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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 이순신 장군 이야기

Bawoo 2014. 8. 12. 07:47

이순신 장군의 이야기인 영화 '명량'이 흥행에 성공하면서 신문에 이순신 장군에 관한 이야기가 올라오기에 그 자료들을 모았습니다.<출처: 중앙일보,머니투데이,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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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가면 산다' 믿었기에 … 백성들이 쌀 들고 모였다

[왜 지금 이순신인가] <상> 신뢰·실력의 리더십
상관 인사 청탁 거절했다가 파직 출장 갈 때 받은 쌀 남으면 꼭 반납
병법·전략·전술 '장군의 역량' 갖춰 도망갔던 군사들 자발적으로 복귀

 

왜 지금 이순신인가 <중> 헌신·겸양의 리더십
"하늘이 도왔을 뿐" 스스로 낮추고
공적 기록할 땐 종들도 안 빠트려
전사자 집엔 제사용 쌀까지 보내
겁쟁이였던 병사들, 목숨 걸고 싸워

“흐리고 비가 내릴 듯했다. 홀로 배 위에 앉아 있으니 이 생각 저 생각으로 눈물이 났다. 천지간에 어떻게 나 같은 사람이 있으리오. 아들 회가 내 심정을 알고 매우 괴로워했다.”

 이순신이 명량해전(1597년·선조 30년) 5일 전에 쓴 일기다. 명량해전을 앞두고 이순신은 고립무원의 처지였다. 엄청난 중압감과 격무로 토사곽란에 시달리다가 인사불성이 되기도 했다. 일기에는 “새벽 2시경부터 토하기를 10여 차례 하고 밤새도록 앓았다”는 대목이 나온다. 심지어 바로 밑의 장수인 경상 우수사 배설은 겁이 나 도망가 버렸다. 이런 상황에선 그도 좌절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자신을 엄습한 두려움과 근심을 딛고 명량대첩을 치른 그는 『난중일기』에 “이번 승리야말로 천행(天幸: 하늘이 내린 행운)”이라고 썼다. 갖은 악조건에서 목숨까지 아끼지 않은 솔선수범, 뛰어난 리더십과 전략으로 큰 승리를 이끌어 냈지만 모든 공을 하늘에 돌린 것이다.

 이순신은 수많은 적선이 침입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후 부하들을 모아 놓고 “죽기를 각오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必死卽生, 必生卽死)”는 자세로 싸워야 한다고 다짐했다. 실제 전투에서도 맨 앞에서 싸웠다. 그러나 이순신이 탄 배를 제외한 나머지 배들은 주춤주춤 물러나기 시작했다. 일기에 그는 이렇게 적었다.

영화 ‘명량’의 한 장면. [사진 CJ E&M]


“내가 탄 배가 홀로 적진 속으로 돌진해 들어가면서 각종 총통들을 마구 쏘아 대니 그 소리가 마치 우레 치듯 하였다. 그러나 적선들이 여러 겹으로 둘러싸고 있어 내 배에 있던 부하들은 서로 돌아보며 겁에 질려 있었다(…). 여러 장수들의 배를 돌아보니 그들은 먼바다에 물러나 있으면서 바라만 보고 앞으로 나오지 않았다.”

 이순신은 자신이 앞장서 겁에 질린 부하들의 동참을 이끌어 냈다. 그는 또 지형과 해류를 이용하는 전략과 전술로 기적과 같은 승리를 이뤄 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스스로를 낮췄다. 이순신은 “나는 나라를 욕되게 했다. 오직 한 번 죽는 일만 남았다”는 말을 자주 할 정도로 책임의식이 강했다.

 또 부하들을 무척 아꼈다. 전쟁에서 희생을 줄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부하들과 활쏘기 연습도 같이하고 글을 가르쳐주었으며, 술도 같이 마시며 위로하고 씨름대회도 자주 열었다. 죽은 부하들도 잊지 않았다. 그들의 시체를 거두어 고향에 묻히도록 하고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쌀을 보내 주기도 했다. 또한 죽은 부하들의 합동제사를 주관하고 제문을 손수 쓰기도 했다. 이 제문에는 승리의 공을 부하들에게 돌리는 겸양의 미덕이 잘 드러나 있다.

 임금에게 승전보고서를 올릴 때에도 부하의 공을 앞세웠으며, 심지어 종들의 이름까지도 적었다. 이에 따라 부하들은 마음속 깊이 이순신을 존경하고 목숨도 아끼지 않고 열심히 싸웠다. 이순신이 보여준 겸양의 미덕이 어부·농부·종들로 이루어진 우리 수군을 무적함대로 만든 밑거름이 된 것이다.

