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황태자 부처를 저격한 6월 28일은 세르비아의 중요한 기념일인 ‘비도브단’(Vidovdan: 성 비투스의 날)이다. 1389년 코소보전투에서 세르비아의 라자르 대공이 오스만 제국의 무라트 1세 대군을 맞아 장렬히 전사한 날이다. 비록 전쟁에서는 졌지만 ‘이슬람의 저지를 위해 희생한 거룩한 기독교정신’과 적에게 굴하지 않는 세르비아 민족의 독립정신을 기리는 성스러운 기념일이다. 세르비아가 알바니아계 주민이 차지한 민족의 성지인 코소보를 결코 포기할 수 없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바로 이 성스러운 기념일에 프린치프는 거사하였고 그의 ‘대세르비아’의 꿈은 전후 유고슬라비아왕국 창건으로 실현되었다. 정작 그는 1918년 4월 전쟁이 끝나기 직전 감옥에서 죽었지만, 종전 직후인 1920년에 유고슬라비아의 ‘민족영웅’으로 추서되었고, 지금 동유럽 일곱 개 도시에 그의 이름을 딴 거리가 있으며 프린치프 박물관도 있다. 1921년에는 6월 28일이 공식 기념일로 제정되었다. 오는 6월 28일 사라예보에 거사 100주년을 맞아 거대한 그의 기념비가 제막된다. 베오그라드에도 똑같은 복제품이 세워진다.
발칸반도를 침략한 오스트리아 제국이지 이를 응징한 프린치프가 아니라는 것이다. 역사적 사건의 주인공은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의사’가 되기도, ‘테러리스트’가
되기도 한다. 오늘의 세계적인 추세는 자신이 보기에 테러리스트일지 몰라도 상대방에게 의사이면 의사로 인정해 주는 것이다. 이것이 국제적인 예의가 되었다.
런던의 한복판 트래펄가 광장은 프랑스가 해전에서 영국에 진 곳의 이름이지만, 이를 바꾸라는 프랑스 사람은 없다. 새삼 일본을 생각한다.
<출처: 중앙일보 -이원복의 세계 속의 한국>
* 참고 자료 *
가브릴로 프린치프(보스니아어: Gavrilo Princip, 세르비아어: Гаврило Принцип, 1894년 6월 25일 ~ 1918년 4월 28일)는 남슬라브 통일을 목표로 삼은 보스니아의 세르비아계 민족주의자로, 오스트리아의 추정상속인 프란츠 페르디난트와 그의 아내 조피를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에서 저격, 살해하였다. 물론 프린치프가 혼자 벌인 일은 아니고, 그와 뜻을 같이 하는 자들과 우파 성격의 단체를 결성하여 벌인 사건이다. 이것이 제1차 세계 대전의 발발로 이어진 사라예보 사건이다.
당시 범슬라브주의의 한 갈래로 나온 남슬라브 운동은 1877년을 전후로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한 세르비아가 주도하였다. 당시 보스니아도 세르비아와 합치며 독립하려 하였으나 1878년 베를린 조약으로 인하여 세르비아 왕국만이 독립하고 보스니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넘어갔다. 세르비아계 보스니아인인 프린치프를 비롯한 남슬라브주의자들은 보스니아가 독립하여 세르비아와 합치는 것을 원했다. 그래서 오스트리아에게는 러시아 제국의 지원을 받으며 남슬라브 운동을 부추기는 세르비아를 제지할 구실을 찾고 있었다.
따라서 사라예보 사건이 터지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 영토 내에서 수사를 하게 해달라는 등의 요구를 담긴 최후통첩을 보냈다. 세르비아는 요구를 대부분 수락한다고 밝혔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끝내 세르비아에 선전 포고를 하여 제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다. 한편 프린치프는 재판을 거쳐 징역형을 언도받았으며,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감옥에서 폐결핵으로 죽었다. 향년 25세. <출처: 위키대백과>
* 세르비아의 안중근 의사 같은 인물입니다 그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