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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에 대하여

Bawoo 2014. 7. 8. 21:49

베토벤 (Beethoven) 

생몰 1770년 12월 17일 ~ 1827년 3월 26일

출생지 독일

 

루트비히 판 베토벤(1770년 12월 17일 ~ 1827년 3월 26일)은 독일의 서양 고전 음악 작곡가이다. 거의 오스트리아 빈에서 살았다.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전환기에 활동한 주요 음악가이며, 작곡가로 널리 존경받고 있다. 가장 잘 알려진 작품 가운데에는 〈교향곡 3번〉, 〈교향곡 5번〉, 〈교향곡 6번〉, 〈교향곡 9번〉, 피아노곡 〈엘리제를 위하여〉, 〈비창 소나타〉, 〈월광 소나타〉 등이 있다.

유년 시절

베토벤의 할아버지는 네덜란드의 플랑드르 출신의 음악가로, 손자와 동명인 루트비히 판 베토벤(1712년~1773년)이었다. 할아버지 베토벤은 17살에 독일로 이주하여 쾰른 선제후 궁정의 베이스 가수로 취직해서 악장(Kapellmeister)으로 승진하였다. 그의 외아들 요한 판 베토벤(1740년~1792년)도 같은 곳에서 테너 가수로 일하였으며 피아노바이올린 교습으로 부수입을 벌었다. 요한은 1767년 마리아 막달레나 케베리히(Maria Magdalena Keverich)와 결혼하였는데, 마리아는 트리어 대주교 궁정의 수석 요리사였던 요한 하인리히 케베리히(Johann Heinrich Keverich)의 딸이었다.

 부친

베토벤의 첫 음악 교사는 아버지 요한이었다. 흔히 요한은 가혹한 선생이며, 어린 베토벤을 "건반악기에 세워놓았으며, 아이는 대개 울고 있었다"고 회자된다. 그러나 그로브 음악 및 음악가 사전에서는 요한의 그런 행동에 대한 확실한 기록 증거가 없다고 지적하며, "억측과 속설은 둘 다 늘어나는 법."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베토벤은 다른 음악 선생으로는 판 덴 에덴(van den Eeden)의 궁정 오르간 주자인 토비아스 프리드리히 프파이퍼(Tobias Friedrich Pfeiffer)가족의 친구이며, 베토벤에게 피아노를 가르쳤다. 친척 [1](Franz Rovantini) 에게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가르침이 있었다. 베토벤의 음악적 재능은 어릴 때부터 두각을 드러내어, 9살 나이(속설에서 말하는 7살이 아닌)에 공연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당시 레오폴트 모차르트의 명성을 알고 있던 아버지 요한은 아들을 신동으로 삼아 돈을 벌려 했으나 결과는 시원찮았다. 1778년 3월 베토벤의 첫 대중 공연회 포스터에서 요한은 거짓말로 아들 베토벤이 6살이라고 주장하였지만 실제로는 7살이었다.

 음악수업

1779년 이후 어느 시기에 베토벤은 본에서 자신의 가장 중요한 교사였던 크리스티안 고틀로프 네페에 음악 수업을 받게 되는데, 그는 같은 해 궁정 오르간 주자로 임명된 사람이었다. 네페는 베토벤에게 작곡을 가르쳤으며, 1783년 3월 베토벤이 처음으로 출판한 곡인 드레슬러 행진곡에 의한 9개의 건반 변주곡(WoO. 63)을 작곡하는 데 도와주었다. 베토벤은 곧 네페의 보조 오르간 주자로 일하였는데, 처음에는 임금을 받지 않은 일이었으나(1781년), 나중에 악장 안드레아 루체시가 지휘하는 궁정 예배당에 고용되었다.

사람들과의 만남

폰 브로이닝 집안과의 만남

베토벤은 여러 사람들에게 소개받아, 이때부터 그의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젊은 의대생 프란츠 베겔러(Franz Wegeler)는 그를 폰 브로이닝 집안(von Breuning, 나중에 베겔러는 이 집안의 딸과 결혼하게 된다.)에 소개해 주었다. 베토벤은 종종 폰 브로이닝 집안에 갔는데, 여기서 그는 독일 문학과 고전 문학을 접하였으며, 이 곳 아이 몇몇에게 피아노를 가르쳐주었다. 폰 브로이닝 가의 환경은 알코올 의존증환자인 아버지의 통제가 점점 심해지는 자신의 집안에 비교한다면 편안한 곳이었다. 이 시기에 베토벤은 페르디난트 폰 발트슈타인 백작과 알게되어 그는 평생 친구이자 재정 지원자가 되었다.

