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음악 감상실 ♣/[ Haydn ]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 (Franz Joseph Haydn)

Bawoo 2014. 11. 30. 20:52

요제프 하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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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요제프 하이든 (Franz Joseph Haydn, 1732년 3월 31일 - 1809년 5월 31일)은 오스트리아의 작곡가이다. 슈베르트와 함께 16살에도 소년 합창단에서 노래를 불렀던 음악가이다.

로라우 출생. 교향곡의 아버지로 불린다. 100곡 이상의 교향곡, 70곡에 가까운 현악4중주곡 등으로 고전 시대 기악곡의 전형을 만들었으며 특히 제1악장에서 소나타 형식을 완성한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그리고 만년에는 미사곡과 《천지창조(天地創造) Schöpfung》(1798), 《사계(四季) Die Jahreszeiten》(1801) 등 오라토리오풍의 교회음악의 명작을 남겼다.

 

 초기생애

 

가난한 부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수레바퀴를 만드는 목수였고 어머니는 결혼전 마을 지주의 요리사였다. 하이든은 어려서부터 남다른 음악적 재능을 보였고, 부모는 그의 교육에 고심했다. 이러한 고민은 사촌이자 근처 마을인 하인부르크의 학교 교장이며 성가대 지휘자이던 요한 마티아스 프랑크가 하이든을 자신의 집에 두고 교육시킴으로써 해결되었다. 6세도 채 되지 않아 집을 떠난 하이든은 그후 몇 번에 걸친 짧은 방문을 제외하고 다시 고향을 찾지 않았다. 소년 하이든은 교회 성가대에서 노래를 부르면서 여러 악기의 연주법을 익혔고, 음악에 대한 유익한 기초 지식을 쌓았다. 그러나 음악을 제외한 하인부르크에서의 생활은 전보다 더 개선된 것이 없었다. 사촌은 가난했고 늘어나는 식구들을 부양하기에는 봉급이 모자랐다. 하이든은 소년에게 필요한 사랑과 보살핌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그에게는 '음식보다는 매'가 더 많이 주어졌다. 그러나 강한 인내심과 낙천적인 성품을 가졌기 때문에 이러한 역경을 잘 헤쳐나갔다.

하이든의 삶은 8세가 되면서 극적으로 변했다. 하인부르크 방문중에 소년 하이든을 본 빈의 장크트슈테판 대성당의 음악감독 게오르크 로이터가 그를 오스트리아 수도 최고의 교회인 장크트슈테판 대성당의 성가대 단원으로 발탁한 것이었다. 그의 부모는 이 제의를 받아들였다. 적어도 음악교육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고, 또한 성가대 부속학교에 기숙하면 가족의 재정적인 부담도 줄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1740년 그는 기대감에 부풀어 빈으로 갔다. 9년간 장크트슈테판 대성당 부속학교에서 성가대원으로 있으면서 음악 실제에 관한 지식을 쌓았다. 그러나 음악이론(작곡법)에 대해서는 거의 교육받을 수 없었으며, 하인부르크에서의 생활 패턴이 그대로 재현되는 듯했다. 이곳에서 그는 성가대원으로서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기 위해 열심히 일을 해야 했고, 식사 문제도 거의 개선된 것이 없었다. 점차 그의 목소리가 변성되어갔고, 목소리가 완전히 변하자 성가대측에서는 그를 더이상 필요로 하지 않았다. 성가대감독은 그가 우연히 한 농담을 구실로 그를 성가대 학교에서 쫓아냈다. 3벌의 낡은 내의와 낡은 코트 1벌이 그가 가진 모든 재산이었다. 당시 17세였던 하이든은 모든 것을 혼자서 새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처음 한동안은 동료 음악가의 다락방에 머물면서 춤곡·소야곡 등을 연주하거나 주일 예배에 오르간을 연주하면서, 또는 헐값으로 레슨을 해주는 등 기회 있을 때마다 음악에 관계된 일을 하면서 '비참한' 생활을 이어나갔다. 하이든은 이러한 일들과 병행해서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 등의 작품이나 중요한 음악이론서들을 열심히 독학으로 연구했다. 그러던 하이든에게 또 한번 행운이 찾아왔다. 당대 성공적인 이탈리아 작곡가이자 성악 선생이던 니콜로 포르포라의 눈에 들게 된 것이었다. 포르포라는 그를 성악 레슨의 반주자로 채용했고 개인 비서 일을 시켰으며, 이에 대한 대가로 작품을 교정해주었다.

