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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 [Ludwig van Beethoven]

Bawoo 2014. 11. 10. 22:59

베토벤 [Ludwig van Beethoven]

 

1770. 12. 17 독일 본에서 세례받음~ 1827. 3. 26 오스트리아 빈.

독일의 작곡가.

베토벤

베토벤(1770. 12. 17 독일 본에서 세례받음~ 1827. 3. 26 오스트리아 빈.) 독일의 작곡가.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과도기의 주요인물이다.

베토벤의 음악세계는 하이든·모차르트의 고전주의 전통에 입각했고, 문학계의 동시대 작가 괴테와 실러의 작품에 표현된 새로운 시대정신을 포괄했으며,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열정적으로 부르짖던 프랑스 혁명의 이상을 좇았다. 베토벤은 이전의 어떤 작곡가들보다도 생생하게 삶의 철학을 대사 없는 음악으로만 표현해 음악의 위력을 드러냈다. 그의 몇몇 작품들에서는 인간의 의지에 대한 확신이 강하게 드러나 있다. 그 자신은 낭만주의자는 아니었지만, 그를 따르는 여러 낭만주의자들의 작품들에 대해 사고의 원천이 되었다. 낭만주의자들이 따르게 된 특질들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설명적 음악인 표제음악에 대한 그의 이상에 있었다. 베토벤은 교향곡 6번 〈전원 Pastorale〉과 연관해 표제음악을 "회화적이라기보다는 감정의 표출"이라고 정의했다. 음악 형식에서도 위대한 혁신가였던 그는 소나타·교향곡·협주곡·현악4중주 등의 영역을 확대했고, 교향곡 9번에서는 지금까지 한 번도 시도된 적이 없었던 성악과 기악을 한데 결합시켰다. 그의 개인적 삶은 병든 귀에 대한 영웅적인 투쟁으로 점철되었고, 중요작품들 중 일부는 그가 완전히 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된 마지막 10년간 작곡된 것이었다. 궁정과 교회의 후원이 사라진 때에 살았던 그는 악보 출판과 작곡료만으로 생계를 꾸려나가야 했다. 그는 자신의 내적 감정을 음악적으로 표현하는 데만 관심을 가진 최초의 직업적인 음악가였다.

 

<생애 초기 >

베토벤은 1770년 12월 17일 요한 판 베토벤과 마리아 마크달레나 판 베토벤 사이에서 태어나 독일 북서부 본에서 세례를 받았는데 생존한 자식 중 맏아들이었다. 플랑드르 출신인 그의 가문은 말린 지역에까지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할아버지 때 처음 본에 정착했으며 그의 할아버지는 쾰른 대주교 선제후의 궁정

합창단에 들어가, 음악감독의 자리까지 올랐다. 아버지 역시 선제후 궁정 합창단의 가수였으므로 18세기에 흔히 볼 수 있던 대로 베토벤도 음악가 가문에서 태어난 셈이었다. 가문은 처음 얼마간 매우 번창했으나, 1

773년 할아버지가 죽고 아버지가 알코올 중독 증세를 보이게 됨에 따라 점차 가난해졌다. 베토벤은 11세

되던 해에 학교를 그만두어야 했고, 18세에 가족의 생계를 꾸려나가야 했다. 아버지 요한은 베토벤이 피아노에 재능이 있는 것을 파악하고 그를 모차르트와 같은 신동으로 키우려 했으나 이러한 노력은 성공하지

못했고, 베토벤은 청년기에 이르러서야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1780년 신성 로마 제국의 단독 통치자가 된 요제프 2세는 동생 막시밀리안 프란츠를 쾰른 대주교 선제후의 후계자로 임명했다. 이제까지 한낱 조그만한 마을에 불과했던 은 막시밀리안의 통치 아래 들어서면서부터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번창하게 되었다. 자유사상에 입각한 로마 가톨릭교도였던 막시밀리안은 본에

대학을 설립했으며 자신이 관할하는 교회의 권한을 제한했다. 또한 본은 레싱·클롭슈토크·괴테·실러가 주도한 독일 문학 부흥운동의 흐름에 휩싸여 있었다. 작센 출신의 개신교도 크리스티안 고틀로프 네페가 이 지방의 궁정 오르간 연주자로 임명되었는데 후일 베토벤의 스승이 된 그는 음악가로서는 다소 한계가 있었지만 높은 이상과 폭넓은 교양의 소유자였고 문필가로 가곡과 경가극을 여러 편 남겼다. 1783년 베토벤은 네페의 도움을 받아 현존하는 최초의 작품인 〈드레슬러에 의한 행진곡 주제에 의한 변주곡 Variations on March by Dressler〉을 만하임에서 출판했다. 1782년 6월 베토벤은 네페의 보조 연주자가 되었다.

 

1783년 본 오페라단에서 계속 저음을 즉흥적으로 연주하는 연주자로 임명되었고, 1787년에는 1784년 이래로 대주교 선제후로 있었던 막시밀리안 프란츠의 후원을 받아 빈으로 가 모차르트에게 음악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빈 여행은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해 2개월이라는 단기간으로 끝났다. 모차르트는 베토벤의 즉흥연주 솜씨에 대단히 감명을 받았고, 친구들에게 "이 젊은이는 위대한 인물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베토벤은 그후 5년 동안 계속해서 본에 머물렀다. 본 궁정에서 그의 직무 외에 본 극장의 관현악단에서 비올라를 연주하는 일이 새로 추가되었다. 대주교는 한동안 베토벤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만 베토벤은 많은 귀중한 친구와 후원자들을 사귈 수 있었다. 그는 이전부터 총리 요제프 폰 브로이닝의 미망인을 알고 있었는데, 그녀는 그를 자신의 4명의 자식들의 음악선생으로 모셨고, 이후 그는 자기 집보다 브로이닝의 집에 더 많이 거주할 정도로 긴밀한 관계를 가졌다. 그밖에도 브로이닝 부인을 통해서 많은 부유층 제자들을 소개받았는데 그에게 가장 커다란 도움을 주게 된 사람은 빈 귀족의 일원이자 대단한 음악 애호가였던 페르디난트 폰 발트슈타인 백작이었다. 그는 1788년부터 본에 거주하기 시작해 이곳에서 브로이닝가의 사교집단과 어울리면서 베토벤의 연주를 듣고는 베토벤의 열렬한 숭배자가 되었다.

 

1790년 황제 요제프 2세가 죽자 베토벤은 발트슈타인의 요청으로 요제프 황제의 장례식을 위해 독창·합창·관현악을 위한 장례 송가를 작곡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곡은 목관악기 연주자들이 곡이 너무 어렵다고 불평하는 바람에 연주가 취소되었다. 베토벤은 이후 요제프 황제의 동생 레오폴트 2세의 제위식 때 이 곡을 연주하기 위해 새로 몇 부분을 추가했으나, 연주되었다는 기록은 없다(이 곡은 19세기말에 와서야 브람스가 재발견해 빈에서 연주했음).

