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학(文學) 마당 ♣/- 戰前 출생 작가

[2009 조선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작] 아칸소스테가 - 채현선

Bawoo 2014. 8. 26. 00:44

 

아칸소스테가

                          

                        - 채현선



외출했던 아내가 이구아나 한 마리를 안고 돌아왔다. 초록빛 몸통에 꼬리에는 우둘투둘한 융기가 한 줄로 돋아 있었다.

"도트."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는 내게 아내가 말했다.

"도트?"

"이 아이 이름이야. 인사해. 이제부터 우리와 함께 살 거야."

"도트? 점?"

"응. 그런데 이름 뜻은 달라. 도토리만 먹는대. 태어나서 지금까지, 쭉."

아내가 도트라고 이름 지은 이구아나는 꼬리를 날렵하게 움직이며 마루의 이곳저곳을 헤집고 돌아다니다가 가끔 멈춰 서서 끽끽거리는 소리를 냈다. 우스운 것은 녀석이 뒤로만 걷는다는 것이었다. 새롭게 맞닥뜨린 낯선 세계를 제 딴에는 그렇게 탐색 중인 모양이었다.

아내는 또 어디론가 나가더니, 새끼고양이 한 마리를 안고 들어섰다.

"이번엔 이름이 뭐야?"

내 물음에 아내는 웃기만 하더니 주방으로 들어가 밥그릇을 들고 나왔다.

"봐, 귀엽지 않아?"

아내는 마룻바닥에 밥풀을 흩어놓았고, 고양이는 그 밥알을 정신없이 핥았다.

"이 아이 이름은 바파르가 좋겠어."

"바파르? 왜?"

"밥풀."

아내는 또 웃었다. 나는 밥알을 먹는 새끼고양이를 내려다보았다. 한쪽 눈 주위를 둥그렇게 감싼 검은 털 때문에 만화 속의 '애꾸눈 잭'이 떠올랐다.

아내는 연 이틀 동안 동네 구경을 하겠다고 나가서는 그린이구아나 한 마리와 고양이를 안고 돌아왔다. 모두 이웃들이 이사 온 기념으로 주었다는데, 꽤 복잡하고 신경 쓰이는 선물인 셈이었다. 하지만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그것들을 데려와서 대체 어쩌려고, 라는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다. 아내에게 작은 위안이라도 될 수 있다면 그걸로 족했으므로 문제될 건 없었다.

아내는 도트와 바파르를 한꺼번에 껴안고 있었다. 나는 쏟아지는 졸음을 이기지 못해 길게 하품을 했다. 감기는 눈 사이로 아내 뒤의 마루와 그 너머의 바다가 햇살에 반짝였다.

"기조 씨, 기조 씨."

마루에 앉아 해바라기를 하던 아내가 스르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엉겁결에 손에 들고 있던 물컵을 바닥에 쏟았다.

아내는 습관처럼 내 이름을 두 번 반복해서 부르곤 했다. 아내는 이름마다 어떤 리듬이 새겨져 있는데 사람들이 그걸 알아차리지 못하는 건, 자기 자신의 한 부분에만 관심이 쏠려있어 다른 것을 향할 여지가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그러고는 다시 리듬을 실어 기조 씨, 기조 씨를 부르며 가볍게 몸을 흔들었다.

"어릴 때 아빠 따라서 이발관에 갔다가 수동식 이발기로 뒷머리를 깎곤 했어. 날이 뾰족뾰족하고 가위처럼 생긴 거 말이야. 스프링이 움직일 때마다 시계 초침소리가 나서 졸음이 몰려오곤 했어."

나는 아내의 목소리를 들으며, 유년의 아내를 상상했다. 아내가 초등학교 교사였던 아버지를 따라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시골이었다. 사시사철 울울한 숲과 자갈길 사이로 소나무 냄새가 밴 바람이 부는 곳이었다며 아내는 지그시 눈을 감고 말했었다. 아내의 눈두덩 위로 평온했던 유년이 지나가는 것 같았다. 오래된 팝송이 흘러나오던 허름한 이발관과 머리에 번들번들하게 기름을 발라 뒤로 넘긴 이발사 앞의 한 여자애가 떠올랐다. 여자애는 의자 위의 울룩불룩한 빨래판에 앉아 쏟아지는 졸음을 이기지 못해 매번 머리를 뜯기곤 했을 것이다. 나는 따끔하고 간질간질한 느낌이 일어 머리를 긁적였다.

"바파르, 이리 와."

아내가 바파르를 불렀다. 새끼고양이는 선뜻 다가가지 않고 몸을 이리저리 꼬며 아내를 탐색 중이었다. 아내의 희멀건 손이 바파르를 끌어당겼다.

