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음악 감상실 ♣/※[음악가별-출생년기준]

엑토르 베를리오즈(Hector Berlioz

Bawoo 2014. 11. 2. 10:25

                          Hector Berlioz  

엑토르 베를리오즈(Hector Berlioz, 1803년 12월 11일 ~ 1869년 3월 8일)는 프랑스후기 낭만주의 작곡가다. 1830년에 발표한 《환상 교향곡》=

엑토르 베를리오즈

으로 유명해졌다. 베를리오즈는 "표제 음악"(Program music)이라는 새로운 극의 특성을 띤 관현악곡 스타일을 창시했다.

베를리오즈는 전 세대인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폰 글루크(Christoph Willibald von Gluck)와 후 세대인 리하르트 바그너아르놀트 쇤베르크처럼 특별한 음악 가문 출신이 아니었고 음악을 특별하게 교육받지도 않았다. 아버지는 베를리오즈를 의사로 키우고 싶어했지만, 베를리오즈는 아버지를 설득하여 파리 음악원에 입학하하여 작곡가로서 길을 걸었다.

이미 음악원 시절에 악기의 표현력에 관심하여 교수들과 자주 싸웠던 베를리오즈는 음색과 효과를 잘 이용할 줄 알았다는 평을 받으면서 후기 낭만파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음악으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한다고 주장한 베를리오즈는 문학과 음악을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작곡하였으나 파리에서 음악 비평가로 활동하면서 많은 적을 만들었고 생전에는 프랑스를 제외한 유럽의 여타 나라에서는 높게 평가받았으나 프랑스 음악계에서는 절대로 환영받지 못했다. 프랑스 음악계에서는 사후에 인정받았다.

 

 초기

남프랑스에서 의사인 아버지의 장남으로서 태어나 17세 때까지 가정에서 일반으로 교육받았고 아들도 자신처럼 의사로 만들고 싶어했던 아버지의 강요로 19세 때 파리로 가서 의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지만, 파리에서 글루크의 오페라에 매혹되어 작곡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23세에 아버지를 간신히 설득하여 파리 음악원에 입학하였으므로 베를리오즈는 유년 시절에 플루트기타를 조금 만졌을 뿐 다룰 줄 아는 악기가 없었다.

베를리오즈는 피아노를 칠 줄 몰랐다.

교육

파리음악원에서 작곡법과 푸가를 공부하기 시작했지만, 보수 경향을 띤 교수들과 음악상 자주 마찰. 특히 당시 파리음악원장이었던 작곡가 루이지 케루비니와도 충돌하지만, 이 시절 베를리오즈는 시키는 것만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탐구하는 자세를 보였다. 당시에는 아직 일반화하지 않았던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여러 작품 후기 현악 사중주를 연구하기도 했다. 특히 음향을 유효하게 활용할 악기 사용법을 연구. 이때 베를리오즈가 작성한 악기 사용법은 후일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증보했고 지금까지 이 분야의 고전으로 쓰인다.

경력

파리음악원에 입학한 1826년을 전후한 1820년대는 음악가를 준비하는 시기. 1830년대는 음악가로서 명성을 날린 시절. 1830년, 로마상 콩쿠르에서 1830년 칸타타사르다나팔의 죽음》로 대상을 받은 베를리오즈는 로마로 유학하나 향수병에 시달린 끝에 본래 3년간 로마에 있어야 했지만, 18개월만에 파리로 돌아온 베를리오즈는 음악비평가로 활동하면서 생계를 유지한 시기에 베를리오즈는 파리를 방문한 영국의 셰익스피어 극단의 공연을 보러갔다가 세익스피어 희곡 《햄릿》의 오필리아 역을 맡은 여배우 해리엣 스미드슨

을 짝사랑한 경험이 《환상 교향곡의 모티브가 되었다.

《환상 교향곡》발표 후 작품을 잇달아 발표하면서 베를리오즈는 프랑스에서 명성을 제고되었으나 1839년 오페라《벤베누토 첼리니》(Benvenuto Cellini)가 참패하면서 한동안 침체기를 겪어야 했다. 1842년에 베를리오즈는 외국으로 공연 여행을 떠나기 시작했다. 1842년에서 1843년에는 독일을 여행하는 중에 《로마의 사육제 서곡을 작곡했다. 1845년에서 1846년에는 프라하부다페스트에서 공연했다. 자신감을 회복한 베를리오즈는 1846년에 일시 귀국하여 오페라 《파우스트의 겁벌》(La Damnation de Faust)을 발표했지만, 또 실패하고 1847년 러시아로 공연 여행을 떠났다. 러시아에서 베를리오즈의 인기는 꽤 높았고 러시아의 모데스트 무소륵스키,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 등에게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프랑스 2월 혁명이 일어나자 다시 귀국했다.

