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아랍 청년이 느닷없이 허리에 고성능 폭탄을 두르고 미군에게 뛰어들고, 그런 자살 폭탄 테러를 두려워한 미군은 의심스런 행동을 하는 중동인을 향해 가차없이 방아쇠를 당긴다. 민간 여객기를 탈취한 중동 테러리스트가 미국 무역 센터 빌딩을 공격하고,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 이어 리비아에도 서방 기독교 국가들의 폭격기가 폭탄을 투하하고 있다. 세상을 양분하고 있는 이슬람과 기독교 세력은 왜 이렇게 서로 반목하고 대립하게 됬을까 ? 하느님과 알라는 공존할 수 없는 걸 까 ? 중동인은 원래 폭력적이어서 그런 건가 ? 여러 미디어에서 떠들어 대는 표면적인 이유를 걷어낸 근본적인 해답은 서기 1096년 있었던 어느 전쟁에서 찾을 수 있다. 그 해 는 이슬람과 기독교 세력을 이후 천 년간 충돌하게 만든 1차 십자군 전쟁이 있었던 해다.
(영화 Kingdom of Heaven, 십자군 출정 장면)
당시 이슬람 세력의 서진(西進)에 위기를 느낀 비잔틴 제국 황제 '알렉시우스 1세'는 종교와는 그 닥 관련없는 영토 유지의 목적으로 당시 교황 '우르바누스 2세'에게 SOS를 친다. 중동을 평정하고 비잔틴 제국(동로마)을 위협하던 이슬람 세력에 맞서 큰 형뻘인 교황에게 지원군좀 보내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교황은 마침 신성 로마 제국 황제들과 성직자 임명권을 둘러싸고 세속적인 권력 싸움을 벌이던 중이었고, 알렉시우스 1세가 도움을 요청한 지역내에 기독교의 성지 예루살렘이 있음을 알고 교황은 기회가 찾아왔음을 직감한다. 영특했던 교황 우르바누스 2세의 전략을 순서대로 풀어보자면 대략 이랬다.
1. 비잔틴의 위기를 이용 기독교 세력과 이슬람 세력으로 편 가르기 하고 갈등을 조장한다.
2. 비잔틴을 지원하기 위한 기독교 세력이 뭉치게 되면 대장은 당연히 교황이 할 수 있다.
3. 교황이 대장이 되면 유럽내 모든 황제나 영주들을 세속적인 종속관계로 둘 수 있다.
4. 교황과 교회의 권위는 황제의 권위보다 강해지고 정치적 영향력도 증대된다.
5. 내부적 갈등은 이슬람 세력에 대한 적개심으로 아름답게 승화시킨다.
사진 (좌) :1095년 클레르몽 공의회에 모인 유럽 영주들
사진 (우) : 당시 십자군 기사들의 복장, 갑옷과 방패에 십자가를 새겨넣었다
대강의 계획을 수립한 그는 차근 차근 행동에 옮긴다. 먼저 1095년 클레르몽 공의회에 3,000명에 달하는 유럽내 권력을 지닌 황제, 영주, 귀족들을 불러모았다. 그 자리에서 비잔틴 황제의 지원요청을 설명하며 이슬람 지배하에 있던 예루살렘의 상황을 전달한다. 예루살렘에 성
지 순례를 가는 기독교인들이 이슬람 세력에 의해 끔찍한 박해와 고문을 받고 있으며, 예루살렘 성지를 점령한 이교도에 의해 성지와 성물들이 처참히 훼손, 모욕받고 있기때문에 기독교인으로서 더이상 성지를 이렇게 방치하는 건 하느님에게 죄를 짓는 것이라고 열변을 토한다. 또 분노한 영주들에게 교황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이교도로부터 성지를 해방 시킬 것'과 '해방 전쟁은 성스러운 전쟁, 즉 성전(聖戰) 이라는 것', '그 징표로 옷에 십자가를 붙일 것 그리고 이 전쟁에 참여한 모든 사람은 죄 사함을 받을 것'이라고 공표한다. 하지만 당시 예루살렘에는 이슬람, 유대인, 기독교인들이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었고, 성지 순례를 오는 기독교인들은 일정 세금만 내면 자유롭게 예루살렘을 드나 들수 있었다는 진실은 의도적으로 전달되지 않았다. (사진 : 1차 십자군 원정대의 주력부대를 이끌었던 고드프리아
결론적으로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영토를 지키고자 했던 비잔틴 황제의 지원 요청과, 이를 종교 전쟁으로 미화해서 교회의 권위를 세우려던 교황의 선동이 절묘하게 맞아 들어가면서 전 유럽이 분노로 술렁인다. 기사뿐만 아니라 민간인, 심지어 어린아이들까지 십자군을 조직했고 좀 더 자극적이고 효과적인 선동을 위해 교황청은 유럽 전역에 십자군 전쟁 참가를 독려하는 전도사들을 파견한다. 이렇게 왜곡된 정보에 분노한 기독교 세력은 칼을 들고 십자가 깃발아래 모여든다. 프랑스인, 노르만인, 로렌인등으로 구성된 4개 주력 부대의 1차 십자군 원정대는 총 6만에 달했고, 그 지휘관은 '고드프리아 드 부용', '레몽 드 툴루즈'같은 후세에 영웅으로 미화된 유력 영주들이 맡게된다. 1096년 8월 15일 쾰른을 출발한 십자군 1차 원정대는 앞서 출발했다가 전멸당한 민간인 십자군과 달리 우여 곡절끝에 1097년 니케아를 함락하고, 1098년 안티오크를 점령한데 이어 1099년 7월 15일 남은 2만 병력을 동원해 드디어 예루살렘에 입성한다. (사진 : 1098년 안티오크 십자군 전쟁 묘사도)