 저명한 경영 컨설턴트인 짐 콜린스는 경쟁기업을 압도하는 탁월한 성과를 내고 이를 오랫동안 유지하고 있는 위대한 기업을 만든 리더들의 공통점을 연구했다. 그에 따르면 이 리더들은 뛰어난 업무능력, 팀워크 능력, 관리자로서의 비전 제시 및 동기부여 역량은 물론 ‘헌신과 겸양의 미덕’이 있다고 한다. ‘헌신과 겸양의 미덕’이 있어야 가장 높은 단계인 5단계 리더가 될 수 있으며, 이러한 리더들이 위대한 기업을 만든다고 했다. 5단계 리더들은 불굴의 의지로 헌신적으로 일을 해 엄청난 성과를 올린다. 그리고 그 공적을 다른 사람들에게 돌리거나 운이 좋아서 성공했다고 겸손해한다는 것이다.

 세계 해전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전과를 거두고도 모든 공을 부하들과 하늘에 돌리는 겸양의 미덕을 보여준 이순신은 5단계 리더의 표상이다. 전쟁에서와 마찬가지로 치열한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리더뿐만 아니라 구성원 모두의 밀도 있는 노력이 필수적이다. 훌륭한 리더가 되려면 구성원들의 헌신적인 노력을 헤아리고 그 공적을 구성원들에게 돌리는 것에 인색하지 않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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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수할 위험, 피할 위험 철저 구분 … 왕의 명령도 안 통했다

왜 지금 이순신인가 <하> 위기관리의 리더십
"소굴에 숨은 적 경솔히 칠수 없다"
선조의 명 거듭 거부해 백의종군
밝은 달밤에도 야습 철통 경계
예측대로 적 쳐들어왔지만 격퇴

 
임진왜란(1592~98)이 없었다면 우리는 이순신을 모를 것이다. 이순신은 미관말직을 전전하다가 전쟁의 위기가 다가오자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전쟁 발발 1년 2개월 전에 유성룡 등의 천거로 종6품 정읍 현감에서 정3품 전라좌수사로 발탁됐다. 한번에 무려 7품계나 특별 승진을 한 셈이다.

 이순신은 전라좌수사 임명 즉시 병력 충원과 훈련, 무기 제조와 군수물자 확보에 매진했다. 임란 하루 전에는 화포의 시험발사에도 성공해 거북선 개발을 완료했다. 임진왜란이 터지자 적의 공격에 더욱 철저히 대비했다.

유성룡이 남긴 『징비록』에는 달 밝은 밤 이순신이 적의 야습을 예측하고 엄한 경계를 명했으며, 그날 예측이 그대로 들어맞자 “여러 장수들이 이순신을 신으로 여겼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순신은 진중에 있을 때 주야로 엄히 경계하여 한 번도 갑옷을 벗은 적이 없었다. … 많은 적선들이 어두운 산 그림자 속을 거쳐 쳐들어 왔으나… 적은 우리를 범하지 못하고 도망쳤다.”

 부하들은 달이 매우 밝아 적의 기습은 없을 것이라고 방심했지만 이순신만은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았다. 적의 기습 가능성을 하나하나 검토하고 대비했다. 달빛이 밝아도 달이 기울며 산 그림자가 드리우니 이 틈을 타 적이 기습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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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순신은 옥포·한산도·부산·명량·노량 등 수많은 해전에서 한 번도 패하지 않았다. 항상 우리 수군의 피해를 최소화하며 승리했다. 그는 패배할 수밖에 없는 무모한 공격은 하지 않았다. 임금인 선조가 적의 소굴로 쳐들어가라고 명했지만 이를 따르지 않았다. 1594년 9월 3일의 일기다.

 “새벽에 밀지(密旨: 임금이 비밀리에 내리는 명령)가 왔다. 임금께서 ‘수륙 여러 장수들이 팔짱만 끼고 서로 바라보면서 한가지라도 계책을 세워 적을 치는 일이 없다’라고 하셨지만, 3년 동안 해상에서는 그런 일이 없었다. 여러 장수들과 함께 죽음을 맹세하고 원수를 갚으려고 하루 하루를 보내지만 적이 험난한 소굴에 웅거하고 있으므로 경솔히 나가 칠 수는 없다.”

