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임진왜란(壬辰倭亂)은 1592년(임진년, 선조 25)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면서 시작되어 1598년(선조 31)까지 이어진 전쟁이다. 임진왜란은 동아시아 3국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제1차 침략을 임진왜란, 1597년의 제2차 침략을 정유재란(丁酉再亂)이라고 구별하여 부른다. 한편 일본에서는 당시 연호를 따서 분로쿠·게이초의 역(일본어: 文禄・慶長の役 분로쿠게이초노에키[*])이라 하며,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에서는 당시 명(明) 황제였던 만력제의 호를 따 만력조선전쟁(萬曆朝鮮戰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임진조국전쟁(壬辰祖國戰爭)이라고 한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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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과 원인[편집]
무로마치 시대에 터진 오닌의 난을 계기로 200여년간 지속된 센고쿠 시대, 결국 무로마치 막부는 힘을 잃고 다이묘들은 난립하기에 이르렀고 이런 환경에 노출된 일본에 15세기 후반 유럽 상인들이 들어와 신흥 상업 도시가 발전하여 지배층인 다이묘들은 봉건적인 지배권을 강화ᆞ노력하였다. 그 중 오와리 국의 오다 노부나가가 두각을 나타내고 국내 통일에 거의 성공하게 되지만 부하의 변절로 인해 다른 부하가 주인의 원수를 갚고 주인의 국내 통일을 마무리하게 된다. 그는 하시바 히데요시 즉, 도요토미 히데요시다. 그는 타국의 다이묘들이 가지고 있던 막강한 군사력을 외부로 방출시킴으로써 국내 안정과 권력 공고화를 도모하고 신흥 상업 세력을 억제하려고 명(明)을 침략하게 되었다는 견해가 있다.[5]
1590년 오다와라 전으로 간파쿠 히데요시의 마지막 저항 가문 고호조 일가(호조 우지마사, 우지나오)를 쓰러뜨리고 센고쿠 시대를 종식시킨 히데요시는 간파쿠(關白) 자리를 양자 히데츠구(豊臣秀次)에게 물려주어 국내(일본)의 내정을 맡게 하고 본인은 (일본어:
또한, 조선에 출병한 다이묘들은 대부분 도요토미 가문에 충성하던 자들(카토 키요마사, 후쿠시마 마사노리 등)이었고 히데요시에게 태도가 미적지근하거나 서로 협력해 우조하지 않았던 다이묘들(도쿠가와 이에야스 등)은 불참하는 등 불협화음으로 7년을 이어오다가 히데요시 사후 도요토미 군대는 조선을 철수, 몇년 후 도요토미 정권은 전복(1600년-세키가하라 전투, 1615년-오사카 전투), 도쿠가와 정권 즉, 에도 막부(1603년)가 들어서게 된다.
히데요시는 1591년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宗義智)를 이용해 게이테쓰 겐소(景轍玄蘇) 등을 사신으로 파견하여 가도입명(假道入明)이라는 주장을 전달했다. 그러나 조선의 왕과 만정제신은 명(明)과 군신대의를 깰 수 없었고 교만한 마음에서 일본을 업신여겼던 데다가 과거 삼포 왜란을 겪었던 조선의 왕과 백관의 처지에서 일본이 명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선선히 조선의 길만 빌린다는 실정도 의심스러운 일이었으므로 일본이 한 요청을 거절하였다.[7]
조선통신사[편집]
히데요시는 재차 대마도주를 이용하여 교섭을 청하고 교섭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조선을 침략할 뜻을 표시했다. 이에 조선 조정에서는 오랜 논의 끝에 1590년(선조 23년)에 교섭에 대답과 더불어 일본의 실정과 히데요시의 저의를 살피려고 황윤길을 통신사로, 김성일을 부사로, 허성을 서장관(書狀官)으로 임명하여 일본에 파견했다.
1591년 음력 3월 통신사 편에 보내온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답서에는 정명가도(征明假道)의 문자가 있어 그 침략의 의도가 분명하였으나 사신의 보고는 일치하지 않았다. 당시 서인을 대표하였던 정사 황윤길은 '반드시 병화(兵禍)가 있을 것'이라고 하고 동인을 대표하였던 김성일은 이에 반대하여 '그러한 정상이 없는데 황윤길이 장황하게 아뢰어 민심을 동요시킨다'고 주장하였다. 이리하여 조신 간에 의견이 분분하였고 동인인 허성마저 황윤길의 명견를 옹호하였으나 당시 정권을 장악한 세력으로서 백성이 동요하면 자신이 향유하던 권력에 초래될 변화를 두려워했던 동인이 주도권을 주도하던 조선 조정은 김성일의 의견을 좇았다.[8]
그러는 동안 조선군은 병법ᆞ무예ᆞ축성술ᆞ해운술 등을 정비하고 유럽에서 전래된 보고와 빈번한 일본 사신의 왕래로 사태를 짐작하고 대책을 강구, 김수(金睟)ᆞ이광(李光)ᆞ윤선각(尹先覺) 등으로 무기를 정비, 성 터를 수축하게 하고 신립, 이일로 하여금 변방의 준비 상태를 순시케 하여 요충지인 영남지방에 많은 힘을 기울였으나 별로 성과가 없었고 선조는 직접 이순신과 원균을 각각 전라도와 경상도에 배치하였으나 경상우수사 원균은 왜란 3개월 전 부임하여 전비를 갖추지 못한 상태였으며 1년전에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이순신만이 제대로 된 전쟁준비를 갖추었다.
각 국의 정치 상황 및 군사력[편집]
조선의 정세[편집]
조선 왕조는 1392년 태조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여 개국한 후 200년이라는 한국 역사상 유례없는 평화를 누리고 있었다.
정치상황[편집]
그당시 조선은 동인과 서인이 치열하게 정치주도권을 두고 정쟁을 벌이는 상황으로,전쟁 직전에 보낸 조선통신사들 또한 붕당별로 의견이 갈라져 결국 율곡 이이의 10만 양병설 또한 기각당하여 조정은 전쟁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상황에서 전쟁을 벌이며 외부의 침입은 걱정치 않았다. 이는 결국 전쟁 발발 이후 선조가 도망치듯 천도하는 겁쟁이의 모습을 보이는 결과를 보인다.
군대상황[편집]
역사상 유래없는 평화속에 군의 기강도 완전히 흐트러졌다. 훈련은 게을리했으며 장수들또한 자기 배불리기만 바빴지 전쟁준비와 훈련에는 관심이 없었다.
조선의 정치 상황[편집]
조선 왕조는 개국 후 100여 년간 창업을 주도했던 개국공신과 이후 세조의 집권을 도왔던 공신 집단과 그 후손들로 형성된 훈구파 세력과 더불어 왕조의 안정과 융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훈구파는 정권이 안정되자 그 부패가 극심해졌고 이런 변화 속에서 이른바 사림파 세력이 등장하여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정치, 사회질서 재정립을 강조하면서 개혁하려고 나섰다. 그 결과 신진 사림 세력과 기존 훈구파 세력과 마찰이 불가피하게 되었고 이러한 마찰은 성종이 훈구 세력을 견제하려고 사림들을 삼사의 청요직에 등용하면서 표면화하였다.
그 결과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중엽에 이르는 근 반세기간에 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 등 네 차례에 걸친 사화가 일어나 사림파 신진 세력들은 크게 타격받고 정국은 큰 혼란을 겪었다.
이 영향으로 정치, 경제, 사회 각 방면에서는 큰 혼란이 일어나 신분 제도와 군역 제도가 무너지면서 권문세도가가 농장을 확대하기 시작했으며 이와 때를 같이하여 공납 제도도 문란해지는 등 사회 전반이 동요하는 기미를 보였다. 이러한 와중에 조정에서는 왕위 계승을 둘러썬 왕실 척신들의 정권 쟁탈전이라 할 수 있는 을사사화가 발생하였고 사림도 내홍 탓에 상호 대립하는 양상이 나타났다. 명종이 모후의 대리 정치 탓에 외척 세력이 정치 중심으로 권력이 개편되면서 부패가 극심하였다. 이후 선조 사림파 집권 이후 동인, 서인 양대 세력으로 분열되어 대립을 거듭하여 국정에 들인 노력보다 얻는 결과가 매우 적었다.
조선의 대외관계[편집]
조선은 조선초부터 사대교린정책을 수립하여 명과는 사대하고 북방이민족과 왜에는 교린하는 정책을 택하였다. 허나 '조선의 정세'부분에서 언급하였듯이 유래없는 평화로 군사력이 약해진 결과 교린정책은 거의 이루어질 수 없었고, 결국 명에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형국이 되었다.