 

인내와 노력으로 그의 실력은 나날이 늘었고, 마침내 그는 귀족 제자들을 가르칠 수 있을 정도가 되었으며, 이들에 의해 오스트리아의 귀족이자 음악 애호가인 카를 요제프 폰 퓌른베르크에 소개되었다. 하이든은 이 귀족의 저택에서 악기 연주자로서 주로 실내악을 연주했다. 이곳에서 쓴 초기 현악 4중주들을 시작으로 그는 일생 동안 80여 곡의 현악 4중주를 작곡하면서 이 음악형식을 발전시켰다. 1758년 하이든은 퓌른베르크의 추천을 통해 최초로 정규적인 자리를 얻었는데, 그것은 보헤미아의 백작 페르디난트 막시밀리안 폰 모르친의 개인 악단을 위해 곡을 써주는 일과 개인 음악교사로서의 일이었다. 막시밀리안 폰 모르친은 대부분 보헤미아 서쪽 부근 루카베츠 지방의 전원 저택에서 살았는데, 이곳에서 하이든이 거느린 악단은 16명 정도의 연주자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악단을 위해 하이든은 첫번째 교향곡을 썼는데, 이 작품은 아직 기존의 음악적 관습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지만 신선하고 충격적인 선율의 면모를 통해 미래의 대가 하이든의 작품들을 예견했다.

에스테르하지가의 후원

모르친은 경제적 부담으로 악단을 더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되었고, 이 때문에 하이든이 실제로 그의 집에 머문 것은 잠깐이었다. 하이든은 얼마 안 있어 팔 온톨 에스테르하지 후작 밑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후작이 모르친의 집에서 연주된 하이든의 작품들을 들은 것이 계기가 되었다. 오스트리아 제국의 귀족 중에서도 부유하고 영향력 있던 가문 출신이었던 에스테르하지 후작은 음악과 미술에 대한 후원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던 사람이었다. 에스테르하지 후작은 빈에서 48km 정도 떨어진 아이젠슈타트에 있는 자신의 저택에서 정규적으로 정선된 연주자들로 구성된 악단의 연주를 감상했다. 이 악단의 감독이 나이가 들어 병이 들자 에스테르하지 후작은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하이든을 부감독으로 임명했다. 1761년 5월 1일 체결된 계약서에는 하이든이 해야 할 일에 대한 세부사항들이 자세히 적혀 있다. 늙은 음악감독은 주로 교회음악에 관여했고, 반면 하이든은 이 악단을 지휘하고 가수들을 매일 연습시키는 일, 필요한 대부분의 곡들을 작곡하는 일, 음악 사서, 악기 보관책, 음악 관계자들의 총관리자 역할 등을 맡았다. 하이든은 이러한 임무들을 잘 수행해나갔고, 시간을 쪼개어 건반악기를 위한 곡을 작곡하거나 음악 채보자의 일을 감독하기도 했다. 관리자로서 그는 기술적으로뿐 아니라 인간적으로도 훌륭한 솜씨를 보였다. 특히 음악 관계 종사자들을 다른 사람들로부터 보호하는 데 능력을 발휘했고, 유머 감각과 친밀함을 통해 다른 관리나 고용주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연주자들은 하이든을 '파파'라 부르며 그를 따랐다.

 

1766년 파울 안톤 에스테르하지가 세상을 떠나고 난 뒤 동생 미클로슈 에스테르하지 후작이 새로운 주인이 되었고, 하이든은 에스테르하지의 궁정에서 음악감독으로 임명되었다. 하이든은 이 궁정 소속 합주단의 음악적인 수준을 높이고, 연주자와 가수를 선발해 전체 규모를 늘리려는 야심에 찬 계획을 벌였으며, 이것은 새로운 주인의 지원을 받게 되었다. 열성적이고 감각 있는 음악 애호가인 새로운 주인은 하이든이 쓴 작품의 가치를 제대로 음미할 줄 알았고, 그의 음악이 발전하고 성숙할 만한 분위기를 만들어주었다. 그는 거의 30여 년에 걸쳐 미클로슈 에스테르하지 후작 밑에서 일하면서 바쁘면서도 보람찬 생활을 보냈다. 하이든은 사냥과 낚시 등 야외 활동을 좋아했다. 순회공연을 통해 외부 세계로부터의 고립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었고, 저명한 작가, 음악가들의 작품을 에스테르하지 궁정에 가져올 수도 있었다. 또한 그는 후작을 수행하여 빈을 자주 방문했다.

