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 첫 작품 발표 300년
진경산수화 새 화풍 열고 금강산을 본 그대로 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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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진경산수화라는 새로운 화풍을 정립시킨 최고의 화가, 한국의 실경을 가장 힘차고 아름답게 표현한 화가, 천하제일경 금강산도를 기념비적으로 그린 화가. 겸재 정선(1676~1759)을 가리키는 말이다.
올해로 겸재가 <신묘년풍악도첩>이란 첫 작품을 그린 지 꼭 300년이 되는 해다. 현존하는 신묘년풍악도첩은 겸재가 1711년 금강산을 첫 기행해서 그린 그림이다. 그 때 나이 36세. 조선 화단에 겸재란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서곡이었다.
▲ 겸재는 평생 금강산을 세 번이나 기행하면서 직접 본 경치를 그림에 그대로 담는
기법을 사용했다. 사진은 겸재가 36세 때 금강산 첫 여행 후 그린 첫 작품
<신묘년풍악도첩> 중 장안사도이다. 이 작품이 나온 지 올해로 300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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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묘년풍악도첩은 1711년 영조대의 최고 시인으로 일컬어지는 친구 이병연이 금강산 초입의 금화현감으로 있으면서 삼연 김창흡과 겸재를 불러 금강산 여행을 한 게 계기가 됐다. 겸재는 말로만 듣던 금강산 일만이천봉을 보고, 채 감회가 가시기 전에 12폭의 작품을 그려냈다. 그 그림이 신묘년에 그린 풍악도첩이라고 해서 신묘년풍악도첩으로 불린다. 이 작품은 겸재란 이름을 화단에 알리며 동시에 진경산수화의 새로운 화풍을 본격 구사하는 계기가 된다.
사실 그 때까지 조선시대의 화풍은 성리학적인 관념론과 명분론에서 벗어나지 못한 관념산수화, 추상산수화가 주류를 이루었다.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서 관념론에서 벗어나 좀더 보편적인 세계관과 구체적인 현실을 중시하게 된다. 즉 실제 본 대로 사실적으로 그리는 기풍으로 바뀌게 된다. 겸재 정선의 <금강산도>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오랫동안 겸재 정선에 대해 연구해 온 덕성여대 박은순 교수는 당시의 화단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 겸재 정선은 50대 후반인 1734년 <금강전도>를 완성하면서 진경산수화의
새로운 화풍을 선보여, 그의 전성기를 활짝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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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에 있던 노론계 문인, 즉 낙론계 문인들은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조선 후기 성리학자들 사이에서 논의된 인간과 동식물의 본성이 같은가 다른가에 대한 이론. 같다고 주장하는 이론이 인물성동론, 다르다고 주장하는 이론이 인물성이론)의 논의를 통해 성리학을 변화된 현실을 수용할 수 있는 학문과 사상으로 변혁시키고자 했어요.
현실과 실제를 중시한 낙론계의 사상은 문예일치를 추구하던 문인들의 경향에 따라 문예에 있어서도 천기론이라는 새로운 문예론을 낳았죠. 정선은 그러한 이념과 문예론을 그림에 적용해 진경산수화라는 새로운 회화를 탄생시켰어요. 따라서 정선의 진경산수화는 정선이 혼자 탄생시킨 것이라기보다는 주변 문인들과 공유했던 학문과 사상, 문예론을 회화라는 장르에 구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어요. 정선이 문인으로서 성리학과 문인문화에 밝았던 점도 작용했죠. 이를 통해 회화의 의미와 역할을 격상시키고 새로운 문인화를 제시했다고 보면 됩니다.”
▲ 겸재가 76세 때 인왕산에 비 온 뒤의 모습을 보고 그린 만년의 대표작
<인왕제색도>. 겸재는 이로써 화가로서 완숙의 경지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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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두 번째 기행 그린 <해악전신첩>으로 명성 얻어
겸재는 금강산을 다녀온 지 불과 1년 후 이병연의 특별초청으로 동생 등과 함께 또 다시 금강산을 기행한다. 2년 연속 금강산 구경을 한 겸재는 친구에게 보답을 하기 위해 내금강과 외금강의 진경 21폭을 그린 <해악전신첩(海嶽傳神帖)>을 이병연에게 선물했다.
이병연은 이를 소장하고 있으면서, 삼연 김창흡, 시인 조유수, 서화수장가 이하곤과 신정하 등 당대 명인들에게 돌려 보이며 시를 받아 넣었다. 겸재의 명성을 일시에 알리는 결정적 계기가 됐고, 겸재는 당장 호사가들 사이에 유명인사가 됐다. 해악전신첩이란 이름은 이병연이 금강산과 주변의 명승들을 실제로 보는 것처럼 생생하게 그린 것에 대한 경의와 감탄의 표현으로 붙인 것으로, ‘바다와 산의 본모습을 그린 그림’이란 뜻이다. 흔히 동양의 그림을 ‘전신’이라 부르고 여러 그림들을 모아 엮은 것들을 ‘전신첩(傳神帖)’이라 부른다. 아쉽지만 이 그림은 지금 전하지 않고 있다.
이때부터 겸재는 문인화가로서 개성적인 화풍을 구사했고, 화가로서 명성을 날리기 시작한다. 한순간에 조선의 명망 있는 화가로 이름을 올리자, 겸재의 집은 그림을 부탁하려는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이에 대해 박 교수는 다음과 같은 의견을 제시했다.