 모차르트와의 만남

평소 모차르트를 존경해왔던 베토벤은 오스트리아의 빈으로가서 그와 만나고 싶어했으나 쉽지않았다 그것은 집안사정이 가난해 자신의 동생과 부모를 먹여살려야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당시 어머니는 병을 앓고 있었고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이기 때문에 사실상 가족을 돌보는 사람은 베토벤밖에 없었다. 따라서 베토벤도 빈으로 가겠다는 생각은 단념한지 오래였다. 그러던 중 1784년 그의 스승인 네페의 도움으로 빈으로 갈수있는 교통비와 숙박비를 얻은뒤 부모의 동의를 얻어 빈으로 갈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는데, 이때 당시 불과 그의 나이 14세때였다. 모차르트는 자신을 만나기위해 빈으로 찾아온 베토벤을 정겹에 맞이하는 한편 그의 실력을 알아보기 위해 자신이 연주한 짦은 음악마디로 베토벤에게 즉흥곡을 만들보라고 지시한다. 조금의 주저함도없이 베토벤이 즉흥곡을 만들어 기대 이상으로 연주하자 감탄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이후 베토벤은 모차르트에게 음악교육을 받기 시작했으며 이때 모차르트는 베토벤에게 받는 교육비를 일절 거절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의 만남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독일(프로이센)에 있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결국 이 사정을 모차르트에게 말한 뒤 빈을 갑작스레 떠나게 된다. 이것이 모차르트와의 마지막 만남이었으며 만난지 불과 1달만의 일이다. (그뒤 하이든을 만나기 위해 다시 빈을 방문하게 되는데 이때가 1792년으로 모차르트 사망 1년후이다)

 궁정 교향악단

1789년 음악가였던 아버지의 뒤를이어 베토벤은 법적 지위를 얻어 집안을 부양하기 위해 아버지가 받는 월급의 반을 받을 수 있었고,궁정 교향악단에서 비올라를 연주하여 가족의 수입으로 삼았다. 교향악단에서의 경험으로 그는 모차르트의 세 오페라 작품을 비롯하여 당시 궁정에서 연주하던 다양한 오페라에 익숙해졌고, 당시 지휘자의 조카이며 자신과 거의 동갑이던 플루트 및 바이올린 주자 안톤 라이하(Anton Reicha)와 친구가 되었다.

 하이든과의 만남

선제후의 도움으로 1792년 베토벤은 으로 갔다. 아마 1790년대 말 당시 런던으로 가던 요제프 하이든성탄절 쯤에 본에서 머물 때 그에게 처음으로 소개받은 것으로 보인다. 하이든은 베토벤이 작곡한 2곡의 장송칸타타(WoO.87,WoO.88) 악보를 보고 그의 재능을 인정하여 베토벤을 자신의 제자로 받아들이게 되어 1792년 7월에 런던에서 빈으로 귀환한 뒤부터 베토벤과의 인연이 시작된다. 베토벤이 본을 떠날때 그의 친구들이 이별의 인사말을 적은 기념노트를 보면, 빠른 날자는 8월 24일(리히터가 쓴 것), 늦은 날짜는 11월 1일(브로이닝이 쓴 것)이므로, 베토벤이 빈으로 떠날 준비 기간과 출발시간을 거의 가늠할 수 있다.