일본과의 관계[편집]
조선은 일본과 하는 외교를 기본으로 교린(交隣) 정책을 유지하였다. 고려 말기에 번번이 왜구는 한반도의 해안를 침범하여 약탈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조선조에 와서는 수군력을 강화하고자 성능이 뛰어난 대포와 전함을 양산하는 등 왜구 소탕에 진력하였다. 조선은 부산, 울산 등 일부 항구만을 제한으로 개방하는 통상 교류하였다. 이후 조선은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하며 우호 관계를 유지해 왔다.
명과의 관계[편집]
명(明)과 조선 간 관계는 ‘책봉-조공 체제’으로 대표되는 가장 전형이 될 만한 군신관계였다. 명과 조선 간 관계는 조선 전기에는 기본으로 책봉-조공 체제에 기반을 둔 사대 관계를 토대로 조선이 명을 섬기는 상황이었다. 조선과 명 사이에는 군신·상하 관계가 성립되고 조선은 제후국으로서 예와 명분에 합당한 불평등한 국가 지위를 감수해야 했다. 구체로는 명 황제에 의거한 조선 국왕 책봉의 수용, 명 연호의 사용, 정기로 계속 하는 조공 등 제후로서 의무가 부과되었다.
명의 조선을 대상으로 한 내정간섭은 거의 없었으며, 초기에는 태조의 조선 국왕 인정 문제와 여진족 문제, 조공 문제로 양국 간에 크고 작은 분쟁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특히 태조와 정도전이 고구려의 고토를 회복하려는 의도로 요동 정벌을 계획하면서 명과 심각한 갈등을 빚었다.그러나 16세기에는 사대주의를 노골로 옹호하는 사림파가 전면에 등장하여 명을 대상으로 한 사대가 매우 당연시되면서 명과 외교 관계는 15세기 이래 기조를 유지하였다.
평화스럽고 안정된 명과 조선의 군신관계가 지속되는 가운데 조선 국왕과 백관은 명과 약속한 ‘1년 3공’의 규정을 넘어서까지 명과 교섭에 적극이었고 그로써 명의 선진 문물을 수용하려 했다. 16세기 이후 양국 관계에서 중요해진 측면은 경제 관계였다. 15세기 이래 조선은 책봉·조공 체제하에 규정된 당초 조공 부담을 줄이는 데 주력하여 금과 은을 조공 품목에서 제외받는 성과를 얻었다.
양국 사이의 통상은 그리 원활치 못한 상황이었으나 15세기 말에 조선 내부 농업 경제력 향상과 함께 명에서 생산된 견직물을 선망하는 수요가 증가하면서 명에서 비단과 원사가 대량으로 유입되었다. 조선과 명 사이의 무역 관계의 진전은 조선의 은광 개발과 일본에서 은 유입을 가속화했으며 궁극에는 은을 매개로 조·명·일 삼국 사이의 무역 구조가 정착되었다.
이처럼 16세기까지 양국 관계는 대체로 사이좋은 기조를 유지하면서도 요동 정벌 문제, 여진족 문제를 놓고서 갈등을 겪기도 했다. 조선은 독립을 유지하고 선진 문물을 수용하려는 의도에서 군신 관계를 받아들였다.
명을 향한 사대 외교는 명을 대상으로 한 굴복이라기보다는 조선보다 강국인 명을 대상으로 하여 왕의 권력 안정을 확보하려는 외교였고 선진 문물을 흡수하려는 문화 외교이면서 공무역 일종이라고 자위할 수도 있었다.
조선의 군사력[편집]
조선 초 국방 체계[편집]
한국의 역사 韓國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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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 시대 |
고조선 시대 |
원삼국 시대 |
삼국 시대 |
남북국 시대 |
후삼국 시대 |
통일 왕조기 |
식민지 시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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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 한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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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기본인 병역 원칙은 양인개병(良人皆兵)과 병농일치(兵農一致)제로 노비를 제외한 16세 이상 60세 이하에 이르는 양인의 정남(正男 : 장정)은 누구에게나 병역의무가 부과되었다. 이때 정남은 정병(正兵 : 현역 군인)으로서 실역을 마치거나 보인(保人: 보충역)으로서 실역 복무에 소요되는 경비를 부담 하는 두 가지 중 한 가지로 구분되었다.
이 원칙을 전제하여 군은 중앙군인 경군(京軍)과 지방군인 향군(鄕軍)으로 대분하여 편성되었다.
중앙군은 태조 3년(1394)에서 세조 초까지 약 60년간에 걸쳐서 여러 차례 개혁을 거쳐 5위 체제(의흥위(義興衛), 용양위(龍?衛), 호분위(虎賁衛), 충좌위(忠佐衛), 충무위(忠武衛))의 편제가 확립되었다.
5위 체제를 근간으로 하는 중앙군은 의무병인 정병을 비롯하여 시험으로 선발된 정예부대와 왕족, 공신, 고급관료의 자제들로 편성된 특수병으로 구성되었으며 이들은 모두 복무 연한에 따라 품계와 녹봉을 받았다.
지방군인 향군은 육군과 수군의 두 가지 병종으로 구분되어 국방상 요지인 영(營), 진(鎭)에 주둔하면서 변방 방어에 종사하거나 일부 병력은 교대로 수도에 상경하여 도성을 수비하는 임무를 담당하였다.
영진군은 주로 해안과 북방 변경에서 근무했으므로 내륙에는 거의 군대가 주둔하지 않아서 병력이 부재한 문제를 타개하고자 향리, 관노, 무직 백성, 공노비으로 구성된 예비군인 잡색군(雜色軍)을 편성하여 해당 지역 수령 지휘하에 두었다.
지방군의 방어 개념은 각 도에 주진으로서 병영(병마절도사가 지휘)과 수영(수군절도사가 지휘)를 설치하고 그 아래에 각처 요충지에 거진(첨절제사가 지휘), 진(동첨절제사가 지휘) 등 대소의 진영을 두어 유사시에 주진 진장의 지휘하에 지역 방어에 임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주진을 중심으로 한 방어 체제는 신속한 병력 집결이 이루어지지지 않는 취약점이 노출되어 이를 보완하려고 세조 1년에 거진을 독립된 방어 편성 단위로 하고 그 아래에 군현 병력으로 제진을 관할하게 하는 진관 체제가 채택되었다.
그 후 을묘왜변을 전후로 한 시기에 조선의 군사상 환경이 급변하면서 근 1백여 년간 고수해 오던 진관 체제는 변모를 가져와 제승방략의 분군법으로 방위 체제가 전환되었다. 분군법은 지역 수령들에게 사전에 작전 지역을 배정해 주고 유사시에 자신이 담당하는 진관 지역에서 작전 지역으로 병력을 이동시켜 작전 임무를 수행하게 하는 제도였다.
이 제도는 유사시 최전방에 병력을 집중시킬 장점이 있는데 작전 지역에 집결한 병력은 중앙에서 파견되는 경장이 도착하기를 기다려 그 사람에게 지휘받아야 하는 시간상 문제가 있었으며, 최전방을 대상으로 하는 과도한 병력 집중 탓에 후방이 공백화할 취약점이 있었다.
이 방위 체제는 일본과 여진족이 소규모로 노략하던 시기에 방어 병력을 집중으로 운용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었으므로 큰 전란을 겪지 않은 조선 조정으로서 문제가 없다고 판단됐다.
전란 직전[편집]
조선조는 건국 후 2백여 년간 이렇다 할 전란을 겪지 않아 상비군 체제에서 병농일치 예비군 체제로 전환된 상태였다. 여진족과 분쟁이 빈번한 북부 지방과 남부 수군은 상비군이 유지되었지만 기타 지방에서는 문서상으로만 병력이 존재하고 실제로는 군역을 부과하지 않거나 대역인을 세우고 군포를 납부하도록 하는 방군수포와 대역납포가 공공연히 이뤄졌다. 특히 기병은 상비군으로서 많은 경험이 있었지만, 임진왜란에서 주력을 담당했던 보병은 병력의 질이 형편없었다.
전쟁의 징후가 점점 분명해지자 선조는 여러 면에서 군비를 강화하고 여러 무장을 발굴하고 성곽을 보수하고 해자를 팠지만, 200여 년이나 평화를 누렸으며 특히 경상도를 비롯한 남부지방은 이전 수백 년 전부터 전란을 입은 경험이 없었기에 많은 마찰이 있었다. 경상감사 김수와 전라감사 이광이 선조에게 명받고 성곽을 수리하고 병장비를 정비하면서 전쟁 준비를 서두르자 지방에서는 부역이 너무 가혹하다는 상소가 빗발쳤고 탄핵까지 받을 뻔하였다.
