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에 걱정은 많고 정치는 계속 어수선하다. 이렇듯 어렵고 불안정한 때일수록 지나온 길을 되짚어보며 역사의 흐름을 챙기는 지혜가 절실하다. 우리가 겪고 있는 오늘의 시험이 한국적 특성을 지니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꼭 우리에게만 찾아온 위기는 아니다. 오늘날 세계 모든 지역에서 민주주의는 국가의 공공성(公共性)을 생각하는 틀과 기준 자체가 혼란스러워진 변환의 시련에 직면하고 있다.
1970년대 중반 유럽의 동서진영 사이에서는 냉전의 대결을 넘어서려는 대화와 협상이 정례화되고 그러한 해빙의 분위기에 힘입어 권위주의 시대를 청산하려는 ‘민주화 제3의 물결’이란 밀물이 전 세계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그 시발점을 마련해준 스페인의 후안 카를로스 국왕이 지난 6월 2일 재위 39년 만에 자진 퇴위하면서 민주화 물결이 썰물로 바뀌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과 아쉬움을 자아내고 있다.
피카소의 ‘게르니카’와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로 지구촌 시민들 기억에 각인된 1936~39년 스페인내전, 인민전선과 군부의 좌우대결에 더해 국제적 외부세력들까지 개입하며 뒤얽힌 싸움 끝에 강권통치를 펼쳤던 프랑코 총통의 선택으로 1975년 즉위한 카를로스 국왕은 81년 군부의 강력한 쿠데타 시도를 좌절시킴으로써 국민적 추앙을 받는 민주화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스페인 민주화의 성공은 포르투갈·그리스 등 남유럽뿐 아니라 하벨·바웬사 등이 주도한 동유럽, 만델라의 남아공, 라틴아메리카의 민주화, 나아가서는 87년 한국의 민주화 성공으로까지 이어졌다 할 수 있다.
40년 전 민주화의 기수를 자임했던 남유럽의 민주정치는 지난 몇 해 혹독한 시련을 겪고 있으며 카를로스 국왕의 퇴위도 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21세기 민주정치의 부진한 모습은 역사의 흐름 속에서 예기치 못한 큰 파도에 부닥치면서 제대로 돌파구를 찾지 못해 노출된 한계라 할 수 있다. 첫째, 급격히 진행된 시장의 세계화, 특히 경제통합의 추세 속에서 경제변화와 정치변화 사이의 현저한 속도 차이와 본질적 성격 차이에 적응하는 능력이 민주체제에서는 극도로 부실하다. 둘째, 보편타당성을 기초로 한 민주주의보다는 특수한 전통과 가치관을 고집하는 민족주의와 내셔널리즘이 훨씬 큰 폭발력을 과시하고 있다. 셋째, 민주화는 독재자가 거머쥐었던 권력을 국민에게 돌려주는 것인데 과연 어떻게 의미 있는 국민주권을 실현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아직도 정답을 찾기엔 갈 길이 먼 숙제로 남아 있다.
한국도 이러한 민주주의의 시련 속에서 허덕이고 있다. 여섯 번의 직선제 민주선거로 대통령을 선출하였고 두 번의 여야 정권교체를 이룩한 한국은 민주제도의 연속성과 안정성을 어느 정도 확보하였다는 평가를 받을 수는 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국민 대다수는 87년 체제 그대로는 안 되겠다는 개혁과 개조 쪽으로 생각을 모으고 있다. 사실 2012년 대선에서 여야는 경제민주화와 복지사회 건설에 우선순위를 두겠다는 데 입장을 같이하는 듯 보였으나 역시 경제변화와 정치변화를 생산적으로 연계시키기엔 한국정치가 역부족임이 계속 드러나고 있다. 한편 민주주의를 압박하는 민족주의 및 내셔널리즘의 문제는 남북분단 상황에 대처하는 한국보다 이웃 일본과 중국의 자세가 오히려 걱정스러운 국면이다. 결국 우리는 생산적 민주주의의 획기적 제도화에 국가발전의 초점을 맞추어야 할 시점에 서 있는 것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민주주의는 대의민주주의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민주정치의 안정된 운영은 누가, 누구를, 어떻게 대표하고 대변하며 그 결과에 어떻게 책임지느냐는 제도화의 성패에 달려 있다. 그러한 대의정치의 중심은 의회, 즉 국회라는 자명한 이치가 대통령 중심의 국가운영이란 오랜 관행에 밀려 기형화가 고착됨으로써 민주정치 파탄의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이다. 6·4 지방선거의 결과는 여야의 황금분할보다는
1970년대 중반 유럽의 동서진영 사이에서는 냉전의 대결을 넘어서려는 대화와 협상이 정례화되고 그러한 해빙의 분위기에 힘입어 권위주의 시대를 청산하려는 ‘민주화 제3의 물결’이란 밀물이 전 세계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그 시발점을 마련해준 스페인의 후안 카를로스 국왕이 지난 6월 2일 재위 39년 만에 자진 퇴위하면서 민주화 물결이 썰물로 바뀌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과 아쉬움을 자아내고 있다.