이 곡은 1790년 런던 여행길에 본에 들른 하이든에 의해서 주목을 받았다. 하이든은 이 악보를 보고 감명을 받은 나머지 런던에서 돌아와 베토벤을 제자로 삼겠다고 제안했다. 베토벤은 하이든의 제안을 받아들였지만, 1792년 가을 프랑스 혁명군이 라인란트 지역을 공략하자 본을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본의 베토벤 하우스에 소장되어 있는 베토벤의 당시 노트에는 본에서 사귄 친구들과 후원자들의 이름이 방대하게 적혀 있다.

 

본에서 작곡을 시작했으나 빈에서 완성·개작한 것을 제외하고 본 시절에 작곡된 그의 작품들은 음악 애호가들보다는 베토벤 전문 연주자들 사이에서 더 흥미를 불러일으켰는데, 그 이유는 이 시기의 작품들에는 그의 예술세계의 근간이 된 여러 다른 작곡가들의 영향, 그의 음악적 약점들, 시행착오 등이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1783년 작곡된 3개의 피아노 소나타들을 보면 당시 본이 독일 근대 관현악의 요람지이며 고전 교향곡 형식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음악양식의 온상이었던 만하임의 전초기지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만하임 악파는 베토벤의 어린시절에 이미 쇠퇴 일로에 있었다. 한때 유명했던 관현악단이 이제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전쟁(1778) 이후 몰락하게 된 것이다. 만하임 양식은 매너리즘에 빠져,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C장조 K. 309에서 볼 수 있듯이 셈여림의 대조에 대한 시도가 진부하고 종종 부적절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현상은 베토벤의 초기 소나타들과 그밖에 당시 그가 작곡한 여러 작품들에서도 발견되는데, 후기 만하임 작곡가의 교향곡이 본 궁정 관현악단에서 고정 레퍼토리로 연주되었던 당시 상황으로 볼 때 그다지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모차르트의 경우에는 그의 규범적 양식에서 잠시 이탈한 것에 불과한 데 반해 베토벤에게는 계속해서 기본적인 요소로 남게 되었다는 점이 다를 뿐이었다. 급작스러운 '피아노'(여리게), 예기치 않은 폭발, 광범위한 도약 진행에 의한 아르페지오 음형(여러 옥타브에 걸쳐 빠르게 화음의 구성음들을 위아래로 연주하는 기법으로, '만하임 로켓'이라 함) 등 만하임 악파의 이러한 요소들은 베토벤의 음악적 개성의 중심 특징이 되었고, 또한 성악 양식에 대한 의존에서 탈피해 기악음악을 해방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다.

 

 

<초기 작품>

 

같은 세대의 다른 작곡가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대중음악과 민속음악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이러한 영향은 1790년 발트슈타인을 위해 작곡한 발레 음악과 초기 가곡, 제창에 의한 합창 등에 특히 뚜렷하게 나타났다. 그의 많은 성숙기 작품들에는 라인란트 지방 춤곡의 강한 리듬의 영향이 보였으며, 그밖에도 이탈리아·프랑스·슬라브·켈트 등 다른 지방의 토속적 음악 어법의 영향도 보였다. 그는 20세기의 관점에서 볼 때 민족주의자라든지 민속음악 작곡가는 아니었지만, 화성의 규범적 진행에서 벗어나 종종 민속 선율의 이례적인 선율형(型)을 허용하곤 했다. 파리와 예술적인 교류를 많이 했던 만하임과 프랑스어를 번역한 희가극을 주로 공연한 본의 국립극장으로부터 프랑스 음악의 영향을 받았다. 유행에 민감했던 본의 사교계는 프랑스 혁명에 공감하는 분위기였고, 이러한 기운은 베토벤 교향곡의 알레그로 악장에서 나타난다. 한편 그의 교향곡 스케르초 악장에 자주 나타나는 지그 리듬도 프랑스에서 기원한 것이었다.

18세기말 모든 피아니스트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의 소나타들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음악은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소리 예술로 간주되던 당시에 바흐는 '표현적' 음악(감정과다 양식 )의 주요한 주창자였다. 바흐의 소나타들에 나타나는 변덕스러운 리듬과 화성, 레치타티보풍 악구 등의 영향은 하이든과 모차르트에게도 똑같이 나타났지만 베토벤의 경우에는 훨씬 더 강렬하게 나타났다. 이것은 베토벤 자신의 기질에 잘 어울렸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그 자신이 몸담고 있던 곳의 지적 풍토의 영향 때문이기도 했다. 브로이닝과 주변 인물들이 주도한 문학 모임은 18세기초 이성을 중시했던 계몽주의에 대한 반발로 이성보다는 느낌과 본능의 돌출을 강조한 질풍노도운동과 관련되었다.

 

괴테의 초기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Die Leiden des jugen Werthers〉은 이 운동의 복음서와

같은 역할을 했다.질풍노도운동의 영향으로 음악은 새롭게 느낌의 예술로서 부각되었다. C. P. E. 바흐 소나타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났던 분위기의 급작스러운 대조는 이제 베토벤의 작품에서 더욱 강조되었다. '느낌'만이 예술적 가치의 유일한 조건이라고 내세우는 스승 네페의 이 이론적 주장을 베토벤은 직접 실천에 옮겼다. 그러나 낭만주의자들이 베토벤을 자신들과 같은 낭만주의자라고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그를 낭만주의자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는 괴테·실러 등의 독일 고전문학에 심취했고, 이들이 문학에서 그랬던 것처럼 음악에서 형식과 감정의 균형을 취했는데 이 점에 있어서 그는 분명히 고전주의자였다.

 

본 시절의 작품들 중 지속적인 관심을 끄는 작품은 대부분 본의 말년에 작곡된 것들로, 목관악기를 위한 8중주(1792), 〈론디노 Rondino〉(1792), 플루트·바순·피아노를 위한 트리오 G장조(1791), 2개의 칸타타 등을 들 수 있다. 네페의 영향 아래 작곡된 그의 가곡들은 독창 성부가 그다지 잘 만들어지지 못했는데 이것은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모두 가수였던 것을 생각하면 다소 이해가 안 가는 대목이지만, 실제로 전 작곡 시기에 걸쳐서 계속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 한편 〈빈센초 리기니 주제에 의한 24개 변주곡〉을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이 곡은 현악3중주 E♭ 장조 작품3과 마찬가지로 개작된 뒤 나중에 출판했다. 이 변주곡들은 베토벤의 피아노 기법을 요약해서 보여주는 작품으로 오랫동안 빈 시절 살롱 연주에서 그의 주된 레퍼토리로 사용되었다.

 

베토벤은 만하임 악파 계보의 전성기 최후의 인물이다.

