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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nri Vieuxtemps- Violin Concerto 전곡

Bawoo 2014. 8. 13. 12:43


Henri Vieuxtemps


Henri Vieuxtemps, Lithograph by Josef Kriehuber, 1842



 Henri Vieuxtemps (17 February 1820 -- 6 June 1881) was a Belgian composer and violinist. He occupies an important place in the history of the violin as a prominent exponent of the Franco-Belgian violin school during the mid-19th century. He is also known for playing upon what is now known as the Vieuxtemps Guarneri del Gesu, a violin of superior workmanship.

 

비외탕이 남긴 바이올린 협주곡은 모두 7곡입니다. 그 중에 5번이 제일 많이 연주되고 있습니다.

 

[ 전곡 연주 모음]


* Violin Concerto No.1 in E-major, Op.10 (1840)

Violin: Misha Keylin/ Orchestra: Janácek Philharmonic Orchestra /Conductor: Dennis Burkh

Mov.I: Allegro moderato 00:00
Mov.II: Introduction: Adagio 24:16
Mov.III: Rondo: Allegretto 27:19

 

 

* Violin Concerto in D minor No 4, Op.31

 

Hilary Hahn, violin / Tugan Sokhiev, conductor / Berlin Philarmonic

 

 

I. Andante (00:37)
II. Adagio religioso (10:27)
III. Scherzo (17:06)
IV. Andante - Allegro (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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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iolin Concerto No.5 in A minor

 

Viktoria Mullova (vn.)
Academy of St. Martin in the Fields / Neville Marriner

00:00 - I. Allegro non troppo
14:00 - II. Adagio
17:40 - III. Allegro con fuoco

 

 

Violin concerto Nº 5 - Sarah Chang

The Violin Concerto No.5 in A minor, Op. 37, by Henri Vieuxtemps was published in 1861 and composed 1858–1859.[1][2] This remains Vieuxtemps' most popular violin concerto, having been recorded by many great violinists, including Jascha Heifetz, Pinchas Zukerman, Itzhak Perlman, Cho-Liang Lin and Kyung-wha Chung. Auer (1925, p. 75) writes that the concerto had been "practically forgotten" but if played as its composer intended, "will not fail to impress the majority of its auditors". The second movement borrows from "Où peut-on être mieux qu'au sein de sa famille?" in Grétry's opera Luc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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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ncerto for Violin no 6 in G major, Op. 47 (Op. posth. 1)  

 

Jolente De Maeyer Violin/  Orchestre Philharmonique Royal de Liège, Patrick Davin

 

 Allegro Moderato (2010) 
 

Pastorale: Andante con moto (2010)

Intermezzo Siciliano

 

Rondo Final: Allegret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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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certo for Violin no 7  opus 49 :orchestration Jeno Hubay

 

1 악장 Moderato

 2 악장: Mélancolie: andante sostenuto/  3 악장: Finale: allegro viv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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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nri Vieuxtemps (1820 ~ 1881 ) 

 

벨기에의 바이올린 연주자.베르비에 (Verviers)출생.어려서부터 뛰어난 재능을 보여 유럽 순회공연을

다니기도 하였으며 아버지에게 음악의 기초를,루쿨루와 안젤로 베리오에게 바이올린을.

지몬 제흐터(Simon Sechter)와 안톤 라이하( anton Reicha)에게 작곡을 사사.

이어 여러차례 유럽 순회 공연을 했고 미국에서도 3번( 1843~44.1857~58,1870~71)이나

순회공연을 했다.1846년 부터 1852년까지는 상크페테르브르크의 궁정음악연주가로 있으면서

그곳 음악원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1871년부터 1873년까지는 브뤼셀 음악원의 교수로 있었다.

 

상트페테르브르크 음악원에서도 러시아 바이올린 연주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브뤼셀 음악원에서는 뇌졸증으로 사임해야했다.

극도로 정밀한 기교적 연주와 풍부한 음역을 한데 혼합한 것이 특징인 그의 연주 양식은 널리

모방이 되었다. 그는 19세기 기교적 연주자 계보의 길을 연 초기 연주자 중 한사람이면 그의

작품들 역시 기교적 연주에서 선구적 영역을 개척했고 특히 바이올린 협주곡 1~7번은

이 형식의 발전에 기여했다.