11월 10일에 빈에 도착한 베토벤은 즉시 하이든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하이든은 그에게 만족했지만, 베토벤은 실제로 가르침을 받다보니 이전의 위대한 우상이었던 거장 하이든에게 여러가지로 실망을 느끼게 되었다. 특히 하이든이 고치고 돌려준 베토벤의 악보를 본 요한 셍크(Johann Schenk, 1753-1836)가 미처 하이든이 발견하지 못했던 많은 오류와 잘못을 지적해주자 하이든에 대한 불신감은 더욱 깊어졌다. 베토벤은 마침내 "하이든에게서는 아무 것도 배울 것이 없다"고 선언하게 되었다. 당시 하이든이 베토벤에게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았다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지만 하이든의 느긋하고 여유있는 성격을 생각해보면 누군가에게 가르친다는 일이 적성에 맞았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런데다 가르치는 상대가 젋은 혈기에 급한 성격으로 알려진 베토벤이었으니 둘이 서로 잘 맞지 않았음은 당연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후 베토벤은 당시 빈에게 뒤어난 이론가로 통하던 요한 알브레히츠베르거(Johann Georg Albrechtsberger, 1736~1809)에게 가르침을 받고, 모짜르트의 연적으로 알려진 안토니오 살리에리(Antonio Salieri, 1750~1825)에게 성악곡 작곡을 배운다. 그리고 1793년말, 결국 베토벤은 하이든 곁을 떠나지만 두 사람간의 불화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확실치 않다. 베토벤이 스스로 가장 만족해하던 C단조 3중주곡을 출판하지 말라고 하이든이 충고한 것 때문에 베토벤은 심한 상처를 받았던 일도 있듯이, 어쨌든 두 사람 사이에 뭔가 개운치 않은 앙금이 있었던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1794년, 하이든이 두 번째 영국 여행을 떠나자 베토벤은 선생님을 바꿀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토벤은 1795년 피아노 소나타 1~3번 작곡을 완성하여 하이든에게 헌정하였으며, 그해 8월 하이든이 빈으로 돌아왔을때 카를 리히노브스키 후작 저택의 연주회에서 직접 들려주었다. 이 3곡의 소나타가 작품2로 출판되었다는 사실은 하이든과 베토벤의 사이가 결정적으로 나쁜 것은 아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베토벤 쪽에서 말하자면 하이든은 과거의 업적을 놓고 볼 때 역시 위대한 대선배였다. 단지 그는 자시의 향학열을 만족시켜주지 않은 것에 대한 불만을 가졌을 뿐이었다. 또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지위와 연륜을 갖춘 하이든 쪽에서 볼 때도 신출내기 청년 음악가의 불평이나 불만 따위에 일일이 대응하여 신경을 쓸 필요가 없었다. 그런 사정이 두 사람 간의 돌이킬 수 없는 불화를 막아준 것이라고 여겨진다.

피아노 3중주 1~3번 작품1과 피아노 소나타 1~3번 작품2를 작곡한 것 외에 그 당시에는 출판되지 않은 상당수의 곡을 작곡하는데 오늘날에는 대부분 WoO작품번호로 분류된다. 그의 작품을 볼수록 작곡 양식이 성숙해지고 범위가 넓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음악학자들은 1791년에 쓴 어느 변주곡집에서 그의 교향곡 3번의 주제와 비슷한 부분이 있음을 찾아낸 바 있다.

 음악수업

베토벤은 바로 작곡자로 자립하지 않았으며, 음악 공부와 피아노 연주에 몰두하였다. 하이든의 지도를 받으며 그는 대위법을 숙달하고자 하였으며, 이그나츠 슈판지히에게서 바이올린 교습을 받았다. 이때 일찍이 그는 때때로 안토니오 살리에리에게서 주로 이탈리아풍 서악 작곡 양식 등의 수업을 받기도 하였다. 이 관계는 1802년(또는 1809년까지일수도 있다.)까지 이어졌다.1794년 하이든영국으로 떠나자 선제후는 베토벤이 고향으로 돌아오리라 기대하였다. 그러나 그는 빈에 남기로 하였으며, 요한 알브레히츠베르거과 다른 선생에게서 대위법 공부를 계속하였다. 선제후의 장학금 지급 기간이 끝났으나,요제프 프란츠 롭코비츠 공, 카를 리히노브스키 공, 고트프리드 판 슈비텐 남작 등 이미 빈의 여러 귀족들의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재정적인 지원을 해 주었다.

연주활동

1793년 베토벤은 빈에서 피아노 명인이자 귀족 살롱의 즉흥 연주자로 명성을 얻었으며, 여기서 그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의 전주곡과 푸가를 연주하기도 하였다. 그의 친구 니콜라우스 짐로크는 그의 작품을 출판하기 시작하였는데, 처음 출간한 작품은 변주곡집(WoO 66)로 보인다.1794년 거의 내내 베토벤은 작곡에 매달렸으며 작품 출판을 하지 않아 이듬해 1795년의 작품 출판이 더욱 중요해졌다.베토벤은 1795년 3월에 빈에서 처음으로 대중 연주회에서 공연하여 피아노 협주곡을 선보였다. 기록 증거가 모호하여 이 작품이 그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인지 2번인지는 불분명하나 두 작품 모두 완성을 앞둔 비슷한 상황이었다.(두 작품 모두 몇 년 동안 완성되어 출판되지 못하였다)연주회 직후 그는 자신의 작품을 출판하면서 처음으로 작품 번호를 붙여 피아노 3중주 1번을 내놓았다. 이들 작품은 자신의 후원자 리히노브스키에게 헌정되었으며, 한 해 생계비에 가까운 이익을 얻었다.