 이후에도 또다시 선조가 공격을 명했으나 이순신은 따르지 않았다. 이것이 빌미가 돼 감옥에 끌려가고 백의종군이라는 곤욕을 치르게 된다. 이후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이 임금의 명에 따라 무모하게 공격하다가 우리 수군은 괴멸당했다.

 이순신은 위험을 회피하기만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꼭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죽음의 위험까지 감수하겠다고 나섰다. 명량해전 직전에 이순신이 12척의 전선으로 수백 척에 달하는 적선의 침입을 저지하려고 하자, 임금은 수군을 없애고 육군에 합류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순신은 다음 같은 글을 임금에게 올렸다.

 “만일 지금 수군을 없앤다면 적이 바라는 대로 하는 것이며, 적은 호남과 호서의 연해안을 돌아 한강으로 올 것입니다. 신은 이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순신은 기피해야 할 위험과 감수해야 할 위험을 정확히 구분했다. 『손자병법』에 선승구전(先勝求戰)이란 말이 있다. ‘미리 이겨 놓고 난 후에 싸운다’는 뜻이다. 이런 경지에 이르려면 싸움 전에 미리 ‘이길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야 한다. 이순신은 미리 ‘이길 수 있는 조건’을 만들고 전투에 임했기에 연전 연승할 수 있었다.

 이순신은 지형·조류 등 지리적 여건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명량해협의 좁은 물목인 울둘목을 전투장소로 택했다. 일본 전선 중 가장 크고 전투력이 강한 안택선은 직접 전투에 나가지 못하고 규모가 작은 관선 133척만 참여할 수 있었다.

또 이순신은 좁은 물목을 간신히 빠져 나올 수밖에 없었던 일본 군선들에 화포를 집중하고, 명량해협의 빠른 조류도 적극 활용해 대승을 거뒀다.

 임진왜란은 조선·일본·중국이 7년 동안 싸운 처절한 전쟁이다. 조선 산하는 쑥대밭이 됐다. 이순신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악조건에서도 빈틈없는 자세로 국가 존망의 위기를 헤쳐나갔다. 그가 보여준 위기관리 리더십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한 사례조차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지금은 불확실성의 시대다. 지능지수(IQ)·감성지수(EQ)뿐만 아니라, 어려운 고비를 극복하기 위해 얼마나 끈질기게 노력하는가를 나타내는 역경지수(Adversity Quotient·AQ)가 높은 리더가 요청되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 이순신이 보여준 높은 역경지수, 위기대비 태세, 리스크 평가와 위험감수(calculated risk-taking), 선승구전 전략, 희생정신을 벤치마킹해야 할 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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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들, 무능 지도층에 불만 … 이순신 실천 리더십에 열광

‘명량’ 1000만 관객 초읽기 … 한국사회 왜 몰입하나

진행=강찬호 중앙SUNDAY 정치에디터 정리=백일현 기자, 박종화 인턴기자 keysme@joongang.co.kr | 제387호 | 20140810 입력
영화 ‘명량’에서 배우 최민식(가운데)이 이순신 장군 역할을 맡았다. 이 영화는 9일 오전 900만 관객을 돌파했다. [사진 CJ엔터테인먼트]
가히 신드롬이다. 이순신 장군의 명량해전을 다룬 영화 ‘명량’이 9일 오전 900만 관객을 돌파했다. 개봉 11일 만으로, 역대 최단 기록이다. 부산국제영화제 위원장을 지낸 영화계 원로 김동호(77) 문화융성위원회 위원장은 “영화 ‘아바타’가 세운 최다 관객 기록 1300만 명을 깨고 1500만 명까지 동원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이순신 바람’은 정치권에도 거세다. 박근혜 대통령이 6일 영화를 관람했다.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와 이인제 최고위원, 새정치민주연합 박영선 비상대책위원장(국민공감혁신위원장)과 전병헌 전 원내대표도 관람하거나, 영화 대사를 인용하고 있다. 특히 “충(忠)은 백성을 향해야 한다”는 대사가 자주 거론된다.

 국민과 정치권이 영화에 열광하는 이유가 뭘까. 중앙SUNDAY는 8일 김동호 위원장과 39년간 ‘이순신 전도사’로 활동해 온 김종대(66) 전 헌법재판소 재판관을 초청해 ‘명량 신드롬’의 의미를 따져봤다. 김 전 재판관은 군 법무관 시절인 1975년 이은상 선생의 『충무공의 생애와 사상』을 접한 뒤 이순신에게 매료돼 그의 생애를 연구한 책 『이순신, 신은 이미 준비를 마치었나이다』를 내고 전국을 돌며 ‘이순신 리더십’ 강연을 200차례 넘게 해 왔다.

