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임진왜란 발발 두 달째인 1592년 6월 5일 경기도 용인. 파죽지세의 일본군에 수도 한양을 빼앗긴 조선군이 경기도 용인에 집결했다. 수도 탈환을 위한 반격작전을 위해 전국에서 5만의 군사가 모였다. 한양과 가까운 용인에 주둔한 일본군을 치기로 결정하고 선봉부대를 보냈지만 일본군은 응전하지 않았고, 지친 조선군은 잠시 휴식을 취한다. 이때 한양에서 출발한 일본 지원군 1000명이 조선군을 급습해 선봉 부대장을 죽인다. 놀란 군사들은 수원 쪽으로 도망쳤지만 허사였다. 이튿날 아침밥을 짓기 위해 불을 피우자 연기로 위치를 파악한 일본군 기병대가 기습했다. 놀란 지휘관은 도망가고 4만여 명의 군사들은 광교산 절벽에서 떨어지거나 허둥지둥 도망가다 압사했다. 『선조수정실록』은 이 장면을 두고 “산이 무너지고 강물이 터지는 듯했다”고 기록했다. 일본군 지휘관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는 “조선의 장수는 어리석고 무능하다”고 비웃었다.
#2. 한 달 후인 7월 8일 한산도 앞바다. 패전의 연속이던 조선 육군과 달리 전라좌수사 이순신 장군의 수군은 연승을 기록 중이었다. 일본 수군이 육군과 협력을 강화하며 병력을 증강하자 와키자카도 해군 지휘관으로 합류해 73척의 배를 거느리고 이순신 장군과 맞붙는다. 일본군 장군 구키 요시타카(九鬼嘉隆)와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도 각각 43척의 배를 이끌고 뒤따라 출격한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은 물길이 좁아 적을 몰아가기 유리한 한산도 앞까지 후퇴하는 척하다 학의 날개 모양으로 진격하며 적군을 에워쌌다. 학익진(鶴翼陣) 전법으로 와키자카의 73척 중 59척이 격침당하고, 일본 수군은 가까스로 탈출한다. 한산도대첩이다.
와키자카 야스하루(사진 위), 구루지마 미치후사(사진 아래) [사진 시가가쓰노리]
임진왜란에서 단맛 쓴맛을 다 본 와키자카가 영화 ‘명량’의 주요 등장인물로 재조명 받고 있다. ‘명량’의 기세는 무섭다. 주말을 앞두고 극장가 예매율도 압도적 1위로 최단 기간 1000만 관객 돌파가 눈앞이다. 한국 영화 역대 흥행 1위 ‘괴물’(1300만 명)을 제치고 사상 최초로 1500만 관객을 동원할 기세다. 영화 속에서 배우 조진웅이 연기하는 와키자카는 영화 속에서 “이순신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라고 되뇌는 소심한 장수로 해적 출신 구루지마 미치후사(來島通總)와 갈등을 빚는 걸로 그려진다.
와키자카가 남겼다는 글도 새삼 화제다. “내가 제일 두려워하는 자도, 가장 미운 자도 이순신이다. 가장 좋아하는 이도, 흠모하고 숭상하는 자도 이순신이다. 가장 죽이고 싶은 이도 이순신이며, 가장 차를 함께 마시고 싶은 자 또한 이순신이다”라는 글이다. 실제 그가 이 글을 남겼는지 입증해줄 실증 사료는 없다는 게 한·일 역사학자들의 얘기지만 이 글은 와키자카에 대해 “적장이지만 이순신을 존경했던 인물”이라는 이미지를 남겼다. 반면 2004년 방영된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선 성미가 급한 공격적 성향에다 임진왜란 패배 이후 이순신 장군에 대한 분노를 못 이겨 할복을 하는 것으로 묘사됐다. 진짜 와키자카는 어떤 인물일까.