일본의 정세[편집]
센고쿠 시대 통일[편집]
1392년 일본에서는 무로마치 막부의 제3대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미쓰가 남북조의 분열을 종식시키고 전국의 지배권을 장악하였다. 그 후 15세기 중엽에 이르러 봉건 영주 세력을 대상으로 한 쇼군의 통제력이 약화하자 지방에 할거한 봉건 영주인 슈고다이묘들이 사분오열하는 현상이 나타나 1467년의 오닌의 난을 계기로 무로마치 바쿠후가 몰락하고 그로부터 100여 년간 군웅이 땅을 나누어 차지하고 굳게 지키는 센고쿠지다이가 개막되었다. 이 혼란기에 지방 신흥 무사 집단이 구 세력인 슈고다이묘 집단을 대신하여 자립 태세를 갖추어 센고쿠다이묘로 등장하였다.
그러던 중 16세기 중엽에 이르러 오다 노부나가가 출현하여 경쟁하는 세력 다수를 굴복시키고 일본의 실질에 근거하는 지배권을 장악하여 통일하는 기운이 무르익어 갔으나 1582년 오다 노부나가가 그 남자의 부장 아케치 미쓰히데에게 피살되는 이변으로 말미암아 일본의 실권은 오다 노부나가의 충복이었던 효웅 토요토미 히데요시에게로 돌아갔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아케치 미쓰히데의 반란 세력을 토벌하고 오다 가문을 장악하여 일본 통일 사업을 계속 추진하였다.
1583년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시바타 카쓰이에와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승리하여 정권을 거의 수중에 넣었다. 같은 해 음력 3월에는 수륙 교통 요지인 이시야마 혼간지 자리에 장대한 오사카 성을 쌓기 시작했으며 1584년 오다 노부나가의 차남인 오다 노부카쓰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연합군과 전쟁에 돌입했다.
결국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상경하여 화의가 성립하였고 이로써 후방을 안정시킨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1585년 시코쿠를 평정하고 조정에서 간파쿠, 다음 해에는 다이죠 다이진에 임명되고 성(姓) 도요토미(豊臣)를 하사받았다. 농민 출신인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 천황의 권위를 이용하고자 했다. 간파쿠가 된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천황에게서 일본 전국 지배권을 위임받고 강령으로서 ‘소부지(墜無事;전국의 평화)’를 내걸었다.
이를 토대로 쟁란을 거듭하던 다이묘들에게 정전을 명령하고 영토의 확정을 토요토미 히데요시 자신에게 맡기게끔 했다. 1587년에는 명령에 불복하던 규슈의 시마즈 세력을 정벌하고 1590년에는 난공불락을 과시하던 오다와라 성을 함락시켰으며 도호쿠의 다이묘를 복속시키면서 전 일본을 통일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치·경제 개혁[편집]
전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곧 정치, 경제 개혁을 강력하게 전개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정권은 토지제도 개혁인 검지(檢地)와 무기 몰수 정책인 가타나가리(刀狩)에 가장 심혈을 기울였다.
1591년 전 일본에 할거한 다이묘들에게 검지장과 구니에즈(지도)를 제출하게 하여 전국 통일을 과시했다. 검지장을 토대로 토지를 측량하고 수확고를 조사하여 전 일본의 생산력을 쌀로 환산하는 ‘고쿠다카(石高)제’를 실시하고 다이묘에게는 고쿠다카에 상응하는 군역을 농민에게는 토지 소유권을 인정하는 대신에 고쿠다카에 합당하는 연공을 징수하는 과정에서 자신을 반대하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는 고의로 황무지로 이봉(移封)하였는데 이것이 오히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임진왜란에 불참하게 된 원인을 제공하였다.
가타나가리는 농민에게서 무기를 몰수하고 농민의 신분을 명확히 하고자 1588년에 시행되었으며 1591년에는 ‘히토바라이(人掃)령’을 내려 신분상 이동을 금지하고 사농공상 신분을 확정하여 병농 분리를 완성하였다.
일본의 군사력[편집]
15세기 중엽 센고쿠지다이에 이르러서 전투 양상이 대규모 집단 보병 전술로 전화(轉化)하여 전투하는 주체도 특정한 영웅 소수가 아닌 보병이 밀집한 부대로 옮겨졌다.
전투 임무를 수행하는 경장비 보병인 아시가루(足經)가 출현하여 전투 승패를 가름하는 중역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들은 16세기 중엽에 뎃포와 화약이 전래되면서 뎃포 부대인 뎃포쿠미와 궁사 부대인 궁조로 편성되어 전투 시 공격하는 주역을 맡았다.
당시 전국 다이묘 세력 가운데서 가장 먼저 이런 전술 변화를 이용하여 통일에 주도권을 장악한 무장이 바로 오다 노부나가였다. 1575년 오다 노부나가는 다케다 군과 벌인 나가시노 전투(長篠の戦い)에서 조총을 보유한 보병을 주력으로 다케다군의 기병을 격파하여 전술 변화에 전혀 새로운 시기를 열어 놓을 만큼 뚜렷이 구분되는 전기를 열었다. 그 후 1582년에 이르러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투 부대의 병종을 기병과 보병 두 가지로 대별하고 사무라이타이쇼(侍大將)의 지휘 하에 기병, 총병, 궁병, 창검병 등의 단위대를 편성한 후에 각조 지휘관으로서 기사와 보사를 두었다.
이 무렵 일본군은 부대를 삼진이나 사진으로 나누어서 단계로 하는 공격을 기본 전법으로 채택하였다. 즉, 제1진인 기병이 2개 대로 전개하여 포위 태세를 갖추면 제2진인 총병이 적의 정면에서 조총을 사격하면서 돌격하고 이어서 제3진인 궁병이 진격하면 제4진인 창검병이 뒤따라 돌진하여 백병전을 벌이는 방식이었다. 비(非)전투 요원으로서는 전령 업무을 담당한 소인, 수송 업무을 맡은 하부, 순박 운항 업무를 수행하는 선두와 수주, 감찰 업무를 행하는 대목부, 의사, 승려[9]가 전투 부대와 작전을 지원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렇게 변모된 군사력을 배경으로 하여 1586년 무렵에 대규모 건조 계획을 추진하기 시작하여 조선 침공 직전에 전함 천여 척을 이미 확보한 데에 이어서 종전 무렵에는 3천여 척이나 되는 대규모 선단을 보유할 수가 있었고 조선을 침공하기 직전인 1591년에는 사이카이도, 난카이도, 산요도, 산인도, 기나이와 그 동방 일부 지역에 동원령을 내려서 병력 33만을 동원할 준비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임진왜란 6년 전인 1586년에 일본 수군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유럽의 범선인 카락과 갤리온 구입을 시도했었는데 포르투갈인의 거절로 구입에는 결국 실패했다.[10]
이 무렵 일본군은 뎃포, 창, 궁시, 일본도를 충비하고 있었으며, 주종 간 단결력이 막강하였을 뿐만 아니라 개인의 실전 경험이 풍부하으므로 전쟁에서 탁월한 전력을 발휘할 수가 있었다.
명의 정세[편집]
명의 정치 상황 대략[편집]
1368년 개국된 명(明)은 15세기 초 영락제 때에 국력이 막강해졌으나 영락제가 사후 국력이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하여 1449년에 정통제가 몽골의 오이라트부를 친정하다가 도리어 패전하여 포로가 된 ‘토목보의 변’을 계기로 명의 국제상 영향력이 점차 약화하였고 내부 기강도 해이해져 갔다.
그 후, 16세기에 이르러 환관의 발호로 정치가 혼란해지고 전국이 반란의 소용돌이에 휩싸일 만큼 크게 동요하였고 이 무렵에 기세를 떨치기 시작한 왜구 집단은 명의 변경 해안 지대를 휩쓸었다.
이에 명은 북방으로는 몽골족의 침입을, 남방으로는 왜구의 침입을 막아서 양방에서 싸워야만 했으며, 이런 외부 압력은 자연히 국력 쇠퇴를 가속화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그러다가 만력제가 등극하면서 10년간은 장거정을 비롯한 대정치가가 등장하여 다시 중흥하는 기회를 맞았으나 장거정이 죽자 만력제는 국사를 돌보지 않고 정사를 환관에게 일임해 정치는 혼란에 다시 빠졌으며, 영하(寧夏)에서 일어난 몽골의 항장(降將) 보바이의 반란과 귀주의 토관(土官) 양응룡(楊應龍)의 난을 평정해야 했고 후에는 임진왜란으로 조선에 원군을 보내려고 국력을 소모하게 되었다.