 유명세를 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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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3년의 베토벤

 

1796년 베토벤은 1789년 모차르트의 연주 여행처럼 중부 유럽의 문화 중심지를 순회하였다. 여정에는 리히노브스키 공(그는 모차르트의 연주 여행에도 동행하였다)도 함께하였으며, 베토벤은 프라하, 드레스덴, 라이프치히, 베를린을 방문하였으며, 작곡과 공연 활동으로 환영받았다. 여행 중 그는 프라하에서 가장 오래 머물렀는데, 리히노브스키 가문의 인맥 덕분에 그는 도시에 오기도 전에 이미 명성이 높았다. 베를린에서는 첼로 소나타(Op.5)를 작곡하여 첼로를 연주하는 음악 애호가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 임금에 헌정하였다. 이 곡은 첼로와 피아노의 서로 다른 성격을 잘 고려한 작품으로, 비르투오조 첼로와 피아노 파트를 잘 결합한 작품으로 유명하다.[2] 임금은 베토벤에게 금화가 가득 든 코담뱃갑을 주었는데, 베토벤은 연주 여행으로 "많은 돈"을 벌었음을 알았다.[3] 1796년 7월 베토벤은 빈으로 돌아왔으며, 그해 11월에 다시 여행을 떠났는데, 북쪽이 아닌 동쪽으로 가서 프레스부르크(오늘날 브라티슬라바)와 페슈트로 갔다. 프레스부르크에서 그는 친구 안드레아스 슈트라이허가 보낸 피아노로 연주하였는데,[4] 이를 놓고 그가 농담하기를 "나에게는 너무 좋다... 왜냐하면 이 피아노는 나만의 음색을 낼 자유를 빼앗아가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였다.[5]

베토벤은 1797년에 거의 빈에서 체재하였는데, 그에게는 여름과 가을마다 심각한 질병(아마 티푸스)에 시달렸으나, 작곡(작곡 부탁을 받는 일이 많아졌다)과 연주를 계속하였다. 이 시기에(1795년일 수도 있다)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청력에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6]1798년 다시 프라하로 여행할 때, 청력이 점차 약해지면서 결국 연주 여행 자체를 포기하게 된다.[7]

 음악적 성숙

1798년에서 1802년 사이에 베토벤은 드디어 그가 작곡의 꽃이라고 여기던 현악 4중주교향곡에 손을 대었다. 1798년에서 1800년 사이에 그가 작곡한 현악 4중주 1~6번 (Op.18)(요제프 프란츠 롭코비츠 공의 부탁으로 그에게 헌정한 곡이다)은 1801년에 출판되어 1800년 교향곡 1번2번와 함께 초연하였으며, 베토벤은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뒤를 잇는 신예 음악가 세대의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았다. 그는 계속 다른 악곡도 작곡하여 "비창" (Op. 13)과 같은 유명한 피아노 소나타 작품도 내놓았는데, 쿠퍼[8]는 이를 "성격의 강렬함, 감정의 깊이, 독창성, 역동성, 음조 면에서 이전 작품을 뛰어넘었다"[9]고 평가하였다. 1799년 그는 그의 생전에 널리 인기를 얻었던 7중주도 완성하였다.

1800년 2월 2일에 베토벤은 교향곡 1번을 초연하기 위하여 도시 극장을 임대하였으며,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작품과, 자신의 7중주, 교향곡 1번, 피아노 협주곡 한 곡(이들 곡은 당시 출판되지 않은 상태였다) 등 다양한 곡목을 공연하였다. 알게마이네 무지칼리쉐 차이퉁(Allgemeine musikalische Zeiting) 지에서 "오랫동안 가장 흥미로운 연주회"라고 묘사했던 이 연주회는 어려움도 겪었는데, 일부 비평가들은 "연주자들이 독주자에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며 비판하기도 하였다.