 

< 빈 시절 >

베토벤은 본을 떠나기 전부터 이미 서북부 독일에서 즉흥연주에 능한 피아노의 장인으로 상당한 명성을 날리고 있었다. 당시 모차르트도 훌륭한 즉흥연주가로 인기를 누렸지만, 모든 점에서 베토벤을 능가하지는 못했다. 감수성을 강조하던 당시의 시대사조에 힘입어 그는 과거의 어떤 연주자보다도 청중에게 강한 감동을 주었다. 자연히 그는 빈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부터 빈의 귀족들에게 대단한 사랑을 받았다. 발트슈타인 남작은 사람들에게 베토벤을 모차르트의 뒤를 이은 위대한 음악가로 칭찬했으며, 빈 초기 시절의 후원자들이 스비텐 백작, 카를 리히노프스키 대공(모차르트를 죽을 때까지 후원했던 유일한 귀족이었음)이었던 것은 의미심장하다. 1790년대 빈에서 음악은 날이 갈수록 귀족들의 오락거리로 인기를 더해갔다. 당시 그곳의 귀족들은 황제 프란츠 2세의 반동정치를 불신했고, 특히 음악을 숭배했다. 많은 귀족들이 직접 악기를 연주할 줄 알았고 이들의 연주 실력은 전문 연주자와 겨룰 정도였다. 어떤 시대, 어떤 지역에서도 이처럼 아마추어 음악이 융성했던 적이 없었다.

그러나 베토벤은 작곡가로서는 아직도 여러 가지 문제들을 극복해야 했다. 그는 하이든의 도움만으로는 부족함을 느껴서 하이든과 겉으로는 계속해서 좋은 관계를 유지했지만, 하이든 몰래 다른 선생들에게 레슨을 받곤 했다. 그중 한 사람인 성 슈테판 대성당의 오르간 연주자 요한 게오르크 알브레히츠베르거는 옛 대위법 양식에 능통한 사람으로 베토벤이 필요로 하는 여러 기법들을 가르쳐주었다. 그는 또한 황제 직속 음악감독이던 안토니오 살리에리에게 성악 작곡법을 배웠다. 1794년 하이든이 런던을 2번째로 방문하기 위해 빈을 떠나자 베토벤이 본으로 복귀하는 데 아무런 장애가 없었다. 그당시 본은 공교롭게도 프랑스의 지배 아래 있었고 선제후도 그곳을 떠나 결과적으로 베토벤에 대한 보조금도 끊기게 되었지만, 그는 레슨과 연주 수입 이외에도 리히노프스키 대공으로부터 생활비를 받게 되었기 때문에 아무런 어려움도 따르지 않았다. 1795년에 그는 빈에서 처음으로 공개연주회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자신이 작곡한 피아노 협주곡 2번과 모차르트의 협주곡을 연주했고, 하이든을 위한 기금 마련 연주회에 참가했다. 한편 수많은 귀족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피아노·바이올린·첼로를 위한 3개의 3중주 작품 1이 출판되었다. 그후 3년 동안 그는 베를린·프라하 등지를 순회공연했으며, 이밖에도 상황이 허락되는 대로 여러 지역을 여행했다. 1800년부터는 대대적인 규모의 공개 연주회를 시작해 외국에 널리 명성을 날리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9세기로 접어드는 시기는 베토벤의 작품활동 시기 중 제1기에 해당하며 그가 아직 18세기적인 기법과 사고에 묶여 있던 시기이다. 당시 출판된 그의 작품들은 대개 피아노 독주곡이나 피아노와 다른 악기를 위한 작품이며, 그밖에 현악 3중주 E♭장조 작품3, 3개의 현악 3중주 작품9, 6개의 현악 4중주 작품18, 교향곡 1번 등이 있다. 이 시기에 그는 서서히 자신의 영역과 기법을 확장해갔으나 아직까지는 주로 피아노 음악 작곡가로서 알려졌다.

 

연주가에서 작곡가로의 방향 전환은 점차 귀먹어가고 있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소리를 듣지 못하는 최초의 징후는 1800년 이전에 나타났지만, 이후에도 몇 년 간 그의 삶에는 변화가 없었다. 귀족의 저택에서 다른 피아니스트들과 경쟁해 연주를 계속했고, 바이올린 연주자 게오르크 브리제토버(베토벤은 그에게 〈크로이처 소나타 Kreutzer Sonata〉를 헌정함) 등의 대가들과 공개 연주회를 같이 열었다. 그러나 1802년경에 이르자 그는 자신의 병이 영구적인 것이고 점차 악화되고 있음을 확실히 자각하게 되었다. 그는 당시까지만 해도 시골이었던 하일리겐슈타트에서 여름을 보내면서 두 남동생 앞으로 쓴 유명한 '하일리겐슈타트 유언장'을 통해 귓병으로 인한 고통을 표현했다. 그가 목숨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가슴속에 있는 창작의 요구를 다 채우지 못하고서는 세상을 떠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친구인 프란츠 베겔러에게 보내는 다른 편지에 "나는 운명의 끈을 붙잡겠다"라고 적었고, 또다른 곳에는 "병에서 치유만 된다면 나는 온 세계를 담아낼 것이다"라고 적었다. 병세는 개선되지 않았으나 위에 나타난 그의 바람들은 모두 이루어졌다.

1819년경이 되면서부터는 완전히 귀가 먹어 의사소통을 위해 노트를 가지고 다녀야 했다. 이 노트에 친구들이 질문을 적으면 베토벤은 말로 대답을 하곤 했다. 소리가 점점 안 들리게 됨에 따라 피아노 연주 수준도 점점 떨어졌다. 그는 그래도 간혹 공개연주회에 나타났으나 대부분 작곡에 힘을 쏟았다. 그는 5~10월 빈 근처의 조그만 마을들을 옮겨다니면서 살았고, 그곳에서 긴 시간 동안 산책을 하면서 악상을 떠올렸으며 스케치북에 이것들을 적어두곤 했다.

이 스케치북들은 오늘날까지 상당수가 보전되어 있으며, 베토벤의 작곡 방법에 대해 많은 것들을 제시해준다. 그는 복잡한 환상곡의 주제도 한순간에 즉흥연주할 수 있었지만 어떤 한곡의 모양새를 가다듬는 데 상당한 공을 들였다. 그의 스케치 악보에는 피아노 협주곡 〈황제 Keiser〉의 아다지오 악장이나 〈크로이처 소나타〉의 안단테 악장 등의 유명한 선율들도 처음에는 별 특징이 없는 평범한 형태로 나타난다. 베토벤은 한 곡을 완성한 뒤에 다른 곡을 시작하지 않고 여러 곡을 동시에 작곡한 것으로 보이며 따라서 한 곡을 서둘러 끝내는 법이 거의 없었다. 예를 들어 1804년에 스케치 악보를 쓴 교향곡 5번은 1808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완성되었다. 스케치 악보에는 때로 비망록의 일종으로 글귀가 적혀 있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3번 교향곡 〈영웅〉의 스케치 악보의 경우에는 몇 소절을 빈칸으로 남겨두었는데, 그의 스케치 악보들은 종종 선율선과 베이스 성부만 적어놓아 곡의 연속적인 흐름만을 잡아놓은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많은 작품들 중 특히 후기 작품들에서는 스케치의 과정이 아주 복잡해서 악보가 최종 출판되기 직전까지 여러 차례 변경되었다. 대체로 베토벤의 곡들은 작곡 초기에 기록한 스케치 악보 및 메모들만 남아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베토벤이 나중에 다른 곡을 작곡할 때에 재료로 사용하기 위해 초기 스케치 악보들을 따로 보관해두었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베토벤은 한 곡을 완성한 뒤에는 더이상 작곡 과정의 모든 세부 작업과정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고도 볼 수 있다.