명의 대외 관계[편집]
조선과 관계[편집]
명은 1368년 건국 후 대내로는 전제왕정을 강화하는 한편 대외로는 자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 질서를 형성해 나갔다. 명은 주변에 여러 나라를 중화주의에 입각한 조공·책봉 체제로 편입시켰다. 조선은 왕권의 정통성을 국제상으로 인정받고 국가의 왕의 권력을 도모하고자 명의 조공·책봉 체제를 받아들였다. 명이 멸망할 때까지 조선은 매년 서너 차례에 걸쳐 조공 사절단을 파견하였다.
해금 정책을 취한 명과 하는 무역은, 조선이 명에 조공하고 나서 그 대가로 사이(賜輿) 형식으로 하는 무역 형태로 이루어졌다. 소위 조공 무역은 명의 황제가 주변 국의 왕을 책봉하는 대가로서 해당 국은 조공으로써 명 황제에게 공녀를 위시해 공물을 바치는 형식이었는데 조선에서 공녀와 견직물과 고려인삼 등을 받으면 명에서는 그 대가로 조선 지배계급이 선망하는 고급 견직물과 자기, 서적, 약재 등을 주었다. 조공 무역은 조선에게 더 이익이 많았는데 이는 조공 횟수를 둘러싼 양국 간 주장을 보면 드러난다. 명이 조선에게 3년 1공, 즉 3년에 1번의 조공 무역을 주장하는데 조선은 거꾸로 명에 1년 3공, 즉 1년에 3번의 조공 무역을 주장했다. 조선에서 이렇게 주장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조공 무역은 제후국에서 제국에 일방으로 갖다 바치는 것이 아니었다. 일단 제후국에서 조공품을 바치면 제국에서는 그에 상응하는 회사품을 하사하는 게 원칙이었다. 회사품은 조공품보다 귀하고 많아야 하는 게 관례였고 원칙이었다. 더불어 사절단의 체제비와 물품 운반비를 명 측에서 모두 부담하였다. 이는 상국으로서 체면을 유지하려는 방도였다.
일본과 관계[편집]
평소 명(明)은 일본 다이묘들이 하는 조공을 그리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1404년 명은 일본의 요구에 따라 10년에 한번씩 조공하되 인원을 200명 이내로 제한하고 패도(佩刀)하고 오면 구적(寇賊)으로 치부해 죄를 따진다는 조건을 붙였다. 무역하는 장소는 절강성 영파(寧波)로 지정했다.
이렇게 제한을 가한 이유는 유황, 구리, 칼 등 일본의 물품이 명에서 특별히 필요하지 않은 데다가 일본 천황이 아니라 영주들의 배가 왔고 체류하는 경비도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일본은 점차 조공 인원을 300명으로 늘려 그런대로 조공 관계를 유지했다. 16세기 초반부터 일본의 규슈 지방 상인들이 명 복건성 쪽 항구에 드나들면서 은을 옷감과 교환하였다.
이 무렵 에스파냐 상인과 포르투갈 상인들까지 절강성, 복건성 등지에 와서 무역하자 명에서는 이들을 몰아내면서 일본 상인들도 함께 축출해서 1547년 이후부터는 일본의 조공선이 명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 뒤 상인들은 아오먼(澳門, 마카오)을 근거지로 삼았다.
그 결과 일본 상인들에게 후원받는 왜구의 활동이 극심해졌다. 왜구는 명과 조선을 주로 공격하였다. 일본은 포르투갈 상인의 중개무역을 이용해 명 상품을 사들이는 것이 번거로워 공식 무역로를 트려고 노력하며 조선에 주선해 달라고 부탁했으나 조선은 이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정권을 장악한 후 명과 무역하려고 노력했으나 성사되지 못했다.
명의 군사력[편집]
명은 개국 초에 징병제와 모병제 장점을 절충한 군제인 위소제도를 채용하기 시작했다. 위소의 최소 단위는 백호소로 정원은 병사 100명과 지휘관인 총기 2명, 소기 10명 등 총 112명이었다.
각 총기는 소기 5명을 지휘하고 각 소기는 병사 10명을 지휘했다. 백호소 10개로서 천호소 1개를 구성하고 천호소 5개로서 1위를 구성한다. 유사시에는 위의 지휘관으로 참장, 유격장, 파총 등을 임명하고 중앙에서 파견되는 총병관이 이를 총괄 지휘하였으며, 1위의 병력 규모는 5,600이었다.
위 수 개가 모여서 군단 도지휘사사를 형성하는데 그 지휘관은 도지휘사이다. 여러 도지휘사사는 중앙의 오군도독부에 분속하게 되어 있었다. 위소의 병사들은 평시에는 둔전과 군사 훈련에 종사하면서 전시에 대비할 태세를 갖추다가 전시에는 중앙에서 내려온 총병관의 지휘하에 전투하였다. 군단인 도지휘사사는 각 성이나 전략상 요지에 있었으므로 명 대에는 13성의 도지휘사와 요동, 만전, 대령 등의 도지휘사사를 비롯하여 관할구역이 광대한 지역에는 행도지휘사사를 두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16세기 전반기까지 명은 전국에 16개 도지휘사사, 5개 행도지휘사사, 2개 유수사를 두고 여기에 소속된 위 493개, 소 2,593개가 있었으며, 도사에게 직속된 소어천호소 315개가 있어 그 병력은 총 329만여에 달했다. 이 밖에도 황제의 친위군으로서 궁성의 수호를 담당하는 금의, 금오, 우림 등의 25위가 있어 그 병력 수가 15만여에 달했다.
명 군제의 근간인 위소제도의 경제 기반은 군둔(軍屯)이었고 그에 초기 세금 부과는 매우 경미하였으므로 위소제도 운영에는 큰 문제가 없었으나 영락제 연간에 군둔 관리 체제를 정비하면서 둔전병 부담이 가중되어 군둔의 기초가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그 후 1449년의 '토목보의 변'을 계기로 위소제도의 문제점을 해결하려는 방안으로서 민병 모집을 이용해 병력을 보충했다.
이 민병은 북방의 몽골족과 동남 해안 지역에 출몰하는 왜구 격퇴에 크게 기여하였으나 후대에 이르러 정치상 혼란과 더불어 군 기강이 해이해져서 그 전투력이 약화하여 역시 유명무실해졌다.
경과[편집]
제1차 침략[편집]
조선의 일방적인 패퇴[편집]
1592년 음력 1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쓰시마 국주에게 조선으로 하여금 일본에 복속하고 명(明)을 정벌하는 과정에서 일본군의 길잡이를 맡으라고 명령하였다. 소 요시토시는 명(明)을 정벌하는 데 길을 빌려달라는 말로 좋게 바꾸어 조선에 교섭해 왔으나 조선은 거절하였다.
교섭이 결렬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2년 5월 23일(음력 4월 13일) 군대 약 20만을 조선으로 파병해 침공하였다. 이날 정발이 지키는 부산진성과 송상현이 지키는 동래성이 일거에 함락되었다. 6월 3일(음력 4월 24일) 순변사 이일이 상주에서 일본군에서 패하고 10일 만에 경상도가 넘어갔다. 6월 7일(음력 4월 28일) 도순변사 신립이 충주의 탄금대에서 일본군에게 대패하고 전사하였다.
일본군의 작전은 육군은 종래 일본 사절단이 조선에서 이용하던 세 길을 따라 북진하고 수군은 조선 남해와 황해를 돌아 물자를 조달하면서 육군과 합세하는 것이었다. 고니시 유키나가를 선봉으로 하는 제1군은 부산·밀양·대구·상주·문경 등을 거쳐 충주에 이르고 제2군은 가토 기요마사가 인솔하여 울산·영천 등을 거쳐 충주에서 제1군과 합세하여 한양으로 진군하였으며, 구로다 나가마사의 제3군은 김해를 지나 추풍령을 넘어 북진하였다. 일본군이 노도처럼 북진해 오자 조선 왕실과 조정은 수도 한양을 버리고 북쪽으로 도주하여 분노한 백성이 궁궐과 전적을 태워버렸다.
6월 11일(음력 5월 2일) 일본군 제1군과 제2군은 개전한 지 20일 만에 충주·여주·양근 등을 거쳐 한양을 점령하여 본거지로 삼았고 6월 26일(음력 5월 17일) 도원수 김명원을 임진강 전투에서 격파하고서 군을 나눠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대는 평안도로,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는 함경도로, 각각 한반도 북부까지 진격하였다. 7월 21일(음력 6월 13일)에 평양이 함락되었다. 다급해진 선조는 의주로 피신했다.
