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음악 감상실 ♣/- 용어 해설

후기 낭만파 음악

Bawoo 2014. 9. 2. 21:18

후기 낭만파 음악

<19세기 후반 ~ 20세기 초>

 

 

낭만파의 최후는 어떠했을까? 음악사가 무 자르듯 뚝하고 맞아 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대략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의 음악 사조를 후기 낭만주의 혹은 신낭만주의 음악(neo-romanticism music)이라고 부른다. ‘후기 낭만주의’란 용어는 만들어진 지 그리 오래된 용어는 아니다. 1850년 이후 쇠퇴해가는 후반기의 낭만주의를 기술하기 위해 생겨난 표현이다. 낭만주의는 19세기 중반까지 그 절정의 꽃을 피운다. 주관적인 표현과 구조적인 조화로움으로 대표되는 낭만파 음악의 성격은 여러 작곡가들에 의해 충분히 내면화되고 응용되었다.

 

19세기 마지막 30년 동안 유럽 사회는 평화롭고 안정된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다가 20세기 초 사회적 불안과 국제적인 긴장이 고조되면서 결국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말았다. 세기 말의 불안한 정서는 급경사를 타고 있는 롤러코스터와 같았다. 낭만파 후기의 음악도 이를 반영하며 급진적인 실험을 시작했다. 기존 형식을 확장해 짧았던 것을 길게 늘리고, 악기 편성을 달리하며 새로운 음향을 만들어냈다. 기악 부분에 성악을 집어 넣어 혼합된 형식을 실험하기도 했다. 고전파 시대와 낭만파 초기와는 달리 조성의 개념도 확연히 달라졌다. 한 마디로 기존의 전통과 급격히 단절해가며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세기말의 거대화된 실험 – 말러와 R.슈트라우스

 

이러한 후기 낭만파의 흐름을 궁극적으로 선도한 작곡가는 독일의 리하르트 바그너였다. 그의 악극은 강렬한 감정 표현, 공들인 구조적 통일성, 타장르까지 포괄하는 광활한 예술 영역, 혁신적 오케스트레이션으로 정의되었다. 바그너가 정의한 ‘총체 예술 Gesamskunstwerk’은 바그너의 예술적 이상을 구체화한 결과물이었다. 이후 바그너의 큰 스케일과 음악적 이상은 후기 낭만파 작곡가들에게 영향을 미쳤고, 이 시기의 거대한 교향곡과 교향시 장르 탄생의 원동력이 되었다. 거대한 교향곡 여러 편을 남긴 구스타프 말러(1860~1911) 역시 그 대표적인 작곡가들 중의 하나이다.

 

 

<말러 [교향곡 8번]의 무대 연주 장면.

거대한 스케일의 정점을 이룬 작품으로 거의 1000명에 가까운

 연주자가 동원된다>

 

말러의 교향곡 한 악장은 기존의 교향곡 전체 길이인 30분을 훨씬 넘어서는 것도 많다. 그 중에서도 [교향곡 8번] ‘천인 교향곡’은 형식적으로나 내용적으로 우주적 스케일의 극치를 이룬 작품이다. 지휘자로서 오랜 세월 현장에서 쌓은 경험은 말러 교향곡의 피와 살이 되었다. 말러는 악기의 조합과 오케스트라 각 파트의 교대 방식에도 변화를 주었다.

 

 

쉽게 말해 축음기가 대중화되기 이전의 그 시대에 이미 ‘스테레오 사운드’의 묘미를 추구했고, 카우벨과 만돌린 등 당시 오케스트라에서 볼 수 없는 악기를 채택해 다양한 음색을 표현했다. 악보에는 강약에서부터 빠르기까지 꼼꼼하고 섬세한 지시를 빽빽히 채워 넣었다. 스케일뿐만 아니라 교향곡과 성악을 결합하여 새로운 양식의 길을 열기도 했다. 내용면으로는 가장 숭고하고 고매하면서도 가장 통속적이고 관능적인 이율배반적 성격이 깃들어 있었다.

 

19세기 중반까지 음악가들의 절대적 숭배 대상은 베토벤이었다. 바그너도 브람스도 베토벤의 음악에 경의를 표했다. 그런데 베토벤 교향곡의 숫자와 관련된 유명한 징크스가 있다. [9번 교향곡] ‘합창’ 까지 9개의 교향곡을 남기고 떠난 베토벤처럼, 후대의 작곡가들도 교향곡 ‘9번’을 넘기지 못하는 징크스가 그것이다.

