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 댄은 출판사 소속 변호사이다. 그는 아름답고 매력적인 아내 베스와 귀여운 딸 엘렌과 함께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파티에서 우연히 출판사의 부편집장으로 일하는 알렉스를 만난다. 알렉스는 댄의 아내 베스와는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는 여자이다. 지성적이며 도발적이다. 이런 알렉스에게 끌린 댄은 아내와 딸이 여행을 간 사이 그녀와 불륜의 사랑을 나눈다.
애초에 댄은 알렉스와의 관계를 오래 지속할 생각이 없었다. 자신이 이미 가정이 있는 몸이라는 것을 알렉스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녀 역시 그와의 관계를 ‘하룻밤의 사랑’이라고 생각할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알렉스의 생각은 달랐다. 그녀는 댄과 지속적인 관계를 원했다. 뜨거운 밤을 함께 보낸 후, 아침이 되면 댄이 쪽지만 남겨 놓고 서둘러 사라지는 상황을 못 견뎌했다.
처음에 뜨거운 열정으로 시작한 두 사람의 로맨스는 결코 로맨틱하지 않았다. 알렉스는 비정상적으로 댄에게 집착하고, 가정이 깨질 것을 우려한 댄은 그녀를 멀리한다. 그러자 알렉스는 시시때때로 사무실과 집으로 전화를 거는가 하면 심지어는 직접 찾아오기도 한다. 어느 날 그녀는 이제 그만 관계를 끝내자는 댄에게 그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충격적인 고백을 한다. 댄은 알렉스에게 아이를 지울 것을 요구하지만 알렉스는 아이를 낳을 것을 고집한다. 그러면서 댄에게 아이 아버지로서의 의무와 책임을 하라고 협박한다.
진퇴양난에 빠진 댄은 가정법 전문 변호사인 친구에게 이럴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자문을 구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그가 전적으로 불리하다는 것뿐이다. 그러는 사이 알렉스는 더욱 노골적으로 댄에게 집착한다. 댄이 살고 있는 집을 팔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고 집을 사려는 사람으로 가장하여 댄의 집으로 들어온다. 댄은 알렉스가 베스를 만나고 있는 광경을 보고 경악한다. 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를 모르는 베스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댄에게 알렉스를 소개한다. 댄은 베스가 안 보는 틈을 타서 알렉스에게 험악한 말을 하지만 알렉스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댄에 대한 알렉스의 집착은 정상의 범위를 넘어선 것이다. 사랑이 아니라 병적인 집착에 가깝다. 그녀는 댄과 그의 아내와 딸이 누리고 있는 안락한 결혼생활을 질투한다. 밤중에 몰래 댄의 집으로 접근해 창문을 통해 세 사람이 벽난로 앞에서 안락하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을 보고 눈물을 흘린다. 생부로부터 아무런 축복을 받지 못한 뱃속의 아이를 생각하며 상대적인 박탈감에 빠진다.
결국 그녀는 그 행복에 돌을 던지기로 한다. 어느 날 외출에서 돌아온 댄의 가족은 엘렌이 애지중지 키우던 토끼가 뜨거운 물속에서 끓고 있는 것을 보고 경악한다. 영문을 모르는 베스는 경찰에 신고하려고 하지만 범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는 댄은 베스를 진정시킨다. 더 이상 이 일을 감출 수 없다고 생각한 댄은 아내에게 사실을 털어놓는다. 알렉스와 잠자리를 가졌다는 댄의 말에 눈물만 흘리던 베스는 알렉스가 댄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말을 듣자 폭발한다. 그녀는 배신감에 떨면서 댄을 내쫓는다.
베스가 댄과 알렉스의 관계를 알게 된 후에도 알렉스는 이들의 가정을 파괴하려는 행동을 서슴지 않는다. 어느 날, 딸 엘렌을 데리러 학교에 간 베스는 딸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알고 놀란다. 알렉스가 먼저 와서 엘렌을 데려간 것이다. 알렉스는 엘렌을 놀이공원으로 데려가 함께 롤러코스터를 탄다. 그 사이 베스는 차를 타고 엘렌을 찾아 헤매다가 그만 교통사고를 당하고 만다. 다행히 엘렌은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지만 베스와 댄은 비정상적인 알렉스의 행동에 위협을 느낀다.
