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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역사> 그림과 함께 보는 '클레오파트라'이야기

Bawoo 2014. 6. 27. 00:18



M. Bianchi - 클레오파트라

 

기원전 41년 로마의 집정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타라를  소아시아 지방의 타르수스로 소환했다

안토니우스는 시저가 피살된 후 옥타비아누스, 레피두스와 함께 제 2차 삼두정치를 이루어

로마를 다스리고 있는 최고 권력자였다.

그는 삼두정치 반대파를 도와준 클레오파트라를 문책할 생각이었다. 당시 이집트 명색은

로마의 동맹국이었지만 실제로는 속국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의 호출에 선뜻 응하지 않았다.

 몇 번의 독촉을 받은 끝에야 타르수수로 향했다. 이는 나름대로의 계산때문이었다.

시저를 사로잡아 아들까지 둔 클레오파트라, 이번에는 안토니우스도 자기 편으로 만들어야

겠다는 생각으로 철저한 준비를 갖추기 위해 늦장을 부린 것이다.

진주를 삼키다

클레오파트라가 탄 배가 타르수스를 향해 천천히 키드누스 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금장식으로 번쩍이는 화려무쌍한 배, 아름답게 펄럭이는 보랏빛 돛, 피리와 류트에서

흘러나오는 감미로운 선율, 그에 맞춰 노예들이 은으로 만든 노를 젓고,

사랑의 여신 비너스처럼 단장한 클레오파트라가 금빛 천막 안에 비스듬히 누워있었다

스물 아홉살의 클레오파트라, 아름다움의 절정에 다달아 있었다.

옆에는 사랑의 신 큐피트로 분장한 미소년들이 색색의 타조 깃털로 부채질을 하고,

숲의 요정 님프처럼 아름다운 여인들이 시중을 들고 있었다.

마치 천상의 세계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황홀하기 이를 데 없는 장면이었다.

 



앨마 테디마 -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에게 저녁 식사에 초대한다는 전갈을 보냈다.

그러나 클레오파트라는 자기가 베푸는 선상의 파티에 와달라고 청했다.

 
그날 저녁, 클레오파트라의 배에 오른 안토니우스는 눈이 휘둥그래졌다.
배의 화려함은 말할 것도 없고, 바닥에는 온통 꽃이 깔려있었으며 금 접시와
보석 박힌 금 술잔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이런 파티에는 막대한 비용이 들겠군요."
 
넋이 나간 안토니우스가 말하자 클레오파트라는 이렇게 대답했다.
 
" 이 정도는 제게 아주 적은 비용이랍니다.
정말 사치스런 파티를 원하신다면 1만 세스텔치아가 드는 파티를 열어드리지요."
 
1만 세스텔치아는 오늘 날의 화폐로 환산하면 약 20만 파운드, 2억 4천만원 정도
한번의 파티에 어떻게 그런 큰 돈을 쓸 수 있겠느냐는 안토니우스의  말에
클레오파트라는 내기를 하자고 했고  안토니우스는 좋다고 하고는 부하 중
한 사람을 심판으로 정했다


G. Lairesse -  Cleopatras Banquet

 
<

J. Jordaems - 진주를 녹이는 클레오파트라

 
클레오파트라의 진실

클레오파트라만큼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인물도 드물지만, 그만큼 왜곡된 역사적 평가를 받아온 인물도 드물 것이다.

<영웅전>을 쓴 로마의 전기작가 플루타르크가 클레오파트라를 안토니우스를 파멸시킨 교활한 여인,

 

'나일강의 세이렌'이라고 부른 이후, 클레오파트라는 남자의 일생을 망치는 요부,

 

혹은 역사를 뒤바꿀 정도로 콧대 높은 여자의 대명사로 근 2천 년 가까이 선망 섞인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

사실 로마인의 입장에서 보면 클레오파트라는 오만하고 도도한 요부임에 틀림없다.
로마의 영웅 안토니우스로 하여금 조국 로마에게 창끝을 돌리게 만든 장본인이 바로 그니까.
때문에 로마 역사가들은 한결같이 클레오파트라를 평가절하했고,
그와 견해가 다른 이집트측의 자료나 기록들을 없애버렸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이쓴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정보들은 로마인들에 의해 왜곡, 조작된 정보들이다.
그렇다면 클레오파트라의 참모습은 무엇일까


Cleopatra on the terraces of Philae
 
 
클레오파트라는 기원전 69년, 이집트 오아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셋째딸로 태어났다.
두 언니외에도 남동생 둘, 여동생 하나가 더 있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가는 전통적으로 남매간에 결혼을 한다. 그것이 왕가의 혈통을 보존하고 왕위를 지키는 길이라는 생각에서이다

프톨레마이오스왕조는 마케도니아  청년 왕 알렉산더의 후예가 세운 왕조이다.
알렉산더가 대제국을 건설한 직후 사망하자 제국은 이집트 지역, 마케도니아와 소아시아 지역,

 

시리아 지역 셋으로 나뉘는데 그 중 이집트를 차지한 것이 바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이다.
그러므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대의 지배층 문화는 이집트 고유문화가 아니라 그리스 문화요,

 

지배층의 언어도 그리스어다
.