베토벤이 모차르트와 하이든의 영향을 받은 것은 분명하나(가령 베토벤의 피아노와 목관 5중주에서는 자신만의 독특한 기법이 쓰였으나 형식이 같은 모차르트의 작품과 매우 비슷한 측면을 보인다.)무지오 클레멘티와 같은 음악가들에게서도 양식상의 영향을 받았다. 베토벤의 선율, 음악적 전개, 전조(轉調)와 기조(基調)의 쓰임, 감정의 특성 면에서 그의 영향을 빼놓을 수 없으며, 자신의 초기 작품이 처음으로 출간될 때 일부 작품에서 그 영향이 도드라졌다. 그때부터 1800년까지 베토벤과 그의 음악은 이미 후원자와 출판업자 사이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었다

교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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맬러(W.J. Mähler)가 그린 1804년의 베토벤.

 

1799년 5월 베토벤은 헝가리인 백작부인 안나 브룬스비크(Anna Brunswik)의 딸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쳤다. 교습은 한 달을 채 넘기지 못하였는데, 그는 맏딸 요제피네(Josefine Brunswik von Korompa (1779-1821)와 관계를 맺어, 그때부터 수많은 억측의 대상이 되었다. 교습이 끝난 직후 요제피네는 요제프 다임(Josef Deym von Střítež 1752-1804)백작과 혼인하였으며, 베토벤은 이들의 가정에 자주 방문하였으며, 모임에서 교습을 하거나 악기를 연주하였다. 요제피네의 결혼은 누가 보기에도 불행하였으나, 부부는 네 자녀를 두었으며, 1804년 다임이 죽은 뒤에도 요제피네와 베토벤의 관계는 별 진전이 없었다.[10]

베토벤은 그 밖에 다른 제자도 있었다. 1801년에서 1805년까지 그는 페르디난트 리스(Ferdinand Ries)를 가르쳤는데, 그는 작곡가가 되어 나중에 그들의 만남을 다룬 책인 "베토벤은 기억한다"을 썼다. 젊은 카를 체르니도 1801년부터 1803년까지 베토벤 밑에서 수학하였다. 체르니 자신도 저명한 음악 교사가 되었는데, 그가 맡은 제자 가운데는 프란츠 리스트도 있었다. 그는 또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도 빈에서 초연한 바 있다.

1800년에서 1802년 사이에 베토벤은 주로 두 작품에 집중하였는데, 월광 소나타 등과 이보다는 작은 곡도 계속 썼다. 1801년 봄 그는 발레곡 "프로메테우스의 창조물"을 완성하였다. 이 작품은 성공을 거두어 1801년과 1802년에 수차례 공연되었으며, 베토벤은 이 곡의 인기에 편승하여 피아노 편곡판도 내놓았다.[11] 1802년 봄, 그는 교향곡 2번를 완성하여 연주회를 열려고 하였으나 결국 취소되어버렸다. 이 교향곡은 이듬해 1803년 4월에 자신이 상임 작곡가로 있는 빈 강의 강변 극장(Theater an der Wien)의 어느 예약 연주회에서 초연되었다. 교향곡 2번과 더불어 이 연주회에서는 교향곡 1번, 피아노 협주곡 3번, 오라토리오 "감람산의 예수"도 같이 공연됐다. 평가는 제각각이었으나, 연주회는 재정적으로 성공하였고, 베토벤은 일반 연주회 표의 세 배 가격으로 표값을 책정할 수 있었다. [12]

1802년 전에는 어쩌다 가끔 형 베토벤을 도와주던 동생 카를이 출판 경영에서 큰 역할을 맡으면서, 베토벤은 출판업자와의 사업도 발전하게 되었다. 당시 최근 작곡된 작품에 더 높은 값을 불러 협상할 뿐 아니라, 카를은 베토벤이 예전에 작곡하고는 출판하지 않았던 일부 작품도 팔았으며, 형이 인기있는 작품들을 다른 악기 편성으로 편곡하도록 권하였다. 베토벤은 이런 부탁에 응했는데, 그는 출판업자들이 다른 사람을 고용하여 자신의 작품을 비슷하게 편곡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13]

 청력 상실

1796년경 베토벤은 점차 청력을 잃어갔다.[14] 그는 심각한 귀울음(耳鳴) 증세를 보여 음악을 감지하기 어렵게 되었으며, 대화도 피하게 되었다. 왜 청력을 잃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는데, 매독, 납 중독, 티푸스, 자기 면역 장애(가령 전신 홍반성 루푸스) 등의 설이 있으며, 심지어 잠을 깨기 위해 찬물에 머리를 담그던 습관이 지적되기도 한다. 이에 관한 가장 오래된 설명은 당시 부검 결과로, 오랫동안 외상이 커져 "내이(內耳)가 부푼" 상태였다는 것이다.[15]