 

브루크너는 교향곡 00번과 0번까지 합하면 11개의 교향곡을 남겼지만 그 역시 9번까지만 쓰고 세상을 등졌다. 구스타프 말러 역시 자신의 아홉 번째 교향곡에 ‘9’라는 번호를 붙이는 대신 ‘대지의 노래’라는 타이틀을 달았다. 말러는 왜 ‘9’라는 징크스를 염두에 두었을까? [대지의 노래]를 작곡하기 한 해 전인 1907년, 사랑하는 딸 마리아 안나의 사망으로 슬픔에 잠긴 말러는 의사로부터 심장병 선고를 받는다. 나아질 가능성도 별로 없었다.

 

빈 국립오페라 측으로부터는 총감독직 사임을 강요 받았다. 당시 빈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 하에 있었고 유럽 중에서도 가장 완고한 보수적 정서가 팽배해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유태인이었던 말러가 빈 국립오페라 음악감독까지 오르게 된 것은 획기적인 일이었다. 오케스트라에는 완벽주의적 지휘자로, 청중에게는 엄격한 음악가의 태도를 견지한 말러에게 여러 불만이 쌓이기 시작했다.

 

빈 언론에서도 그가 유태인이라는 점을 물고 늘어지며 공격했다. 결국 말러는 사임했다. 죽음, 불행, 정체성의 문제가 말러에게 ‘9’ 교향곡에 대한 불안을 불러왔을지도 모른다. 평소엔 지휘를 하느라 주로 여름 휴가 기간에만 작곡에 전념했던 말러는 [대지의 노래] 초연을 볼 수 없었고, 1910년에는 [교향곡 10번]을 작곡하기 시작했지만 결국엔 미완성으로 그치고 말았다.

 

 

<말러의 거대한 음악과 새로운 악기, 지휘하는 모습을 풍자한 캐리커처>

말러와 마찬가지로 빈에서 활약한 지휘자 겸 작곡가가 있었으니 뮌헨 출신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1864~1949)이다. 슈트라우스는 빈 국립오페라 외에도 뮌헨, 바이마르, 베를린 등 독일의 많은 도시에서 지휘자로 활약했다. 말러와 마찬가지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관현악법 역시 현란하고 호화롭기 이를 데 없다. 슈트라우스의 교향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영화 [스페이스 오디세이]에 등장해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흥미롭게도 이 영화의 우주 여행 장면에 등장하는 왈츠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을 작곡한 사람은 또 다른 슈트라우스인 요한 슈트라우스 2세다. 슈트라우스 가문은 세기 말, 빈 왈츠의 전성시대를 리드했다. 서로 다른 스타일의 슈트라우스들이 세기 말의 음악을 리드하고 있었던 셈이다.

 

1900년 이후 R.슈트라우스는 오페라 작곡에 힘을 기울였는데 다양한 분위기와 스타일의 천재적인 재능을 선보였다. 오스카 와일드의 희곡을 번역한 [살로메]는 관능적인 ‘일곱 베일의 춤’과 세례요한의 목이 나오는 장면 등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음악으로 잘 묘사한 반면 [장미의 기사]에서는 18세기 빈 귀족사회를 방불케하는 우아함을 보여줬으며, 17세기 몰리에르의 대본에 기초한 [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 [서민귀족] 등은 마치 모차르트의 음악과 같은 고전적 분위기를 자아냈다.

 

<현란한 관현악법으로 후기 낭만주의 음악의 걸작을 남긴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러시아 5인조, 보헤미아의 민족주의 음악

 

오스트리아와 독일에서 세기말의 혁신적 음악실험이 진행되는 와중에 유럽 저쪽 편에서는 민족주의 음악이 거세게 일어나고 있었다. 19세기 후반 당시 독일은 모든 면에서 최강국이었다. 음악 선진국이었던 독일은 1870년~1871년 보불전쟁 이후 통일제국이 되어 제1강국의 위치에 올랐다. 그러던 독일 음악은 두 가지 거센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으니 하나는 민족주의(국민주의) 음악, 또하나는 프랑스 음악이었다. 그렇다면 음악사에서 민족주의 음악이 대두된 배경은 무엇일까? “독일 음악만 음악이냐,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 이런 공감대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러시아와 보헤미아(체코)에서 거세게 나타난 민족주의는 발트해 연안과 스칸디나비아, 스페인, 이탈리아, 헝가리, 영국, 미국 등으로 널리 퍼져 나갔다. 그 중 차이콥스키를 비롯한 러시아 음악가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러시아 5인조의 리더 발라키에프(왼쪽)와 러시아의 음악의 아버지 