 

 

앙리 비외탕의 삶

 

 대가의 눈에 띈 잠재력 넘치는 소년의 연주 비외탕 일가의 가장 대표적인 바이올리니스트이자

작곡가인 앙리 비외탕은 1820년 3월 17일 벨기에의 베르비애에서 태어났다.

4세부터 아마츄어 음악가이자 조율사엿던 그의 아버지에게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하였고

이어서 루쿨루(M.Lecloux-Dejonc)를 사사한 그는 6세가 되던해 처음으로 대중앞에서

실력을 선보이게 된다.

 

비외탕은 1827년 11월29일에 리에지(Liege)의Socie,Te. Gretry연주를 성공적으로 치러내고

이듬해 초에는 부뤼셀에서 몇차례 연주를 하엿는데 이곳에서 大 바이올리니스트인 베리오(Beriot)의

이목을 끌어 그이 제자가 되는 영광을 안기도 한다.

1829년 5월에 제자를 파리로 데리고 간 스승은 비외탕의 데뷔를 위한 무대를 개최해 주었고 그는

로드 협주곡 제 7번을 연주하여 청중의 큰 호응을 얻게 된다.본 음악회를 지켜본 페티( Fetis)는

비외탕을 '타고난 연주가 '라며 격찬을 하기도 하였다. 1831년에 이탈리아로 떠나기 전까지 베리오는

탁월한 기량을 지닌 제자를 열성을 다해 4년 동안 지도하였다.

 

 

혼신을 다한 후진 양성과 벨리에 악파의 성립

 

1844년에 비엔나 출신 피아니스트 요세핀 에더 ( Josephine Eder) 와 결혼한 비외탕은 1855년

프랑크푸르트에 보금자리를 마련하였으나  1866년 정치적 불안으로 인해 파리로 거처를 옮겼다.

2년 후에 예기치 않은 불의의 사고로 아내를 잃게되자 그는 해외연주여행에 몰두하여 그로 인한

성공을 통해 스스로를 위안하였다. 1871년 비외탕이 미국에서 돌아 왔을  때 그는 브뤼셀 음악원

으로부터 교수 제의를 받게된다. 그는 벨기에 바이올린 악파를 혁신적으로 발전시키겠다는 큰 포부를

가지고 전력을 다하여 후진양성에 힘썼다.

유명 바이올리니스트 이자이 (Eugene Ysa ye)도 이 시기 그의 제자중 하나였다.

 

그러나 1873년에 갑자기 찾아온 중풍으로 몸이 마비된 비외탕은 비에니아프스키에게 자신의 교수

자리를 임시로 위임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다행히 1877~ 8년부터는 병세가 호전이

되어 조금씩 레슨을 재개하게 되었지만 1879년에는 학교측으로 부터 결국 사임당하게 된다.

병마와 싸우던 그는 2년후 알제리 무스타파( Mustapha )의 한 요양소에서 지병으로 숨을 거두었다.

 

 

풍부한 음악적 감수성으로 무장된 탁월한 비르투오조

 

비외탕은 풍부한 음색과 뉘앙스 넘치는 표현을 구사하면서도 정확하고 절도 있는 연주를 통해

자신만의 개성을 발현하는 솔리스트였다. 또한 뛰어난 실내악 주자이기도 했는데 ..그는 모짜르트 ,

하이든.베에토벤,바흐,케루비니등의 작품들로 구성된내악 프로그램을 연주하는 연주자 조직

에서도 활동하고 있었다. 그의 동년배들은 비외탕이 훌츠,린케( Joseph Linke)로부터 내려오는

비엔나 실내악 전통의 대가라고 서슴없이 칭한다. 이처럼 그는 실내악을 즐겨 연주하며 애호가

양성과 실내악 음악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꾀하였다.

프랑코- 벨기에 악파의 바이올린 연주를 대표하는 한 사람이자 기교주의에 빠지지 않고 정확한

해석에 바탕을 둔 풍부한 음악적 감수성으로 수많은 청중들에게 뜨거운 감격을 선사한 비외탕은

거장의 면모를 지닌 연주가로서 19세기가 남긴 가장 위대한 업적 의 작곡가 중 한 사람임에 틀림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