이런 우려는 결국 현실이 된다. 알렉스가 댄의 집에 침입해 두 사람을 죽이려고 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댄은 알렉스의 목을 조른다. 욕조에 빠져 죽은 척하던 알렉스가 다시 살아나 댄을 칼로 찌르려고 하는 순간 베스가 총으로 알렉스의 가슴을 쏜다. 알렉스는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고, 이렇게 해서 하룻밤 불륜의 사랑으로 시작된 불행은 끝을 맺는다.
영화에서 알렉스는 비정상적으로 남자에 집착하는 일종의 정신병자로 나온다. 하지만 그녀에게도 동정의 여지는 있다. 여자로서 그녀는 사랑받고 싶었던 것이다. 다른 사람과 나누지 않는 사랑, 한 남자의 온전한 사랑을 받고 싶었고, 또 그의 아이를 낳아 행복하게 기르고 싶었다. 그 열망이 너무나 강렬해 결국 비정상적인 집착이 되었다. 그녀는 너무 간절하게 댄의 사랑을 갈구하지만 댄은 끝내 그녀에게 돌아오지 않는다. 이런 알렉스의 절망감을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이 대변한다. 댄을 그리워하는 알렉스는 [나비부인]을 들으며 오열한다.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은 일본의 나가사키 항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핑커톤이라는 미군 장교와 일본인 게이샤 초초 상의 비극적인 사랑을 그린 것이다. 나가사키 항에 정박한 아브라함 링컨 호에서 내린 미군 해군 장교 핑커톤은 새로운 항구에 닿을 때마다 늘 그랬던 것처럼 여기서도 ‘데리고 놀’ 여자를 구한다. 그리고 포주의 소개로 15살인 게이샤 출신의 초초 상을 만나 장난삼아 결혼식을 올린다. 핑커톤은 장난이었지만 초초 상은 장난이 아니었다. 그녀는 미국인 남편 핑커톤을 위해 조상 대대로 믿어온 종교를 버리고 기독교로 개종할 정도로 그를 사랑한다.
하지만 초초 상을 하룻밤 사랑으로만 생각했던 핑커톤은 나가사키 항을 떠나는 배와 함께 그녀를 떠난다. 초초 상은 핑커톤의 아들까지 낳아 기르며 그를 기다리고 있다. 핑커톤이 돌아올 것이라는 그녀의 믿음은 너무나 굳건하다. 어느 날 하녀 스즈키가 그가 다시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하자 다음과 같이 자신의 신념을 노래한다. [나비부인] 중에서 가장 유명한 아리아인 [어떤 갠 날]이다.
내게 말했어요. 오, 버터플라이
그대가 기다리면 내 꼭 돌아오리라.
어느 맑게 개인 날,
연기가 피어오르고
바다 저 멀리에서 배가 나타나지요.
희고 큰 배가 항구로 와서 예포를 쏘아 올려요.
봐요. 그가 왔어요!
나는 그를 만나러 갈 겁니다.
언덕 위에서 그를 기다릴 거예요.
얼마든지 오래 기다릴 수 있어요.
그런 기다림은 괴로움이 아니니까요.
군중을 헤치고 올라오며 한 남자가 올라옵니다.
내가 있는 언덕으로 올라오면서 말을 겁니다.
그가 누굴까요?
그가 누굴까요?
언덕에 다다랐을 때 그가 뭐라고 말할까요?
아마 먼 곳에서 “나비야”라고 부르겠지요.
하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고 숨을 거예요.
장난이기도 하지만, 그 순간 너무 좋아서
죽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지요.
그이는 나에게 다가와 이렇게 말하겠지요.
“귀여운, 내 오렌지 꽃처럼 귀여운 아가씨”
예전에 나를 그렇게 불렀던 것처럼.
그래요. 그는 꼭 이렇게 돌아올 거예요.
난 약속할 수 있어요.
걱정하지 말아요,
난 믿고 기다릴거예요.
노래의 마지막에 그가 꼭 돌아올 것이라고 하는 대목에서 초초 상은 온 힘을 다한 절규로 자신의 신념을 표현한다.