 미하일 글린카(오른쪽)의 모습 >                          

러시아는 19세기까지 클래식 음악에서 독자적인 스타일을 키우지 못했다. 이탈리아와 독일의 스타일을 본받아 음악가를 지망하는 사람들은 독일에서 교육을 받곤 했다. 이 무렵에 활약한 러시아 작곡가가 차이콥스키(1840~1893)이다. 그는 잘 알려진 대로 러시아 최초의 직업 작곡가로 손꼽힌다.

 

그러나 그의 음악은 러시아의 특성만을 내세웠다기보다는 범유럽적이었다. 그로 인해 러시아 내에서 차이콥스키의 음악은 부당한 취급을 받기도 했다. 실제로 차이콥스키는 봄부터 가을까지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별장에서 생활했고 11월에는 서유럽에서 생활했고, 서유럽의 세련된 음악을 접하며 자신만의 스타일을 만들어갔다.

 

요즘은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이 더 자주 연주되는 듯하지만 [교향곡 6번] ‘비창’이나 [피아노 협주곡], [바이올린 협주곡] 등은 오늘날 콘서트홀의 필수 레퍼토리로 손꼽힌다. [백조의 호수], [잠자는 숲속의 미녀], [호두까기 인형] 등 3대 발레곡은 특별히 춤에 관심이 있지 않더라도 누구나 들어봤음직 한 감미롭고 감상적인 멜로디를 지니고 있어 세대를 초월해 사랑받는 걸작이 되었다.

 

차이콥스키와는 달리 러시아 특유의 민족적 음색을 클래식 음악에 도입해 독자적 스타일을 만들어 낸 다섯 명의 작곡가를 이른바 ‘러시아 5인조’라 부른다. 큐이, 발라키레프, 보로딘, 무소르그스키, 림스키 코르사코프가 그들이다. 이들 중 유일하게 정규 음악교육과 전문코스를 밟은 발라키레프가 그룹의 리더였다. 보로딘은 화학자, 무소르그스키는 관리, 큐이는 공병대 장교, 림스키 코르사코프는 해군 사관이라는 구체적인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

 

무소르그스키는 교향시 [민둥산의 하룻밤]과 모음곡 [전람회의 그림]으로 유명한 작곡가이다. 그는 음악 속에서 과격하고 급박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것을 즐겼다. 발라키레프로부터 음악을 배웠지만 그의 제자들 가운데 배움의 정도가 가장 서툴렀다고 전해진다. 현재 뛰어난 관현악법의 작곡가로 알려져있는 무소르스키를 떠올려 볼 때 참으로 아이러니한 대목이다.

 

‘대담하고 거칠고 약간은 촌스러운’이라고 표현되는 무소르그스키의 음악을 들여다보면 러시아 민요 음계가 깊이 뿌리내리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그 ‘촌스러움’이 러시아적 관현악 효과를 만들어낸 무소르그스키의 매력이라고 할 수 있다. 보로딘의 음악 역시 러시아 민족적 색채가 진하게 배어 있다. 보로딘의 오페라 [이고르 공] 2막에 나오는 ‘폴로베츠인의 춤’은 동양 취향의 선율과 화성, 리듬을 멋지게 보여준다. 이런 동양 취향은 차이콥스키와는 달리 서유럽의 음악교육을 체계적으로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그러나 보로딘의 음악 역시 무소르그스키와 마찬가지로 러시아 토속적 색채를 가지고 독자적인 음악세계를 구축했다.

 

[세헤라자데], [왕벌의 비행]으로 잘 알려져 있는 림스키 코르사코프는 해군사관에서 음악원 교수가 된 후 자신의 부족함을 극복하기 위해 과거 선배들의 작곡 기법을 철저하게 연구했다. 러시아 민요를 수집하고 편곡, 출판하는 데에도 노력했다.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많은 제자들 가운데는 [불새], [봄의 제전]과 같이 현대음악의 걸작을 남긴 이고르 스트라빈스키가 있다. 림스키 코르사코프는 러시아 민족주의 1세대와 20세기 초 ‘신 고전주의’ 러시아 작곡가를 이어준 다리가 된 셈이다.

