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음악 감상실 ♣/ - 파가니니

[스크랩] 파가니니 1

Bawoo 2014. 4. 25. 22:50

Sonata for violin and guitar no.6 in e minor op.3 - Nicolo Paganini, Sarah Chang Violin

 

 

 

 

 

 

 

언제부터인가 운전을 하면서부터 차는 음악을 크게 듣는 유용한 수단이었습니다. 차를 몰고 다니면서 특별히 그때 듣고 싶은 곡이 없으면 항상 걸려있던 CD는 봄철은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 '봄', 그외 나머지 계절은 파가니니의 이 소나타 곡들이었습니다. 특히 이 곡들은 가을이면 계절의 풍광과 함께 그 아름다움이 더욱 절절이 느껴지는 게, 제게는 봄과 가을의 테마곡들인 셈입니다.

 

 

파가니니는 우리가 중고등학교의 음악수업에서 잠깐 배운 지식으로는, 복잡하고 난해한 기법의 기괴한, 악마에게 영혼을 바친 바이올리니스트 정도로만 알고 있었을 뿐이지, 이렇게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선율의 곡들을 만들어낸 사람으로는 상상하기 힘든 작곡가이었습니다.

 

파가니니의 곡가운데 작품번호(Op, Opus) 2번과 3번은 바이올린과 기타, 두악기의 연주를 위해서 쓴 소나타인데 작품별로 각각 6곡씩 들어가 있습니다.

Sonata for violin & Guitar, Op2 No.1~6Sonata for violin & Guitar, Op3 No.1~6 로 구성되어 있고 각 번호마다 빠르기를 달리해서 2악장씩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이 글의 배경음악으로 나오는 곡은 Op3의 6번째 곡의 1악장입니다. 음원에는 대부분 Sonata No.12 로 표기되어 있는데 이는 Op2, Op3 둘 합쳐서 번호를 매겼다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따라서, Paganini의 기타와 바이올린을 위한 12번째 소나타이며 , Op3의 6번째 소나타입니다.

 

기타대신 피아노와 연주한 곡입니다.끝에 2악장이 조금 나옵니다.

 


 

드라마 모래시계의 한 장면입니다.

 

 

원곡음원 (사라장 연주가 아닌 속도가 조금 빠릅니다) 모래시계 OST "혜린의 테마- 서로다른 연인" 음원

 

 

 

 

 

 

 

Song From A Secret Garden - Violin & Piano

 

 

 

 

작곡가나 연주자는 그들의 곡으로 기억이 되고 글쓰는 이들은 그들의 글로, 화가는 그림으로 기억이 됩니다. 우리 주변의 사람들은 그들과의 관계로 마음에 남을 겁니다. 어린왕자에서 왕자와 여우처럼 서로 인연을 맺고 서로 알아가면서 길들여진다는 것, 나에게 그 사람이 세상에 하나뿐인 사람이 되고, 그 사람에게 나는 세상에 하나 뿐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소중한 사람들에게 음악 하나씩 붙여 놓는 것은 어떨까요.....?

 

 

 

 

 

 

 

초연처사의 테마 유력후보곡 : 곤드레 만드레

 


 

Niccolo Paganini 1782 - 1840

 

바이올린의 역사는 아마도 파가니니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할 만 합니다. 충격적인 그의 연주 기법과 실력은 다른 연주가와 작곡가들의 수준을 올리는 기준이 되어버리고 파가니니 이후 바이올린은 엄청난 발전을 이루게됩니다. 오케스트라에서 가장 중요한 악기로 바이올린이 자리매김을 한 것도 그 이후의 일인 것으로 어디선가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기괴한 파가니니의 바이올린곡을 잠깐 보실까요. 손가락의 근육이 버틸 수 없을 정도로 보이는 연주입니다. 카프리스 24곡 중에 1번 곡입니다.

 

 

Paganini Caprice No.1 - Alexander Markov Violin

 

파가니니 카프리스는 바이올린 콩쿠르와 오디션, 실기시험에 거의 빠지는 일이 없는 음악이기에 바이올리니스트라면 항상 파가니니의 카프리스를 연습해야 한다. 하지만 이 곡을 연주용으로 무대에 올리는 바이올리니스트는 많지 않다.

 

 

파가니니 곡 중에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곡일 것 같습니다. 바이올린 협주곡 2번 3악장 Rondo 라 캄파넬라

 

Ivry GITLIS live Paris PAGANINI La campanella - S.Wislocki, 1966

 

 

파가니니에 영향을 받아 피아노의 파가니니가 되겠다고 하던 리스트가 위 곡을 피아노 곡으로 편곡한 리스트의 라 캄파넬라입니다.