아내는 심장근육이 굳어가는 희귀병 진단을 받았다. 가끔 가슴을 옥죄는 통증 외에는 별다른 증상이 없었더랬다. 섬유화의 진행으로 수축을 하지 못하는 아내의 심장은 언제 멈출지 모른다고 했다. 그 언제라는 것이 막연하기만 해서, 일 년을 살지도 십 년을 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원인도 치료법도 그에 따른 예후도 없어, 정확하게 처방받을 수 있는 약도 시도해 볼 수 있는 수술도 없었다.

아내는 울지 않았다. 대신 작은 목소리로 눈물이 날 정도로 매운 음식이 먹고 싶다고 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병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분식점에서 떡볶이를 먹었다. 아내는 손부채질을 하며 몇 잔의 물을 들이켠 후 맑은 얼굴로 앞서 걸어갔다. 목덜미가 다 자라지 않은 계집아이처럼 푸르스름했다.

집으로 돌아온 아내는 가끔 밥을 먹다가도 스르르, 텔레비전을 보다가도 스르르, 앞이나 옆으로 꼬꾸라졌다. 그러고는 기조 씨, 기조 씨, 하며 내 이름을 불렀다. 그때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매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것은 목소리에 담긴 어떤 기운 때문일 것이다. 아내의 목소리는 어쩐지 청량한 바람이 묻어나는 민트사탕 같다. 그 담박한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바닥을 향해 아주 가볍게 내딛는 발걸음이 떠올랐다.

"나, 탭댄스를 배울까 해."

아내는 바파르의 털을 손으로 쓸어주며 말했다. 이어 작은 새처럼 여린 숨을 내쉬었다. 다가가 아내의 이마를 짚었다. 손바닥에 축축하고 뜨거운 온기가 느껴졌다. 그 뜨거운 기운이 살아있음을, 그리고 앞으로도 살아가고 싶다는 아내의 열망을 대신 말해주는 것 같았다.

"탭댄스? 이런 거?"

나는 일어나서 바닥에 발을 구르며 과장된 몸짓을 섞어 탭댄스를 흉내 냈다. 누가 보아도 민망한 마음에 고개를 돌렸을 것이다.

"하지 마. 바보 같아."

그렇게 말하면서도 아내의 눈에는 웃음이 묻어 있었다.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야옹.

바파르가 길게 하품을 하며 소리를 냈다. 아내와 나는 들었느냐는 말을 동시에 물으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집에 데려와서 바파르가 처음으로 고양이다운 소리를 낸 것이다. 그 옆에 있던 도트는 눈알을 굴리며 마루를 돌아다녔다. 팔이 기역자로 꺾인 모양으로 붙어 있어서 온몸을 좌우로 틀면서 걸었다. 도토리를 찾고 있는 모양이었다. 뒤로 걸으면서도 녀석은 한 직선으로만 움직였다. 아내는 자신을 위협하는 모든 것들을 눈으로 보기 위한 거라고 말했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어떤 기형적인 요인으로 생긴 버릇이 아닐까 싶었다. 보통의 그린이구아나는 상추나 당근 등의 채소를 먹는다지만 도트의 식성은 달랐다. 이름값을 하려는지 오직 도토리에만 입을 댔고 몸집에 비해 먹어도 너무 많이 먹었다. 과일조각과 채소를 그릇에 담아 내밀었지만 쳐다보지도 않았다. 혹시나 싶어 사료를 사다 주어도 마찬가지였다. 녀석은 껍질을 벗긴 도토리를 조금씩 깨물며 대부분의 시간을 먹는 데 소비했다.

도트가 오고 나서 아내와 나는 도토리를 줍기 위해 집 뒤의 산을 올랐다. 가을이 깊지 않아 떨어진 것은 많지 않았다. 그것만으로 먹는 양을 감당할 수는 없었다. 결국 오 일마다 열린다는 시골 장에 가 도토리를 사왔다. 오는 길에 동물병원에 들렀다. 수의사는 설명을 다 듣고 난 후에도 눈만 껌뻑거리더니, 겨우 '글쎄요,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아직까지 별문제가 없는 것으로 보아 앞으로도 괜찮지 않을까요?', 라며 오히려 우리에게 물었다. 아내와 나는 내처 도트의 원래 주인에게 가 계속 이렇게 도토리를 먹고 뒤로 걸으며 살아가도 되는 거냐고 물었다. 그는 도트 어미도 그렇다며 사람 좋은 웃음을 지었다. 그것은 독특한 체질로 태어난 도트와 그의 어미가 살아가는 방식이며 자신들 앞에 펼쳐진 특이한 삶을 향한 일종의 적응이라고도 했다. 그래서 도트에게 수식어가 하나 붙었다. 오직 도트.