 -‘명량’이 왜 이렇게 인기인가. 무능한 정치 리더십에 대한 불만 때문인가.
 ▶김동호=‘명량’은 국가가 가장 위태로운 시기에 민관·군이 힘을 합쳐 위기를 극복하는 리더십을 보여준다. 세월호 참사로 인한 총체적 난국 속에서 진정한 리더십을 갈구하는 국민의 욕구를 충족시킨 영화다. 박근혜 대통령도 6일 영화를 본 뒤 나를 포함해 함께 관람한 이들에게 “우리 역사 굽이굽이마다 위기가 많았지만 이순신 장군 같은 분이 국민과 관가의 모든 힘을 합쳐 위기를 극복해 오늘의 우리가 있다”고 하더라.
 ▶김종대=지금 국민의 마음은 많이 아프다. 세월호 참사 같은 대재앙이 재발하지 않는다는 보장마저 없다. 그런 불안 속에 영웅을 기다리는 마음들이 생겼다. 옛날엔 나라가 위기를 맞자 이순신 한 사람이 나타나 구해냈는데, 왜 지금 공직자 중엔 그런 사람이 안 보이나 하는 심정으로 영화를 봤을 거다.

 -이순신 리더십의 핵심은 뭔가.
 ▶김동호=‘명량’에서 이순신은 물길을 잘 아는 촌로 한 명과 울돌목에 올라 작전을 세운다. 노인의 조언을 경청하고 작전으로 옮기는 장수의 지혜가 엿보였다. 한 명의 병사가 아까운 상황에서 탈영병의 목을 베어 군기를 잡는 엄격한 장군의 모습도 보여준다. 또 이순신은 영화에서 말을 거의 하지 않는다. 대신 행동으로 실천하는 리더십을 보여준다. 지금 우리 지도층도 그런 자세를 가져야 한다. “충(忠)은 백성을 향하는 것”이라는 대사처럼 국민을 기준으로 판단하고 행동해야 한다.
 ▶김종대=칠천량해전에서 수군이 참패하자 권율 장군이 이순신을 찾아가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는다. 권율은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되고 고문당해 숨지기 직전까지 가는 데 관여한 사람이다. 그런데도 이순신은 권율에게 “현장을 둘러보고 방책을 구하겠다”고 답한 뒤 전세를 파악하고 수군을 재건한다. 공적인 가치를 사적인 감정보다 앞세우는 게 이순신 리더십의 핵심이다. 공직자가 가장 먼저 배워야 할 자세다.
 또 원균은 배 200척을 갖고도 참패해 전사한 반면 이순신은 불과 12척만으로 133척의 왜선 군단을 무찌른다. 그건 두 장수가 가진 내면의 차이 때문이다. 원균은 장병들에게 적의 목을 베어오게끔 한 뒤 그 숫자를 자신의 전과로 보고했다. 당시엔 장수의 평가 기준이 적의 목 숫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병사들이 적을 죽인 뒤 그 목을 따려면 시간이 많이 걸린다. 그러다 전사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런데 이순신은 장병들에게 “적의 목을 따는 대신 죽이는 데만 전념하라”고 했다. 그 결과 전투 효율이 높아지고 전사자도 급감했다. 원균은 ‘목이 없으면 내 공도 없어지는데 이겨봤자 뭐하나’란 생각으로 전투에 임했지만 이순신은 ‘내 공을 따지기 앞서 나라 구하는 게 급하다’는 자세로 임했다. 그런 자세가 명량해전이란 기적을 만든 것이다.
 이순신은 또 백성을 진심으로 사랑했기에 군·민을 하나로 만들 수 있었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경상·전라도 수령들은 일제히 도망가버리지만 이순신은 전라도 300리 길을 돌아 적진을 향해 나아가며 전투 준비를 한다. 백성들은 그런 이순신을 보고 ‘이제 우린 살았다’고 안도하며 군량미를 헌납했고 장정들은 자원해서 병사가 됐다.