 

민족주의의 경향은 동유럽에서도 꿈틀댔다. 동유럽 역시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독일,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한 음악 세력권에 속하고 있었다. 특히 동유럽의 보헤미아 지방, 체코와 슬로바키아 일대는 몇 세기에 걸쳐 합스부르크 가의 통치 하에 있었기에 서유럽의 음악을 깊숙히 받아들이게 되었다.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 조반니]가 초연된 체코 프라하를 떠올려보면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보헤미아 민요가 러시아 민요보다도 더욱 서유럽 민요에 가까운 이유도 거기에 있다. 보헤미아의 대표적인 민족주의 음악 즉, 국민음악 작곡가로 스메타나와 드보르자크를 들 수 있다.

 

‘체코 음악의 아버지’라 불리는 스메타나는 연작 교향시 [나의 조국]과 오페라 [팔려간 신부], 현악 4중주 등이 대표작인데 특히 [나의 조국] 중 ‘몰다우’를 들어보면 조국에 대한 스메타나의 뜨거운 마음을 느낄 수 있다.

드보르자크는 주로 체코에 머물렀던 스메타나와 달리 국제적으로 명성을 얻은 작곡가이다. [교향곡 9번] ‘신세계로부터’는 드보르자크가 뉴욕 국립음악원 원장을 맡으면서 미국에서 체재할 당시 흑인영가와 미국 인디언 민요에 관심을 가졌던 흔적을 읽을 수 있다. 또한 드보르자크의 [슬라브 춤곡집]은 슬라브 민족만의 독특한 리듬과 정열, 음악적 감수성이 새겨져 있는 걸작 음악이다. 동유럽 못지않게 민족주의가 발전한 북유럽에서는 핀란드의 시벨리우스, 노르웨이의 그리그 같은 작곡가들이 낭만주의 시대의 마지막 걸작을 쏟아내고 있었다.

 

 

북유럽의 국민주의 음악 - 그리그, 시벨리우스

 

바이킹의 나라 노르웨이에는 에드바르드 그리그가 있었다. 15세의 나이로 독일 라이프치히 음악원에서 5년동안 피아노와 작곡을 공부하고 피아니스트로 유럽 여러 나라를 순회했다. 극작가 헨리크 입센의 극 부수음악으로 쓴 [페르 귄트]는 그의 대표작으로 민족적인 특성과 정통 클래식 양식이 함께 존재한다. ‘솔베이그의 노래’를 비롯한 [페르 귄트]를 이루는 여러 명곡에는 북유럽의 자연과 정서가 한데 어우러져있다.

 

그리그 [피아노 협주곡 A단조]는 슈만의 작품과 커플링되어 발매되곤 하는 그의 빼놓을 수 없는 걸작이며, 평생에 걸쳐 완성했던 [서정 소곡집] 같은 피아노 작품에서는 북구적 감성을 담은 우아한 멜로디, 섬세한 장식음, 서늘한 감수성 등을 찾아볼 수 있는데, 이는 쇼팽으로부터의 영향과 노르웨이의 민요, 무용의 발자취를 담고 있다.

백야의 나라 핀란드를 대표하는 얀 시벨리우스는 철저하게 깨끗한 고전적인 양식을 고수했다. 다른 민족주의 음악가와 달리 시벨리우스의 음악을 두고 한정된 의미에서 민족주의적이란 말은 그래서 나온 것이다. 시벨리우스는 핀란드 민요를 인용하거나 모방하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소재에 있어서는 민족적 내용를 가진 소재를 채택했다. 핀란드의 민족 서서시인 [칼레발라]에 마음을 빼앗긴 그는 이 작품에서 성악 작품의 가사와 교향시의 주제를 채택했다.

시벨리우스는 핀란드의 차가운 대지를 비추는 눈부신 태양 같은 순간들, 때로는 음울하고 때로는 황량한 자연 자체의 힘을 자신의 음악에 투사하며 고전적 양식을 고수하면서도 민족적 색채를 담아냈다. 대표적 작품은 7곡의 교향곡과 [핀란디아], [슬픈 왈츠], [타피올라], [포욜라의 딸]과 같은 교향시 그리고 바이올리니스트의 필수 레퍼토리인 [바이올린 협주곡]을 들 수 있다.