 

베토벤은 몇 년 동안 연극과 연관해서 작곡을 했는데 이것은 그의 전체 작곡기간에 비할 때 아주 짧은 기간이었다. 1801년에 그는 발레곡 〈프로메테우스의 창조 Die Geschöpfe des Prometheus〉의 악보를 완성했고, 2년 뒤에는 고전적 주제에 의한 에마누엘 시카네더의 대본으로 오페라 작곡을 제안받았다. 시카네더는 모차르트의 〈마적 Die Zauberflöte〉으로 명성과 부를 얻은 인물이며, 빈 극장의 경영주이기도 했다. 불행히도 시카네더가 극장 경영권을 빼앗기는 바람에 계약이 무효가 되었지만 베토벤은 벌써 이 오페라 안에 포함될 2, 3곡을 작곡해놓은 상태였다. 이듬해에 빈 극장 측에서 새롭게 베토벤에게 작품을 의뢰함으로써 베토벤은 거의 잊어버리고 놓아두었던 오라토리오 〈올리브 산의 예수 Christus am ölberg〉의

작곡에 다시 들어갔다. 이 작품은 베토벤 자선 연주회에서 피아노 협주곡 3번, 교향곡 1번·2번과 함께 연주되었다. 1804년에는 3번 교향곡이 완성되었는데, 대부분의 전기(傳記)작가들은 이 곡을 베토벤 음악의 발전에 하나의 분수령으로 간주하고 있다. 전례없는 규모의 이 교향곡은 인간 의지를 강하게 표현했으며, 베토벤은 이 곳을 그가 존경하던 나폴레옹에게 헌정할 생각으로 작곡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황제에 즉위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그는 공화국의 현실에 격분해 곧바로 애초의 생각을 버리고 대신 표지에 '한 위대한 사람을 기리며'라고 적었다. 이후 계속해서 〈열정 Appassionata〉으로 알려진 피아노 소나타 F단조 작품57, 피아노 협주곡 4번 G장조 작품58, 3개의 〈라주모프스키 현악 4중주 Razumovsky Quartet〉 작품59, 교향곡 4번 작품60, 바이올린 협주곡 작품61 등이 발표되었다. 이 시기에 속하는 또다른 작품으로 오페라 〈피델리오 Fidelio〉를 들 수 있는데 이 작품은 1805년 겨울 시즌 연주를 위해 위촉받아 작곡한 것으로, 결혼한 여자가 소년으로 변장해 감옥에 갇힌 남편을 구출하는 내용을 그리고 있다. 베토벤은 이러한 극의 내용과 음악을 결합시키는 데 있어서 페르디난도 파에르와 루이지 케루비니의 영향을 받았다. 특히 베토벤이 매우 숭배했던 케루비니는 〈피델리오〉와 비슷한 '구원'을 주제로 하는 오페라의 작곡가이다. 〈피델리오〉는 처음에는 그다지 크게 성공을 거두지 못했는데, 이것은 부분적으로는 프랑스 군대가 아우스털 리츠 전투 이후 빈을 점령해 많은 빈 사람들을 내몰았던 것에 기인했다. 사람들의 권유로 고민 끝에 개정된 대본을 가지고 다음해 봄에 공연할 수 있도록 개정 작업을 해 이 오페라는 2번이나 더 공연되었다. 그러나 베토벤과 흥행주 사이의 다툼으로 공연은 계속될 수 없었고, 화가 난 베토벤은 악보 계약을 취소해버렸다. 8년이 지나서야 〈피델리오〉는 완전히 새로운 대본과 베토벤 자신의 상당한 손질 끝에 빈의 무대에 다시 세워졌고, 이후 이 작품은 독일 극음악의 고전이 되었다. 그밖에 다른 몇몇 오페라 작곡을 구상했으나 결실을 보지는 못했다.

 

모차르트와 마찬가지로 베토벤은 항상 공식적인 수입원이 없이 생계를 유지해나갔다. 그러나 베토벤은 돌봐야 할 가족이 없다는 점에서 모차르트보다 경제적으로 더 나은 위치에 있었다. 유럽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던 라이프치히의 〈국민음악 신문 Allgemeine musikalishe Zeitung〉의 평론가들은 베토벤에 대해서만큼은 오랜 관습인 거만한 비방조에서 벗어나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따라서 베토벤은 아직 저작권 개념이 채 형성되지 않던 시대였지만 하이든이나 모차르트 같은 앞선 작곡가들이나 슈베르트와 후대의 작곡가들에 비해 출판업자와 훨씬 더 유리한 조건의 흥정을 할 수 있었다.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인한 빈 음악계의 여러 제약에도 불구하고, 베토벤은 자신의 의욕적인 작품들을 공연하는 데 그다지 어려움을 겪지 않아도 되었는데 이것은 물론 베토벤을 후원한 리히노프스키 공 같은 후원자들 덕분이기도 했다. 리히노프스키 공은 베토벤에게 매년 정규적으로 600플로린을 지급해주었고, 그밖에도 교향곡 4번을 헌정받은 오페르스도르프 백작처럼 베토벤에게서 곡을 헌정받은 여러 귀족들은 후한 대가를 치러주었다. 황제의 동생인 루돌프 대공은 베토벤의 제자가 되기도 했다. 따라서 베토벤에게 가난은 그다지 심각한 위협이 되지는 않았지만, 귓병이 점차 악화된 데다가 화를 잘 내는 습성이 겹쳐 점점 빈 음악가들과 관계가 악화되었다. 1808년 5번 교향곡과 6번 교향곡을 초연한 자선 연주회(이 연주회에서는 〈코랄 판타지아 Choral Fantasia〉 작품80도 연주됨)에서 사람들과 크게 다툰 베토벤은 아예 빈을 떠날 결심을 했다. 이러한 그의 결심을 전해 들은 그의 후원자 루돌프 대공, 로프코비츠 후작, 킨스키 후작 등은 베토벤이 빈에 계속 남아 작곡활동을 하기만 하면 세 사람이 합심해 매년 4,000플로린을 그에게 지급할 것을 제시했다. 이 계약은 베토벤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계속되었지만, 그 사이에 1811년 화폐가치가 절하되는 등 몇 가지 상황 변화가 일어났다. 그러는 동안 루돌프 대공은 후원금을 높여주었고 이어서 다른 귀족들도 이것을 따랐다. 1809년 이후 베토벤은 비교적 여유있는 생활을 할 수 있었는데, 그럼에도 그의 생활 습관 때문에 그를 방문한 사람들에게는 그가 무척 가난한 생활을 하는 것처럼 여겨졌다. 사람들 앞에 나타나는 횟수도 점차 줄어들었다.