빨간색과 파란색이 나선형으로 돌아가는 조명은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기껏 구불구불한 골목길 끝의 이발관을 찾아가도 실상은 마사지 영업을 하는 곳이 많았다. 한적한 전원에 묻혀 사는 작가를 만나고 돌아가는 길에 아내의 말이 생각나 이발관을 찾아 나섰다. 서툰 페인트 글씨로 상호가 적힌 슈퍼가 보였다. 나는 생수를 사며 이발관이 있는지를 물었다. 따분한 표정의 슈퍼주인은 파리채를 휘두르며 턱짓으로 가는 길을 가리켰다. 나는 슈퍼를 나와 주변을 둘러보았다. 집마다 하얀색 페인트가 발린 벽면에 푸른 잎이 달린 나무와 함지박만 한 꽃들이 그려져 있었다. 높지 않은 건물들이 고만고만해서 옛날 사진 속에나 나올 법한 풍경 같았다.

이발관 유리창은 커다랗고 깨끗했다.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말끔한 유리창 안에 내가 서 있었다. 내 오른쪽 어깨가 심하게 기울어져 있었다. 가방을 다른 쪽으로 매봤지만 여전히 어깨는 기울었다. 그런 사실을 알고 나니 무거운 등짐을 진 것처럼 갑자기 어깨가 뻐근했다.

외관과는 달리 이발관 안은 허름하고 지저분했고 오래된 먼지 냄새 때문에 콧속이 간지러웠다. 인기척을 해봤지만 주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발관에서 흔하게 보았던 수영복을 입은 여자들의 사진은 없었다. 대신 그림 하나가 벽에 붙어 있었다. 액자 속의 그림은 어떤 화석을 그려놓은 것 같았다. 전체적으로는 물고기처럼 생겼지만 몸에 기역자로 꺾인 사지가 달린 동물이었다. 생생하게 그려진 모양새 때문에 금방이라도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꼬리지느러미 뒤로 펼쳐진 갯벌이 밤하늘의 달빛에 푸르스름한 빛을 띠고 있었다.

"아칸소스테가라우."

어디서 나타났는지 추레한 노인이 옆에 서 있었다.

"아, 네."

노인의 말을 건성으로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화석 속의 주인공은 인간의 선조라네. 우리들이 원래 아란다스피스라는 물고기였다는 걸 알고 있나?"

"물고기요?"

"자네가 익히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먼 시원을 말하는 거야. 사지가 달린 물고기 이전에는 아주 작은 미생물이었다지."

나는 노인의 말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또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은 나를 흘끔 보더니 다시 그림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말을 이었다.

"바다 밑에서 커다란 고기에게 잡아먹히며 약자로 살다가 어느 날 육지로 나오게 되었다네. 그리곤 물고기로서의 진화가 아니라 습지에서 살아가기 위해 몸을 변화시켰지. 바다에서 살지 못했으니 누군가는 퇴화라고 할 테지만, 물고기로서 진화하지 못했다고 다 퇴화라고 말할 수는 없잖은가. 새로운 세계를 맞닥뜨리고 끊임없는 고난에 부딪히면서 녀석은 자신만의 적응을 모색했을 거야. 살아남을 수 있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바람이 불고 때로는 폭풍이 몰아쳐도 말이야. 그건 또 다른 진화가 아닐까?"

노인은 자신의 무용담을 이야기하듯 눈을 지그시 떴다. 허무맹랑한 말을 늘어놓는 괴짜처럼 보였다.

"녀석이 바다 밖으로 나와 육지에 적응하지 못했다면 이렇게 자네와 내가 서 있는 일도 가능할 수 없었을 걸세. 지구상의 모든 포유류의 선조였으니까."

나는 노인에게서 시선을 떼어 그림을 바라보았다. 바다 속의 평범한 물고기에서 육지로 나와 기역자로 꺾인 사지를 좌우로 움직이면서 걷는 저 그림 속의 도마뱀 같은 물고기로, 그리고 다시 인간을 포함한 지구상의 모든 포유류로 변해 가는 영상이 펼쳐졌다. 아무래도 믿기지 않는 장면이었지만, 노인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굳이 따져 물을 일은 아니지 싶었다.

"이 그림 사실라우? 이게 습곡에서 발견된 화석을 재현해놓은 거야. 진짜 화석은 아니지만 그림이 너무 생생해서 더 진짜처럼 보인단 말이지. 녀석을 봐, 멋지잖아?"

노인이 새끼손가락으로 코를 후벼 파더니 거뭇한 코털을 뽑아 허공에 대고 후후 불었다. 나도 모르게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게 아니라 저는……."

"안 사려면 말고."