하지만 그녀의 신념과는 정반대로 핑커톤은 본국으로 돌아가 서양 여자와 ‘정식으로’ 결혼을 한다. 그리고 본부인과 함께 초초 상의 집을 찾는다. 자신의 신념이 물거품으로 돌아간 것을 안 초초 상은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단도로 가차 없이 자기 가슴을 찌른다. 어린 아들을 남겨둔 채.
영화는 [나비부인]을 끌어들여 댄과 알렉스의 관계가 결국 비극으로 끝날 것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두 사람이 알렉스의 집에서 음식을 만들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알렉스가 [나비부인]을 틀어놓는다. 댄은 다섯 살 때 아버지와 함께 처음 본 오페라가 [나비부인]이었다고 하면서 주인공이 자살할 때 무서워서 혼났다고 얘기한다.
핑커톤이 결혼했다는 것을 안 초초 상은 스즈키의 표현을 빌리면 “덫에 걸린 나방의 날갯짓처럼” 떤다. 그리고는 아들을 핑커톤에게 보내고 자신은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것을 결심한다. 그녀는 스즈키에게 밖이 너무 환하고 봄기운이 완연하니 문을 닫으라고 한다. 봄꽃은 흐드러지게 피었지만 그녀의 마음은 이미 겨울인 것이다. 초초 상은 “수치스럽게 사는 것보다 명예롭게 죽는 것이 낫다.”고 독백한다. 그리고는 아들을 불러 품에 안고 마지막 작별 인사를 나눈다.
백합과 장미 같은 아가.
너는 절대로 알면 안 된다.
너를 위해서, 너의 맑은 눈을 위해서
나비는 죽는단다.
너는 바다 건너 멀리 떠날 거야.
자란 뒤에도 어미에게 버림받았다고 슬퍼하지 말아라.
나를 위해 천국의 보좌에서 내려온 아가야.
어미의 얼굴을 자세히 보고
희미하게라도 기억해다오.
잘 보거라. 내 사랑. 안녕.
잘 있거라. 내 사랑하는 아가.
그리고는 장엄한 오케스트라 반주에 맞추어 자신의 가슴을 칼로 찌른다. 영화는 댄과 알렉스가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장면에 이 대목을 들려줌으로써 이 위험한 사랑의 불장난에게 닥칠 비극적 종말을 예고한다.
결국 알렉스는 댄에게 버림받는다. 댄은 자신의 행복한 가정으로 돌아갔고, 알렉스는 어둠 속에서 하염없이 그를 기다리며 눈물 흘린다. 이 대목에서 초초 상이 아들을 안고 부르는 자장가가 나온다.
엄마 품에서 잘 자거라.
나는 슬픔에 있어도
너는 천국에 있으렴.
금빛 별들이 너를 둘러싸기를
잘 자라. 우리 아가.
초초 상의 비극적 종말을 예감해서 일까. 노래의 멜로디는 서정적이지만 어딘가에서 깊은 슬픔이 느껴진다. 알렉스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어둠 속에서 이 노래를 듣고 있는 동안, 댄은 아내, 친구 부부와 함께 볼링을 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그 콘트라스트를 극대화하기 위해 영화는 두 장면을 교차해서 보여준다. 한쪽은 지옥, 한쪽은 천국이다.
한 남자에 대한 사랑과 집착이라는 측면에서 초초 상과 알렉스는 비슷한 면이 있다. 하지만 그 양상은 사뭇 다르다. 초초 상이 자학적이라면, 알렉스는 가학적이다. 아무리 사연이 측은해도 자신의 집착 때문에 다른 사람을 해치려는 사람에게는 좀처럼 동정심을 느끼기 힘들다. 반면에 사랑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에게는 일종의 측은지심을 갖는다. 아들을 안고 부르는 초초 상의 자장가가 아련한 슬픔, 애잔한 동정의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 아닐까.
글
진회숙 음악 칼럼니스트
- 이화여대 음대 및 서울대 음대 대학원 졸업
현재 서울시립교향악단 월간지 SPO 편집위원이며, 서울시향 ‘콘서트 미리 공부하기’를 비롯한 여러 클래식 강좌의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평화방송 FM 음악공감 ‘진회숙의 일요 스페셜’의 진행자이다. 저서로 <모나리자. 모차르트를 만나다> 외 여러 권이 있다. - 저자의 책 보러가기 인물정보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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