 

베토벤은 진지하게 결혼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1801년에 친구 베겔러에게 보낸 서신에는 '사랑하는 나의 아름다운 여인이여'라는 글귀가 인용되어 있다. 이 편지는 브라운슈바이크 백작의 딸이며 그의 피아노 제자인 테레제와 요제핀의 사촌인 줄리에타 주치아르디 백작부인에게 보낸 것으로 여겨진다. 그가 일명 〈월광 Mondschein〉으로 알려진 피아노 소나타 C#단조 작품 27-2를 헌정한 대상도 바로 줄리에타 백작부인이었다. 그러나 줄리에타는 1803년 갈렌베르크 백작과 결혼했고, 이후 베토벤은 그녀를 어느 정도 경멸했지만 커다란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 베토벤은 그녀의 사촌인 요제핀에게도 결혼 신청을 했다(그녀의 전 남편인 폰 다임 백작은 1804년 세상을 떠남). 둘의 만남은 3년 정도 계속되었지만 베토벤의 우유부단한 성격과 요제핀 가족의 압력으로 끝이 나고 말았다. 1810년에는 테레제 말파티라고 하는 자신의 주치의 딸과도 결혼설이 나돌았지만 이것 역시 무산되고 말아 결국 베토벤은 총각으로 남았다. 그러나 베토벤이 죽고 나서 잠겨진 한 서랍에서는 여성에 대한 베토벤의 심정과 관련해서 호기심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3통의 편지가 발견되었다. 이 편지들은 '불멸의 여인' 앞으로 씌어진 것들로서 베토벤은 이 편지들을 쓰고 난 뒤 아무에게도 보내지 않고 서랍에 보관해 둔 셈이다. 이 편지의 내용은 시적 정서에 잔뜩 부풀려진 것에서부터 건강과 생활의 불편함에 대한 사소한 불평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며, 따라서 이 편지들이 문장 연습을 위해서가 아니라 어떤 특정인에게 보낼 의도로 씌어진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준다. 달과 날은 적혀 있지만 연도는 적혀 있지 않은데, 여러 가지 추측들 중 1801~02년, 1806~07년보다는 1811~12년일 것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해 보인다. 물론 수신인이 누구인지는 추측할 수 없다.

 

1810년 E. T. A. 호프만은 베를린에서 교향곡 5번을 극찬했고, 이것을 계기로 이 작품은 전세계적으로 인기를 누렸으며 특히 낭만주의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해에 베토벤은 작가 베티나 브렌타노를 알게 되었는데, 그녀는 독일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클레멘스 브렌타노의 누이이며 후일 아힘 폰 아르님의 아내가 되었는데 독일 민요집 〈어린이의 이상한 뿔피리 Des Knaben Wunderhorn〉를 편찬했다. 베티나가 베토벤에게서 받았다고 주장한 여러 편지들 중에 오직 하나만이 베토벤이 쓴 진품임이 입증되었고, 나머지 중에 1통은 별다른 특성 없는 낭만적 어투로 음악에 대한 철학론을 펼치는 내용이며, 베토벤이 쓰지 않은 것이 확실하다. 베티나는 1812년 타플리츠에서 베토벤과 괴테를 만나게 해준 사람이기도 했다. 둘 사이의 관계는 다소 일방적인 것이어서, 베토벤은 괴테를 존경했지만 괴테는 베토벤에 대해 유명한 작곡가 이상으로 별다른 매력을 느끼지 못한 듯하다. 베토벤이 음악 출판업자인 브라이코프와 헤르텔에게 보낸 서신에는 "괴테는 시인답지 않게 궁정의 분위기를 너무 좋아한다……"고 적혀 있는데, 이것으로 미루어 두 사람의 만남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괴테는 베토벤에 대해, "길들여지지 않은 성품의 소유자이며 세상을 혐오하는 것 자체는 나쁠 것 없으나, 그래도 이러한 그의 태도는 그 자신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그다지 유쾌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괴테는 1810년 씌어진 〈에그몬트 Egmont〉의 부수음악을 '순수한 사랑'으로 관심을 표명했다.

1811년부터 다음해까지 작곡된 곡들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교향곡 7번과 8번이었다. 이중 7번 교향곡은 1813년 초연되었는데, 이 연주회에서는 후일 웰링턴공이 된 아서 웰즐리가 빅토리아 전투에서 나폴레옹에게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쓴 〈전투교향곡 Battle Symphony〉도 초연되었다. 원래 이 곡은 메첼이 발명한 판하르모니콘이라고 하는 악기로 연주하도록 작곡되었지만, 베토벤은 후에 이 작품을 관현악곡으로 편곡했다. 베토벤은 솔직하게 이 작품이 가장 열악한 표제음악이라고 생각했는데 그에게 이 곡은 일찍이 〈전원 교향곡〉에서 표현했던 것 같은 '회화적 재현이 아닌 느낌의 표현'이라는 표제음악의 이상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곡이었다. 그러나 이 작품이 성공을 거두자 그는 기꺼이 이 작품을 관현악곡으로 편곡했다. 심지어 이 곡의 악보를 복사해서 섭정을 하고 있던 영국의 조지 왕세자에게 보냈으나 조지 왕세자는 이것을 받고도 아무런 소식을 전하지 않아 그를 화나게 했다. 이 연주회로 그는 많은 경제적 이득을 얻었지만 한편 메첼과 다투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1811년 화폐가치가 절하되었지만 1813년부터 이듬해까지 베토벤은 경제적으로 손해를 면할 수 있었다. 7번 교향곡의 초연은 대단히 성공적이었고, 청중은 이 곡의 알레그레토 악장을 반복해서 연주할 것을 요구할 정도였다. 베토벤의 음악은 전유럽에 알려졌으며 〈피델리오〉는 엄청난 인기를 누렸고, 베토벤은 애국적 칸타타 〈영광의 순간 Der glorreiche Augenblick〉으로 프랑스의 몰락을 기념했다. 전쟁이 다 끝난 1814년 빈은 짧은 순간 승리감에 도취되었지만, 얼마 안 가 오스트리아의 경제가 붕괴되고 빈 이후 거의 40년 동안이나 침체상태를 면하지 못했다.