일본 내 임진왜란 전문가로 통하는 기타지마 만지(北島万次) 전 일본 공립여자대학 교수는 e메일 인터뷰에서 와키자카를 “정세 판단이 뛰어나고 지략에 능했던 장수”로 정의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조선 침략』을 쓴 기타지마 교수는 용인전투를 예를 들며 “기습을 특히 좋아했던 장수”라고 설명했다. 한산도대첩 역시 기습의 명수로서의 본성이 발동했다가 무참히 패배한 경우다. 73척의 배를 배정 받은 그가 혼자 공을 세우고자 동료 장수 구키와 가토를 따돌리고 몰래 출격했다는 게 기타지마의 설명이다.
와키자카는 마음이 급했다. 10대에 도요토미의 시동(侍童)으로 발탁되며 직계 가신으로 분류됐지만 내로라할 전공이 없었기 때문이다. 도요토미의 일본 통일 마지막 관문이었던 시즈가타케(賤ヶ岳) 전투에서 도요토미를 수호한 7명의 장수인 ‘칠본창(七本槍, 7개의 창)’에 이름을 올리긴 했지만 존재감이 약했다. 그런 그에게 임진왜란은 도요토미의 눈에 들 절호의 기회였다. 한산도대첩은 그가 둔 무리수가 자충수가 된 셈이다.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의 이상훈 기획연구실장은 “당시 일본군은 각 영주가 이끄는 부대의 연합군이었다. 조선 수군의 상명하복이 아니고 전체적 가이드라인만 따르면 되는 상황이었다”며 와키자카의 ‘나 홀로 출정’ 배경을 설명했다.
한산도대첩 트라우마는 그에게 붓을 들게 한다. 패전의 기록이다. 한산도대첩기념사업회의 류태수씨가 와키자카의 후손이 살고 있는 일본 효고현 다쓰노(龍野)에서 찾아낸 자료에 따르면 와키자카는 “나는 성급했고 적장은 침착했다. 나의 전술은 단순했지만 그의 전술은 치밀했다. 나는 적장 앞에 꼼짝할 수가 없었다”고 적었다. 한산도대첩축제 집행위원장이기도 한 류씨는 “패전의 기록을 남긴 장수는 어디에나 많지 않다”며 “와키자카 역시 인정할 만한 인물인 셈”이라고 평했다.
그러나 패배는 패배다. 한산도에서 겨우 살아남은 패전 장수 와키자카는 어떻게 명예 회복을 했을까. 류 위원장은 와키자카를 위해 변명을 해 준 감독관 덕분이라 설명한다. 도요토미가 감독관에게 와키자카에 대해 묻자 “훌륭히 싸웠지만 적장이 워낙 출중했다. 다시 기회를 주면 좋겠다”고 감싸줬다는 것이다. 두 번째 기회를 얻은 와키자카는 결국 정유재란까지 남아 수훈 장수가 되고 이후 에히메(愛媛)의 5만3000석을 하사 받아 영주가 된다.
그는 도요토미가 1598년 사망한 후 진정한 인생 역전을 이뤘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패권을 쥐기 위해 1600년 나고야에서 벌인 세키가하라(關ヶ原) 전투에서 도쿠가와의 동군(東軍) 반대파인 서군(西軍) 소속이었던 와키자카는 비밀리에 아군을 배신했다. 시대의 흐름이 도쿠가와 쪽에 있음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이 덕에 와키자카는 도요토미의 가신이면서도 도쿠가와 시대에도 영지를 보존 받는다. 기타지마 전 교수는 “상황 판단이 빠른 와키자카의 처세술이 최고조였던 때”라고 평했다. 그러나 이후 도요토미의 아들 히데요리를 치는 전쟁에 참여하는 과정에선 은퇴하고 아들을 대신 보낸다. 류 위원장은 “도요토미를 배신한다는 괴로움에 불교에 귀의해 말년을 조용히 보냈다”고 전했다. 그는 73세까지 살았다.
<출처: 중앙일보-전수진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