클레오파트라는 기원전 51년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결혼식을 올리고 왕위에 즉위,
공동통치를 시작했다.
그때 그의 나이는 열 여덟살, 동생은 열 살이었다. 클레오파트라는 그리스어 아닌 이집트어를 배워 사용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최초의 왕이다.
그는 이집트 고유어를 익혔을 뿐 아니라 이집트 고유 문화와 신앙, 전통을 존중하고 자기를 이집트 고유의 신들과 결부시켰다.

백성의 인기를 얻기 위한 정략적 조치였지만 어쨌든 그리스 문화에 젖어 있던 왕가의 풍습에 반하는 파격이었다고 생각된다.
뿐만 아니라 그는 학문과 예술의 후원자였고, 궁전 박물관에서 열리는 학술토론회에 참가하기도 했다.


H. Markart - 클레오파트라의 나일강에서의 사냥
 
 
기원전 100년경부터 로마는 알렉산더 사후 분할된 제국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클레오파트라와 아버지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가장 중요한 당면 과제는 로마의 합병 속에
이집트의 독립을 유지하는 일이었다.
더욱이 클레오파트라와 그 남편이자 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13세 사이에는 왕위를 둘러싼
치열한 권력다툼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런 복잡한 정치 상황 속에서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 합병을 주장하던 시저에게 접근,
타고난 미모와 지성, 재능으로 능란한 외교를 벌인 끝에 이집트를 '동맹국'으로 선언하게 만들고,
나아가 불안한 자신의 왕위를 굳건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시저가 피살당하자, 이번에는 안토니우스를 사로잡아 로마에 대항했다.

클레오파트라의 꿈은 이집트의 영광을 되찾는 일이었다.
그의 이름 '클레오파트라'는 바로 '민족의 영광'이란 뜻이다.

클레오파트라의 역사적 복권

기원전 36년,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를 이집트, 키프로스, 리비아, 시라아의 통치자로 선언하고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들에게 각각 땅을 나누어줌으로써 로마제국의 상당 부분을 넘겨주게 된다.

이 사건을 '알렉산드리아의 증여'라 한다. 클레오파트라에게는 ' 왕 중의 여왕'이란 칭호가 주어졌다.
클레오파트라의 꿈이 이루어진 순간이다.

하지만 꿈은 오래가지 못했다. 화가 난 시저의 후계자 옥타비아누스가 선전포고를 한 것이다.
안토니우스에게가 아니라 클레오파트라에게, 옥타비아누스의 눈에는 안토니우스는 그저
이집트 여왕 손에 놀아나는 하수인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기원전 31년 그리스 동쪽 해안의 악티움에서 옥타비아누스가 이끄는 로마군과 클레오파트라,
안토니우스 연합 함대 간의 싸움이 벌어졌다.
유명한 악티움 해전이다.
결과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참패였다.
안토니우스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클레오파트라 역시 로마에 끌려가 웃음거리가 되느니 자결을 택했다.
자기를 안토니우스 옆에 묻어달라는 편지를 남긴채, 기원전 30년의 일이다.

<

Hans Makert - 클레오파트라의 죽음

 

 

그가 자결방법으로 독사를 택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플루타르크는 뱀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으며 단지 뱀의 자취같은 것이 발견되었다고만

기록하고 있다.

클레오파트라의 꿈이 무너짐과 동시에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도 무너지고 이집트는 로마에 합병되었다.

클레오파트라가 시저와 안토니우스 사이에서 낳은 자식들은 후환을 없앤다는 명목하에 모두 처형되었다.

 

클레오파트라는 강대국 로마에 맞서 이집트의 독립을 지키려고 애쓴 인물이다.
그런데 로마인들은 클레오파트라로부터 정치가로서의 면모를 완전히 지워버리고,

오로지 미모를 무기로 남자를 유혹해서 욕망을 달성한 여인으로만 남겨놓았다.

로마가 자랑하는 두 영웅 시저와 안토니우스를 차례로 유혹한 클레오파트라가 몹시 꽤씸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클레오파트라를 역사적으로 복권시키는 유일한 길은 그를 요염한 '여인'으로서가 아니라,

야심만만하고 탁월한 '정치가'로서 재평가 해 주는 것이 아닌가 한다.






 
              < 출처 : http://cafe.daum.net/silverhischool/7qEU/980'토마토 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