 

메테르니히의 오랜 통치와 이른바 비스마르크 시대가 계속되면서 예술은 소박한 상태를 면하지 못하고 베토벤의 창작 시기는 또다른 국면을 맞았다. 게다가 그는 귓병으로 인해 전보다 더욱 사람 만나는 것을 꺼렸다. 새로 작곡하는 작품의 숫자도 줄어들었다. 1815~27년에 작곡된 작품은 1792년 이후 작곡된 전체 작품의 양에 비할 때 아주 적은 부분에 불과했다. 그러나 소수의 작품이지만 이 시기의 작품들은 이전에 그가 작곡한 어떤 작품들보다도 음악적으로 깊이가 있고 작곡가의 성숙한 관념의 세계가 반영되어 있었다. 한편 점차 비사교적으로 되어간 그는 자기 자신과 경제적인 문제에 더욱 신경을 곤두세웠지만 언제나 좋은 결과를 본 것만은 아니었다.

이무렵 베토벤은 런던의 필하모닉 소사이어티와 관계를 맺게 되었다. 일찍이 1803년 베토벤은 에든버러의 출판업자 조지 톰슨을 만나 자신이 스코틀랜드의 민요를 가지고 소나타를 작곡하면 이것을 출판해줄 것을 의뢰했었다. 비록 처음에 계획한 소나타는 결실을 보지 못했지만 조금 시간이 지난 뒤에 톰슨은 그에게 성악·바이올린·첼로·피아노를 위한 민속 선율을 편곡해줄 것을 요청했다. 결국 그는 편곡을 완성함으로써 이후 몇 년 간 좋은 수입을 얻을 수 있었다. 더욱이 1815년에 제자인 페르디난트 리에가 런던에 정착해 필하모닉 소사이어티의 창설자 중 하나가 된 것을 계기로 런던의 음악 애호가들은 새롭게 베토벤의 작품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 단체의 또다른 회원인 찰스 니트는 빈에 있는 베토벤을 방문했고, 나중에 이 단체 이름으로 새로 3개의 서곡을 의뢰했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작곡된 〈슈테판 왕 König Stephan〉·〈명명(命名) 축일 Namensfeier〉·〈아테네의 멸망 Die Ruinen von Athen〉들은 너무 늦게 도착했을 뿐 아니라 나중에 이것들이 새로 작곡된 것이 아님이 밝혀짐으로써 단체와의 관계가 좋지 않게 되었다. 이러한 불편한 관계는 한동안 계속되었고, 페르디난트 리에가 중재를 위해 많은 노력을 했지만, 1813년으로 계획된 런던 방문은 베토벤이 원했지만 성사되지 못했다. 그러나 필하모닉 소사이어티는 베토벤의 음악에 대한 관심을 계속 버리지 않았고, 이것이 어떤 의미에서 이 단체가 위촉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9번 교향곡의 탄생에 중요한 몫을 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런던이 아닌 빈에서 초연되었고 악보에 기록된 헌정 대상도 프로이센의 왕 빌헬름 프리드리히 3세였다. 베토벤은 병상에 누워 필하모닉 소사이어티가 100파운드의 돈을 보내왔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깊이 감동했다.

1815년 동생 카스파르 안톤 카를이 죽자 해외여행 계획을 포기해야 했다. 카스파르 안톤 카를에게는 미망인 요한나와 9세 된 어린 아들 카를이 있었는데, 유언으로 베토벤과 미망인을 아들 카를에 대한 공동 후견인으로 지목했다. 베토벤은 미망인의 부도덕성을 들어 자기 혼자 후견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법적으로 주장했고, 이후 3년간이나 재판이 계속된 끝에 베토벤이 승소했다. 어린 카를에 대한 베토벤의 사랑은 상당히 지대한 것이었지만, 베토벤은 그렇게 좋은 후견인은 될 수 없었다. 삼촌인 베토벤과 어린 카를 사이에 심한 말다툼이 자주 벌어졌고, 급기야 1826년 카를이 대학시험 준비 도중 자살 기도를 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다행히 병원에서 회복한 카를에 대해 베토벤은 다소 못마땅한 마음이었지만 친구들의 권고를 받아들여 군대에 들어가게 했다. 그러나 그는 군대에서 그렇게 잘 지내지는 못했고, 베토벤에게도 이 사건은 심한 상처가 되어 결국 죽음을 재촉한 결과가 되었다.

 

 

 

만년의 중요한 작품들 중에 피아노와 첼로를 위한 2개의 소나타 작품102와 피아노 소나타 B♭ 장조 작품106(후일 '해머클라비어'라 불리게 됨)을 빼놓을 수 없다. 9번 교향곡의 작업을 다시 시작했지만 루돌프 대공이 올뮈츠의 대주교로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다시 작곡을 중지하고 대공의 서품식을 위해 대규모의 〈장엄 미사 Missa Solemnis〉를 작곡하기 시작했다. 작곡은 아주 느린 속도로 진행되었고, 결국 예전에 요제프 2세를 위한 칸타타 작곡과 마찬가지로 제 시간에 맞추어 작곡하는 데 실패했다. 서품식이 지난 3년 뒤인 1823년이 되어서야 베토벤은 이 작품을 완성해 대주교에게 보냈다.

한편 1820~22년 최후의 피아노 소나타 3개를 작곡했고, 교향곡 작곡을 위해 잡다한 스케치 악보를 작성했다. 그러는 동안 작곡가 안톤 디아벨리는 베토벤과 슈베르트, 루돌프 대공 등에게 변주곡의 주제를 보냈는데, 그는 처음엔 거절했지만 후에 이 주제로 33개의 변주로 된 〈디아벨리 변주곡〉(1823)을 완성했다.

9번 교향곡도 제모습을 갖추어가기 시작해서 이듬해인 1824년 완성되어 〈장엄 미사〉의 몇 악장 등과 함께 초연되었다. 이 교향곡의 초연에 직접 지휘를 맡았는데, 귓병으로 인해 연주가 끝난 뒤 쏟아져나온 우뢰와 같은 박수 갈채도 듣지 못하다가 독창자들이 그를 청중 쪽으로 돌려세워주자 비로소 그 광경을 볼 수 있었다.

9번 교향곡은 대규모 작품으로는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 1823년에 마지막으로 니콜라스 갈리친 공작으로부터 50더컷(ducat)과 함께 3개의 현악 4중주를 의뢰받았다. 그는 이 의뢰를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1825년이 되어서야 이중 첫번째로 현악 4중주 E♭장조 작품127을 완성할 수 있었다. 이후 예정된 것보다 2곡이나 더 많은 4곡의 현악4중주를 더 작곡했다. 카를이 자살을 기도한 1826년 마지막으로 작곡한 현악4중주 B♭장조 작품130을 완성했다. 여름 동안 생존한 형제 니콜라우스 요한의 집에서 보내고 빈으로 돌아오던 길에 결핵에 걸려 결국 회복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는 병상에 눕게 되었고, 1827년 3월 26일 빈에서 간경변증으로 사망했다. 3일 뒤에 치러진 장례식에는 2만여 명의 조문객들이 참석했다. 운구자 중에는 유명한 피아니스트 후멜이 포함되어 있었고, 슈베르트는 횃불을 들었으며, 오스트리아의 위대한 극작가 프란츠 그릴파르처가 추도사를 썼다.