베토벤이 죽은 다음날 한 어린음악가가 그의 머리카락을 잘라가져간다. 그는 베토벤의 머리카락을 죽을때까지 잘 보관했으며 대대로 가보로 물려준다. 2차세계대전때 이물품은 행방이 묘연해졌는데 이것이 1994년 런던 소더비 경매소에서 세상에 공개된다. 베토벤의 머리카락을 아르곤 국립연구소에서 분석한결과 일반인의 100배가 넘는 납수치가 나타났다.[16] 이로써 베토벤이 일생동안 겪은 육체적 고통과 청력상실의 직접적인 원인이 납중독임이 밝혀졌다.[17]

1801년에 베토벤은 친구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자신의 증상을 설명하고 이로 인해 음악 활동과 사회 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알렸다.(그러나 그의 가까운 친구 일부는 이미 청력 상실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18] 베토벤은 의사의 조언에 따라 빈 바로 바깥에 있는 오스트리아의 작은 마을인 하일리겐슈타트에서 1802년 4월부터 10월까지 지내며 자신의 증세에 적응하고자 하였다. 여기서 하일리겐슈타트 유서를 쓰는데, 베토벤은 음악 활동을 위하여 계속 살겠노라는 자신의 결심을 담았다.[19] 시간이 지나면서 청력 상실은 심해졌다. 이에 관한 확실한 일화가 있는데, 자신의 교향곡 9번을 초연할 때 연주가 끝나자 아무것도 들리지 않던 그는 베토벤이 청각장애인임을 배려한 여가수의 도움으로 객석을 향해 뒤돌아서자 그제서야 관객들이 떠들썩하게 박수를 치고 있음을 보았으며 그러자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20] 베토벤은 청력을 잃었어도 작곡을 계속할 수 있었으나, 수지맞는 돈벌이 수단이던 공연 연주는 점점 어려워졌다. 1811년에 그는 연주회에서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를 연주하려 하였으나 실패한 뒤로 그는 다시는 사람들 앞에서 연주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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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5년의 베토벤

 

베토벤은 피아노 소리를 조금이라도 감지하기 위하여, 피아노 공명판에 막대기를 대고 입에 물어서, 그 진동을 턱으로 느꼈다. 독일 본의 베토벤하우스 박물관에는 나팔 기구 등 보청 기구들이 전시되어 있다. 분명 큰 걱정거리였지만, 카를 체르니는 베토벤이 1812년까지는 그럭저럭 사람의 말이나 음악을 들을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21] 그러나 1814년 베토벤은 거의 대부분 귀머거리가 되었으며, 그가 손님들 앞에서 피아노로 시끄러운 아르페지오나 우뢰같은 베이스 음표를 연주할 때, "Ist es nicht schön?"(아름답지 않소?)라고 말할 때 손님들은 그의 익살과 용기에 깊은 동정을 느꼈다.[22]

베토벤이 청력을 잃으면서 특이한 사료가 보존되었다. 바로 그의 대화록이었다. 죽기 전 10년 또는 몇 년 동안 그의 친구들은 그에게 할 말을 이런 책에다가 써서 전하였으며, 베토벤은 말로 대답하거나, 책에다가 쓰기도 하였다. 이 책들은 음악이나 다른 화제에 대한 토론을 담고 있으며, 그의 생각을 전해주고 있으며, 음악과 자신의 관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했는지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자기 작품의 연주를 어떻게 느꼈을지에 대한 연구의 자료가 되고 있다. 불행히도 베토벤이 죽은 뒤 그의 비서 안톤 신틀러(Anton Schindler 1795-1864)가 음악가 베토벤을 이상화된 모습으로 그리려고 이러한 대화록 400권 중 264권을 파손해버렸다.(또는 고친 것도 있다)[23]


 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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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의 후원자였던 루돌프 대공.

베토벤은 작품 출판과 공연회로 수입을 벌었으나, 후원자들의 지원도 받았는데 이들을 위하여 그는 개인 연주회를 베풀고 이들의 부탁을 받은 작품을 써서 일정 기간을 두었다가 나중에 출판하기도 하였다. ,요제프 프란츠 롭코비츠 공, 카를 리히노브스키 공 등 그의 초기 후원자들 몇몇은 작곡을 요청하고 출판된 작품을 구매함과 더불어 연금을 지불하기도 하였다.