수많은 전장에서 단련된 백전노장인 일본군은 전쟁 경험이 풍부하였고 잘 훈련되고 조직되었지만, 조선군은 군비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았으며 실전 경험도 전무했다. 조선이 전쟁 가능성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대책을 마련하였다고는 하나 오랜 기간 평화를 누리던 남부 지방에서는 심히 반발하였다. 결국, 병사들이 일본군이 진격해 온다는 급보를 듣고 탈영하는 사태도 빈번하였다. 일례로 일본군이 침공한다는 소식을 들은 이순신의 부하 포졸인 황옥현은 탈영하다가 이순신에게 적발되어 참수당하기도 했으며, 대규모 총력전을 경험하지 못했으므로 당시에는 전시 계획은 있었으나 그 실행하는 과정에서 많은 문제를 드러냈다. 예컨대 대구에는 전시 계획대로 군대가 소집되었어야 했으나 일본군의 고속 돌파로 말미암아 경장 이일이 도착하기도 전에 전역에 일본군이 진입하였고 백성과 수령도 뿔뿔이 도망친 뒤라서 일본군의 침공에 대비하여 급조한 대구읍성은 방어에 쓰이지도 못하고 버려졌고 이일은 자신이 지휘할 군대를 보지도 못하고 상주에서 일본군과 전투하기도 전에 패해서 도망쳤다.
조정의 피난[편집]
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조선의 왕과 백관은 여러 비상대책을 강구하였다. 신립의 패보는 한양의 인심을 극도로 동요시키고 선조는 마침내 정신(廷臣)과 더불어 한양을 떠나 개성·평양 방면으로 도망치고 두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을 함경도와 강원도에 보내어 근왕병을 모집하라고 시키고 명(明)에 사신을 지속으로 보내어 구원을 계속하여 청하였다.
왕이 한양을 나왔을 때 분노한 백성이 궁궐을 태워 버리고 노비는 자신의 문적(文籍)을 알고 있는 장례원과 형조를 불태웠다.[11]
조정에서는 도원수 김명원에게 도성을 수비하라고 시켰으나 결국 1592년 5월 3일(음력), 도성은 손쉽게 함락되었다. 당시 일본에서는 성이 함락되면 성주는 할복하고 성에 사는 주민은 항복하여 해당 지역이 평정되는 것이 전쟁에서 기본 방식이었는데 조선은 왕이 도성을 버리고 도망치고 각지에서는 백성이 저항했다. 고려의 현종, 고종, 공민왕도 이러한 방식으로 불리한 형편을 타개했으므로 조선 백성은 별로 충격받지 않았지만, 일본군 입장에서는 굉장히 당혹스러워했고 백성이 정복자에 대항하는 실정에도 충격받았다. 일본에서 백성이란 단순히 거주를 이전하는 자유도 없는 영지에 부속된 농노나 전리품으로서 성격이 강했기 때문이다. 일본은 이런 차이를 모른 채 정복한 조선에서 보급과 급료 등 비용을 충당할 예정이었으므로 일본군의 기본 계획에 큰 차질을 빚는다.
한양에서 백성을 두고 도망친 선조와 백관 일행은 임진강을 건너자 일본군의 추격을 늦추려고 나루터를 방해하고 배 여러 척을 침몰시켰다. 선조와 백관 일행은 일본군이 한강 이남까지 진격해 오자 다시 도망쳤으며, 개성을 거쳐 평양에 이르러서는 광해군을 왕세자로 책봉하였다. 이후 일본군이 개성까지 함락하고 황해도로 북진해 오자, 선조와 백관 일행은 또다시 도망치기로 마음을 굳게 정하였다. 선조는 이런 굴욕 속에서 몽진에 성공하였다.
조선군의 반격[편집]
조정에서는 그와 함께 또 하나의 조정인 분조를 꾸렸는데 평양에서 왕세자로 책봉된 광해군이 이를 이끌고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의병 봉기를 촉구하고 의병 부대를 국가의 정식 군대로 인정하였다. 이는 조선이 병농일치의 군사제도를 시행하였으므로 당연한 절차였고 의병장에게 관직을 주고 무과에 급제하고 현감 이상 관직이 있는 관리로서 대우해줬지만, 의병장을 대상으로 하는 관직 제수와 우대는 기존 무과 급제를 이용해 정식으로 장수가 된 자들과 알력을 일으켰는데 이런 알력이 첨예화하여 폭발한 것 중 하나가 김덕령 사건이다. 한편으로 공명첩으로써 군량미를 모으고 근왕군을 모집하기도 했다. 광해군이 분조를 이끌고 활발히 활동하는 것을 전해 들은 각지 사대부와 백성은 광해군을 따르고 근왕군에 참가하려고 찾아왔다. 광해군은 근왕병을 모집하고 군량미를 확보하였으며 민심을 안정시켰다. 이에 명나라 장군들도 광해군을 극찬하였다.
의병들은 곳곳에서 일본군의 보급로와 통신망을 차단하여 일본군을 곤란에 빠뜨렸다. 의병의 봉기로 민심은 차츰 제자리를 찾게 되었으며 조선 관군도 재기할 시간을 벌었다.
1592년 또한,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압도하는 화력과 탁월한 전술을 이용하여 일본 수군을 음력 5월 사천 해전에서, 음력 6월 당포 해전에서, 음력 7월 한산도 대첩에서 패퇴시키고 제해권을 장악하였다. 일본군은 보충 병력과 군수품 수송이 어려워져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명(明)에서 온 원군의 활약과 조선 수군과 의병의 활동은 조선에 불리하였던 전세를 소강(小康)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한편 국내 각처에서는 일본군의 침공에 대항하는 의병이 일어났다. 조헌은 충청도 옥천에서 일어나 청주에 주둔한 일본군과 전투하고 금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하다가 전사하였고 곽재우는 경상도 의령에서 거병하여 의령과 창녕에서 일본군과 일전을 벌이고 진주에서 김시민과 함께 일본군을 방어하였다. 고경명은 전라도 장흥에서 거병하여 은진까지 북상하였다가 금산성에서 일본군과 격전하다가 전사했으며, 김천일은 호남에서 거병하여 수원을 근거지로 일본군과 전투하고 강화도로 진을 옮겼다가 다음 해 진주에서 전사하였다. 정문부는 함경도에서 활약하여 경성과 길주를 회복하고 일본군을 몰아내어 함경도를 수복하였다. 묘향산의 중 휴정은 격문을 팔도 승려에게 보내 그 사람의 제자 유정의 내원을 얻어 승병 1700명을 이끌고 평양 탈환전에 참여해 공을 세워 도총섭에 임명되었으며, 그 사람의 제자 처영도 승병을 모집하여 전라도에서 권율의 막하로 들어가 활동하였다.
특히, 조선군은 김시민의 제1차 진주성 전투, 권율의 이치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크게 방어하여 전라도가 온전할 수 있었다. 이는 일본군을 주춤하게 하였고 일본군의 작전에 차질을 빚게 하였으며, 많은 인구가 사는 조선 최대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기반으로 전력을 재정비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순신의 전라 수영이 육지에서 일본군의 내습 걱정 없이 해전에 전념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이순신장군의 승전의 뒷 배경에는 단순히 뛰어난 지휘력과 급습 말고도 총통이라는 훨씬 더 강력한 화력병기 및 안정적인 판옥선에 더해 귀선이라는 새로운 전투함이 조합된 '발전되고 강력한 무기체계'가 전력화 되었길래 가능했던 승리였다.
명군의 개입[편집]
한편, 의주로 도망친 선조는 명나라에 계속하여 구원을 간청하였다. 명나라 조정에서는 여론이 분분하였으나 병부상서 석성의 주장으로 자국의 영토에까지 전쟁이 번지는 형편을 막으려면 조선에서 적을 방어해야 상책이라는 판단하여 대규모 원병을 파견하였다. 이 때 명(明)은 일본의 의도가 명 정벌에 있다고 판단하였다. 한편, 몇 해 전 조선의 역관이 명나라 여자를 홍등가에서 구한 적이 있었고 그 여자가 나중에 석성의 부인이 되었고 조선의 곤란을 듣고 부인이 석성을 설득해 조선에 명군이 파병되었다는 일화도 전래한다. 조선의 거유(巨儒)인 성호 이익은 저서에서 임진왜란의 최고 공신은 석성이라고 평가했다.[출처 필요]
요양부총병 조승훈은 병사 5천을 이끌고 평양성을 공격하였으나 패하자 명나라에서는 심유경을 평양에 파견하여 화의를 제창하게 하는 한편 1593년 음력 1월 이여송, 송응창이 이끄는 4만여 대군은 조선군과 합세하여 평양을 수복하고 일본군은 한양으로 퇴각하였다. 명군은 처음에 파병한 3천여 명을 시작으로 종전할 무렵에는 10만여 대군을 조선에 주둔시켰다.