동시대 쇤베르크나 스트라빈스키, 바르토크 등의 작곡가들이 급진적 실험에 열을 올리고 있을 때, 시벨리우스는 엄격함과 고전주의적인 고요함을 품고 있는 음악을 만들어 지금까지도 사랑받고 있다.

 

 

프랑스풍, 인상주의 음악

 

<피아노를 연주하는 드뷔시의 모습>

1860년 무렵부터 세기 말에 걸쳐 프랑스에서 번성한 ‘인상주의’는 미술에서 회화의 경향을 일컫는 말이었다. 클로드 모네의 화풍이 대표적으로 애매한 윤곽선과 붓터치에 의한 정교한 구성, 빛의 명멸을 반영한 화려한 색채, 즉흥적 감흥이 인상파 미술의 대략적인 특징이다.

이러한 인상파적 이미지와 색채는 동시대 클로드 드뷔시의 음악에도 반영되었다. 드뷔시의 음악과 그의 스타일을 계승한 프랑스 음악을 후기 낭만파 가운데서도 특히 ‘인상주의 음악’이라고 부른다.

 

 

드뷔시의 음악은 기존기존의 음악과 달리 막연하고 윤곽이 불분명한 느낌을 자아내는 경우가 많다. 멜로디보다도 울림 중심의 화성과 소리의 색채, 음향의 느낌을 중요시한 것도 특징이다. 드뷔시는 소리가 가진 색채를 통해 한 편의 이미지, 한 편의 자연경관을 고스란히 떠올리게 하는 음의 마술을 구사했다.

 

이러한 혁신적 감수성은 [판화], [영상], [어린이 차지] 등 시적인 타이틀을 가진 드뷔시의 작품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드뷔시의 모호한 화성과 리듬감각, 신비로운 뉘앙스의 음악은 20세기 초 현대음악 작곡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조성이 없는 무조음악, 리듬과 소절이 확실치 않은 경계없는 음악으로 이어지는 길을 드뷔시가 튼 것이다.

드뷔시의 독특한 화성법, 새로운 음색 구사, 음역의 확장과 같은 혁신적 음악을 계승한 작곡가가 모리스 라벨이었고, 인상주의 음악 스타일에 유머와 풍자적 터치를 가미한 작곡가는 에릭 사티였다.

 

 

라벨은 고전 형식을 중시하면서도 인상주의 음악의 특징을 적극적으로 녹여냈다. [밤의 가스파르], [라 발스], [볼레로] 등 수없이 많은 곡들은 고전 형식 속에 감각적이고 관능적인 인상주의 색채와 이미지가 투영된 걸작이다. 단 두 개의 멜로디가 반복하면서 점점 거대해지고 종국에는 거센 포르티시모에 도달하는 [볼레로]는 관혁악법의 대가인 라벨의 재능이 폭발적으로 드러나는 곡이다.

 

 

 

<드뷔시와 함께 프랑스 인상주의 음악을 대표하는 작곡가 모리스 라벨>

 

 

 

영화 [101번째 프로포즈]에서 배우 문성근이 연습했던 [짐노페디]와 같이 피아노 곡으로 유명한 에릭 사티예술은 조표와 마디줄이 없고, 간결하게 반복되는 부분이 많아 정적이고 신비로우면서도 경쾌한 재치가 있다. 사티는 20세기 전반의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 등 새로운 경향의 예술운동에 참여하고 샹송과 영화 등 여러 장르의 예술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1917년 사티의 발레음악 [퍼레이드 parade]가 초연됐을 때 시나리오는 장 콕토가, 무대 미술은 파블로 피카소가, 의상은 코코 샤넬이 맡았다고 한다. 당대의 최고 예술가들이 모인 완벽한 예술 합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전방위적인 예술활동에 열정적이었던 사티의 재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만일에 누군가가 근대에서 현대로 급변하는 당시의 음악계를 들여다봤다면 약간의 두통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앞으로 도래할 혼란스럽고 복잡한 20세기를 앞두고 충분히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 출처: 다음 카페 '클래식 사랑 그리고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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