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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정치> 한국 민주주의는 미국의 국가이익

Bawoo 2014. 8. 6. 07:27

한국 국민은 한국 민주주의에 대해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한국 정치에는 지역주의나 이념 양극화 같은 단점도 있지만, 한국의 민주화는 아시아 전체에 모범적 선례가 되고 있다. 미얀마에서 캄보디아에 이르기까지, 개혁을 시도하는 권위주의 세력이건 정치적 자유를 확대하려고 투쟁하는 시민사회 그룹이건 ‘어느 나라가 모델이냐’고 물어보면 미국·일본이 아니라 대한민국을 지목한다. 한국 민주주의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한국 내에서는 ‘민주화가 어떻게 달성됐는가’ ‘미국은 한국의 민주화를 도왔는가 아니면 방해했는가’하는 문제를 두고 분열 양상이 계속되고 있다. 기본적인 사실을 분명히 해야 한국이 아시아 민주주의 확산에 더 크게 기여하고 북한의 민주화를 지원할 수 있다.

 미국이라는 공화국이 탄생했을 때부터 민주주의의 확산은 신생국 미국의 정체성과 안보의 핵심이었다. ‘건국의 아버지들’은 ‘자유의 제국’이 미국을 넘어 태평양 지역으로 확산될 것으로 내다봤다. 건국 초기부터 세계의 민주화가 미국의 전략적 이익이라는 관점에 서 있었던 것이다.

 19세기 미국인들이 태평양 너머 아시아를 바라보기 시작했을 때 주요 전략가들은 해양 국가들이 민주화될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봤다. 유럽의 식민주의 세력을 저지해 미국이 극동지역에서 교역할 수 있도록 보장할 나라들은 민주화된 해양 국가들이라는 것이었다. 1853년 일본을 개항으로 이끈 매슈 페리 제독은 뉴욕에서 행한 연설에서 “미국인들이 일본을 ‘기독교화’하면 안 된다”고 역설했다. 일본 문명이 중국보다 앞섰다고 봤기 때문이다. 1882년 조·미 수호통상조약을 맺은 로버트 슈펠트 제독은 그런 언급을 하지 않았다. 그에겐 한국이 청나라에 속하는지 아니면 독립국인지는 혼란스러운 문제였다.

 1890년대 말 대전략(大戰略·grand strategy) 분야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자랑하던 앨프리드 세이어 머핸은 일본의 근대화가 유럽 국가들의 식민주의 팽창을 저지해 아시아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확대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머핸과 가까운 친구였던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민주화 될 수 없는 인종은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루스벨트는 일본이 필리핀을 넘보지 못하도록 1905년에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었다. 이 밀약 때문에 미국이 아태 지역에서 저지하려고 했던 바로 그 식민지화의 길로 한국을 내몰았다. 하지만 같은 시기에 미국 선교사들은 민주주의 가치를 한국 사회에 전파하려고 그 어떤 아시아 지역에서보다도 더 열심히 노력했다. 미국인은 민주주의에 무한한 지지를 보냈다. 하지만 강대국 권력정치가 한국의 독립에 대한 미국 정부의 지지를 제약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정부는 대한반도 정책에서 어떻게 민주주의적 이상을 구현할지 고심했다. 한반도를 점령한 미군은 피로 물든 오키나와 전쟁터에서 바로 왔다. 일본어 통역 장교들밖에 없었다. 점령군은 한국을 통제하는 데 일본인들의 도움을 받았다. 상당수 젊은 미군 장교들은 일본인들을 통하지 않고 한국의 민주 세력을 직접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트루먼 행정부는 하루빨리 한반도에서 손을 떼고 싶어했다. 일본과 필리핀을 공산주의로부터 보호하는, 비용 대비 효율이 보다 높은 방어선을 치기 위해서였다. 한국전쟁의 결과로 방어선이 휴전선으로 북상했다. 그 이후 미국의 민주화 정책은 거의 전적으로 반공주의의 맥락에서 형성됐다.

 베트남전은 외교정책에서 민주주의가 차지해야 할 비중에 대한 논의를 혼돈 상황으로 몰아갔다. 미 의회는 군사적·경제적 지원과 인권을 연계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지미 카터는 미군 철수와 야당을 탄압하는 박정희 대통령을 응징한다는 공약으로 1977년 집권했다. 카터 정책의 결과는 혼란 그 자체였다.

 로널드 레이건은 조지타운대 진 커크패트릭 교수가 쓴 ‘독재자들과 이중 잣대’라는 논문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이 논문은 독재의 대안인 공산주의가 훨씬 더 나쁘기 때문에 전두환 정부 같은 정부들을 용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레이건 대통령이 취임하기도 전에 전두환은 김대중에게 내란죄로 사형선고를 내렸다. 레이건의 외교정책팀은 조용히 전두환과 협상해 사형을 가택연금으로 바꿨으며 결국엔 석방될 길을 텄다. 대가는 워싱턴 국빈방문이었다. 이 거래는 김대중의 목숨을 살렸지만, 급진주의적 시위자들은 미국으로부터 등을 돌렸다. 노태우가 전두환의 후계자로 지명되자 레이건 행정부는 1년 전 필리핀의 마르코스를 대할 때처럼 강경하게 나왔다. 미국의 메시지는 명백했다. 정치 개혁을 확대하지 않으면 노태우 정부는 마르코스와 마찬가지로 미국의 지지를 상실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점점 더 큰 목소리로 한국의 재벌 기업과 한국군도 정치적 자유화를 요구했다. 미국의 개입은 효과를 봤다. 노태우는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미국이 한국 민주주의를 위해 항상 올바른 선택을 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미국은 그 어떤 나라보다도 한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더 많은 지원을 했다. 한국 민주주의의 다음 시험대는 남북통일이다. 미국인들은 한국의 민주주의가 미국의 국가이익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게 됐다. 한·미 동맹이 역사적인 한반도 민주 통일의 초석이라는 것을 한국인들이 알아주기를 나는 희망한다.

< 출처: 중앙일보-마이클 그린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선임부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