아마 베토벤의 가장 중요한 귀족 후원자는 레오폴트 2세 황제의 막내 아들인 루돌프 대공이었을 터인데, 그는 1803년 혹은 1804년에 베토벤에게서 피아노와 작곡 교습을 받았다. 두 사람은 친구가 되어 1824년까지 만났다. 베토벤은 루돌프에게 14곡을 헌정하였는데, 그 가운데는 대공 3중주(1811년)과 대작 장엄 미사(Missa Solemnis, 1823)도 있다. 루돌프도 답례로 베토벤에게 자신의 작품 한 곡을 헌정하였다. 베토벤이 루돌프에게 보낸 편지들은 오늘날 악우 협회(Gesellschaft der Musikfreunde)에 보관되어 있다.

왕실 극장의 직위를 거부한 뒤 1808년 가을에 베토벤은 나폴레옹의 동생이자 베스트팔렌 왕국의 임금인 제롬 보나파르트카셀의 궁정에서 급료가 높은 악장(Kapellmeister) 자리를 맡아달라고 제안하여 이를 받아들였다. 베토벤의 친구들에게서 소식을 전해들은 루돌프 대공, 킨스키(Kinsky) 백작과 롭코비츠 공은 베토벤이 빈에 머물도록 설득하고자 연간 4,000 플로린의 연금을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루돌프 대공만이 베토벤에게 약속한 날에 주기로 한 연금의 몫을 지불하였다. 킨스키는 장교직 복무로 소환되어 아무것도 주지 않았으며, 얼마 안되어 말에서 떨어져 죽었다. 롭코비츠는 1811년 9월에 연금 지불을 중단하였다. 뒤이어 후원을 계속해주는 사람이 없었으며 베토벤은 대개 작품의 권리를 팔거나 1815년 이후 적은 연금에 의지하였다. 당초 후원자들의 재정 지원 약속은 프랑스와의 전쟁이 일어나면서 어느 정도는 무의미해졌는데, 정부가 전쟁 준비로 돈을 찍어내어 심각한 물가 상승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슈베르트와의 만남

베토벤은 훗날 "가곡의 왕"으로 불리는 프란츠 슈베르트와 만난 적이 있었다. 두 사람의 거처는 불과 2km 떨어져 있는 거리에 살았지만 베토벤의 청력상실을 비롯한 합병증으로 제대로 된 대화를 하지못해 때문에 쉽게 만나지 못했다 슈베르트의 소심한성격 또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러다 지인들의 권유로 슈베르트가 용기를 내어 만나게 된것이다. 베토벤은 슈베르트로부터 받은 그의 악보를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으며 이렇게 늦게 만난것에 대해 후회를 했고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네를 조금만 더 일찍 만났으면 좋았을 것을.. 내 명은 이제 다 되었네. 슈베르트 자네는 분명 세상에 빛낼 수 있는 훌륭한 음악가가 될 것이네. 그러니 부디 용기를 잃지말게.."

그후 슈베르트에게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을 글로 적으라고 했지만 슈베르트는 베토벤의 허약한 목소리를 듣고 괴로운 나머지 방을 뛰쳐나가고 말았다. 베토벤죽기 일주일 전의 일이었고 이것이 슈베르트와의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이었다. 작품 시기별 분류

베토벤의 작품은 보통 세 시기, 즉 초기, 중기, 후기로 분류한다. 이 방식에 의하면 초기는 1802년 정도까지, 중기는 1814년 정도까지 그리고 1815년 무렵부터 후기로 나눈다. 초기, 즉 고전기는 요제프 하이든과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영향을 많이 받으면서도 새로운 방향을 찾아 그의 작품의 지평을 넓힌다. 초기의 중요한 작품은 교향곡 1번, 교향곡 2번, 첫 여섯개의 현악 사중주곡, 첫 세개의 피아노 협주곡, 20개의 피아노 소나타를 든다. 여기에는 비창 소나타, 월광 소나타도 들어있다. 중기, 즉 영웅기는 그의 귀가 들리지 않게 된다는 것을 확실히 인식하면서 시작된다. 영웅적이면서도 고통스러운 면모를 나타내는 대 편성곡들이 이 시기에 작곡되었다. 작품으로는 교향곡 3번부터 교향곡 8번까지 여섯 개의 교향곡과, 나머지 두 개의 피아노 협주곡, 삼중 협주곡과 바이올린 협주곡, 그리고 7번부터 11번까지 다섯개의 현악 사중주곡과, 7개의 피아노 소나타(발트슈타인, 열정 등), 또 크로이처 바이올린 소나타와 그의 유일한 오페라 피델리오가 있다. 후기는 1815년경부터 인데, 지적인 깊이와 형식적인 혁명성 그리고 집중성과 인간적인 표현을 특징으로 한다. 가령 현악 사중주곡(작품번호 131번)은 7개의 악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교향곡 9번은 마지막 악장에 오케스트라와 더불은 합창을 집어넣었다. 그밖의 이 시기 작품으로는 장엄미사, 마지막 다섯개의 현악 사중주곡, 대 푸가, 마지막 다섯 개의 피아노 소나타 (함머클라비어 소나타등)이다.

