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라이
samurai , 侍
- 일본 무사계급의 구성원.
본래 사무라이라는 용어는 귀족 출신인 무사를 가리키는 것이었지만, 12세기에 권력을 장악하여 1868년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때까지 일본 정치를 지배한 무사계급에 소속된 모든 사람을 지칭하게 되었다. 지방 무사 출신인 가마쿠라 시대[鎌倉時代:1192~1333]의 사무라이들은 상당 수준의 무예를 지녔으며 자신들의 극기주의에 대한 높은 자부심을 가지고 이전의 잔잔하고 세련된 왕실 문화와는 전혀 다른 절도 있는 문화를 발전시켰다.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1338~1573]의 사무라이들은 선(禪) 불교의 영향을 받아 오늘날까지도 계속되는 다도(茶道)나 꽃꽂이 같은 일본 고유의 예술들을 탄생시켰다. 이상적인 사무라이는 불문의 행동규범을 따르는 극기적인 무사여야 했으며, 이 행동규범은 뒤에 무사도 (武士道)로 정립되어 용기, 명예, 개인적 충성을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게 되었다 (→ 색인 : 무사도). 이때문에 불명예나 패배를 당했을 경우에는 할복 자살(셋푸쿠[切腹])을 택하는 것이 제도화되었다.
도쿠가와 시대[德川時代:1603~1867] 초기에 전체 인구 중 10% 미만에 불과했던 사무라이들은 사회질서를 정착시키고 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한 노력의 일환 속에서 폐쇄적인 계층으로 밀려났다. 여전히 자신들의 사회적인 지위를 상징하는 2자루의 검을 차고 다니는 것이 허용되긴 했지만, 250년간 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아래의 평화시대에 대부분의 사무라이들은 관리가 되거나 다른 생업을 가져야만 했다. 18세기초부터 상업경제가 발전하고 도시가 성장함에 따라 일본에는 활기찬 도시문화가 꽃피기 시작했으며 궁극적으로 사무라이들의 검소한 생활방식을 변화시켰다. 동시에 주로 고정된 봉급을 받고 살아가던 사무라이들의 경제적 지위도 점차 악화되었다.
도쿠가와 시대 말기에는 높은 사회적 지위에도 불구하고 점점 더 많은 수의 사무라이 가족들이 궁핍에 시달렸다. 19세기 중반 서구 열강의 침략에 직면하여 새로운 민족의식을 자각하고 출세를 열망하던 하층 사무라이들은 도쿠가와 체제에 반대하는 운동에 참여했으며 이로 인해 1868년 메이지 유신이 일어났다. 1871년 봉건제도가 공식적으로 철폐되었을 때 사무라이 계급의 특권적인 지위도 상실되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사무라이 출신들은 1870년대에 여러 번 반란을 일으켰으나 새로 창설된 관군에 의해 곧 진압되고 말았다.
