락 이유|승려로 산다는 것, 때로는 가마꾼으로 때로는 희극인으로|통청, 엄격한 신분제에 숨구멍을 틔우다
3 _ 조선을 만든 국가 시스템
사기꾼까지 등장한 왕실 직속 내수사의 위세|예나 지금이나, 기득권의 반발을 산 호패 개혁|억울한 죽음이 없게 하라, 치밀한 살인사건 처리|도덕정치를 위한 제도적 장치, 피혐|허참례와 면신례, 영광만큼 가혹한 관료 신고식|오피니언 리더들을 위한 매스미디어, 조보|후임을 스스로 정하는 자대권의 명과 암|조선의 인사청문회, 서경|조선 왕조 역사 보존의 중심, 태백산사고|어머니의 눈물, 임금의 눈물
2부 조선 사람들이 살았던 ‘공동체’
4 _ 사람 사는 마을, 문제도 많아
향안, 지역사회의 뜨거운 감자|삭적, 향권이 행사한 자율적 처벌|산송, 묫자리를 둘러싼 산 사람들의 다툼|근엄한 성리학자의 ‘내 논 찾기’|사람을 향한 저주, 저주보다 더 무서운 사람|공자의 권위를 침범한 살인사건 조사|사이비 부처, 가난한 백성을 울리다|조야를 들끓게 한 도산서원 위패 도난사건|가벼운 허물을 덮어 주는 지혜, 제마수
5 _ 마을의 갑甲, 수령이라는 사람들
“웬만하면 떠나지 말기를”, 구관은 늘 명관인 까닭|꼼짝 마라, 지방관! 임기 5년 중 연 2회 인사고과|현감을 물러나게 한 투서의 위력|목민관도 목민관 나름|가렴주구를 도운 아전, 고을에서 쫓겨나다|탐관오리 상관에서 벗어나려 꾀를 내다|큰 권력을 겁낸 작은 권력, 몸을 사리다
6 _ 세금, 마을 공동의 고충
부패와 학정의 온상, 방납|여러 사람 잡은 공물, 끝내는 민란으로|때 아닌 왜공 닦달에 백성들만 이중고|명나라 군대를 위한 특별세 ‘당량’, 백성들을 울리다|대동법의 정착은 쉽지 않았다|양전사 하기 나름, 세금 줄다리기|관아도 감당 못한 세곡선 뱃사공의 횡포|배보다 큰 배꼽, 구휼미를 보내면서 운송까지 책임지라니
3부 조선 사람들의 ‘개인’으로 살기
7 _ 사람살이는 예나 지금이나
친정에 대한 그리움을 덜다, 근친과 반보기|종이학 내걸어 벗을 청하다|백석정에서 떠난 벗을 그리워하다|여생 아닌 다시 시작하는 생의 출발점, 환갑|질침법, 거머리로 종기를 다스리다|아들을 살리려 유학자가 푸닥거리까지 했건만|전쟁보다 무서운 돌림병, 효심으로도 못 막아
8 _ 공부와 시험을 대하는 그들의 자세
장황, 애지중지하는 책을 위한 정성|조상 문집 발간을 위해 지방관을 자원하다|거접, 과거시험에 대비한 특별 학습|군역 회피를 노린 향교 교생을 걸러 내다|300년 만의 기회를 상피제 탓에 날리다|시관의 무리수로 유혈사태가 난 과거 시험장|전체 ‘파방’까지 거론된 부정시험의 허무한 처리|아름답고도 끈끈한 동방 간의 우애
9 _ 힘든 삶의 뒤편, 쉼과 여행
풋굿, 뙤약볕을 견디게 해 준 호미씻이|물이 있으니, 뱃놀이가 없으랴|등고회와 동고회, 놀이 방법도 가지가지|모내기 끝낸 후의 꿀맛 여유, 단오날 풍경|청량산 여행에서 백성의 아픔을 보다|관리들은 연 72일 쉬었다
용어 풀이
주석
책 속으로
대북파에게 아첨하고 빌붙었던 사람들의 죄를 성토하고 징계하기 위한 일인지라, 평소 이들에게 감정이 있었던 사람이나 그들의 행태에 불만을 가졌던 사람들 모두가 모였다. 인부까지 대동하여 이른바 흉당의 집을 부수고, 그들의 죄를 고을 이름으로 성토하기 시작했다. 집들이 불타고, 어떤 집에서는 사람들이 달려 나와 애걸복걸하는 통에 문만 부수기도 했다. 이날 영천은 전쟁터 같았다(47쪽).