낭만주의적 특징

베토벤을 둘러싼 찬반 논쟁 가운데 하나는 그가 낭만주의 작곡가인지, 아니면 고전주의 작곡가인지에 대한 것이다. ‘낭만주의적’의 의미와 낭만주의 음악 시대 자체의 기간에 대한 의견이 사람들마다 다르기 때문에, 베토벤을 이 운동이나 기간에 포함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는 문맥에 따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낭만주의 운동을 일반적으로 문학과 예술의 한 미학적 시기로 간주한다면, 베토벤은 분명히 독일의 괴테·실러영국퍼시 실리와 같은 문학적 낭만주의 시기의 첫 절반에 위치한다. 그는 또한 슈포어E.T.A. 호프만과 같은 동시대인들로부터 낭만주의 작곡가라고 불렸다. 그는 자주 연가곡의 첫 작곡가로 간주되며, 낭만주의적인 민속 특징에 자주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작품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작품 목록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교향곡

미사, 오라토리오, 칸타타와 기타 성악곡

  • 《미사 C장조》작품번호 86
  • 《장엄미사 D장조》 작품번호 123
  • 오라토리오《감람산 위의 그리스도》작품85
  • 칸타타 《영광의 순간》작품136 외 다수의 칸타타 작곡
  • 콘서트 아리아 《오, 무정한 자여》 작품65 (20여곡의 콘서트 아리아 작곡)
  • 100여곡 이상의 성악을 위한 캐논 작곡
  • 가곡 《그대를 사랑해》 WoO.123
  • 가곡 《아델라이데》작품46
  • 영국 민요를 주제로 한 가곡 300여곡 작곡 및 일반가곡 200여곡 작곡
  • 오페라 《피델리오》작품72 (그외 미완성 오페라인 《베스타의 불》이 있음)

 관현악곡, 협주곡

(세계 3대 피아노 협주곡 중의 하나, 총 7곡의 피아노 협주곡 작곡, 0번 E flat장조 WoO.4와 6번 D장조 미완성 협주곡 있음)

  •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작품61

(세계 3대 바이올린 협주곡 중의 하나, 베토벤이 직접 플룻 협주곡과 피아노 협주곡으로 편곡한 곡도 있음)

  •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를 위한 삼중협주곡 C장조 작품56
  • 피아노, 합창과 관현악을 위한 환상곡 C단조 작품80
  • 극음악 <<코리올란>> C단조 작품62(총 11곡의 극음악 작곡)
  • 극음악 <<아테네의 폐허>> 작품113 (베토벤의 터키행진곡은 4번째 나오는 부수음악임)
  • 극음악 <<에그몬트>> F단조 작품84 * 발레음악 <<프로메테우스의 창조물>> 작품43

대 푸가 자필본

2005년 10월 13일, 공식적으로 179년 된 베토벤의 자필 악보가 2005년 7월에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Wynnewood의 Palmer Theological Seminary에서 한 사서에 의해 발견되었다고 보고되었다. 이 악보는 115년간 분실된 상태였는데, 이 악보는 소더비 경매에 2005년 12월 1일 경매에 붙여져 195만 달러에 팔렸다. 전화로 경매에 참가하여 낙찰 받은 사람은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았다.[24] 이 악보는 원래 1890년 목록에 올라와 있었고, 베를린에서 열린 경매에서 오하이오 주 신시내티의 한 사업가에게 낙찰된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의 딸은 1952년에 그것과 모차르트의 〈판타지아〉를 포함한 다른 자필 악보를 펜실베니아 주의 한 교회에 주었다. 어떻게 그 베토벤의 자필 악보가 도서관의 소유가 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 자료 출처 : 위키백과사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