<다음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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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라이
사무라이(일본어: 武士, ぶ-し, 부시, 모노노후; 무사)는 일본 봉건 시대의 무사(武士)를 뜻한다. 본래는 가까이에서 모신다는 뜻의 단어, 시(侍)에서 나온 말로써 귀인을 경호하는 사람을 가리켰으나, 헤이안 시대(平安時代) 이후 일반적인 무사를 가리키게 되었다. 주군을 잃은 사무라이는 로닌이라 불리며, 칼솜씨를 제외한 기술이 없어 특별한 직업없이 유랑하거나 걸식하며 살인청부 등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성립
원래는 유력 귀족이나 여러 다이후(大夫)를 섬기는, 사무라이혼(侍品)이라 불린 통상 위계 6위 정도의 하급 기능직 관인층, 즉 귀족과 연줄이 있는 국가 레벨의 지배계층의 가장 낮은 곳을 차지하고 있던, 실무자 계급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말하자면 조정을 섬기는 관인이면서 동시에 상위 귀족・관인층을 섬기며 조정의 실무직을 맡았던 신분이 바로 「사무라이」로, 출세한다 해도 귀족의 말석인 5위 정도까지 오르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 실무라는 것도 말 그대로 조정의 국사 전반에 관련된 것으로 굳이 무예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업무가 존재했고 각각의 업무를 가업으로 계승했으며, 후세에 이르러 차츰 무예를 직능으로 하는 부시(武士)를 가리켜 사무라이라 부르는 경우가 많아지게 되면서 사무라이=무사라는 공식이 성립하게 된 것이다(부시 또한 초기에는 다이후 신분의 군사 귀족과 사무라이 신분의 일반 부시라는 두 계층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또한 귀족과 연결된 지배층이던 사무라이 신분보다 낮은, 본래는 백성의 신분이었던 지자무라이(地侍) 등도 부시 취급을 받으면서 이들 백성 출신의 지자무라이와 구별해, 「사무라이」는 「상층 부시」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여기서의 상층이란 엄밀하게는 발생기의 부시와 마찬가지로 말을 타고 전투에 나갈 자격과 권리를 갖춘 부시를 말한다). 17세기 초에 간행된, 일본어 단어를 포르투갈어로 해석한 사전인 《닛포지쇼》(日葡辞書)는 부시(Bushi)나 모노노후(Mononofu)는 각각 「무인」(武人), 「군인」(軍人)을 의미하는 포르투갈어로 번역되어 있는 한편으로 사부라이(Saburai)에 대해서는 「귀인 또는 존경받는 사람」(貴人、または尊敬すべき人)으로 번역하고 있어, 이 시기 사무라이라는 이름이 부시 계층 안에서도 특별한 존재가 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어원
「사무라이」는 16세기에 이르러 등장한 단어로, 가마쿠라 시대(鎌倉時代)에서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에는 「사부라이」(サブライ), 조금 더 올라가 헤이안 시대(平安時代)에는 「사부라히」(サブラヒ)로 각기 발음되었다. 「사부라히」는 일본어 동사 「사부라후」(サブラフ)의 명사형이다. 「사부라후」라는 단어는 이미 나라 시대(奈良時代)에 「사모라후」(サモラフ)라는 단어 형태가 등장하고 있어 이것이 현재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원형으로 여겨진다. 「사모라후」는 엿본다, 살핀다는 뜻의 동사 「모라후」(モラフ, 候)에 접두사 「사」(サ)가 붙여진 것으로 「모라후」는 다시 지킨다, 엿본다는 뜻의 동사 「모루」(モル, 窺・守)에 존재・계속이라는 뜻의 조동사(동사성 접미사라고도) 「후」(フ)가 붙여져 나온 단어로 추정되고 있다.
이렇듯 「사모라후」의 원래 뜻은 상대의 모습을 가만히 엿본다는 뜻이 되지만, 나라 시대에는 이미 귀인의 옆에 붙어 그 모습을 엿보며 명령이 떨어지기를 기다린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었다. 이 「사모라후」가 헤이안 시대에 모음 교차를 일으켜 「사무라후」가 되고, 나아가 자음 교체를 일으켜 「사부라후」가 된 것으로 보인다. 「사부라후」는 「侍」라는 한자의 훈으로도 쓰이고 있는 데서도 보이듯 헤이안 시대에는 오로지 귀인의 옆에서 모시는 자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었다.[1]
「주군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모시는 일, 또는 그러한 사람」으로써 훗날 조정을 섬기는 관인인 동시에 상급 귀족을 섬기는 하급 기능직 관인을 가리키게 되고 그 기능직 관리의 한 축을 이루었던 부시를 가리키게 되었으며, 앞서 서술한 것과 같이 초기에는 부시뿐 아니라 법관이나 음양사 같은 중하급 기능직 관인도 모두 「사무라이」라 불렸고 굳이 「부시」(무인)라는 특정 직책의 계층만을 지목한 것은 아니었다. 헤이안 시대의 「사부라히」는 그 뒤 「사부라이」→「사무라이」 등의 어형 변화를 거치게 되지만, 지위와 상관없이 군사 관련 직능을 가진 자, 즉 부시 전반을 사무라이라 부르게 된 것은 에도 시대(江戸時代)의 일로, 그 전까지는 귀족이나 쇼군(将軍) 등의 가신인 상급 부시들에만 한정하여 사무라이라고 불렀을 뿐이다.