 

모차르트와의 긴밀한 우정이 싹트게 된 것도 빈 방문이 계기가 되었다. 모차르트는 하이든보다 24세나 어렸지만 이것이 두 사람 사이의 우정에 문제가 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서로의 작품에 고무되었다. 모차르트는 하이든으로부터 현악 4중주 쓰는 법을 배운 것에 감사하면서 '경애하는 친구'에게 6곡의 현악 4중주를 헌정했다. 하이든 역시 젊은 친구인 모차르트에게 받은 음악적인 충격을 표현했다. 성숙한 하이든이었지만 그는 자기 방식만을 고집하는 사람이 아니었고, 새로운 생각에 대해 융통성 있게 받아들이려는 자세를 보였다. 모차르트와는 달리 하이든은 일생 동안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졌다. 하이든의 작품들은 전유럽에서 연주되었고, 오스트리아·독일·네덜란드·프랑스·영국 등지에서 악보로 출판되었다. 그는 유럽의 많은 음악 애호가들로부터 공식적인 후원을 받았다. 그 예로 1796년 스페인의 카디스에서는 성 금요일 예배를 위한 〈7가지 마지막 말씀 The Seven Last Words〉, 나폴리 왕은 리라 오르가니차타와 허디거디를 위한 곡들을 위촉했다. 교향곡 82~87번에 해당하는 '파리 교향곡'들은 파리로부터 위촉받은 곡들이다.

 

하이든은 음악가로서는 성공했지만 개인으로서는 성공적인 삶을 살지 못했다. 그를 사랑한 한 소녀가 수녀원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녀의 부모는 하이든으로 하여금 수녀원에 들어간 딸의 언니와 결혼하도록 종용했다. 당시 하이든은 모르친 백작의 저택에서 일자리를 얻게 된 즈음이었다. 결혼생활은 전혀 행복하지 않았고, 자식도 없었다. 아내는 2세 연상으로 싸움을 좋아했고 고집이 세었다. 음악에 대한 이해도 없었으며, 따라서 남편의 작품에 대해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하이든의 자필 악보를 불을 지필 때 사용하는 기름종이로 사용할 정도였다. 그결과 하이든은 다른 여자들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고, 수년 동안 후작의 저택에 고용된 젊은 이탈리아 출신 메조소프라노 가수 루이지아 풀첼리와 사랑에 빠졌다.

영국 시절

1790년 미클로슈 에스테르하지 후작이 죽고 아들인 온톨 에스테르하지 후작이 새로운 주인이 되어 궁정 음악가들을 대부분 해고시켰지만, 하이든만은 그대로 남게 했고, 월급도 주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어떤 의무도 주어지지 않았고, 마음내키는 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었다. 하이든은 에스테르하지가 궁정에 오랫동안 머무는 동안 새로운 방식의 삶을 모색했다. 하이든이 시간적인 자유를 얻게 되자 2곳으로부터 제의가 들어왔다. 하나는 나폴리 궁정을 방문해 달라는 나폴리 왕으로부터의 제의였고, 또 하나는 바이올린 연주자이자 연주회 매니저인 요한 페터 잘로몬의 제의였다. 잘로몬은 영국에서 건너와 하이든에게 자신이 주최하는 런던에서의 일련의 연주회를 위해 6곡의 새로운 교향곡과 20곡의 소품 작곡과 지휘를 매우 좋은 조건으로 위촉했다. 영국으로부터는 잘로몬의 이러한 제의와 더불어 킹스 시어터를 위해 새로운 이탈리아 오페라 1편을 작곡해주는 대가로 300파운드를 지불하겠다는 제의도 들어왔다. 하이든은 이탈리아 쪽의 제의보다는 영국 쪽의 제의에 더 솔깃했다. 하이든은 영국에 가면 잘 훈련된 대규모 관현악단과 일할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을 쌓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당시 번창했던 음악도시인 런던에서 살며, 독립된 생활이 보장되는 것이었다.