명군이 전쟁의 판도를 바꾸었지만, 명나라가 개입하여 전쟁이 길어진 측면도 있다. 개전 1년 후 조선군은 오합지졸 병력 17만 5천을 운용하고 있었고 일본군은 도해 15만 중에서 승려와 의사를 위시해 전투 부대와 작전을 지원하는 非전투 요원 대부분을 포함해 7만 명 이상이 전사한 상태고 전선도 경상도 남부로 고착되었으나 전세가 불리할 때마다 일본은 강화를 요청하였고 피해나 위험 부담 없이 전쟁을 마무리하고 싶었던 명군은 조선 장수들의 공세 요구를 묵살하고 강화에 응하곤 하였다.
명군은 벽제관 전투에서 패하여 개성으로 한때 후퇴하였다. 이에 일본군은 한양에 집결하여 마침 함경도에서 철수하는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와 연합하여 행주산성을 공격하였다. 행주산성은 권율이 방어하던 곳으로서 일본군과 격전을 벌인 끝에 방어하였다. 행주산성에서 한 전투는 권율의 분전도 있었지만, 군사에 관련된 식견이 전혀 없으면서 지휘관으로 임무를 수행한 다이묘[출처 필요]인 우키타 히데이에와 이시다 미쓰나리라서 조선군의 성을 방어할 수 있었다. 특히 이 공성전에서 우키타 히데이에는 부상(負傷)하였다. 행주산성 방어전은 김시민의 진주성 전투, 이순신의 한산도 대첩과 함께 임진왜란의 3대첩 중 하나이다.
강화 회담[편집]
명나라는 심유경을 한양의 일본군 본진에 다시 보내어 화의를 계속 추진하였고 일본군도 보급 문제로 말미암은 전황 불리, 명군의 진주, 악역(惡疫)이 유행한 탓에 화의에 응하여 1593년(선조 26년) 음력 4월에 전군을 남하시켜 서생포에서 웅천(雄川 : 지금의 창원)에 이르는 사이에 성을 쌓고 화의 진행을 기다리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군은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 함락하지 못한 진주성을 공격하여 조선군과 9일간 치열하게 전투한 끝에 의병장 김천일·경상우병사 최경회·충청병사 황진 등을 전사시키고 성을 함락하였으나 일본군도 피해(被害)가 커서 전라도로 진격하지 못하였다. 이것이 제2차 진주성 전투이다. 이로써 전란 내내 전라도는 일본군의 침입으로부터 보전되었다. 전라도는 최대의 곡창지대이며 인구가 많아 반격의 발판으로 중요했다.[12] 또한, 일본군이 육로를 통해 전라 수영, 즉 이순신의 해군기지의 곧바로 진격하여 육지를 통해 배후를 공격하는 최악의 상황도 이루어질 수 없게 되었다. 2차 진주성 전투 이후 이순신은 현덕승에게 보낸 편지에서 "若無湖南 是無國家(만약 호남이 없으면 나라가 없을 것이다.)"라고 적었다.[13]
1593년 음력 8월 명나라는 일본군과 휴전협상을 제의했다. 양국은 3년에 걸쳐 지루하게 휴전하는 협상하는 과정에서 이몽학의 난이 일어나기도 했다.
제2차 침략[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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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은 보급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탓에 전황이 불리해지자 화의에 나섰다. 명군도 벽제관 전투에서 패한 후 자국의 이해를 우선시하여 종전을 원했으므로 화의 교섭이 시작되었다. 조선 왕과 신료들은 삼국 중에서 가장 많이 피해(被害)하였다면서 화의를 반대하여 교섭에서 제외되었다. 교섭이 진행되는 동안 조선 조정은 군사제도를 능률이 많이 나게 개편하고 의병 부대를 관군으로 편입시키는 등 방비를 강화해 나아갔다. 일본군은 남해안으로 철군하여 왜성을 축조하고 전투를 중단한 채 주둔하였다.
명(明)과 일본군 양측은 서로 자국이 유리한 처지에서 화의를 교섭하려고 하였다. 일본군은 명 황녀(皇女)를 일본의 후비(後妃)로 삼을 것, 한반도의 남부 4도를 내줄 것, 감합 무역을 부활할 것, 조선 왕자와 대신 12명을 인질로 삼을 것을 명에 요구하였으나 일본군이 한 요구는 대부분 수용되지 않았고 3년에 걸친 화의 교섭은 결국 결렬되었지만, 협상하는 과정에서 포로가 된 조선의 두 왕자는 일본군이 조선 왕실에 돌려주었다.
남해안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은 1597년 다시 전쟁을 시작하였다.
일본 수군은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을 전멸시켰고 일본 육군은 임진년 침공과 다르게 보급로를 탄탄하려고 전라도를 점령한 후 한양을 공격하기로 한다.
당시 일본 수군은 이순신의 파직과 원균의 칠천량 해전 대패로 말미암아 남해안 대부분의 재해권을 장악하였고 일본 육군은 1597년 9월 25일(음력 8월 15일), 9월 29일(음력 8월 19일) 남원 전투, 전주성에서 조명 연합군을 대파하고 남원과 전주를 함락시킨 일본 육군은 전라도를 점령하고 충청도 직산까지 진격하여 명군과 대치하기에 이른다.
또한, 일본군은 전공을 증명하고자 조선인들의 코를 베어 전리품으로 일본에 보냈고(→귀무덤), 남녀노소를 불분하고 마구 잡아 서양에서 온 노예상에게 매각했다.
왜군의 철수[편집]
남원과 전주를 함락한 일본 육군은 전라도를 점령하고 충청도 직산까지 진격했다. 후에 충청도 직산에서 명군과 대치하여 몇 차례 전투하였으나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이 명량 해전에서 일본 수군을 대파시키자 보급선이 끊길 것을 우려한 일본 육군은 충청도 직산을 끝으로 더는 진격하지 못했다.
이후 조명연합군(朝明聯合軍)과 일본 육군의 공수가 바뀐다. 1597년 12월 말에서 1598년 1월 초에 걸쳐 조명연합군(朝明聯合軍)은 울산왜성을 규모가 매우 크게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14][15][16] 일본 육군은 군량이 극심하게 부족 상태에서 고군분투하였다.
1598년 9월 말부터 10월 초에 걸쳐 조명연합군은 서로군, 중로군, 동로군을 편성하고 수군이 이를 받치는 형태의 사로 병진 작전을 개시하였다. 이는 서쪽에서 순천왜성(고니시군), 사천왜성(시마즈군), 울산왜성(가토군)을 동시에 공격하는 태세였으나 왜교성 전투,[17] 제2차 울산성 전투,[18][19] 사천 전투에서 패하였다.[20][21][22][23] [24]
이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왜군은 결국 이를 극비에 부치고 본국으로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이순신은 노량에서 철수하는 왜군을 쫓아 함대를 대파하여 승리했으나 전투 중에 전사하였고 왜군은 전투에는 패배했으나 본국으로 철수에는 성공하여 임진왜란은 종전하였다. 여기서 철수에 성공했다 뜻은 고니시 유키나가를 위시한 주요 지휘관이 무사히 본국으로 귀환했다는 의미이고 일반 병졸들은 철수에 실패한 인원도 많았다.
전쟁 결과가 3국에 미친 영향[편집]
조선에 끼친 영향[편집]
민간인을 포함한 조선 측 사망자는 180,000여 명에서 1백만 명으로 추정된다.[25][26] 또한, 경작지 중에서 66%가 파괴되었다.[27]
문화재 손실도 막심하여 경복궁을 위시한 건축물과 서적·미술품 등이 소실되었는데 역대실록 등 귀중한 사서를 보관했던 사고도 전주사고만 남고 모두 소실되었다. 경복궁이 파괴되는 바람에 조정에서는 광해군이 즉위한 이후에도 한동안 월산대군이 개인 저택으로 사용하던 집을 궁궐로 대용했다.[28]
이외에도 민가 많은 수, 포도청, 서원 등이 파괴되어 한국전쟁과 비견될 정도로 심각한 피해(被害)였다. [29] 한편 병제 개편과 무기 개량에 착수하여 척계광의 《기효신서》를 얻어서 절강무예를 본받아 병술을 개혁하고 훈련도감을 설치, 삼수병(三手兵)을 두어 무예를 조련시켰다. 무기로서 원래 무기인 궁시창검·총통·완구·화전 외에 비격진천뢰와 화차가 발명되었고 조총과 불랑기를 이용하였다.