유명한 사무라이
사무라이로써의 「부시」
현재 널리 알려진 것과 같은, 전투를 본분으로 하며 고대로부터 근세까지 일본이라는 국가의 지배계층을 형성했던 전문 군사 계층을 일본에서는 부시(武士) 또는 부샤(武者)라 불렀다. 부시는 헤이안 시대에 처음 발생하여 그들의 군사력을 바탕으로 근세, 즉 에도 막부 말기까지 일본 역사를 이끈 중심적 존재였으며, 심지어 그러한 부시의 존재 자체를 없앤 근대 일본의 신정부(메이지 정부) 또한 많은 부시들의 참여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일본 역사에서의 이러한 부시의 탄생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 재지영주설
- 메이지 시대의 역사학자 미우라 히데유키(三浦周行)가 제창한, 일본의 부시는 지방의 무장 영주들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하는 설. 지방에서 일어난 신흥 영주층이 스스로를 방호할 목적에 따라 무장하였으며 이들 세력이 부시단으로 조직화됨에 따라 수도에서 지방관 등으로 파견된 하급 귀족 · 하급 관인층을 우두머리로 추대하고 더 큰 조직화가 진행되면서 황족 출신의 명문 귀족이 보다 상위 부시단의 우두머리가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2]
- 직업관인설
- 사토 신이치(佐藤進一), 우와요코테 마사타카(上横手雅敬), 도다 요시미(戸田芳実), 다카하시 마사아키(高橋昌明) 등이 제창한, 재경(在京) 부시에서 비롯된 「(전투)기술직 관인」에서 부시의 기원을 찾는 설. 여기서 「기술직 관인」이라는 것은 부시의 기원이 되는 군사 업무를 전담하고 그것을 가업으로 삼아 전수하게 된 귀족들, 즉 세이와 겐지나 간무 헤이시와 같은 군사 귀족 및 하급 관인층을 말한다.[3] 헤이안 시대 후기의 장원공령제 아래서 장원 영주(유력 귀족이나 지샤, 혹은 인세이 시기의 상황)나 지방 관청과 유착하여 영지 경영자로서 발전했다고 보는 설이다. 즉 무사단으로써의 조직화는 아래에서 위로 아니라 위에서 밑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헤이안 시대 후기 조정의 지방 지배가 조정에서 파견한 지방관에게로 권력을 몰아주는 체제로 이행하면서 수령의 수탈에 대한 부농층의 무장 습격이 빈발하게 되고, 지방관들은 과거 에미시 등의 북방 종족과 전투 경험이 있는 수령 역임자나 그 자녀들로써 중앙에서 밀려난 귀족 및 지방관이 될 자격을 갖춘 여러 다이후들을 지역 분쟁 진압에 동원했고, 이들은 그 훈공의 대가로 조정으로부터 공전(公田) 경영을 위임받았지만, 그 훈공에 불만을 품은 자들이 일으킨 반란(대표적인 것이 다이라노 마사카도나 후지와라노 스미토모의 난)을 진압한 다이라노 사다모리 · 후지와라노 히데사토 · 미나모토노 쓰네모토 등의 집안은 무예를 가업으로 하는 집안, 즉 무문(武門)으로써 조정으로부터 공인받고 훗날 부시라고 불리는 집단의 시조격인 존재가 되었다.[4] 즉 초기 부시들의 경제 기반은 조정으로부터 위탁받은 공전에 있었지 그들 자신이 영지를 경영하는 영주가 된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11세기 중반부터 장원 개발이 가속화되면서 국가 소유의 공령과 장원 간에 무력 분쟁이 잦아졌고, 현지의 경찰이자 재판 책임자로서 장원 책임자나 공령의 지배자인 지방관으로써 군사 분쟁에 대응할 수 있는 부시가 임명되는 경우가 잦아지면서 부시들은 자연스럽게 영지 경영자로서 등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 고쿠가군제설