“겸재의 작품은 수준의 편차가 심해요. 엄청난 대작이 있는가 하면 어떻게 이런 그림을 그렸을까 하는 졸작도 많아요. 아마 그림 그리는 일을 업으로 삼아서 일부 명성에 걸맞지 않게 많은 작품을 그렸고, 졸작을 남기지 않았나 하는 추정을 가능케 하는 부분이죠. 작가로서 특이한 점입니다. 지금 현재 겸재가 남긴 졸작은 어찌 보면 위작논란을 일으킬 만한 것들이죠.
뿐만 아니라 겸재는 매우 많은 작품을 그린 다작 화가였어요. 그러다보니 대충 그린 그림과 정성을 들여 그린 그림의 차이가 크게 나는 거죠. 또 겸재와 비슷한 화풍을 지닌 김희선의 작품은 실제 겸재 그림과 판별이 쉽지 않아요. 당연히 가짜 논란이 일죠. 실제 18세기에 가짜 그림이 유통됐다는 기록도 있어요. 다작에다 비슷한 화풍을 지닌 화가까지 있다 보니 분명 본인이 그리지 않은 그림이 겸재 이름으로 남을 수 있죠.”
▲ 겸재의 자화상이라고 알려져 있는 <경교명승첩> 중 독서유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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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의 졸작은 그가 제대로 그림 교육을 받지 않은 결과라는 해석도 있다. 그의 천재성은 누구나 인정하지만 어릴 적 그림교육을 받은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겸재는 1676년 1월 3일 북악산 서쪽 기슭에서 태어난 기록은 있지만 성장 과정이나 가족 배경 등에 대한 흔적은 거의 없다. 14세 때 부친이 사망하고 홀어머니 밑에서 성장했으며, 결혼도 29세 때 했다. 당시 29세면 거의 손자 볼 나이에 해당한다. 단지 어릴 적부터 그림을 잘 그렸다는 김조순의 기록은 전해 오지만 사제관계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다. 천재성에 바탕을 둔 독학으로 그림을 그렸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대작과 졸작, 그리고 다작은 이러한 가능성을 뒤받침하고 있다.
30대 중반부터 명성을 얻기 시작한 겸재는 40대 들어 첫 벼슬길에 오른다. 화가로서 겸재의 명성이 높아지자 좌의정 김창집의 천거로 종6품의 관상감 천문학겸교수로 관직에 나갔다. 이때는 관직에 진출함으로써 생활이 안정되고, 선비 문인으로 편입되는 시기였다. 40대에는 <사계산수도>, <구학첩> 등의 작품을 그리지만 아직 겸재 특유의 힘찬 화풍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
50대 들어서는 왕성한 활동으로 그의 독특한 화풍이 빛을 발한다. 50대 중반경인 1731년 인왕산 아래로 이사하면서 생활에 안정을 이루고 화풍도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는 게 박 교수의 설명이다. 겸재는 평생 금강산을 세 번 기행한다. 50대 후반인 1734년 완성한 <금강전도>를 통해 겸재는 자신이 창안한 진경산수화의 절정을 이룬다. 선비화가로서 그의 역량을 드러낸 작품이며, 그의 대표작이기도 하다.
박 교수의 설명에 의하면, 18세기 문인계층이 관심을 가진 실경을 진경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당시 실경산수화와 진경산수화는 모두 현실에 실재하는 경치를 다룬 그림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실경산수화는 광의의 통칭이고, 진경산수화는 조선 후기에 유행했던 실경산수화를 가리키는 협의의 말이다. 진경은 신선경처럼 아름다운 경치 또는 현장에서 본 경치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박 교수는 겸재의 진경산수화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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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경산수화는 18C 문인들이 관심 가진 실경 표현
“겸재의 진경산수화에는 다양한 면모가 나타나지만 그 가운데 특히 중요한 부분은 기행을 통해 본 경관을 강렬한 화풍으로 표현한 진경산수화를 정립한 점입니다. 항상 현장답사를 중요시했으며, 현장에서 본 경관에서 강렬하고 생동감 넘치는 흥취를 소위 휘리법(揮?法)이라고 하는 빠른 필선과 강한 필력, 풍부한 먹색을 구사하는 화풍으로 그려냈어요. 또 구성은 화면을 꽉 채우는 이른바 밀밀지법(密密之法)을 선호했죠. 이것도 보는 이에게 강렬한 흥취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요소입니다. 이처럼 정선의 화풍에 보이는 여러 특징들은 천기론에서 중시하던 방법론과 화풍을 그대로 실천한 결과로 나타난 겁니다.”
50대 후반 들어 진경산수화라는 중국 화법에서 볼 수 없었던 독특한 화풍으로 새 시대를 연 겸재는 60대부터 그의 전성시대를 활짝 맞는다. 1739년 <청풍계>, 1740년 <경교명승첩>, 1742년 <연강임술첩> 등을 잇달아 내놓으면서 조선 최고 화가로 자리매김한다. 중인 화가들도 점차 정선을 추종하는 시기였다.
70대 들어서는 완숙의 경지에 이르러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인왕제색도>를 1751년에 완성한다. 그리고 80세가 넘어 죽을 때까지 작품 활동을 계속한다.
박 교수는 “겸재는 학식과 신념을 겸비한 문인으로서 회화는 천기(天機)라는 통념에 도전하며, 회화의 성격과 의미, 격조를 한껏 격상시킨 도전적인 화가였다”며 “보수적인 문인들의 비판과 무시에도 불구하고 진경을 그리기 위해 평생 전국을 답사하고 회화적 기법을 연마하기 위해 평생 동안 사용한 붓이 무덤을 이룰 정도로 노력하는 조선의 대표적 화가였다”고 겸재를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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