지금도 뛰어난 피아니스트 들이 자신의 초인적인 기교를 자랑하기 위해 레퍼토리로 자주 연주하고 있는 곡이기도 합니다. '라 캄파넬라'는 종을 뜻하는 말인데 피아노의 고음부가 종소리를 드라마틱하게 묘사하고 있으며 멀리서 또는 가까이서 들려오는 종소리와 그 울림, 분위기를 피아노의 화려한 기교를 통해 탁월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클라이막스의 웅장한 피아노 음향과 과감한 공격성, 고음부의 섬세하면서도 갸날픈 종소리 묘사가 서로 효과적으로 어우러지며 매력적인 감흥을 만들어냅니다. - 네이버 오늘의 클래식에서 -

 

Liszt - La Campanella - Alice Sara Ott

 

 

 

 

 

아래의 글은 파가니니에 대해 퍼온 글입니다.

 

박중서 / 출판번역가, 장서가

1840.5.27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라는 오명을 떨치지 못한 채 사망하다

이날 카파렐리 사제는 오래 전부터 품은 생각을 마침내 실천으로 옮겼다. 수개월째 병석에 누워 있다가 임종을 맞이한 어느 음악가를 찾아가려는 것이었다. 성직자가 죽어가는 사람을 찾아가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사제의 굳은 표정이나 태도에서는 어딘가 긴장감마저 감돌았다. 이 환자에 관해서는 꽤 오래 전부터 괴이한 소문이 떠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안에는 악마가 들어 있소" - 임종 당시의 한 마디

이탈리아 제노바의 시청에 보관되어 있는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한때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로 명성을 얻은 그의 경이적인 연주 실력은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버린 대가로 얻은 것”이라는 이야기가 파다했다. 사제가 오늘 환자를 찾아온 주된 목적도 그것이었다. 곧 지옥으로 향할 죄인에게 마지막으로 영혼이 구제될 기회를 제공하려는 것이었다.

 

후두 결핵을 앓고 있던 환자는 침대에 누워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었다. 악마가 나타나기 전에 최대한 빨리 이 음악가의 고백과 참회를 이끌어내야 한다는 지나친 부담 때문이었을까? 사제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다짜고짜 환자에게 물었다. “도대체 당신의 바이올린에는 어떤 비밀이 있기에 그토록 놀라운 선율을 내는 것이오?” 한발 한발 찾아오는 죽음의 고통에 시달리던 음악가는 그저 손짓만 했다. 아무 대답도 하기 싫으니 제발 나가 달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물러서기는 커녕 한층 더 집요해지는 사제의 질문에 마침내 환자도 짜증이 솟구친 모양이었다. “그 속에는 악마가 숨어 있소.” 거의 들릴까 말까 하는 목소리로 이렇게 속삭인 다음, 음악가는 갑자기 바이올린 쪽으로 손을 뻗었다. 순간 사제는 비명을 지르며 그 집에서 뛰쳐나갔다. 그리고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이야기했다. 악마와 결탁했다는 그 바이올리니스트가 본인의 입으로 그 사실을 시인했다는 것이었다. 존경받는 성직자의 증언이라서 그랬을까? 이 소문은 그간의 구구한 추측에 대한 확증으로 여겨졌으며, 아무런 검증이나 의심도 없이 사방팔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렇다면 그 음악가는 왜 그런 쓸데없는 말을 했던 것일까? 그런 소문이 근거 없음은 누구보다도 본인이 더 잘 알고 있었을 텐데 말이다. 어쩌면 임종의 자리에서까지 뜬소문에 대한 추궁을 받는 데 대한 분노 때문이었을까? 너희들이 원한다면 얼마든지 그렇다고 말해주마 하는 반발심 때문이었을까? 소문이 퍼지거나 말거나, 사람들이 믿거나 말거나, 어느 쪽이든 이제 그에게는 아무 상관없었으리라.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라는 별명을 얻었던 천재 음악가 니콜로 파가니니는 바로 그날, 14세 된 아들이 혼자 임종을 지키는 가운데 지중해 연안의 도시 니스에서 58세를 일기로 사망했기 때문이다. 1840년 5월 27일, 오후 5시 경의 일이었다.

 

 

그는 바이올린 한 대로 오케스트라의 소리를 모방해냈다

니콜로 파가니니는 1782년 10월 27일, 이탈리아의 제노바에서 태어났다. 다섯 살 무렵부터 만돌린과 바이올린을 연주하기 시작했으며, 본격적으로 음악 교습을 받기 시작하면서부터 어디서나 반년이면 스승의 실력을 따라잡는 놀라운 재능을 선보였다.