모차르트를 포함한 친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는 런던을 향해 떠났다. 하이든은 이전까지 한번도 오스트리아를 떠난 적이 없었다. 1791년 새해 첫날 영국에 도착했고, 18개월 지난 뒤 그 결과는 아주 긍정적인 것이었다. 여러 가지 신선한 인상들과 저명 음악가들과의 만남, 그에게로 향한 존경의 눈빛 등으로, 하이든의 창작 작업은 빛날 수 있었다. 2번에 걸쳐 이루어진 런던 방문중에 쓰여진 교향곡들은 그의 관현악 작품의 절정을 이루었다. 이 교향곡들은 관현악 편성의 기교적 경지, 형식의 능숙한 처리, 자유롭게 흘러 영감에 가득 차 있는 선율선, 유머 감각 등으로 영국 청중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 이 인기는 '놀람', '시계', '군대', '큰북 연타' 등과 같이 작품에 붙여진 별명들에서도 반영된다. 하이든이 직접 지휘하는 모습은 위대한 영국의 음악사가인 찰스 버니의 말대로 "자리에 앉아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전기 충격과도 같은 감동을 주었고, 가히 열광적이라 할 만한 열정의 경지"를 보여주었다. 킹스 시어터를 위해 작곡한 오페라는 공연 허가를 받지 못했지만, 하이든은 재정적인 손실을 당하지 않았고 정신적으로도 그다지 당황하지 않은 듯했다(→ 색인 : 런던 교향곡).

영국에서 하이든은 왕실에서뿐만 아니라 여러 저명한 인사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1791년 옥스퍼드대학교에서 명예음악박사학위를 받았고, 웨일스의 후작과 요크의 공작을 위해 연주회를 열었다. 하이든의 일기에는 그가 '영광스러운 접대를 받은' 여러 방문들과 그곳에서 만난 아름다운 여성들에 대한 언급이 씌어 있다. 60세가 된 하이든의 얼굴은 천연두로 얽혀 있었고 코는 매부리에다가 짧은 다리를 가졌지만, 많은 여성들로부터 존경과 숭배를 받았다.

 

그러던 중 에스테르하지가에서는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열리는 황제 프란츠 2세 대관식에 하이든이 수행해줄 것을 원했고, 1792년 6월 하이든은 런던을 떠나 독일로 향했다. 여행중 그는 본에 들려 22세의 베토벤을 소개받았고, 이를 인연으로 베토벤은 빈으로 거주지를 옮겨 하이든에게 레슨을 받기도 했다. 7월 29일 하이든은 빈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영국에서 벌어들인 돈으로 좋은 집을 살 수 있었다. 굼펜도르프의 외곽지역에 자리잡은 이 집은 오늘날 그대로 보존되어 하이든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하이든이 빈에 머문 것은 아주 짧은 기간 동안이었다. 영국의 숭배자들은 하이든에게 빨리 런던을 다시 방문해줄 것을 요청했고, 1794년 1월 그는 다시 영국으로 돌아가 1795년 8월 15일까지 머물렀다. 왕실의 여러 사람들이 그가 계속 영국에 머물도록 노력을 했지만 하이든은 이를 거절했다. 그가 영국 체류를 거절한 것은 에스테르하지가의 새로운 주인이 된 미클로슈 2세가 하이든이 감독으로 있던 이전의 관현악단을 원상태로 다시 부활시키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하이든은 미클로슈 2세의 새로운 제의에 끌려 계약을 체결했다. 새로 하이든에게 주어진 일은 전처럼 힘겨운 일이 아니었다. 겨울 동안에는 빈에서 보내도 된다는 조건이 하이든의 결정에 강한 동기를 작용했다. 하이든은 런던의 많은 친구들을 떠나야 했지만, 영국 체류시기를 결실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했다. 그의 짐꾸러미에는 768쪽에 달하는 악보로 가득 찼고, 창작작업에 대한 충분한 보수와 음악적 자극을 받은 것에 대해 만족해했다.