노인은 옷의 먼지를 툭툭 털며 웃었다. 입술 사이로 드러난 누런 치아는 듬성듬성하고 오랫동안 빨지 않았는지 하얀 가운 여기저기에 얼룩이 묻어 있었다. 나는 그림 앞에서 물러서며 수동식 이발기가 있는지 물었다. 노인이 헤벌쭉해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이 내 앞에 꺼내놓은 것은 이발기뿐만이 아니었다. 날이 무딘 가위와 숱이 무성한 거품 솔, 손잡이가 달린 면도칼과 구식 라디오, 그리고 십 년도 더 지난 것 같은 잡지, 나팔꽃처럼 생긴 커다란 관이 달린 축음기 등 모두 오래되고 별로 실용적이지 않은 것들이었다. 그 어느 것에도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한쪽에 세워진 서랍장 안에서 물건들은 계속 쏟아져 나왔다. 그중에는 알록달록한 단추들과 실패 뭉치도 있었다. 손때가 묻은 작은 주전자와 작동이 될까 싶은 전기 포트와 다리미도 나왔다. 가장자리가 깨진 접시와 컵을 탁자 위에 올려놓으면서 노인은 내내 벙글거렸다. 나는 그런 노인이 이발사가 아니라 '기이하고 특별한'이라는 이름이 붙은 서커스단의 마술사가 아닐까 생각했다. 정말 노인에게는 기이한 구석이 있었고 어쩐지 나와는 다른 세계와 시간을 살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함께하는 시간이 흐를수록 그런 기이함이 특별하게 여겨졌다. 설령 그것이 오래된 물건들이 뿜어내는 기운 때문이라고 해도 별 상관없는 일이었다.

"이런 걸 사가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나는 노인의 성의를 생각해 거품 솔을 집어들며 물었다. 그가 나를 향해 다시 벙긋 웃었다. 물건들을 팔기 위해 억지로 지어 보이는 웃음 같진 않고 원래 천진하게 잘 웃는 사람 같았다.

"사가는 사람들이 있긴 하지. 가끔이긴 하지만. 자네가 이발기를 사러오는 것처럼 말이야. 요샌 통 손님이 없어. 남자들도 미용실에서 머리를 깎는 이상한 시대니까."

노인은 내 반응이 시원치 않다고 생각했는지 이번에는 이발 의자를 가리켰다.

"그럼 이걸 사시든지. 이게 한 오십 년 됐나?"

여기저기 거죽이 뜯겨져 나가고 없어 오십 년이 아니라 한 백 년은 더 지난 것 같았다. 누군가가 앉는다면 그대로 폭삭 주저앉을 것처럼 낡은 의자는 위태로웠다.

"이 의자를요?"

"이거 좋아. 한번 앉아 봐. 얼마나 편안한지 잠이 그냥 와버려."

나는 멋쩍게 웃으며 수동식 이발기만을 가방에 넣었다.

"저 그림은 안 사가고? 저것도 오천 원인데."

나는 노인의 손끝을 따라 그림을 바라보았다. 이내 노인에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사가든지 안 사가든지 상관은 없어. 하지만 언제든지 이것들이 필요하면 찾아오라고. 내가 살아있는 한 여길 떠나진 않을 테니까. 지금은 보이지 않던 것들이 언젠가는 눈에 들어올 날이 오기도 하거든. 살아 있다면 말이야."

이발관을 나서는 내 등 뒤에서 노인이 껄껄 웃었다. 나는 몇 번 뒤를 돌아보았다. 이발관의 유리창으로 햇살이 포자처럼 부서져 내렸다. 몇 걸음을 지나지 않았지만 어느새 이발관이 저 멀리 물러나 있었다.

아내는 내가 사온 수동식 이발기를 신기한 눈으로 들여다보았다. 나는 이발관에서 보았던 아칸소스테가 얘기를 하려다 그만 두었다. 마루에 거울을 놓고 가위를 가져와 앉더니 아내는 자꾸 혼자서 자르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아내는 가위로 망설임 없이 머리카락을 귀밑까지 바짝 잘랐다. 얼굴에 붙은 머리카락을 푸푸, 불던 아내가 내가 사온 이발기를 내밀었다. 나는 그것을 받아들고 아내의 목덜미를 깎기 시작했다. 머리카락이 잘려나갈 때마다 낡은 스프링이 시계 초침처럼 째깍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 사이로 아내에게 선물해준 유년의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단발머리의 아내는 시골의 촌스러운 계집아이처럼 보였다. 아내가 거울에 비친 자신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살짝 웃었다. 나는 아내가 웃을 때마다, 그녀의 생명이 조금씩 길어지는 것 같아 마음이 들뜨곤 했지만 어떻게 하면 아내를 웃길 수 있을까, 연구하지는 않았다. 아내가 내게 바라는 것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내의 희귀병 진단을 받고 나서 우리는 겨우 며칠만 여행을 다녀왔다. 여행 중에도 아내가 움직이는 반경은 작고 조심스러웠다. 조수석에 앉아 노래를 흥얼거리거나 차창 밖으로 손을 내밀어 바람을 움켜쥐었다. 어느 땐 수천만 개의 입자로 쏟아져 내리는 햇빛을 받으며 꾸벅꾸벅 졸기도 했다. 사실 아예 모든 걸 정리하고 남은 시간을 아내와 여행하며 보내고 싶었다. 그 시간이 일 년이든, 십 년이든 상관없었다. 나는 승합차를 사서 개조한 다음 전국을 돌아다니자고 제안했다. 아내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선배 둘과 함께 소규모로 운영해오던 출판사를 접겠다고 했다. 최근에 출판된 책의 반응이 좋아 형편은 나아지고 있었지만 마음이 가질 않았다. 아내는 그것마저 만류했다.