 

아들의 재능을 간파한 아버지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혹독한 연습을 시켰고, 파가니니는 열네 살인 1795년에 처음 바이올린 연주회를 열어 세상을 놀라게 했다. 한동안 궁정 악사로 일하던 파가니니는 1810년부터 본격적인 연주 여행에 나섰으며, 이탈리아뿐 아니라 오스트리아, 독일, 프랑스, 영국 등지를 순회하며 유럽 전역에 명성을 떨쳤다.


파가니니는 고난이도의 다양한 연주 기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해 유명해졌지만, 일각에서는 진지한 음악이 아니라 경박한 잔재주를 피워 이목을 집중시킨다는 비난도 나왔다. 그는 바이올린 한 대로 오케스트라의 소리를 모방하는가 하면, 갖가지 동물의 울음소리를 재현해서 감탄을 자아냈다. 활이 아니라 나뭇가지로 연주하는가 하면, 현을 한두 개만 걸고 연주하고, 심지어 악보를 거꾸로 올려놓고 연주하는 등, 그의 놀라운 실력을 증언하는 일화들은 정말이지 무궁무진하다. 처음에는 그의 어마어마한 명성을 반신반의하던 관객들조차도 한두 곡만 듣고 나면 모조리 그의 팬이 되어 열광할 정도였다.


19세기 프랑스 화가 으젠 들라크루아가 그린 파가니니의 모습(1832)

 

 

 

파가니니의 연주화를 알리는 포스터(1831). 그의 연주회는 언제나 열광의 도가니 였다. 관객들이 실신했고, 악마와 마녀가 춤을 춘다는 등 다양한 입소문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순회 연주회는 결국 파가니니의 건강에 치명타가 되었다. 젊은 시절에 걸린 매독이 평생 완치되지 않았고, 수은 치료법으로 인한 부작용까지 더해지며 그의 몸은 처참하게 망가졌다. 관객의 원성에도 불구하고 값비싼 입장료를 매기고, 무리한 일정도 마다하지 않은 덕분에 한 재산 모아놓은 파가니니였지만, 말년에 가서는 투자 실패로 인해 그중 상당 부분을 날려 버렸다. 설상가상으로 후두결핵으로 인해 목소리조차 잘 나오지 않자, 그때부터는 아직 어린 외아들이 늘 곁을 지키며 대변인 역할을 해 주어야 했다. 만신창이가 되어 고국으로 돌아온 파가니니는 요양을 위해 들른 니스에서 꼬박 7개월 동안 앓아누웠다가 결국 사망한다.

 

역사상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로 손꼽히는 파가니니지만 음악사적 평가는 의외로 야박한 데가 있다. 작곡가로서보다는 연주가로 더 뛰어났고, 악보 출판보다는 즉흥 연주를 더욱 중시했으며, 제자를 거의 두지 않아서 특유의 바이올린 연주 기법을 후대에 전하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이유로 지적된다. 물론 개성 넘치는 비르투오소(명인)의 시대를 열고 낭만주의를 예고했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지만, 당대에만 해도 진지한 음악가로서 파가니니의 진면목을 파악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고난이도로 유명한 그의 <24개 카프리치오>의 악보를 본 당대의 바이올리니스트들조차 “이건 연주가 불가능하다”고 입을 모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신기에 가까웠다는 그의 기량이 어느 정도인지 우리로선 알 수 없고, 다만 다른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추측만 해볼 수 있을 뿐이다. “이 놀라운 남국의 마법사의 연주는 들으면 들을수록 점점 더 불가사의해진다. 그를 알면 알수록 그의 연주는 도무지 납득하기가 더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어느 명민한 이의 말대로, 우리의 생각이 멈추는 순간, 파가니니는 연주를 시작한다.” (베를린 공연 직후, 한 신문에 실린 기사 중) “(그의) 연주를 들어보지 못한 이들에게 아무리 열심히 설명을 한들, 무감각한 철자와 죽은 단어의 나열, 그저 해독 불능의 상형문자에 불과할 것이다.” (빈 공연 직후, 그의 <바이올린 협주곡 3번 E장조>에 관해 논평한 어느 신문 기사 중)

 

 

"파가니니의 발치에 '사슬'이 감겨있고 '악마'가 나타나 연주를 도왔다"