에스테르하지가에서 보낸 만년의 빈 시절

1791년 하이든은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대수도원에서 열린 헨델 추모음악회에 참석하고는 헨델의 위대한 오라토리오들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하이든은 오라토리오를 작곡하고자 적당한 대본을 구했는데,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 대본은 헨델을 위해 준비된 것이었다. 하이든은 빈에 정착하여 다시 에스테르하지 후작을 위한 일을 시작하면서, 오라토리오 〈천지창조 The Creation〉의 작업에 들어갔다. 원래 존 밀턴이 지은 서사시 〈실락원 Paradise Lost〉과 성서의 〈창세기〉에 기초한 이 작품의 대본은 고트프리트 판 슈비텐 남작에 의해 독일어로 번역되었다. 오라토리오 작곡은 하이든의 적성에 잘 맞는 작업이었다. 하이든은 신앙심이 투철했고 전생애를 통해 로마 가톨릭 교회를 위한 아름다운 라틴어 미사곡들을 썼다. 독일어 가사에 의한 〈천지창조〉 작곡을 통해서는 신에 대한 하이든의 감사의 마음을 표현했고 음악을 통해 그를 그토록 기쁘게 했던 자연의 아름다움을 묘사했다. 이 작품을 작곡하던 기간은 그의 생애 전체를 볼 때 어떤 시절보다도 행복했다. 하이든은 신앙심으로 고양되었고 신과의 영적인 교감을 가졌다. 1798년 4월 오라토리오 〈천지창조〉가 한 후작의 궁정에서 초연되었고 사람들로부터 커다란 반응을 얻었다. 얼마 안 가서 공개연주회가 열렸고 반응도 전과 마찬가지로 대단했다. 그후 〈천지창조〉는 계속해서 대성공을 거두면서 연주되었고, 하이든 자신의 요청에 따라 자선연주회도 열리게 되었다.

 

이러한 성공으로 하이든은 또다른 오라토리오 〈사계 The Seasons〉를 쓰기 시작해 1801년에 완성했다. 제임스 톰슨(1700~48)이 대본을 썼으며 역시 고트프리드 판 슈비텐이 번역했다. 하이든은 대본의 덕분으로 대자연에서 일어나는 종교적 광경들을 음악으로 잘 표현할 수 있었다. 이 작품 역시 궁정과 공개연주회에서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고, 특히 궁정연주회에서는 오스트리아 여황제가 직접 소프라노 솔로를 맡아 불렀다. 만년의 하이든이 작곡한 또다른 작품으로는 미클로슈 에스테르하지 2세를 위해 작곡한 6곡의 미사곡을 들 수 있는데 이 작품들은 18세기의 대표적 미사곡으로 꼽힌다. 그밖에 현악 4중주들을 연속적으로 작곡했고, 1797년에는 오스트리아를 위해 감동적인 노래 〈신이여 황제 프란츠를 보호하소서 Gott erhalte Franz den Kaiser〉를 작곡했다. 이 노래는 이후 1세기가 넘도록 오스트리아 제국의 국가로, 또한 독일의 애국적 노래 〈독일, 가장 뛰어난 독일 Deutschland, Deutschland über alles〉로 사용되었고, 오늘날 영어권 나라의 프로테스탄트 찬송가에서도 여러 가지 제목으로 들을 수 있다. 하이든은 이 노래를 아주 좋아하여 그의 현악 4중주 3번 〈황제 Emperor〉 작품76의 변주곡의 주제로도 사용했다.

 

만년에 하이든은 유럽의 여러 곳으로부터 존경의 표시를 받았다. 사실 그의 명성으로 볼 때 놀랄 만한 일이 못되며, 하이든 스스로도 이에 대해 흡족스럽게 생각했다. 스톡홀름·암스테르담·상트페테르부르크·파리 등에서는 그를 음악협회 명예회원으로 추대했고, 파리는 〈천지창조〉의 초연 후에 금메달로 그를 기념했다. 오스트리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출생지인 로라우에서는 하이든이 보는 가운데 기념비가 세워졌고, 빈에서는 그에게 금으로 된 공로 훈장을 수여했다. 특히 인상적인 사건은 1808년 그의 76회 생일을 기념하는 빈 축하 연주회였다. 연주회에서는 명연주자들에 의해 〈천지창조〉가 연주되었고, 병져 누워 있던 하이든이 직접 참석했다. 그는 팔걸이 의자에 앉은 채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연주회장에 들어와 귀족들이 앉는 곳에 함께 앉았다. 그를 기념하는 시가 낭송되었고, 박수갈채가 연주회장을 뒤흔들었다. 그가 자리를 떠나려 하자 왕년의 제자 베토벤이 무릎을 꿇고 스승의 손에 입을 맞추었다. 이것은 최후로 참석한 공개연주회였다. 이후로 빈의 상황은 힘이 없는 노령의 하이든이 연주회에 참석하기에는 너무 열악했다. 오스트리아와 빈은 1809년 나폴레옹 군대의 공격을 받았다. 전쟁중에 빈은 폭격을 당했다. 하이든의 집 근처에도 포탄이 떨어졌지만, 나폴레옹은 보초들로 하여금 하이든의 집 둘레를 경비하도록 했다. 한 프랑스 장병이 하이든의 집을 방문하여 그와 그의 음악에 대해 경의를 표하자 병든 하이든에게도 잠시나마 기쁜 휴식이 주어졌다. 이 장병은 〈천지창조〉에 나오는 아리아 한 곡을 불렀고, 노래를 들은 하이든은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노래를 부른 이 장병은 얼마 후 전사했고, 하이든도 그가 죽은 지 며칠 안 되어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을 들은 프랑스 군인들이 영구차 뒤에서 열을 지어 따라 걸었다. 빈의 명사들과 프랑스의 고급 장교들도 이 천재 작곡가에게 경의를 표했다.< 출처: 다음백과-K. Geiringer 글 >