청나라에 납치되었다가 돌아왔다는 상처만으로도 이미 일어서기 힘든데, 상놈들에게 겁간까지 당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결코 버틸 수 없다는 사실을 부녀자들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고향으로 돌아온 부녀자들은 그래서 상놈들마저 겁간할 수 있는 여자로 전락했다. ‘환향녀’가 정숙하지 못한 여자를 상징하는 ‘화냥년’으로 의미가 바뀌어 가는 과정이었다(55쪽).
지금은 도구적 지식에 대한 발견과 축적을 학문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유학은 지식 그 자체를 추구하기보다는 지식을 통해서 ‘좋은 사람 되기’가 목적이었다. 학문의 목적이 지금과 달랐기에 학문 자체의 내용도 지금과 달랐다(71쪽).
지역에서 필요로 하는 종이 부역만 해도 영지사 승려 전체가 매달려야 할 정도로 충분히 버거웠다. 그런데 병영에 대야 할 종이 부역까지 떨어지니, 영지사로서는 막막하기만 했다. 약삭빠른 젊은 승려들은 벌써 절을 떠나기 시작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종이 부역으로 큰 절이 비게 될 수도 있었다(78쪽).
영조 대에 오면서 서얼들도 청직에 나아갈 수 있도록 허락했다. 영조 입장에서는 정치적인 이유와 탕평의 이념을 관철시키는 과정이었겠지만, 기록에는 “서얼들의 억울함을 민망하게 여겨” 통청을 허락했다고 했다. 영조 자신도 미천한 신분의 어머니를 두었기 때문에 이러한 정책을 폈을 것이라 짐작되기도 한다(86쪽).
형식적으로 신임 관료가 술과 안주를 준비하는 것이지만, 내용은 신임 관료들에게 기합을 주고 가혹할 정도의 신고식을 치르게 하는 것이었다. 오죽하면 힘들어서 ‘잠도 오지 않을 정도’라고 기록하고 있을까! 내로라하는 양반 자제들, 그것도 대과에 합격할 정도로 공부에만 매진하면서 몸이라고는 써 본 적이 거의 없던 신임 관료들이 새벽부터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온갖 고초를 ‘허참례’라는 형식으로 치러야 했다(108쪽).
조보를 받아 본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지배층에 속했음을 의미했다. 중요한 정보를 공식적으로 취득할 수 있는 위치에 있음을 뜻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조보를 받아 보기 원했다. 이렇게 되자 1577년 8월에는 민간업자들이 의정부와 사헌부의 허가를 얻어 조보를 본떠 매일 인쇄로 발간하고, 독자들에게 구독료를 받는 사업을 시작하기도 했다(113쪽).
이조와 병조의 인사 실무를 담당했던 정랑과 좌랑 전체를 통칭해서 부르던 말이 바로 전랑이다. ‘전랑銓郞’에서 ‘랑郞’은 직급의 범위를 말한다. …… ‘전銓’은 저울대를 말한다. 인사를 위해 사람을 공정하게 평가한다는 뜻이다(115쪽).
서경이란 감찰을 전문으로 하는 기관인 사헌부와 탄핵 및 간언을 전문으로 하는 기관인 사간원 관리들이 새로 부임하는 관료에 대해 하자가 없는지 살핀 후 그 인사에 동의하는 절차이다. …… 조선시대는 5품 이하 모든 관리가 대상이었다는 점이다(120쪽).
지방관에 대한 평가는 5년 임기 동안 1년에 2회씩 10번을 하게 되어 있다. 평가 등급은 상上, 중中, 하下 세 단계였다. 그 결과에 따라 지방관의 유임이나 재평가, 파면 등이 결정되었다. …… 지방관의 경우 세 단계 평가 가운데 가장 낮은 점수인 하를 맞게 되면 그 앞의 점수와 상관없이 바로 파직되었다. …… 중 역시 두 번 연속해서 받으면 파직되었다. 또한 재임 중에 (연속은 아닌) 중을 두 번 받으면 더 이상 승진이 불가능했다(177쪽).
자신도 돌림병에 감염될 수 있다는 공포는 전쟁에 나가는 병사의 공포보다 더 컸을 것이다. 이와 같은 공포와 두려움이 극에 달하면 인정이나 동정심도 사라질 수밖에 없다. …… 김택룡이 정희생의 먼 친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도움을 주지 못했던 이유이다. 실제 돌림병이 조금만 더 퍼지면 전쟁을 맞아 떠나는 피란처럼 다른 지역으로 피접을 가는 것이 일반적인 대처법이었다(267쪽).
장황은 본래 그림이나 서예작품을 잘 보존하기 위해 작품 뒤에 한지를 덧붙이는 표구와 비슷하게 이해되기도 한다.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장황은 그림보다 책을 보존하기 위한 장식기술이다. 특히 책 겉표지를 튼튼하게 하여 오랫동안 사용할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었다(271쪽).