 

베토벤의 업적

그의 가장 커다란 업적은 성악음악에 대해 열등한 것으로 여겨진 기악음악을 최고의 위치로 부상시킨 데 있다. 비(非)모방예술인 음악은 18세기에 모방예술인 문학이나 회화에 비해 열등한 것으로 여겨졌다. 음악 중에서 칸타타·오페라·오라토리오와 같은 장르는 가사의 도움을 받기 때문에 높은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지만, 소나타나 모음곡 등과 같이 순전히 기악으로만 된 음악 장르들은 낮은 위치에 머물렀다. 이러한 생각에 차츰 변화를 일으킨 데에는 여러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우선 만하임 악파 관현악단의 부상으로 기악이 위용을 떨쳐 교향곡이 발전할 수 있었고, 느낌을 선호하고 순수이성에 반기를 든 작가들의 노력도 한몫을 했으며, 하이든·모차르트와 더불어 베토벤의 활동이 크게 기여했다. 이로써 영국의 수필가이자 비평가였던 월터 페이터가 말한 "모든 예술은 음악의 상태를 열망한다"라는 낭만주의 후기의 유명한 구절이 나타나게 되었다.

베토벤 이후에는 이제 더이상 음악을 '귀에 듣기 좋은 소리 예술' 정도로 표현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게 되었다. 그의 기악 작품들은 느낌의 강렬한 강도와 이제까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완벽한 구성을 결합시켰다. 그는 오페라와 노래를 제외하고 기존의 음악 형식들, 특히 교향곡과 현악 4중주를 발전의 정점으로 올려놓았으며, 이것은 이전의 선배 작곡가들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이 점에서 대부분의 작품이 오페라와 협주곡에 경도된 모차르트보다는 하이든에 더 가까웠다.

작품활동

처음으로 베토벤의 작품을 세 시기로 나눈 사람은 베토벤 전기작가 빌헬름 폰 렌츠인데, 그는 제1기를 본의 습작시기를 제외한 1794년 피아노·바이올린·첼로를 위한 3개의 3중주 작품1부터 시작해 교향곡 1번과 6중주곡을 처음 공개 연주한 1800년 전후로 잡았다. 제2기는 피아노 소나타 C#단조 〈월광〉을 작곡한 1801년부터 피아노 소나타 E단조 작품90을 작곡한 1814년까지로 잡았으며, 제3기는 1814년부터 세상을 떠난 1827년까지로 잡았다. 이러한 그의 구분은 유용한 것이기는 하지만 엄격하게 적용된 것은 아니었다. 한 작품의 작곡이, 렌츠가 분류한 어느 한 시기에 시작했더라도 다른 시기에 완성된 경우가 많았으며, 따라서 피아노 협주곡 3번이나 교향곡 2번과 같은 곡들은 제1기와 제2기에 모두 걸쳐 있는 셈이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작곡가로서 베토벤의 성숙기는 어떤 악기로 작곡을 했느냐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그중 피아노는 그에게 가장 친숙한 악기로 작곡의 근간이 되었다. 1800년 이전에 작곡된 그의 피아노 소나타들에는 이미 제2기의 특성이 먼저 나타나고 있는 반면, 미사곡의 경우에는 그에게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령 C단조 미사곡은 피아노 협주곡 4번이나 〈라주모프스키 현악 4중주〉 등과 같은 시기에 작곡되었지만 여러 가지 점에서 초기 작품들의 성향을 보이고 있다.

제1기의 작품으로는, 교향곡 1번과 피아노 협주곡 1·2번을 제외하면 거의 실내악에 국한되는데 이 작품들은 대부분 그가 연주하던 악기인 피아노를 기초로 만들어졌으며, 그는 18세기의 장인적 기교에 심취했다. 대부분 음 재료들은 하이든 및 모차르트와 유사한 특성을 보이지만 당시의 양식을 운용하는 데 있어서 좀더 거칠었다. 대개 당시 사용하던 형식들을 확장시켰는데 예를 들어 교향곡이나 소나타에서 1악장 제시부는 길이가 늘어나고 복수 주제가 사용되었으며, 발전부는 상대적으로 길이가 줄었다. 느린 2악장에서는 길이가 늘어나고 장식을 많이 한 서정적인 성격을 띠었다. 3악장(스케르초 악장이라 부르는 경우가 많음)은 미뉴에트 악장 원래 모습에 비교적 충실했지만 흔히 미뉴에트풍과는 다른 리듬 패턴을 사용하기도 했고, 끝으로 4악장은 대담하고 명확하다. 그러나 당시의 다른 작곡가들과 구별되는 가장 중요한 특성은 셈여림의 대조에 대한 개성적인 처리, 특히 '크레셴도'(점점 세게)에 바로 이어 급작스럽게 '피아노'(여리게)가 나타나는 기법과 예기치 않은 강세와 모호한 리듬, 피아노 소나타들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즉흥연주풍 기교(언뜻 들어서는 아주 보잘것없고 의미없어 보이던 음재료에서 의미심장한 결과를 만들어내는 기법)에 있었다.

 

제2기는 1801년에 작곡된 2개의 '환상곡풍'(quasi una fantasia) 소나타로 시작하지만, 교향곡과 협주곡 분야에서는 교향곡 3번 〈영웅〉(1804)과 피아노 협주곡 4번(1806)이 작곡되기 전까지는 아직 이 기간의 특징이 나타나지 않았다. 이 기간에는 즉흥연주풍 음재료의 사용이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지만, 이전 시기에는 18세기의 전통적 틀 속에 이것이 얼마나 잘 흡수될 수 있는가에 관심을 기울였던 것에 반해, 이제 그는 규범으로부터 이탈이 갖는 논리적 의미를 좀더 꼼꼼히 탐색했다. 기본적으로 간단한 화성을 사용했고(모차르트와 비교할 때 좀더 간단한 편이었음) 기본박에 관련해 화성을 운용하는 기법이 새로워졌다.