1850년, 베를리오즈가 작곡한 《테 데움이 만국박람회를[1] 축하하려고 공연되었다. 같은 해에 베를리오즈는 필하모닉 협회를 조직하여 파리에서 음악상 활동했지만, 큰 성과는 거두지 못했고 계속 실패하여 경제상 궁핍했고 프랑스 음악계와 마찰 탓으로 생활은 고달팠으나 1856년 프랑스 아카데미 회원이 되면서 생계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되었다. 연주 여행도 계속했는데 1867년에서 1868년까지 러시아 공연 여행이 마지막이었다.

1869년 3월 8일, 베를리오즈는 지병으로 파리에서 별세했다.

음악 세계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곡을 많이 창작했다. 프랑스 작곡가로서는 예외로 대규모 기악곡의 창작에 몰두, 프랑스 특유의 섬세한 감정과 관현악법에 의거하여 감미로운 음색을 즐겨 사용하였으며, 대담하고 분방한 표현은 감정이 강렬하고 갑작스러워 누르기 어려운 폭발에 때때로 도달하기도 하고 스스로 베토벤의 사도로 자처하였으며, 그 영향을 스스로 수용했다. 외관은 그다지 프랑스답지 않지만 작품의 특징을 이루는 음의 원조법상 사용, 음의 선명한 배합, 명쾌한 선율은 극히 프랑스다웠다. 베를리오즈는 자신의 명성에도 평생 빈곤하였다. 베를리오즈를 대표할 정도로 전형이 될 만한 특징이 있는 작품인 《환상교향곡》은 '표제 음악'을 대표할 정도로 전형이 될 만한 특성이 있다.

 

베를리오즈의 음악 세계는 문학과 음악을 자유로이 넘나들었던 그답게 음악을 문학적으로 표현하였다.

리하르트 바그너와 함께 낭만파를 대표하는 작곡가가 되어 새로운 관현악곡 기법인 "표제 음악"을 창시한 베를리오즈는 악기의 음색과 효과를 최대한 이용 환상과 감정을 극을 관람하듯이 큰 긴장이나 감동을 환기하게 표현하고자 대규모 관현악단을 조직했다.

 

베를리오즈의 데뷔작이자 대표곡인 《환상교향곡》은 문학과 관련된 사실 묘사를 교향곡의 각부와 연결한다. 《환상교향곡》 외에도 《파우스트의 여덟 장면》(1828년 ~ 1829년), 《이태리의 해롤드》(1834년), 《로미오와 쥴리엣 독창과 합창》(1839년), 《죽음과 승리의 대 교향곡》등도 마찬가지다. 작곡한 여러 오페라도 이런 양식이다.<출처: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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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리오즈의 음악은 강한 개성(극적 표현력과 다양함)으로 청중에게 열광과 혐오의 양극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이러한 극단적 변모로 인해 사람에 따라서는 똑같은 그의 작품이라도 어떤 곡은 무척 좋아하면서도 또다른 곡은 싫어하는 경우가 종종 있게 된다. 이것은 셰익스피어는 좋아하지만 〈오셀로 Othello〉는 싫어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베를리오즈는 독일·이탈리아·프랑스 등 특정한 나라의 전통보다는 좀더 근원적인 음악의 뿌리를 탐색했기 때문에 음악적으로 난해했다.

 

그의 선율은 풍부하면서 확장되어 있어 4마디로 이루어진 악구(樂句)를 선호하는 사람들을 당황하게 하며, 그의 화성은 모호하고 미묘하지만 언제나 기능적이며 음색의 요소들에 자주 의존하고 있다. 조바꿈은 거칠며 다른 작곡가들의 경우보다 더 조잡하게 보일 수도 있는데 이는 그가 절제적이면서도 효과적인 수단을 동원하여 절묘한 대조를 통한 조바꿈을 하기 때문이다. 그의 관현악법은 일반적으로 밝고 투명하지만 결코 창백하지는 않다. 조지 버나드 쇼는 "어떤 지휘자도 베를리오즈·모차르트 음악을 연주하는 것을 듣기 전에는 음악적 인상에서 최고로 민감한 지휘자라고 말하지 말라"고 말했다.