또 백성의 사상 면에서도 많은 변화가 일어나 애국심과 자아반성 등 여러 방면에서 개선과 명(明)을 향한 사대사상이 더욱 굳어졌으며, 일본인을 대상으로 한 재인식과 적개심이 더욱 높아졌고 전란 중 명군이 관우를 숭배하는 사상을 전래하여 민간신앙이 크게 영향받았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조선 사람을 독한 고추로 독살하려고 가져왔으나 이로 인하여 오히려 한민족이 고추를 즐기게 되었다는 설이 있지만 신빙성이 떨어지고 오히려 일본의 여러 문헌에는 고추가 임진왜란 때 한국에서 일본으로 전해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한편으론 이재위(李裁威)의 《몽유(蒙纜)》(1850년대)에 북호(北胡)에서 들어왔다고 기록하였다. 임진왜란 당시에 일본군의 포로가 된 홍호연의 일본인 후손과 한국인 후손이 400년 만에 경상남도 진주국립박물관에 만났다.[30]
일본에 끼친 영향[편집]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일본 내에 도요토미 히데요시 측 봉건 제후의 세력이 약화하여 도쿠가와 이에야스로 하여금 정권 교체를 쉽게 이룰 수 있게 하였다.
조선에 출병한 다이묘들은 대부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충성하던 사람들이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완벽히 장악하지 못한 다이묘들은 도요토미에게 소집되었으나 나고야 성에 주둔하고 있었다. 조선에 출병한 부재 다이묘들의 영지는 관료 집단이 관리하게 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이 관료 집단의 힘이 비대해졌다 그런데 조선 출병하였던 다이묘들의 세력이 약화되었으며, 나고야 성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소집된 수많은 다이묘가 모여있었다. 그러므로 주둔 중이던 다이묘들 중에 가장 유력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손쉽게 정치상 장악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때문에 그는 토요토미 히데요시 죽음 후 평화 협상에서 일본 내 주도권을 잡으면서 실제에 근거한 권락자가 되었다.
우에스기 가게카쓰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잡으려고 일으켰던 병력에 이시다 미쓰나리가 중심이 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들이 대거 합세하여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들은 결국 세키가하라(1600 년)에서 충돌했으며 이 전투가 일본 전체의 병력이 충돌한 전투였는데도 전투가 개시된 지 3시간 만에 종결되었다. 이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압승했다. 패배한 이시다 미쓰나리, 고니시 유키나가, 안코쿠지 에케이는 참수당했고 우에스기 가게카쓰, 모리 데루모토는 무려 80%에 달하는 영지를 삭감당했다. 특히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이시다 미쓰나리는 그 일족이 절멸되어 현재 도요토미 히데요시나 이시다 미쓰나리의 자손은 아무도 없다.
일본은 이 전쟁으로써 가져간 조선의 문물을 대표할 정도로 전형이 될 만한 특징이 있는 도자기 기술은, 조선의 도공을 일본으로 데려가 후하게 대하면서 도자기를 제작하게끔 양호한 환경을 조성해 주었다. 이렇게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 도공들은 일본 도자기의 발달에 결정으로 기여하였다. 이에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이라고도 부르며, 활자(活字)를 가져가서 일본 활자 기술 발전을 이롭게 하였고 서적을 가져가 문화가 발달하게 이바지하게 되었다.
명나라에 끼친 영향[편집]
명은 대군을 조선에 파병하여 국력을 소모시켰으므로 국가 재정이 문란하게 되었다. 당시 명은 만력제가 재위 중이였다. 그는 초반에는 선정을 베풀었으나 후반에 들어서면서 국정을 게을리하고 낭비를 일삼았다. 특히 조선 출병까지 포함된 '만력3정'으로 대표되는 과도한 원정으로 재정은 고갈되어갔으며 자신의 무덤을 건설하기 위해서 만력3정에 소요된 경비보다도 많은 은자 800만냥을 지출하여 세금은 늘어나는데도 명의 재정은 더욱 궁핍해졌다.
그러나 명나라의 쇠망 혹은 멸망이 임진왜란이라는 단일한 사건만이 중대하게 작용하여 일어났다는 해석은 임진왜란의 여파가 일본에는 상대적으로 작게, 타국에는 상대적으로 과장하여 크게 일어났다고 보는 일본중심사관이 뿌리뽑히지 못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일본에서는 임진왜란 패퇴 직후 도요토미 정권이 붕괴했지만, 명나라는 임진왜란 이후에도 50여년 가까이 유지되었다.
대중문화 속에서 그려지는 임진왜란[편집]
대한민국의 경우는 여러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 임진왜란을 상세히 묘사하는 반면, 일본의 경우 비교적 간단하게 다루었다.
- 한국 입장
- MBC 대하드라마 《조선왕조오백년》 임진왜란 편에서는 일본군이 조선에 침략하여 약탈과 학살을 벌이는 장면, 대규모 해전 등 조선군과 일본군의 전면전이 묘사되었다. 《조선왕조오백년》〈임진왜란〉 편은 1991년 10월부터 일본 NHK를 통해 방영되었다.[31]
-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 임진왜란은 일본의 정치적 목적에 의하여 전쟁과 외교가 병행된 전쟁으로 묘사되었다.
- 영화 《천군》에서는 이순신의 활약 보다는 인간적 내면을 더 비중있게 다루었다.
- 2015년 방영 예정인 KBS 드라마 《징비록》에서 류성룡 선생이 집필한 '징비록' 내용을 바탕으로 임진왜란이 발생하기 전부터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노량해전까지 시기에 조정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를 묘사할 예정이다.
- 일본 입장
- 일본에서는 임진왜란이 원의 일본 원정[32]에 비해서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으며 비교적 간단하게 다루어진다.
- NHK 대하드라마 《공명의 갈림길》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출병을 명령하는 단 한컷만으로 임진왜란을 묘사하였다. 이는 그 이전, 그 이후의 작품에도 마찬가지였다.
- 일본 대하 역사 소설 '《도쿠가와 이에야스》'에서는 의외로 히데요시 말년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갖는 전쟁으로 그려진다. 히데요시는 전 주인 《오다 노부나가》의 영향을 받아 오래전부터 꿈꿔왔던 조선침략이었는데, 어렵게 얻은 친아들이 병사해 그 슬픔을 잊고자 갑자기 실행에 옮기는 것으로 나타난다. 전쟁 중에 또다른 아들 히데요리가 출생하여 히데요시는 기뻐하였으나, 명나라의 참전으로 전쟁상황이 고착되고 자신에게 병이 찾아왔음을 알자 많은 집착과 근심을 보인다. 결국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전쟁은 급하게 종결되고 무리를 둔 조선침략은 다이묘간 분쟁과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대두, 《세키가하라 전투》(1600년)등을 가져와 히데요시의 천하통일을 붕괴시킨다. 이와 대조적으로 이에야스는 일본통일의 목적을 평화에 두고 있기에 전쟁이 되풀이 될 가능성이 없는 것으로 묘사된다. 《선조》와 《이순신》, 《울산성 전투》, 명나라부터의 책봉, 《명량해전》과 《노량해전》, 이순신의 죽음 등이 서술되어 있다.
당시 사용된 무기[편집]
조선[편집] |
일본[편집] |
양국 주력함 비교[편집]
조선[편집]
조선의 전함은 바닥 부분이 평평한 전함이며 일본의 전함보다 내구력이 뛰어났다.
판옥선 위에 판자를 덮어 방어체계를 갖춘것 외에는 판옥선과 동일하다. 한때 위인전기 등에서 세계 최초의 철갑선이라 하였다. 거북선은 다른 전함에 비해 고도의 기동성이 요구되었다.
조선의 주력 전함으로, 함선 위에 판자로 만든 집(누각)이 있다고 하여 판옥선이라 불렸다.
정찰과 연락용도로 사용한던 함선이다. 일반적으로 조선의 각 수군 항구에서는 판옥선과 협선을 1:1비율로 보유하는 것이 규정사항이었다. 다른 함선에 비해 알려진 바가 적다.
일본[편집]
일본의 전함은 바닥 부분이 뾰쪽하며 배 위에 집 모양의 누각을 세웠다. 대체로 조선의 전함에 비해 크기가 작고 내구력이 약했다.