사실 1차 십자군 원정대가 강력했다기 보다는 뜻밖의 공격에 준비가 되 있지 않았던 이슬람
군의 내부 분열이 예상밖의 성과를 거둔 원인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슬람과 기독교간의
비극적인 증오의 역사는 기독교의 성지 예루살렘에 십자군이 입성하면서 시작된다. 그간 교황이 왜곡해 놓은 이슬람 이미지로 복수심에 가득차 있던 기독교 기사들은 성안에 살고 있던 모든 주민 - 남녀노소 불문, 종교 불문 - 모든 예루살렘 시민들을 잔인하게 살해했다. 기독교 순례객을 도륙한 것에 대한 보복이자 하느님을 모독한 이교도를 징벌하는 것이라고 굳게 믿었던 십자군은 입성 후 무려 6주간 학살을 계속했으며 기록마다 편차는 있지만 기독교권 기록에서는 4만, 아랍권 기록에서는 7만에 이르는 주민들이 살해당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성안에 살고 있던 사람은 누구를 불문하고 모두 도륙되었으며 당시 공존하고 있던 대다수의
이슬람, 유대인들 뿐만 아니라 심지어 기독교 주민들 마저도 학살된 것으로 전해진다. 이 사건이 이슬람인, 유대인, 기독교인 모두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었고 이로써 공존의 역사는 끝장나 버렸다. 이 잔인한 학살은 이슬람인들에게 복수심을 안겨주었고, 이후 십자군 원정이 7차례나 거듭 되면서 기독교 세력과 이슬람 세력간의 증오심은 씻을 수 없는 감정으로 세대를 넘어 전해지게 되었다. 십자군 원정은 시간이 흐를 수록 애초의 종교적 목적에서 약탈, 노략, 방화등을 통한 전리품 획득 즉 일확 천금의 기회로 변질되간다. 예루살렘으로 향하던 십자군이 동맹국인 비잔틴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약탈했던 사건은 그 원정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목적이 얼마나 세속적이었던가를 보여주는 사례로 남아 있다.
1996년 4월 기념비적인 행사가 유럽에서 열렸다. 총 500명에 달하는 기독교인들이 과거 1차 십자군 원정 당시의 경로대로 총 5,000km 를 도보로 걸어 쾰른에서 예루살렘까지 횡단하는 행사였다. 1999년 7월 12일 예루살렘에 입성한 이 유럽인들은 자신들의 목적은 900년 전 십자군의 영광을 재현하고 상기시키는 데 있지 않고, 반대로 당시 십자군이 저지른 대 학살을 사과하고 십자군 원정을 제대로 보겠다는 의지를 아랍인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목적라고 밝혔다.
1999년 7월 14일 경향신문에 보도된 참가자의 인터뷰 내용은 당시 기사를 읽는 내게도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유럽에도 십자군에 대한 올바른 역사관을 가진 양심들이 살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던 계기였다. 당시 인터뷰 내용을 옮겨본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당시에 저질러진 일들이 잘못된 것임을 인정키위해 여기 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여전히 압도적으로 많은 서구인들이 왜곡된 역사관에 빠져있다. 지금도 많은 서구 영화들이 십자군의 안티오크 승리나 기적같은 예루살렘 정복등을 소재로 제작되고 있으며 그 승리를 찬양하고 있다. 하나 같이 이슬람 지휘관 '살라딘'을 악의 화신으로, 보스푸러스 해협을 넘어 이슬람의 땅으로 진격하는 십자군은 고귀한 가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하느님의 군대로 설정하고 있다. 정치적 목적을 가진 교황에게 선동되어 양민을 학살하고 동족을 약탈했던 십자군 원정이 이후 역사에 얼마나 깊은 상채기를 남겼는 지를 조명하는 자료는 찾아보기 힘들다. 예루살렘내 모든 생명체를 살해한 잔혹성은 사실 묘사하기 힘든 불편한 진실이 아닐 수 없다.
이 사건 이후 생겨난 두 종교간의 희생과 복수의 순환고리는 천년이 지난 지금까지 중동인과 서구인들 가슴속에 남아있다. 기독교인들에게 자긍심의 역사로 기록된 십자군 원정이 지속적인 종교 분쟁을 야기한 최악의 사건중 하나로 냉정하게 재 조명되기를 기대해본다.
[출처] 추악한 성전(聖戰) - 십자군 전쟁의 실체 |작성자 가우디
The Crusades : 제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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