피카소의 ‘게르니카’와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로 지구촌 시민들 기억에 각인된 1936~39년 스페인내전, 인민전선과 군부의 좌우대결에 더해 국제적 외부세력들까지 개입하며 뒤얽힌 싸움 끝에 강권통치를 펼쳤던 프랑코 총통의 선택으로 1975년 즉위한 카를로스 국왕은 81년 군부의 강력한 쿠데타 시도를 좌절시킴으로써 국민적 추앙을 받는 민주화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스페인 민주화의 성공은 포르투갈·그리스 등 남유럽뿐 아니라 하벨·바웬사 등이 주도한 동유럽, 만델라의 남아공, 라틴아메리카의 민주화, 나아가서는 87년 한국의 민주화 성공으로까지 이어졌다 할 수 있다.
한국도 이러한 민주주의의 시련 속에서 허덕이고 있다. 여섯 번의 직선제 민주선거로 대통령을 선출하였고 두 번의 여야 정권교체를 이룩한 한국은 민주제도의 연속성과 안정성을 어느 정도 확보하였다는 평가를 받을 수는 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국민 대다수는 87년 체제 그대로는 안 되겠다는 개혁과 개조 쪽으로 생각을 모으고 있다. 사실 2012년 대선에서 여야는 경제민주화와 복지사회 건설에 우선순위를 두겠다는 데 입장을 같이하는 듯 보였으나 역시 경제변화와 정치변화를 생산적으로 연계시키기엔 한국정치가 역부족임이 계속 드러나고 있다. 한편 민주주의를 압박하는 민족주의 및 내셔널리즘의 문제는 남북분단 상황에 대처하는 한국보다 이웃 일본과 중국의 자세가 오히려 걱정스러운 국면이다. 결국 우리는 생산적 민주주의의 획기적 제도화에 국가발전의 초점을 맞추어야 할 시점에 서 있는 것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민주주의는 대의민주주의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민주정치의 안정된 운영은 누가, 누구를, 어떻게 대표하고 대변하며 그 결과에 어떻게 책임지느냐는 제도화의 성패에 달려 있다. 그러한 대의정치의 중심은 의회, 즉 국회라는 자명한 이치가 대통령 중심의 국가운영이란 오랜 관행에 밀려 기형화가 고착됨으로써 민주정치 파탄의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이다. 6·4 지방선거의 결과는 여야의 황금분할보다는
한국 사회의 완벽한 분열증세를 노출했다. 다만 그 병리적 현상에서 일말의 희망을 찾을 수 있다면 민주국가에서는 비슷하게 양분된 국민의 정치성향이 양대 정당제를 정착시킬 수 있는 토양이며, 여야 간 타협의 정치 없이는 민주주의를 지탱할 수 없다는 이치를 모든 국민에게 일깨워준 것이다. 결국 양극단을 피하고 중간지대에서 승패를 결정짓는 새 정치제도와 문화를 정착시켜야 할 때가 온 것이다.
만사를 대통령의 결단으로 처리하는 청와대 중심의 기형화된 관행과, 타협보다 투쟁으로 전진하겠다는 잘못된 정치악습에서 과감히 벗어나 한국 민주주의의 새 틀을 짜는 데 모두의 창의력을 집결시켜야 할 때가 바로 지금이라 하겠다.
* 출처: 중앙일보 /글쓴이:이홍구 전 총리*
- 딴죽: 국회가 제 기능을 못하고 있으니 이 또한 문제 아닌가요? 이래저래 국민들만 힘들지요. 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