 

벨기에의 작곡가 세자르 프랑크는 베를리오즈가 작곡한 모든 작품이 걸작이라고 말했다. 이 말은 베를리오즈의 작품 하나하나는 일련의 작품들 가운데 마지막, 혹은 최상의 작품이 지니고 있는 완벽함을 잃지 않으려는 계속적인 노력이라기보다는 그 각각마다 서로 다른 독창적인 개념을 구현한 것임을 뜻한다. 프랑크의 판단은 다른 작곡가들과 달리 베를리오즈는 거의 같은 일을 되풀이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것이다. 오히려 그는 어떤 것에 대한 친숙함은 다른 것에 대한 손쉬운 접근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결론에서 주제 하나하나를 위한 새로운 양식을 창조했다. 한 작곡가의 작품인데도 〈장송과 승리의 교향곡〉·〈로미오와 줄리엣〉·〈그리스도의 어린시절〉만큼 서로 닮지 않은 작품도 없을 것이다.

 

그의 화성체계는 시종 같아 보이는데 그것은 부분적으로는 보편적인 기대에서 현저하게 벗어나 있는 화성에 기인하고, 또 한편 무엇인가를 하기 위한 서투른 시도로 보는 대신 있는 그대로 감상되어야 하는 뉘앙스에서 비롯된 결과이다. 그의 선율과 자유분방한 대위법은 작품 어디에나 나타나 있는 특징인데, 선율은 강렬한 독창성과 역동적인 균형을 가지고 있으며 대위법은 능숙하면서도 소탈한 개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특징적 요소들 말고도 베를리오즈는 각각의 오페라와 그 등장인물들에게 서로 다른 개성적인 분위기를 만들어주었다. 그 작품들 각각을 반복해서 듣는 것만이 그 작품이 지니고 있는 힘과 미적 차원(심리적 차원을 포함하여)에 대한 안목을 열어줄 것이다. 물론 이들 작품에 결함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가 작품 하나하나에 특이한 개성을 부여했다는 말은, 곧 다른 작곡가라면 결코 제시할 수 없는 독특한 개념을 각 작품 속에 구현했음을 뜻한다.

 

극과 분위기의 창조에 있어 베를리오즈는 우수, 자기 성찰, 부드럽고 격정적인 사랑, 자연에 대한 명상, 군중의 소동 등을 다루는 장면에서 탁월했다. 그의 일관된 의도는 진실과 음악 감각의 결합이었다. 이때 음악 감각은 강렬할 수도 있지만 또 한편(다시 버나드 쇼의 말을 인용한다면) '가늘고 섬세하며 세상의 것이 아닌 예기치 않은 것,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다.

 

베를리오즈의 음악에 관한 보다 신중하고 냉철한 연구가 필요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것을 첨가하고 인용할 필요가 있다. 1935년 존경받는 영국의 음악학자 도널드 토비 경은 〈트로이 사람들〉을 처음 듣고는, 이 작품은 '음악극 분야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설득력 있는 작품 가운데 하나'라고 단언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결코 베를리오즈의 진가를 모른다"라고 했다. 분명한 것은 19세기에 저술된 책들은 바그너나 드뷔시에 대한 편견이 있든 없든 간에 학생들을 잘못 인도할 것이며 청중의 귀를 막을 수도 있는 것이다. 베를리오즈를 단순히 관현악의 재료적 측면을 개발한 데 불과한 음색의 기술자로 설명하는 것은 옳지 않다. 다행히도 서구 전역에서는 그의 주요작품들이 계속 반복적으로 연주되면서 베를리오즈를 최고 수준의 극적인 작곡가로 보는, 보다 수긍할 만한 견해가 한편에서 생겨나게 되었다.

 

1945년 이전에는 베를리오즈의 작품 가운데 정규 레퍼토리에 포함된 것은 〈환상 교향곡〉과 몇 곡 되지 않는 짧은 발췌곡뿐이었다. 청중의 충분한 준비가 없는 상태에서 연주된 그의 대작들은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했으며 그들을 그대로 묻어두어야 한다는 주장을 확인시켜주었다. 그러나 LP 음반의 등장은 상황을 급격히 변화시켰다. 청중은 이제 연주자들의 해석을 판단할 수 있게 되었고, 아울러 베를리오즈 작품의 연주에 대해서도 다른 작곡가들의 작품을 들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에 대한 사전 지식과 비평적 태도를 가지고 듣게 되었다.<다음백과-J. Barzun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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