이상하게도 합격된 사람들 면면을 보면 재상을 비롯한 고위 관료들의 자제나 친척이 많았다. 거꾸로 이야기하면, 만약 시권과 피봉이 제대로만 붙었다면 떨어졌어야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재상들을 비롯한 고위 관료의 자제나 친척들이었다는 말이다. 이렇게 되자 영의정 류영경柳永慶(1550~1608)이나 대사헌 성영成泳(1547~1623)과 같은 재상들과 고위 관료들은 속으로 파방을 원치 않았다(300쪽).
이 시기를 두고 “호미 끝에 100그루의 벼가 달린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아무리 더워도 김매기는 해야 했고, 이 김매기는 잡초와의 마지막 싸움이었다. 풋굿이라는 말도 이 때문에 나온 것으로 보인다. 풋굿은 들판에 잡초草를 제거한 다음에 여는 연회宴 혹은 굿이라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한자 표기 방법인 초연으로도 불렸다(307쪽).
‘등고회’란 말 그대로 높은 곳에 오른다는 의미이다. 높은 곳에 올라 경치와 풍경을 구경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의미가 이렇게 단순하지 않다. 등고회는 일반적으로 가을이 한참 익어 가는 음력 9월 9일을 기해 이루어졌다. 단풍이 절정을 뽐내기 시작할 무렵인지라, 높은 곳에 오른다는 것만으로도 한 해를 지내는 또 다른 아름다움과 만날 수도 있었다(313쪽).
아무도 찾지 않는 청량산에 추위나 겨우 막을 집 한 칸 짓고 얼마 나지 않는 소출로 살아가는 게 나을 터였다. 단풍이 한창인 시절 단풍놀이로 청량산을 오르는 양반네를 보는 것은 별로 기분 좋지 않을 일이나, 그래도 몸을 뉘일 한 뼘 집과 겨우 먹고살 만한 조 한 되로도 이들은 청량산의 팍팍한 삶을 선택했던 것이다. 가뭄이나 홍수와 같은 자연재해는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예나 지금 이나 결국 백성들을 더욱 팍팍한 삶으로 내모는 것은 권력을 가진 또 다른 ‘사람’들이었다(323쪽).
출판사서평
조선의 삶을 온전히 담은 자료의 보고寶庫, 민간 일기
기록의 나라답게 조선의 유학자들은 숱한 일기를 남겼다. 생활일기는 물론 서원을 세우는 영건일기, 관직일기, 여행ㆍ전쟁 일기 등 그 종류도 다양하다. 심지어 유배일기도 있다. 민간 소장 기록유산을 수집, 보존하는 안동의 한국국학진흥원에는 대략 3,000점 정도의 일기류가 보존되어 있다. 이를 바탕으로 DB 구축과 번역 작업을 진행하는 한편 창작 소재로 2차 가공한 ‘스토리테마파크(http://story.ugyo.net)’를 서비스하고 있기도 하다.
이 책은 이 작업들에 참여했던 이들이 그중 20권의 일기에서 ‘조선의 일상’을 길어낸 것이다. 조선 사람들의 ‘육성’을 통해 역사책이 놓친 이야기를 읽다 보면 옛사람들의 지혜에 놀라고, ‘예나 지금이나’하는 탄식이 절로 나오게 된다. 한마디로 시험에 대비하기 위해 달달 외우던 ‘죽은 역사’가 아닌 ‘살아 숨쉬는’ 흥미로운 역사를 만날 수 있는 책이다.
‘오늘’의 거울도 될 만한 국가 시스템
책은 일기가 다룬 소재에 따라 국가ㆍ공동체ㆍ개인 3부로 나뉜다. 이 중 1부 조선이라는 ‘국가’에 살았던 사람들을 보면 ‘이렇게 정비된 제도가 ……’ 하고 놀랄 만한 내용이 여럿 실렸다. ‘피혐’이란 게 그렇다(104쪽). 사간원이나 사헌부 등에서 탄핵받은 관리가 조정에 출사하지 않고 대기하는 것을 ‘피혐’이라 했다. 스스로 물러나 자신에게 혐의 없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조사의 공정성을 담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죄인을 가두고 곤장과 같은 중벌을 내릴 때에는 심문관 두 명이 함께 추국하도록 한 ‘동추’란 제도도 규정되어 있었다(100쪽). 아버지가 시험관이 되는 바람에 300년 만의 기회인 경상도 특별 과거시험에서 응시조차 못하게 된 ‘상피제’ 이야기는 또 어떤가(291쪽).