'변하는 건 없어. 그냥 다가오는 하루하루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게 가장 좋은 선택이야.'

자신의 말처럼 아내는 어떤 변화도 원하지 않았다. 조바심을 내고 안절부절 못하는 것은 오히려 내 쪽이었다. 어이없게도 뭔가 극적인 상황을 바랐던 것인지도 몰랐다. 아내는 드라마나 영화의 주인공처럼 첫사랑을 찾지도 않았다. 특별히 찾고 싶은 사람도 없다 했다. 아련한 추억이나 죄책감을 가질만한 상대가 없는 아내의 지나온 삶은 튀어나온 곳 없이 담백하고 평평했다.

한 달이 지났지만 아내의 말대로 변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예전보다 집에 있는 날이 더 많아졌지만, 나는 여전히 며칠에 한 번씩 출판사에 나가고 작가를 만나고 편집 회의를 했다. 그러면서도 수없이 집으로 전화를 걸어 아내의 안부를 물었다. 아내가 전화를 받지 않으면 들고 있던 서류나 책을 그대로 집어던지고 숨 가쁘게 집으로 달려왔다. 그러면 아내는 오르내리는 내 등을 무심한 얼굴로 다독였다.

우리에게 유일한 변화가 있었다면 살던 집을 그대로 둔 채 이곳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우연히 여행 중에 들른 곳이 아내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나도 다르지 않아 며칠 전에 대충 짐을 싸 이사를 했다. 다리가 있어 완전히 고립된 섬도 아니고, 살던 집과도 멀지 않고 푸른 바다를 볼 수도 있는 곳이 바로 이 섬이었다.

새로 마련한 집의 마당에는 웃자란 풀이 무성했고 소금기가 밴 바람은 부드러웠다. 마루의 묵은 때가 대단해서 열 번이 넘는 걸레질을 해야 했다. 아내는 내가 하는 일들을 마루에 앉아 바라보며 음악을 들었고, 나는 온종일 풀을 베고 마당을 쓸고 거미줄을 걷었다. 하루라는 시간은 생각보다 빨리 지나갔다.

아내가 단발머리를 나풀거리며 안방 문을 닫더니 한참이 지나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앞에 서서 문을 열려다 말고 잠시 머뭇거렸다. 안에서는 서툴지만 제법 힘이 실린 소리가 들렸다. 나는 주춤하게 물러서서 탭댄스를 추는 아내가 내는 소리를 들었다. 투닥 틱, 투닥 틱, 톡, 톡, 톡, 아내가 바닥에 발을 굴렀다. 나는 아내의 춤추는 모습을 보고 싶었지만 그만두기로 했다. 검은 가죽 신발을 신은 아내의 작은 발이 내는 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지난밤 노트북으로 교습 동영상을 반복해서 보더니 어느 정도 스텝을 익힌 모양이었다. 단발머리의 아내가 허공으로 튀어 오르는 상상을 하니 쿡쿡, 웃음이 나왔다.

마루 한쪽에 있는 바파르와 도트의 집 앞으로 슬쩍 다가갔다. 녀석들은 철망 안의 아내가 만들어준 이불 위에서 몸을 꼭 맞댄 채로 잠들어 있었다. 바파르와 도트를 데려온 날, 아내는 마루에 앉아 천 조각들과 솜뭉치를 들고 온종일 손을 놀렸다. 간간이 지나가는 맑은 바람이 아내의 긴 머리카락을 조용하게 흔들었다. 좌식 책상에 앉아 원고를 읽던 나는 허리를 꺾으며 기지개를 켰다. 그때 아내가 짜안, 하고 내 앞으로 이불을 내밀었다. 빨간 꽃잎이 박힌 핑크색 이불은 방석만 했고 포근포근하게 부풀어 있었다. 밖으로 삐져나온 하얀 실밥 자국을 내가 자세히 들여다보자, 아내는 딴청을 피우며 손바닥으로 이불을 가렸다.

바파르가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나도 바짝 다가가 녀석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고양이 속눈썹이 원래 저렇게 길었는지를 잠깐 생각했다. 바파르가 작은 눈을 끔벅거렸다. 오직 도트는 바파르 옆에서 눈알을 굴려 사방을 살폈다. 도트가 기역자로 꺾인 팔로 걸음을 옮길 때마다 이발관에서 보았던 아칸소스테가라는 그림이 생각났다. 육지로 올라와 자신만의 방식을 터득했다는 그것도 도트처럼 저렇게 좌우로 몸을 틀며 걸었을 것이다.