 -‘명량’의 흥행엔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불만도 배경이 됐다고 하는데.
 ▶김종대=아니다. 특정한 지도자 한 명이 아니라 지도층 일반에 대한 불만과 갈증 때문에 흥행이 됐다고 봐야 한다. 이순신이 나라를 어떻게 구했나. 쿠데타를 일으킨 것도, 정승으로 무슨 큰 정책을 만든 것도 아니다. 그저 자신이 맡은 바다를 지켰을 뿐이다.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을 100% 완수하니 나라가 지켜진 거다. 자신의 임무를 100% 정성으로 수행하니, 하늘도 감동해 이긴 것이다. 우리도 각자의 책임을 100% 이루는 사회가 되면 살맛 나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
 ▶김동호=그렇다. 모든 사람이 자기 분야에서 책임과 최선을 다하면 사회와 국가가 발전한다.

 -이순신을 다룬 영화는 이전에도 있었는데.
 ▶김동호=1962년(유현목 감독)과 71년(이규웅 감독)에 각각 ‘성웅 이순신’이란 영화가 나왔고 77년엔 김진규 주연의 ‘난중일기’(장일호 감독)가 나왔지만 모두 흥행엔 실패했다. 반면 같은 이순신을 다룬 ‘명량’이 히트한 건 시대 상황과 연관 있다고 본다. ‘성웅 이순신’이 나온 60~70년대는 경제는 어려웠지만 공직자의 자세가 지금처럼 흐트러지진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책임감 있는 공직자를 찾기 힘들고 배려나 포용 같은 가치가 사라지며 인성마저 메말랐다. 그러니 이순신을 통해 그런 갈증을 풀어주는 영화가 흥행이 된 거다.
 ▶김종대=헌법재판관 시절인 2년 전쯤 김한민 감독과 만났다. 명량해전을 소재로 한 영화를 기획 중이라면서 내 책을 읽고 확신을 가졌다고 했다. 이순신이 명량에서 승리한 원인은 뭘까. 이순신은 해전 전날 밤 신인(神人)이 나타나 ‘이렇게 하면 이기고 이렇게 하면 진다’고 가르쳐 줬다고 썼다. 그 신인이 무슨 얘기를 했을까 고민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란 말이 있다. 백성을 구하려는 이순신의 정성이 지극해 하늘을 움직인 것 아닌가. 이순신은 살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김 감독의 생각도 나와 같았다. 김 감독은 내가 지은 시를 책상 앞에 붙여놓고 ‘명량’을 찍었다고 한다. 나도 영화 크랭크인 고사(告祀)에 참석했고, 촬영 현장도 찾았다. 이순신 리더십 강연에서도 ‘명량’이 개봉되면 꼭 보라고 선전했다.

 -박 대통령이 이 영화의 어떤 대목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고 보나.
 ▶김종대=이순신의 배가 회오리에 휘말려 침몰하기 직전 백성들이 갈고리로 배를 살려내는 장면에서 박 대통령도 찡하지 않았을까 싶다. 백성들이 이순신에게 감사의 눈물을 뿌리며 절할 때에도 그렇지 않았을까. 그게 바로 사랑이다. 흔히 지도자는 소통해야 한다고 하는데, 말 대신 행동으로 사랑을 해야 소통이 된다. 이순신은 박 대통령의 부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이 아산 현충사, 한산도 제승당을 복원하면서 부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 전 대통령에 대한 반발 탓인지 지식인들은 지난 수십 년간 이순신을 외면해 왔다. 하지만 이순신은 공부하면 할수록 무조건 빨려들어가는 사람이다. 이순신이 충(忠)을 바친 대상은 왕이 아니라 ‘조선’이란 사직(社稷)이다. 이순신은 ‘한 뼘의 땅도 적에게 내줄 수 없고 백성 그 누구도 상처를 입을 수 없다’는 마음으로 나라와 국민을 지켰다. 또 단 한 번도 왕에게 아부하거나 자신의 권한을 사적으로 행사한 일이 없다. 그 점에서 ‘장수된 자의 의리 는 충을 좇아야 하고 그 충은 백성을 향해야 한다’란 대사는 비록 픽션이지만 이순신의 정신을 잘 보여주는 명대사다.
 ▶김동호=박 전 대통령이 독재를 미화하기 위해 이순신 장군 재조명에 열중했다는 주장은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내가 박 전 대통령 시절 줄곧 문화공보부에서 근무하며 관련 사업들을 담당해 잘 안다. 박 전 대통령은 이순신뿐 아니라 불국사나 도산서원 등 전국의 문화유산 복원에 온 힘을 기울였다. 선조들이 남긴 문화재들을 되살려 호국정신을 선양하고 국가발전의 동력으로 삼으려는 것이었지,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한 건 아니었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세월호 참사 같은 불행한 사건이 터지지 않았다면 영화가 이렇게 흥행했을까.
 ▶김동호=아마 관객이 이처럼 많이 들지는 않았을 거다.
 ▶김종대=세월호 참사 직후 제작사인 CJ엔터테인먼트가 김 감독에게 “개봉을 무기 연기해야 할 것 같다”고 했다고 한다. 김 감독이 내게 “어쩌면 좋겠느냐”고 묻기에 “반드시 개봉돼야 한다. 지금이야말로 이런 영화가 필요하다”고 했다. 만약 연기됐다면 국민이 이렇게 좋은 위로를 받을 순 없었을 거다.