파가니니의 놀라운 연주를 들은 관객들은 감동한 나머지 집단 히스테리를 일으키기도 했다. 나폴레옹의 여동생이며 루카의 군주인 엘리자 보나파르트는 그의 연주만 들으면 까무러쳤다. 파가니니가 바이올린의 현을 두 개만 사용하는 곡을 선보이자, 엘리자는 “그럼 하나로만 연주할 수도 있느냐?”고 물었다. 이에 영감을 얻은 파가니니는 정말로 G현 하나로만 연주하는 곡을 만들었는데, 그의 평생을 따라다닌 괴소문이 바로 거기서 비롯되었다. 즉 파가니니가 연주하는 바이올린의 G현은 젊은 시절 그가 목 졸라 살해한 애인의 창자를 꼬아 만든 줄이라는 소문이었다. 또 한편으로는 파가니니가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 탁월한 실력을 얻었으며, 바이올린 활을 움직이는 것은 그가 아니라 사탄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이런 소문이 어찌나 파다했는지 교회를 중심으로 파가니니를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세력이 생겨났다. 공연 때마다 관객들은 혹시 무대 어느 한 구석에 정말 악마가 숨어 있는지 보려고 눈을 크게 떴으며, 파가니니가 지나갈 때마다 정말 악마 특유의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걷는지 보려고 시선을 집중했다. 소설가 스탕달과 작곡가 리스트도 이런 소문을 마치 사실인 양 언급했고, 시인 하이네는 공연 중에 파가니니의 발치에 ‘사슬’이 감겨 있고, ‘악마’가 나타나 연주를 도왔다고 단언했다.

 

 

 

바이올린 한 줄로만 연주하는 파가니니의 모습을 풍자한 삽화(1810년경)

 

왜 이런 헛소문이 그토록 기세를 떨쳤던 것일까? ‘마법’이나 ‘악마’야말로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은 듯한 파가니니의 실력을 설명하는 가장 간단하고 그럴싸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관습과 권위를 무시하는 특유의 괴팍함과 자유분방함은 물론이고, 꼬챙이 같은 체구에 치렁치렁한 머리카락, 두드러진 매부리코와 광대뼈를 지닌 파가니니의 외모도 악의적인 헛소문의 생성에 일조했다. 당시의 언론도 선정적인 기사를 함부로 써내 소문의 전파를 부추겼다. 나중에는 파가니니 본인이 해명에 나섰지만 소용이 없었다. 베른트 비테의 말마따나 “소문이란 제 나름의 생명력을 가지고 때로는 불멸의 존재로 화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비단 파가니니의 시대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인터넷 시대에도 마찬가지이리라.

 

 

사후 36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안식을 얻은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

평생 헛소문에 시달리며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라는 오명을 얻은 파가니니였지만, 죽음조차도 그에게 곧바로 안식을 가져다주지는 못했다. 오히려 생전의 악평 때문에 사후에는 더욱 매몰찬 대접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사망 당일, 그러니까 1840년 5월 27일부터 시작된 그의 사후 수난은 무려 수십 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모두가 듣고 싶어 했던 바로 그 증언을 파가니니에게서 억지로 끌어낸 카파렐리 사제는 니스의 주교를 찾아가 자신이 들은 사실을 전했고, 교회 측에서는 곧바로 이 유명한 음악가에게 조의를 표하기 위해 치던 조종을 중도에 모두 멈추도록 지시했다.


파가니니는 고향인 제노바에 묻히고 싶다고 유언했고, 그의 후원자인 디 체솔레 백작은 긴 여행 동안 부패를 막기 위해 의사를 시켜 그 음악가의 시신을 방부 처리했다. 하지만 교회 측의 반대로 파가니니의 시신은 제노바로 가지 못하고 수년간 타향에 머물러 있었다.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의 시신을 둘러싸고 갖가지 소문이 무성해지자, 백작은 이 불운한 음악가의 유해를 자기 소유인 어느 작은 섬의 동굴에 숨겨 놓았다. 사후 4년 뒤인 1844년에야 그의 시신은 니스를 떠나 제노바로 돌아갔지만, 역시 교회 측의 반대로 인해 묘지에 묻히지 못하고 지하 납골당에만 임시로 안치될 수밖에 없었다. 파가니니의 시신이 영구 거처를 얻게 된 것은 그로부터 한참 뒤인 1876년의 일이었다. 아들 아킬레가 수없이 청원과 뇌물 공세를 펼친 끝에, 파가니니의 시신은 마침내 지하 납골당에서 나와 교회 묘지에 정식으로 묻힐 수 있었다. 부친의 임종을 지켜보던 14세의 소년은 이미 50세의 중년이 되어 있었다. 사망한 지 무려 36년이 지난 뒤에야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는 비로소 대지의 품에서 안식을 취할 수 있었던 것이다.

출처 : 하사랑
글쓴이 : 하사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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