잠이 쏟아져 내리는지 바파르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콧방귀 섞인 한숨을 뱉었다. 작은 물방울 하나가 내 콧잔등으로 튀었다. 도트가 바파르의 품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녀석들이 서로 꼭 껴안거나 등을 맞대고 자는 걸 보면 특이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들은 어울릴 수 없는 종족인데도 늘 철망 안에 함께 있었다. 바파르가 도트의 철망 안으로 먼저 들어가긴 했지만, 도트도 그런 바파르를 밀어내지 않았다. 나는 마루 끝으로 와 바다를 바라보았다. 멀리 배 한 척이 수면에 포말을 일으키며 지나갔다.

투닥 틱, 투닥 틱, 톡, 톡, 톡. 물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사위가 온통 하얀빛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톡톡톡, 소리는 경쾌했다. 백 브러시, 힐, 토, 스탬프, 셔플. 나는 아내의 목소리와 함께 그녀가 가르쳐준 대로 반복해서 턴을 했다.

눈을 떠보니 안방의 천장이 보였다. 발목이 뻐근했다.

투닥 틱, 투닥 틱, 톡, 톡, 톡. 투닥 틱, 투닥 틱, 톡, 톡, 톡.

이른 아침부터 아내가 마루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꿈속에서 물방울 소리라고 생각했던 건 아내가 발을 구르는 소리였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마루로 나왔다. 아내가 발그레한 얼굴로 자신의 작은 발을 내려다보았다. 슈즈 앞에 붙은 은색 징이 반짝거렸다.

"바파르가 물구나무서기를 해. 그러면 밥을 많이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봐."

갑작스러운 아내의 말에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내는 바닥에 앉아 슈즈를 벗은 후에 바파르를 불렀다. 녀석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내는 바파르를 안고 와 벽에 뒷발을 올려주었다. 바파르는 뒷발을 벽에 붙이고 물구나무를 선 것 같은 포즈를 취했다. 잔뜩 귀찮은 표정이었다.

"잘했어. 다큐 바파르."

아내는 며칠 전 바파르에게도 수식어를 붙여주었다. 바파르는 그릇에 밥을 담아주면 절대 먹지 않다가도 바닥에 흩트려주면 게걸스럽게 달려들었다. 모습이 어찌나 처절한지 아내말대로 생존을 향한 야생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같았다. 그런 녀석이 물구나무를 섰다. 아내는 바파르를 안아 자신의 볼에 비볐다.

"춤은 다 배운 거야?"

나는 아내에게 물었다.

"이제 교본은 그만 보기로 했어. 기본 스텝을 다 배우진 않더라도 탭댄스를 출 수는 있거든. 나만의 방식으로."

아내가 웃으며 말했다. 입술이 푸른빛이었다. 나는 아내의 푸른빛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내는 저러다가도 아주 가끔 얼굴에 핏기가 없어지며 옆으로 쓰러졌다. 그러고는 매번 기조 씨, 기조 씨, 하고 내 이름을 불렀다. 다행히 근래에 아내가 쓰러지거나 내 이름을 두 번 부르는 일은 없었다.

"우리 산책 가자."

이마에 땀방울이 맺힌 아내가 말했다.

"괜찮을까?"

"괜찮지 않을 게 뭐 있어."

아내의 문제는 그것이 무엇이든 너무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는 점이었다. 심지어는 자신에게 다가온 병도 그렇게 여기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내는 오히려 평온한 얼굴빛이었다. 나는 도통 아내의 마음을 읽어낼 수 없었다.

아내가 긴 플레어스커트에 분홍색 카디건을 걸쳤다. 나는 청바지 차림에 슬리퍼를 신으려다 아내가 눈을 흘기는 바람에 운동화로 갈아 신었다.

"당신 이름, 자꾸 부르다 보면 기적 씨, 기적 씨 하는 거 같아."

아내는 들뜬 기색이 역력했다. 처음 만났을 때 아내는 자신이 행복한 사람도 불행한 사람도 아니라고 했다. 그래서 밥을 먹는 건지, 숨을 쉬고 있는 건지, 제대로 살아가고 있는 건지 잘 느껴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동안 아내는 기적이 아닌, 기조의 나를 만나 그런 것들을 느끼며 살아왔을까.

하늘과 맞닿은 바다가 푸르게 파닥거렸다. 교각 옆에 천막이 들어서 있었다. 서커스 단체였다. 아내와 나는 만국기가 길게 걸린 진입로를 걸었다. 오전인데도 천막 안에는 수십 개의 조명이 켜져 있었다. 트럼펫과 북소리가 정신없이 귓속을 파고들어 이상한 나라의 이상한 축제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아내가 내 팔에 매달리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기조 씨, 기조 씨."