베토벤은 이 기법을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강세를 두어 주요주제들에 변화를 꾀함으로써 각 악장의 윤곽이 결정되었다. 결론적으로 어떤 작곡가들보다도 실험적이었는데 그는 한번 시도한 것을 또다시 반복하는 법이 없었다. 모든 작품들, 특히 중기 및 후기 작품들은 형식면에서 저마다 독특한 개성을 갖추었다. 1악장의 제시부가 짧아졌고 발전부와 코다가 길어졌으며, 2악장은 더욱 짧아져서 거의 생략된 듯하고, 3악장은 이제 완전히 미뉴에트가 아닌 스케르초 악장으로서 면모가 두드러져 예기치 않은 강세와 당김음을 자주 사용했다. 마지막 악장은 앞선 악장에 비해 더 무거운 느낌을 갖는 경우가 많았고, 어떤 경우에는 가장 중요한 악장으로 부상하기도 했다. 음들이 선율이나 화성적인 면에서 기능적으로 사용됨에 따라 장식음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제3기에는 악상이 더욱 압축된 반면 화성이나 짜임새의 영역은 점차 확대되었다. 헨델에 열중한 그는 좀더 철저하게 대위법을 구사함으로써 결실을 맺기 시작했다. 그러나 베토벤은 앞선 시기에서 보여주었던 단순성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리지 않았고, 따라서 이 시기의 표현과 느낌의 영역은 다른 어떤 시기보다도 앞선 것이었다. 당시 그가 점점 더 크게 관심을 쏟았던 영역은 변주곡이었다. 즉흥연주 기질은 언제나 변주곡이라는 장르와 잘 부합되었고, 3번 교향곡 〈영웅〉의 마지막 악장이나 〈프로메테우스 Prometheus〉 변주곡(2가지 모두 같은 주제로 작곡되었음) 등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이 장르에서 뛰어난 작품들을 많이 남겼다(물론 이전에 출판된 변주곡 작품들은 장식적인 성격만 갖고 있을 뿐 그다지 독특한 특성을 펼치지는 않았음). 마지막 시기인 제3기의 음악적 특징은 바로 변주곡 장르에서부터 개발되기 시작했다. 그의 말기 현악4중주나 소나타들에서 나타나는 변주곡의 독특한 특성은 축조적 건축의 개념에서 자라나는 것이었다. 현악4중주들에서는 푸가, 변주기법, 춤곡, 행진곡, 소나타 악장, 심지어 선법적·5음음계적 선율 등 그의 모든 음악기법들이 동원된다.

구조의 혁신

베토벤은 조성의 건축적 사용이라 할 수 있는 기법을 최초이자 최상의 수준으로 발휘했다. 〈영웅〉 교향곡의 1악장(알레그로)과 같은 그의 위대한 소나타 악장들을 듣고 있으면 아주 먼 조로 움직이고 있다 하더라도 청자의 무의식적 마음이 E장조를 계속 지향하게 된다. 따라서 재현부로 돌아오기 오래 전에 딸림조(B장조)의 모습을 조금 비추면 금방 그것을 딸림조로 인식할 수 있다. 그밖에 교향곡과 현악 4중주에서 그가 이룬 혁신 중에 또다른 특별한 점은 미뉴에트 악장을 좀더 역동적인 스케르초 악장으로 대체한 것이다. 그는 관현악과 현악 4중주에서 새로운 영역의 울림과 다양한 짜임새를 개척했다.

협주곡에서도 이러한 혁신적 면모는 비슷한 양상으로 나타났다. 엄밀히 말해서 그는 협주곡에서도 형식적 개혁을 시도하지는 않았다. 한 예로 피아노 협주곡 4번과 5번에서 그는 관현악에 의한 리토르넬로에 앞서서 독주악기를 처음 도입했는데 이것은 이미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에서 사용한 시도였다. 9번 교향곡의 마지막 악장이나 〈장엄 미사〉에서 베토벤은 합창효과를 능란하게 사용했지만, 독창 성부의 운용은 끝까지 그에게 처리하기 어려운 문제로 남았다. 수많은 가곡들은 아마도 그의 작품들 중에서 가장 열등한 영역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유일한 오페라 〈피델리오〉가 작품으로서 뛰어난 것도 오페라라는 매체를 그가 잘 이해했다기보다는 전체적으로 음악 자체를 워낙 잘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모차르트나 하이든과 같은 작곡가들에게 선율은 언제나 성악적 성격이 강했고, 따라서 이들은 베토벤 〈영웅〉의 1악장같이 선율이 기악적 성격으로 된 곡은 상상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2악장에서는 서로 다른 세 악기들이 이루는 단편들이 한데 모여서 하나의 선율을 이룬다. 바그너가 베토벤을 기악적 선율의 발명자라고 했던 것도 사실은 그다지 억지가 아니었다.

베토벤은 피아노 음악의 역사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가 활동할 당시 피아노 소나타는 당시의 실내음악 형식들 중 가장 친숙한 것으로 현악4중주보다도 더 인기가 높았다. 피아노 소나타는 대중적인 공개 연주회에서도 자주 연주되었다. 베토벤에게 피아노 소나타는 대담무쌍한 그의 내적 이상을 전달하기에 가장 적합한 수단이었다. 그는 쇼팽이나 리스트와 같은 후대 작곡가들이 피아노의 타악기성(지속음을 낼 때의 한계)을 극복하기 위해 개발해낸 여러 피아노 기법들은 예견하지 못했다. 이것은 우선 베토벤 자신이 뛰어난 실력을 갖춘 피아니스트로서 아주 간단한 구조로 된 선율이라 하더라도 '노래부르는' 것처럼 성악적으로 만들 수 있었고 또한 피아노 자체가 발전의 초기 단계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베토벤이 피아노의 타악기적 성질을 높이 평가했고 그것을 쓸모있게 사용할 줄 알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피아노 소리는 해머로 현을 쳐서 내기 때문에 아무리 연주자가 프레이징을 잘 처리한다 하더라도 현을 켜서 내는 바이올린처럼 소리를 지속시킬 수는 없다. 피아노는 지속음을 내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지속음이 나는 것처럼 만드는 것이다. 베토벤은 이러한 피아노의 한계를 그대로 인정하고 선율을 만든 유일한 작곡가였다. 그는 피아노를 다른 악기들과 결합시키는 데는 그다지 능숙하지 않았으므로 그의 피아노와 다른 악기를 위한 듀오 소나타들은 다소 저급한 수준에 그쳤지만, 피아노 소나타의 영역에서만큼은 즉흥기법을 건축적으로 사용하는 데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후대의 작곡가들 가운데 첫 악장에서 마지막 악장까지 작품 전체를 하나로 연결해주는 베토벤의 축조적 성질을 가장 성공적으로 계승한 사람은 리스트로, 리스트의 교향시들과 2개의 피아노 협주곡에 잘 나타나 있다. 후대 작곡가들에게 가장 커다란 영향을 준 베토벤의 두 작품은 5번과 9번 교향곡인데 모두 역경을 헤치고 이룬 승리를 다루고 있다. 브람스의 교향곡 1번 C단조, 차이코스프키의 교향곡 5번 E단조, 세자르 프랑크의 교향곡 D단조, 말러의 교향곡 2번 C단조 등은 모두 이러한 베토벤의 불굴의 영혼을 계승한 후대 작품들이지만, 이것들조차 베토벤의 작품과 동등한 수준에 놓을 수는 없다.

 

 

* 출처: 다음 백과-J. M. Budden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