기타[편집]
한편 임진왜란 전의 정세보고를 한 황윤길과 김성일의 문제가 1945년 해방 직후에까지 이어지면서 논란이 되었다. 황윤길의 집안 후손인 사학자 황의돈이 학봉 김성일을 비판적으로 기술한 점이 2000년대에 와서 알려지면서 논란거리가 된다. 현대에 들어와 교과서를 편찬하면서 현대 한국사학사에 있어 김성일은 임진왜란을 유발한 전화의 책임자로 기록되었다. 이러한 논지를 띤 최초의 학자는 황윤길의 문중 족손인 황의돈이었다.[33]
해방 후 동국대학교에서 국사학을 연구한 제1세대 학자인 황의돈은 신편 조선 역사 128~129쪽에서 류성룡, 이산해 등 당시 득세한 동인배가 김성일의 편을 들어 군사 시설을 모두 부수고 조정의 모든 대신들이 마음을 놓아 태평한 꿈에 취하여 드러누웠다.'고 기록함으로써 임진왜란의 책임이 김성일에게 있다고 기록하였다.[33]
이를 두고 신복룡은 '한 역사적 인물의 행적은 그의 진심과 동기를 이해하는 데에서부터 비롯해야 하며 그의 진심은 그가 마지막 생애를 어떻게 마쳤는가에 따라 평가되어야 한다.[33]'며 김성일은 신중한 애국자요 충신이었지 결코 의롭지 않게 거짓말을 말할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문중 사학의 희생자였다.[33]며 안타까워했다.
주요 인물[편집]
굵은 글씨는 전쟁 당시 각국의 군주이며 칼표(†)가 붙은 인물은 전쟁 중 사망한 인물.
조선 (한국)[편집] |
일본[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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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편집]
- 임진왜란 해전 목록
- 임진왜란 전투 목록
- 항왜 VS 순왜
- 임진왜란 군대 목록
- 월하의 침략자
- 병자호란
- 간양록(看羊錄)
-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
- 조선인 포로
- 징비록
- 연려실기술
- 양부하(梁敷河)
- 피로인(被虜人)
- 왜관
- 페르낭 멘데스 핀투
- 왕직(王直)
- 철포전래
- 포르투갈의 발견
- 일본-포르투갈의 관계
- 예수회
- 일본의 기독교
- 일본 로마가톨릭의 역사
- 기리시탄 다이묘
-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 그레고리오 세스페데스
- 가스파 빌레라 - 세스페데스 대신에 원래 조선에 오기로 했던 신부
- 일본의 기독교
- 해귀(海鬼) - 명나라 군대가 데려온 포르투갈 용병
- 사세용(史世用) - 조선에 온 중국첩보원
- 나에시로가와
임진왜란을 소재로 하는 작품[편집]
PC 게임[편집]
각주[편집]
- 이동 ↑ Turnbull, Stephen. 2002, pp. 140.
- 이동 ↑ Turnbull, Stephen. 2002, pp. 217.
- 이동 ↑ Turnbull, Stephen. 2002, pp. 221.
- 이동 ↑ Turnbull, Stephen. 2002, pp. 230.
- 이동 ↑ 《글로벌세계대백과》, 〈임진왜란〉, 임진왜란〔槪說〕.
- 이동 ↑ 『일본사』55장, 루이스 프로이스(Luis Frois), 1583년 ~ 1597년 사이에 일본에서 집필.
- 이동 ↑ 조선왕조실록
- 이동 ↑ 통신사 황윤길 등이 왜 사신 평조신 등과 돌아오다. 조선왕조실록 (1591년 3월 1일). 2009년 2월 14일에 확인.
- 이동 ↑ 부대 특성에 따라 서양에서 파견된 신부가 이 임무를 담당하기도 했는데 이때는 지휘관 다이묘가 가톨릭 신도일 때에 해당되었다. 일례로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대에서 성직자로서 업무를 담당한 사람 중 한 사람이 스페인의 세스페데스 신부였다.
- 이동 ↑ 이상윤 (2010년 2월 22일). 《기술,배,정치-기술배정치는 세계패권을 어떻게 바꿨는가?》. 높은새, 297쪽. ISBN 978-89-93989-02-1
- 이동 ↑ 『조선왕조실록』, 『난중잡록』
- 이동 ↑ 호남연합의병 주역 유팽로를 만나다, 한국일보, 2012년 6월 13일
- 이동 ↑ 이한우 차장 대우, ['무호남 무국가'의 진실] "호남땅마저 함락되면 조선은 망한다", 《주간조선》, 2006년 11월 18일
- 이동 ↑ 宣祖 96卷, 31年(1598 戊戌 / 명 만력(萬曆) 26年) 1月 10日(丙申) 3번째기사 접반사 윤형, 충청 절도사 이시언이 적과의 전투상황을 보고하다
- 이동 ↑ 宣祖 96卷, 31年(1598 戊戌 / 명 만력(萬曆) 26年) 1月 16日(壬寅) 2번째기사 이시언•성윤문이 적과 한 전투 상황과 후퇴 사실을 알리다
- 이동 ↑ 宣祖 96卷, 31年(1598 戊戌 / 명 만력(萬曆) 26年) 1月 16日(壬寅) 3번째 기사 접반사 이덕열이 후퇴중 입은 피해와 백성들의 비참한 실상을 보고하다
- 이동 ↑ 宣祖 105卷, 31年(1598 戊戌 / 명 만력(萬曆) 26年) 10月 12日(甲子) 6번째 기사 우의정 이덕형이 명군의 패전에 관한 일로 치계하다
- 이동 ↑ 宣祖 105卷, 31年(1598 戊戌 / 명 만력(萬曆) 26年) 10月 2日(甲寅) 3번째 기사 마 제독 접반사인 이광정이 제독이 경주로 퇴진하려 한다는 치계를 올리다
- 이동 ↑ 宣祖 105卷, 31年(1598 戊戌 / 명 만력(萬曆) 26年) 10月 10日(壬戌) 7번째 기사 마 제독 접반사인 이광정이 제독의 패전에 대한 치계를 올리다
- 이동 ↑ 宣祖 105卷, 31年(1598 戊戌 / 명 만력(萬曆) 26年) 10月 8日(庚申) 7번째 기사 군문 도감이 동 제독이 후퇴하였다고 아뢰다
- 이동 ↑ 宣祖 105卷, 31年(1598 戊戌 / 명 만력(萬曆) 26年) 10月 10日(壬戌) 6번째 기사 경상도 관찰사 정경세가 명군의 퇴각을 다룬 치계를 올리다
- 이동 ↑ 宣祖 105卷, 31年(1598 戊戌 / 명 만력(萬曆) 26年) 10月 16日(戊辰) 3번째 기사 동 제독이 전투에 관한 게첩을 올리다
- 이동 ↑ 宣祖 105卷, 31年(1598 戊戌 / 명 만력(萬曆) 26年) 10月 17日(己巳) 1번째기사 감찰 어사 진효의 일본군과 한 전투에 관한 제본
- 이동 ↑ 宣祖 105卷, 31年(1598 戊戌 / 명 만력(萬曆) 26年) 10月 12日(甲子) 7번째기사 삼로의 군사가 패전하다
- 이동 ↑ Turnbull, Stephen. Samurai Invasion: Japan’s Korean War 1592–98. London: Cassell & Co, 2002
- 이동 ↑ Jones, Geo H.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 1592", The China Review, or notes & queries on the Far East, 1899 (Volume 23, Number 4-5: pp. 215–219, pp. 239–254), China Mail Office.
- 이동 ↑ Early Joseon Period. 《History》. Office of the Prime Minister. 2007년 3월 30일에 확인.
- 이동 ↑ 덕수궁 공간분석
- 이동 ↑ 이것을 지금으로 따진다면 청와대와 정부건물과 지방자치제도가 붕괴되고 교육시설과 공장등의 생산시설이 없어지고, 토지문서등의 문서의 소실들로 물적피해만 따저도 수십조원은 가볍게 넘을 것이다.
- 이동 ↑ 지성호 기자. "임란 때 생이별한 형제 후손들 400여 년 만에 상봉", 《연합뉴스》, 2010년 11월 29일 작성. 2010년 11월 3일 확인.
- 이동 ↑ 「조선왕조5백년—임진왜란」日서 방영, 《동아일보》, 1991.10.04
- 이동 ↑ 자신들의 영토에서 일어났으며 비록 가마쿠라 막부의 약화를 가져왔지만 일단 승리한 전쟁
- ↑ 이동: 가 나 다 라 신복룡, 《한국사 다시보기》 (도서출판 풀빛, 2001) 128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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