갑자기 아내가 가슴을 움켜쥐고 앞으로 꼬꾸라졌다. 한동안 듣지 못했던, 아내가 내 이름을 부르는 순간이 꼭 이렇게, 이런 모습으로 찾아와야 하나 싶었다. 나는 가볍고 둥근 아내를 싸안았다. 서커스의 시끄러운 음악소리가 한순간에 작아졌다.

아내는 내 등에 업혀 팔을 늘어뜨리고 노래를 불렀다. 나는 아내를 업고도 가뿐한 걸음을 걸을 수 있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 자꾸 아내를 추어올렸다. 노래를 부르던 아내가 헉, 하고 딸꾹질 같은 소리를 냈다. 나는 아내가 부르는 노래의 제목을 물어보려다가 그만두었다.

"무슨 노래든 당신이 부르고 싶으면 부르는 거야. 당신만의 방식으로."

나는 다시 아내를 추어올리며 말했다.

"관사에 살 때 아빠가 에디슨인가, 하는 상표를 모방한 축음기를 하나 구해오셨어. 꼭 정전이 되면 촛불을 켜놓고 축음기 손잡이를 한참 동안 돌려서 음악을 틀었거든. 귀하거나 비싼 건 아니었지만 우리에겐 충분히 낭만적일 노래들과 밤 풍경을 선물해주었어. 당신, 축음기 소리 들어 봤어?"

아내가 물었다. 나는 대답 없이 고개를 저었다. 햇살에 바다의 수면이 반짝거려 눈이 부셨다.

"한 번도?"

아내가 다시 물었다.

"어, 한 번도. 참, 그 이발관에서 축음기 봤는데. 우리 내일 사러 갈래?"

"좋아."

아내가 대답했다. 나는 다시 한 번 아내 삶의 일부분인 유년을 선물해주고 싶었다. 잠시 멈춰 서서 아내를 추어올렸다. 아내가 헉, 딸꾹질하는 소리를 냈다.

오전 내내 비가 이어졌다. 가늘게 내리던 비는 오후가 되어서야 잦아들었다. 창문을 열자 제 빛을 찾은 풍경이 한층 선명하고 가까워져 있었다. 감기에 걸린 아내는 밤새 고열에 시달렸다. 편도선이 부었는지 아내의 날숨에 휘파람소리가 묻어났다.

"벽에 기대고 싶어."

아내를 반쯤 일으켜 벽에 기대게 해주었다. 아내가 자신의 머리맡에 놓여 있던 화분을 끌어당기자 만개한 붉은 꽃잎이 잠시 흔들렸다. 아내가 손으로 꽃잎을 쓰다듬었다. 허여멀건 아내의 손가락 때문에 꽃잎이 더 붉게 도드라졌다.

"당신 혼자서 다녀오는 게 좋겠어."

아내가 말했다.

"거긴 언제라도 갈 수 있어. 꼭 오늘이 아니어도."

"아냐, 오늘 다녀오는 게 좋겠어. 정말 그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왜?"

아내는 내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힘없이 웃었다. 서른 살 아내의 입가에 주름이 깊게 파였다. 머리카락이 이마로 자꾸 흘러내려 나는 몇 번이고 반복해 쓸어 넘겼다. 힘이 들어간 손가락 사이로 몇 가닥의 머리카락이 뽑혔다.

"부탁이야. 축음기를 사와서 음악을 들려줘."

아내는 힘들게 침을 삼킨 후 말을 이었다.

나는 오직 도트와 다큐 바파르를 안고 방으로 들어왔다. 품에 안긴 도트와 바파르가 빠져나가려고 발버둥을 쳤다. 도트의 초록빛 몸이 스스륵, 손아귀를 벗어나는가 싶더니 방바닥으로 떨어졌다. 녀석이 몸을 좌우로 틀며 맹렬하게 뒷걸음질 쳤다. 발톱이 바닥에 닿으며 아주 작게 타다닥 소리를 냈다.

"넌 언제쯤 제대로 된 이구아나로 진화를 할 거냐? 뒤로 걷고, 도토리만 먹는 게 정상이냐?"

나는 도트를 잡아 머리통을 살짝 한 대 때렸다. 그러자 더 심하게 몸을 뒤틀었다.

"그게 녀석이 택한 방식일 수도 있어."

"어?"

나는 아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꼭 변해야 하는 건 아니니까. 그냥 그 모습 그대로 살아가면 되지 않을까?"

나는 도트를 내려다보았다. 도트는 발톱으로 내 팔을 움켜쥐고 있었다. 다른 팔에 안겨 있던 바파르가 하품을 하며 도트에게 얼굴을 비볐다. 나는 아내에게 도트와 바파르를 건넸다. 두 녀석을 가슴에 안은 아내가 나를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아내와 도트와 바파르를 뒤로 하고 마루로 나와 구두를 신었다. 손끝이 바르르 떨렸다. 어쩌면 온몸이 떨리는 것 같기도 했다.