‘있는 놈’들의 횡포는 예나 지금이나
그런가 하면 가진 자들의 꼼수, 횡포를 꼬집는 이야기도 여럿 나온다. 법으로 향교의 수와 규모를 정해 놓았음에도 유생들이 군역을 피하기 위해 너도나도 향안(향교 학생명부)에 올리는 통에 정원을 20배 넘게 초과하기도 했다(286쪽). 반면 양반들의 등쌀에, 나라의 세금을 피하기 위해 아예 토지를 들어 양반가나 서원에 노비 되기를 청하는 ‘투탁’이 성행하기도 했다(64쪽). 한 끼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백성들에게서 국방을 명분으로 곡식을 빼앗은 의량(52쪽), 명나라 모문룡의 가도 주둔비를 충당하려 징수한 당량(219쪽), 왜관 운영 경비로 뜯어낸 특별 세금 왜공(213쪽) 등으로 일반 백성의 허리는 부러질 지경이었다.
여전히 빛나는 옛사람들의 지혜
3부 조선 사람들의 ‘개인’으로 살기에는 ‘역사’에서는 만날 수 없는 선인들의 희로애락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시집간 딸이 친정을 찾아 한 달 정도 머무는 ‘근친’, 이것이 어려울 경우 안사돈들이 동반해 중간에서 만나 회포를 풀었던 ‘반보기’는 생활사의 좋은 예이다(243쪽). 본래 과거 합격자가 ‘말 머리를 나란히 하다’란 뜻인 제마수가, 가벼운 허물을 털어내기 위해 내는 한턱내는 벌칙으로 바뀐 사실(168쪽), 과거시험을 앞둔 지방 유생들이 서당이나 향교에서 합숙하며 집중 모의학습을 하는 ‘거접’(279쪽), 권당 제작비가 요즘 돈으로 4,000만~8,000만 원에 이르는 조상 문집 출간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전도양양한 관리가 지방관을 자청한 이야기(277쪽) 등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가득하다.
한 꼭지도 허투루 흘릴 수 없네
60여 꼭지의 글은 하나하나 여느 역사책에서 보기 힘든 이야기의 보고寶庫다. 조선시대 관리들이 하루 12시간 근무하되 연 70일을 쉬었다든가(325쪽), 청나라에 잡혀 갔다 왔다는 이유로 이혼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는 환향녀 이야기(55쪽) 등을 접하기란 쉽지 않다. 여기에 일기에서 골라낸 이야기답게 모든 글에는 사람이 중심이다. 당연히 생생할 수밖에 없다. 내공이 탄탄한 필자들이 묵직한 평석을 더해 읽는 맛이 더욱 각별해진 것도 이 책의 미덕이다. 내수사의 횡포를 두고 “권력이 부정하면, 이를 집행하는 사람들 역시 부정할 수밖에 없다. …… 고려 왕실의 사유재산제도가 가진 폐해는 조선 건국 과정에서 중요한 개혁 과제가 되었다. 그러나 작은 필요성을 인정하는 과정에서 남겨두었던 부정한 권력은 결국 씨앗이 되어 …… 모든 것이 그렇듯 부패도 성장한다”(93쪽)한 것처럼.
예나 지금이나 전염병은 병 자체보다 공포가 더 문제
전염병은 코로나 19를 겪는 우리에게는 너무나 거센 시련이지만, 조선시대로부터 지금까지를 살펴보면 이 역시 일상의 한 단면들이었다. 전쟁이나 흉년 등으로 인해 백성들이 기근에 처하게 되면, 전염병은 늘 그 뒤를 따랐다. 이 때문에 전염병에 대한 공포는 기근과 짝하여 확산의 일로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1616년 음력 7월 17일 경상도 예안현(지금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에 전염병이 돌았다. 전염병에 걸린 사람들은 철저하게 고립되면서 약도 구할 수 없고, 변변한 치료도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265쪽). 병이 옮을 수 있다는 공포의 이면에는 병 그 자체보다, 지금까지 함께 공동체를 이루어 왔던 사람들로부터의 배척당하고 터부시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더 크게 작용했다. 전염병에 걸린 정희생의 어머니는 이러한 공포로 인해 병에 의한 죽음이 아니라 스스로 목숨을 끊는 방법을 선택했다(266쪽?). 전염병이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라, 전염병에 의해 확산된 공포가 사람을 죽였던 것이다. 전염병은 그 병의 전파 속도보다 그 병을 빌미로 한 ‘공포’의 전파 속도가 훨씬 크고 광범위하다는 사실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다. 죽음마저 극복할 것 같은 의학의 발달도 아직까지 사람의 의식과 삶에 대한 욕망을 넘어서지는 못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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