 -영화가 일부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다는 논란도 있는데.
 ▶김동호=역사영화는 가능한 한 사실에 근접하게 묘사할 필요가 있지만 알려지지 않은 부분에선 감독의 상상력과 연출력이 발휘돼야 한다. 그런 점에서 ‘명량’은 균형이 잘 잡힌 영화다.
 ▶김종대=그렇다. 특히 백성들이 쇠사슬로 배를 구해내는 장면은 뛰어난 창작이다.

 -우리 영화계에 던지는 시사점은.
 ▶김동호=한국 영화는 ‘괴물’ ‘왕의 남자’가 연속 히트한 2006년 정점을 찍은 뒤 쇠퇴 조짐을 보여왔는데 ‘명량’이 되살리고 있다. 우리 영화는 관객의 70%가 20대인데, 이 영화는 40대 이상이 더 많이 본다는 게 특징이다. 중장년의 감성을 파고드는 메시지가 있다는 거다. 또 대개는 아이들이 부모를 졸라 극장을 찾지만 ‘명량’은 부모가 아이를 데려와 함께 보는 ‘에듀테인먼트(education+entertainment)’로 자리 잡고 있다. 또 울돌목 회오리 영상이나 1시간에 달하는 해전 장면은 대부분 컴퓨터그래픽으로 제작했는데, 그 수준이 세계 최고라 할 만하다. 1500만 명은 너끈히 동원해 최다 흥행기록을 경신할 것이다.
 ▶김종대=판사 시절부터 ‘충무공 정신으로 살맛 나는 세상을 만들자’는 생각으로 이순신 정신을 강의해 왔다. 하지만 강연 200번 해봤자 2만 명 모으기도 힘들다. 그러나 영화가 1000만 명을 돌파하면 국민과 이순신이 얼마나 가까워지겠는가. 김 감독은 앞으로 한산대첩과 노량대첩도 영화화해 이순신 3부작을 만들겠다고 한다. 그 꿈이 이뤄지기 바란다. 올해 안에 국회에서 인성교육진흥법이 통과될 전망인데 이순신을 인성교육의 롤모델로, ‘명량’을 그 교재로 쓰면 좋겠다.


진행=강찬호 중앙SUNDAY 정치에디터 정리=백일현 기자, 박종화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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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웅 이순신'의 재림인가? '명량'이 한국영화 사상 최단기간에 천만관객을 돌파하며 이순신 신드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흥행기록이 워낙 경이적이다 보니 영화적 완성도를 둘러싼 논란도 파도에 휩쓸려 사라졌다. 발 빠르게 편승한 정치권은 벌써부터 이순신의 리더십을 찬양하고, 단체관람에 나선 기업들은 그의 위기관리 능력을 벤치마킹하기 바쁘다.

영화 '명량'이 이처럼 폭발적인 반응을 얻고 있는 이유는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어렴풋이 알고 있다. 아니, 느끼고 있다. (특정하기는 어렵지만) 세월호 참사에서 군부대 폭력까지 누적되어온, 지금 이 순간 한국인이 앓고 있는, 어떤 상실감을 건드리고 있기 때문이다. 슬프다. 분하다. 그런데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바뀔 것 같지도 않다. 답답하고 기운 빠지는 찰나에 이 영화가 맞아떨어진 것이다. 오죽하면 영화를 곱씹으며 위로받고 싶을까?

극중 이순신의 모습은 신화적 존재로 그려지지 않는다. 찬양 일색의 성웅이나 부풀려 미화된 슈퍼히어로가 아니다. 오히려 평범한 사람들처럼 이순신과 그의 부하들도 죽음의 두려움 앞에서 도망치고 싶어 한다. 나라의 존망이 걸린 싸움임을 직감하면서도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나약함. 영화 전반부에 드러난 이 인간적인 고뇌가 어쩌면 관객들의 감정이입을 용이하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실제 명량대첩을 이끈 이순신은 어땠을까?