이상하게 걸음을 옮길 때마다 시멘트 바닥에 닿은 신발에서 톡, 톡, 톡, 소리가 났다. 나 자신도 모르게 리듬에 맞춰 걸음을 떼었다.

한 번 와봤던 곳인데도 이발관이 있던 동네로 가는 길은 미로처럼 구불구불하고 아득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나는 같은 곳을 반복해서 돌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잠시 멈춰 심호흡을 한 후 기억을 짚어나가듯 천천히 차를 움직였다.

생수를 샀던 슈퍼마켓이 보였다. 나는 차를 세워놓고 슈퍼 앞으로 다가갔다. 문은 단단히 잠겨 있었고 문고리에 걸린 자물쇠는 녹이 슬어 누런빛을 띠고 있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지나가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슈퍼 앞에 자동차를 두고 이발관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기억 속의 풍경이 하나 둘 눈앞으로 다가왔다. 낮은 건물들, 벽면에 그려진 푸른 잎이 달린 나무와 함지박만 한 꽃들은 여전했다.

이발관에 다다라 출입문을 열어보았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는 마름모 모양으로 손차양을 만들어 유리창을 들여다보았다. 이발관 안은 이미 폐허가 되어 있었다. 바닥에 뒹구는 물건들 사이로 전기 포트와 그릇들, 낡은 이발 의자 같은 것들이 섞여 있었다. 벽에 붙은 화석 그림, 아칸소스테가. 녀석을 두고 노인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나는 돌멩이로 유리창을 깬 후, 안으로 들어가 축음기를 찾았다. 관이 부러진 축음기는 예전에 보았던 모습이 아니었다. 관을 대충 이어 붙이고 손잡이를 돌려보았지만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손을 털며 바닥에서 일어서는데 물고기 같기도 하고 도마뱀 같기도 한 생물이 그림 속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축축하게 젖은 눈이 먼 곳을 향해 있는 그것의 몸을 쓸어내렸다. 손바닥에 온기가 느껴졌다.

나는 화석 그림을 떼어내 출입문을 향해 걸어갔다. 발밑에서 물건들이 바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집에서 너무 늦게 나온 탓인지 밖은 벌써 어둠이 깔려 있었다.

검은 하늘에 돋아난 달이 푸르스름한 빛을 냈다.

'기조 씨, 기조 씨, 미안해.'

아내의 목소리가 푸른 달빛을 타고 허공으로 흩어졌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둠이 내린 길 위에에는 오직 푸른 달과 아칸소스테가 그림과 내가 있을 뿐이었다. 부드러운 바람이 코끝을 스쳤다.

아내는 지금 무얼 하고 있을까. 스르르, 가슴을 움켜쥐고 옆으로 꼬꾸라지는 아내의 모습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아내는 죽었다. 아니다. 아내는 죽었다. 아니다. 아내는 탭댄스를 추고 있을 것이다. 지금 아내는 어떤 모습으로 춤을 추고 있는 것일까. 나는 그림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바닥에 발을 굴렀다. 아마 이렇게 추고 있지 않을까. 나는 아내의 춤을 떠올렸다. 투닥 틱, 투닥 틱, 톡, 톡, 톡, 내 발바닥에서 경쾌한 소리가 울렸다.

그때였다. 바닥에 내려놓은 그림 속에서 입체그림처럼 아칸소스테가의 몸뚱이가 쑤욱, 일어섰다. 녀석은 나를 바라보며 새까만 눈을 굴렸다. 기역자로 꺾인 사지가 그림에서 떨어질 때마다 쩍, 하는 소리가 났다. 목을 이리저리 움직이던 아칸소스테가는 바닥에 닿은 여덟 개의 손가락으로 타다닥 소리를 냈다. 지구상의 모든 포유류의 선조였다는 그가 좌우로 몸을 틀며 걷기 시작했다.

그리 빠른 걸음도 느린 걸음도 아닌, 자신만의 적당한 보폭으로 걷는 녀석을 따라 나도 몸을 움직였다. 이렇게 끝이 어디인지를 알 수 없는 길은 계속될 것이다. 아내가 변함없는 모습으로 자신을 받아들여 덤덤하게 살아가는 방식을 택한 것처럼, 도트와 바파르도 퇴행적 진화라는 또 다른 진화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몰랐다.

나는 이제 나를 감싸고 있는 것들과 해와 달과 함께 기울어가는 시간을 바라보며 멈추지 않고 걸어갈 것이다. 푸른 달빛 아래서 투닥 틱, 투닥 틱, 톡, 톡, 톡, 아내가 가르쳐준 대로 스텝을 밟았다.

'꼭 변해야 하는 건 아니니까. 자, 백 브러시, 힐, 토, 스탬프, 셔플.'

아내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부드러운 바람으로 살랑거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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