- 일본의 고대 말기에서 중세 초기(10세기 - 12세기)에 성립된 국가군사제도를 가리키는 개념으로써 율령국가가 왕조국가로 변질되고 조정에서 지방의 행정권을 지방관인 수령에게 위임하는 과정에서 성립된 것이 국가군제다. 율령지배체제가 무너지고 조정이 조세 진납을 비롯한 지방의 행정권을 수령에게 집중시키는 과정에서, 수령은 고쿠가(国衙) 기구 내부의 소(所)를 중심으로 지방 권력을 재편성하고 그 아래의 하급 토착수령인 군지(郡司)나 부호층은 토지 경작 및 경영을 다시 수령으로부터 조세 의무와 함께 위임받은 다토부묘(田堵負名)로써 고쿠가 지배 조직에 편입되고, 한편으로 「소」에 배속된 재청관인(在庁官人)으로써 고쿠가 행정의 한 축을 맡게 되었다. 간표(寛平)에서 엔기(延喜) 시대에 이르는 동안, 도고쿠에서 조세 문제에 반발해 일어난 반란에 대해 조정은 지방관이 군사를 동원할 수 있도록 허락하는 추포관부(追捕官符)를 고쿠가에 발급해 병사 징발 등의 재량권을 지방관에게 주었고, 이를 근거로 자신이 맡은 구니 안의 다토부묘들을 병사로써 징발할 수 있게 하였다. 지방관은 다시 이들 병사의 지휘권을 고쿠오레이시(国押領使)· 스이호시(追捕使)에게 위임하여, 오레이시가 이들 병사를 조직하여 추포 활동에 나서기도 했다. 이러한 반란을 진압한 훈공자(자신들이 가진 전지 경영에 경제 기반을 두었고, 수령에 속하여 치안 유지활동에 종사하였던 다토부묘들 포함)야말로 초창기 부시라는 것이다. 도고쿠에서 시작한 국가군제는 쇼헤이(承平) 연간(930년대)에 세토 내해에서 발호하게 된 해적에[5] 대한 진압이나, 이들을 진압하는 공을 세웠지만 그 훈공을 제대로 보상받지 못한 후지와라노 스미토모 등과 같은 다토부묘들이 일으킨 해적 행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조정은 세토 내해 여러 지방에 도고쿠의 오레이시와 같은 게고시(警固使)를 두어 추포관부를 받고 병력 동원 권한을 가진 수령 아래서 유사시 병력 지휘를 맡게 함으로써, 도고쿠와 같은 고쿠가군제가 사이고쿠에도 세워졌다.
각각의 학설에는 모두 저마다 약점을 갖고 있는데, 서구 역사학의 고대-중세-근대라는 시대발전사관에 맞추어 일본역사를 해석함으로써 일본 근대화의 토대를 마련한 재지영주설은 부시단(武士団)의 주요 구성원이었던 겐지(源氏)나 헤이시(平氏), 후지와라 씨(藤原氏)의 존재, 고대 지배계급으로써 조정이나 인(院), 셋칸케 등 권문(権門)과 밀접하게 연줄이 있던 상급 부시들의 기원을 설명할 수 없다는 데에 난점이 있었고, 직업관인설은 겐페이도시쓰로 통칭되는 군사 귀족들을 기원으로 하는 부시나 관료 직업적 기술로서의 무예에 대해서는 설명할 수 있지만 그들의 직업적 기술을 뒷받침할 경제적 기반으로써의 「영지」나 인적 기반이 필요한 주종관계에 대한 설명이 아주 약하다.