역사 속의 이순신도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오롯이 자신을 극복하고 죽음을 초월하지는 못했다는 말이다. 그 근거로 척자점(擲字占)과 주역점(周易占)에 관한 기록을 들 수 있다. 난중일기를 보면 이순신이 점을 치는 대목이 17회 가량 등장한다. 그 가운데 14회는 직접 쳤고, 3회는 점쟁이를 시켰다. 죽음의 두려움에 맞서 싸웠다지만 그이도 사람인지라 속내는 불안했다는 뜻이다.

점은 미신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긴 하지만 불확실한 미래에 대비하기 위해 오늘날에도 적지 않게 활용된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이 친 점도 마찬가지였다. 내일의 생사를 장담할 수 없는 전쟁터에서 고향에 남겨둔 아내와 자식, 그리고 후원자인 유성룡의 안부를 간절한 마음으로 살폈다. 뿐만 아니라 백성의 농사일을 염려하여 비가 얼마나 내리는지도 점괘를 통해 미리 알아봤다. 군사작전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새벽에 촛불을 밝히고 홀로 앉아 왜적을 치는 일이 길한지 점을 쳤다. 첫 점괘는 '활이 화살을 얻은 것과 같다(如弓得箭)'는 것이었다. 다시 점을 치니 이번에는 '산이 움직이지 않는 것과 같다(如山不動)'고 나왔다. 바람이 순조롭지 못하였다. 홍도 안바다에 진을 치고서 잤다." - 난중일기, 1594년 9월 28일

이것은 전투의 길흉을 예측하는 점이다. 이즈음에 이순신은 도원수 권율과 도체찰사 윤두수가 주도하는 수륙합동작전에 참여하고 있었다. 9월 28일은 출전하기 전날이었는데 첫 점괘는 활이 화살을 얻는 것이니 나쁘지 않았다. 문제는 다시 친 점이었다. 산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괘는 성과가 없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결국 이 싸움(장문포해전)은 여러 번 교전을 시도했으나 아무런 전과를 얻지 못하면서 사실상 실패로 끝났다.

여기서 특이사항을 꼽자면 이순신이 같은 사안을 놓고 점을 여러 번 쳤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자신이 원하는 결과가 나올 때까지 점을 친 셈이다. 판단은 스스로 내리되 자기 확신을 갖거나 주변을 설득하는 수단으로 점을 활용했다고 볼 수 있다. 장문포해전은 후자에 해당한다. 어디까지나 추론이지만 이순신은 점괘까지 곁들여 신중론을 폈는데 권율과 윤두수가 강행했을 가능성도 있다. 윤두수는 후일 이순신을 탄핵한 장본인이다.

백사 이항복은 이순신을 과감한 결단력의 소유자라고 평한 바 있다. 전장에서 결단을 내리려면 냉철한 판단은 물론이고 이를 뒷받침하는 자기 확신과 설득력이 필수다. 이순신이 울돌목에서 12척의 배로 330척의 대적을 물리친 것도 그래서다. 원래 전쟁은 맨정신에 하기 어렵다. 점이든 뭐든 승리에 대한 확신으로 죽음의 두려움과 대면하고, 영화 속 최민식의 연기처럼 핏발 선 눈빛으로 독려했을 터. 오늘날 광화문 한복판을 지키고 선 이순신 동상에 인간의 얼굴이 어른거리는 이유다.

 

* 출처: 머니투데이 -권경률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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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고야 성에서 명량을 보다 *

 

영화 ‘명량’에 등장하는 왜장(倭將)들은 어디에서 출병했을까. 부산에서 최단거리인 일본 규슈의 사가 현 가라쓰 시에 있는 나고야(名護屋) 성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 침략의 전진기지로 삼기 위해 반 년 만에 바닷가에 급조한 성이다. 성의 이름을 자신의 고향인 나고야(名古屋)에서 따오며 가운데 글자만 ‘古(고)’에서 ‘護(호)’로 바꿨다. 도요토미는 자신의 본거지인 오사카 성에서 이곳으로 옮겨와 전쟁을 진두지휘했다. 화친협상이 깨지면서 재차 조선을 침략한 것이 정유재란이고, 영화 명량은 바로 그 무렵의 이순신을 다루고 있다.