 

죽은뒤의 시련

대한민국 문화방송 MBC는 신비한TV서프라이즈에서 <사라진 두개골>을 소개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809년에 하이든이 세상을 떠나자 유족들은 장례식을 간소하게 치루고 그의 유언대로 유해를 교회가아닌 일반묘지 즉 가문의 묘에에 안장시킨다. 그런데 예기치 못한 사태가 발생했는데 하이든의 무덤이 파헤쳐진 것이다. 게다가 그의 머리가 온데간데 없어져 유족들은 큰 충격에 빠지게 된다. 이에 오스트리아 왕국으로부터 유해찾기를 공식적으로 요청했고 필사적으로 찾기위해 노력했지만 그의 머리를 찾는데 필요한 단서와 현장의 목격자도 한명도없어 전혀 진전이 없었다.

나중에 왜 무덤이 파해쳐졌는지 그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는데 오스트리아 귀족중 1명이 음악의 천재적 재능을 가졌던 하이든의 뇌를 조사하고 싶어 유태인인 피터와 로젠바움에게 부탁해서 파해쳐진 일이었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문제가 발생는데 피터와 로젠바움은 하이든 머리를 더욱 비싼값에 팔기위해 하이든 머리의 부폐된 상태를 고려해 다른노인의 시체의 머리를꺼내 귀족을 속여 넘겨주고 자신들은 다른사람에게 팔아넘겨버린 것이다. 나중에서야 자신이 속았다는것을 알아차린 그 귀족은 분노했으며 그들을 즉시붙잡아 조사했으나 이미 하이든의 머리는 익명의 사람에게 팔아버린 뒤였으며 갖가지 수소문하였지만 이미 자취를 감춘 뒤였다. 이후 100여년이 넘도록 하이든 머리는 유럽전역에 팔려나가는 수모를 겪는다.

이 세월이 흐르는 동안 하이든의 후손들은 생전에는 그의 머리를 찾기위해 노력했고 자신이 죽을때는 후손에게 반드시 조상의 머리를 찾아야한다는 유언을 대대로 남기고 있었다.

한편 오스트리아 정부는 이번사태에 대해서 "이 사건은 국제적 망신이며 세계적으로 자랑하는 조국의 음악가 머리가 도굴당해 온 유럽에서 장식품처럼 여기저기로 팔려나가 것은 두고볼수 없다" 는 등 많은 의견과 비난여론이 빗발쳤지만 하이든의 머리를 찾는데 진전이 거의 없었다. 그러다 수소문끝에 하이든의 머리를 찾는데는 성공하여 하이든의 후손들과 오스트리아 정부는 반환소송을 청구하였지만 그 유해의 주인은 소송반환에대한 거부권을 행사하여 되찾는데 어려움을 맞았고 설상가상으로 제1차세계대전과, 제2차세계대전 발발로인해 유해반환소송은 잠정중단하게 된다.

그러다가 1954년 6월 마침내 유해반환소송에 승소하여 하이든 머리는 조국의 품으로 돌아왔는데 무덤에서 파해쳐져 머리가 분리된지 무려 145년만의 일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오스트리아주민 수십만명이 나와 145년만에 조국에 돌아온 하이든의 머리를 맞이했다.

또한 오스트리아 대통령 및 정치인들이 하이든의 미사에 대거 참석해 대 음악가의 안식을 간절히 바라며 이제서야 머리를 찾은것에 대해 하이든 후손들에게 정식으로 사죄했다.<출처:위키백과>

작품 목록

 

  . 요제프 하이든의 교향곡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