같이 보기
바깥 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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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대극 르네상스 프로젝트: 사무라이
- The Samurai Archives Japanese History page
- Samurai Swords and Samurai Culture
- History of the Samurai
- 토에이 교토 스튜디오 파크
이 글은 일본에 관한 토막글입니다. 서로의 지식을 모아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
- 이동 ↑ 「시」라는 한자 자체에 원래 「귀족의 곁을 모시며 일한다」는 의미가 있었지만, 그것이 부시처럼 무예를 가업으로 하는 기능직 관인을 의미하는 말로써만 쓰이게 된 것은 일본이 유일하다.
- 이동 ↑ 이 설은 일본 역사에서의 중세(中世)라는 개념의 발견과도 관련이 있는데, 고대 사회에서 근대 사회로 넘어가는 중세라는 시대는 오직 서구에만 존재했으며 근대화하기 위해 꼭 필요한 중세라는 과도기를 거쳐 근대화를 이룩한 서구와는 달리 중세를 맞이하지도 못하고 고대에 머물러 있는 아시아는 정체되어 발전할 수 없다는 서구 역사학에 맞서는 과정에서, 미우라 히데유키는 서구 유럽의 중세라는 시기는 게르만족의 대이동으로 야기된 「무장한 봉건영주」 즉 기사(騎士)라는 계급이 지지했다는 점에 착안하여 일본에서도 헤이안 시대 중기부터 도고쿠(東国)를 중심으로 하는 변경 사회에서 활약했던, 서구의 기사와 같은 「무장한 봉건영주」로써 부시가 존재했으며 이들을 통해 일본에도 중세라는 시기가 존재했다는 결론을 도출, 일본도 서구와 같은 근대화가 가능하다는 주장을 펼쳤던 것이다. 패전 뒤에도 이 설은 일본 학계의 주류로써 유물사관의 영향까지 더해져 부시를 고대 지배계급이었던 귀족과 종교 세력을 배제하고 중세라는 새로운 시대를 연 변혁자로써 인식하게 하였다.
- 이동 ↑ 이 설에 따르면 부시는 하나의 사회적 신분이자 무예라는 전문 기술을 직업으로 보유한 신분으로써 규정할 수도 있다. 즉 기사(騎射)나 전투 작법을 이어받은 집에 태어나고 그것을 이어받은 자만이 부시이며, 아무리 무예에 뛰어나고 신분이 높다 해도 부시 신분이 아닌 한 부시로 인정받을 수 없는 것이다(부시가 되려면 정통 부시 집안의 게닌이 되던지 그 집안의 무예를 전수받고 새로 집안을 일으켜서 부시 집안으로서 계승권을 인정받던지 하는 수밖에 없다).
- 이동 ↑ 이러한 무문이 확립된 뒤에도 이들과 별도로 조정의 무관(武官)에 해당하는 직종이 존재하고는 있었으나, 이러한 관직을 가지고 있어도 무문 출신(즉 다이라노 마사카도와 후지와라노 스미토모의 난을 진압한 다이라노 사다모리나 후지와라노 히데사토, 미나모토노 쓰네모토 등의 후손)이 아니면 부시로 인정받을 수 없었다. 특히 하극상이 일반화되었던 센고쿠 시대 이전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처럼 백성이나 기타 출신의 인물은 당연히 부시로 인정받을 수 없었다. 조상의 무명에 따라 자신의 집이 부시로 인정받았으므로 그들은 자신의 집안, 고명한 조상을 자랑했던 셈이다.
- 이동 ↑ 이들 해적은 조정의 정책에 따라 조세 징수를 포함한 지방 행정이 지방관에게로 집중되고 그에 따라 조세 징수권을 잃은 기존의 토착 세력들이 그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일으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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