지난주 규슈의 관문인 후쿠오카에서 제22차 한일포럼이 열렸다. 정계 재계 학계 언론계 등의 전문가들이 매년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여는 회의다. 후쿠오카에서 가라쓰까지는 차로 1시간 20분 남짓. 나고야 성을 둘러봤다. 아마 명량 열풍이 아니었다면 구태여 그런 수고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고야 성은 성이 아니라 성터라는 말이 맞다. 그야말로 황성(荒城) 옛터다. 도요토미가 죽고 왜군이 퇴각하면서 곧바로 파괴됐기 때문에 건물은 남아있는 게 하나도 없다. 한때 17만 m²(약 5만 평)의 광활한 터에 전국의 다이묘(大名)들이 160곳에 진을 치고 있어 장관을 이뤘다고 했으나 지금은 기록에만 남아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성터에서 내려다보이는 바다는 이순신과 도요토미만을 얘기하지 않는다. 나고야 성 앞바다는 고대 한반도와 일본열도의 우호의 아이콘인 백제 무령왕이 태어났다는 섬을 품고 있고, 여몽연합군이 일본을 침공할 때 거쳐 갔으며, 조선의 골칫거리인 왜구의 주요 근거지이자, 일제강점기부터 자주 듣게 된 한(恨)의 대명사 현해탄이기도 하다. 좋든 싫든 역사의 바다인 셈이다. 그래 그런지 포럼에서 만난 후쿠오카의 유력인사들은 빠짐없이 역사적, 지리적으로 규슈는 한반도와 일본열도를 잇는 창구이자 현관이라고 했다. 그 말은 사실이다. 그러나 규슈에는 빛만 있는 게 아니라 그늘도 공존한다.

이번 한일포럼에도 빛과 그늘이 있었다. 일본은 과거를 제대로 사과했는가, 군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장기간 한일 정상회담을 못 열고 있는 것은 누구 탓인가, 한국이 중국 쪽으로 기울고 있다는 주장은 사실인가, 미디어가 양국관계를 더 악화시키고 있는가, 내년 국교 정상화 50주년은 관계회복의 전기가 될 것인가 등등을 논의했지만 어느 해보다 시각차가 컸다. 악화된 한일관계는 포럼에도 부정적 영향을 줬다. 한일 양국이 중요한 파트너로서 지금처럼 불편한 관계가 지속돼서는 안 된다는 점에 의견을 같이하고 미래지향적인 성명서를 채택한 것이 그나마 위안이었다.

사가 현이 나고야 성터 근처에 만든 ‘나고야 성 박물관’에서 한일 갈등을 푸는 실마리를 확인한 것도 수확이라면 수확이다. 박물관 옆 국기게양대에 태극기와 일장기가 함께 걸려 있는 게 인상적이었다. ‘일본열도와 조선반도의 교류사’를 상설전시하고 있는데 언뜻 ‘침략’을 ‘교류’로 호도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러나 전시물 해설과 박물관 소개서는 나고야 성을 ‘침략기지’라고 분명히 규정하고 있고, 한반도에서 건너온 문물이 일본의 발전에 큰 도움을 줬다는 사실도 솔직하게 기술하고 있다. 전시의 마지막에 와서야 비로소 역사를 직시하면서 우호관계를 구축하자고 말한다. 거부감이 안 든다.

도요토미는 명나라를 치기 위해 조선에 길을 빌려달라고 했다. 지금도 중국의 급부상에 가장 신경을 쓰고 있는 나라가 일본이다. 400여 년이 흐른 지금을 그때와 비교하는 것은 난센스다. 다만, 그때나 지금이나 한반도가 양국 사이에 끼여 원치 않는 선택을 강요받거나, 불필요한 갈등을 인내해야 하는 것은 여전히 불행이다.

나고야 성은 조선에 16만 명을 출병시키고도, 예비로 16만 명을 대기시켜 놓고 있었다. 도요토미가 죽지 않았다면 역사는 어떻게 전개됐을지 모른다. 나고야 성에서도 이순신은 보였지만 일본의 야욕과 조선의 무능 때문에 유린당한 백성들과 산천초목의 울부짖음은 전혀 들리지 않았다. 자위가 불가능한 나라, 리더십이 붕괴한 나라, 자국을 과대평가하는 나라에 전쟁이 일어난다면 오늘이라고 다를 게 없다. 나고야 성에서 명량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전쟁 영웅은 이순신 장군 한 명으로 족하다고.

* 출처: 동아일보-심규선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