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 진경산수(眞境山水) 3齋 3園의 그림세계
▶3 齋 : 겸재(謙齋) 정선, 현재(玄齋) 심사정, 관아재(觀我齋) 조영석
▶3 園 : 단원(檀園) 김홍도, 혜원(蕙園) 신윤복, 오원(吾園) 장승업
眞境山水畵
진경산수화란 진경이 들어있는 산수화를 말한다. 진경이란 진수진경(眞秀眞景)을 말하는데 진경은 본래 선경의 경지를 말하는 것으로 인간이 생각해 낼 수 있는 최고의 깊숙한 경지를 말하는 것으로 본다.
진경산수화란 말은 도교의 철학적인 이념이 들어 있는 자연 풍경화를 말한 것이다. 실경산수화(實景山水畵)의 전통을 바탕으로 한국적인 새로운 화풍을 창출. 종래의 형식화된 창작태도에서 벗어나, 현실을 통해 고의(古意)와 이상을 찾고자 한 당시의 사상적 동향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또 한국의 산천을 주자학적(朱子學的) 자연과 접목시키고자 한 문인 사대부들의 자연친화적 풍류의식도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림의 소재는 전대와 마찬가지로 명승명소(名勝名所)와 별서유거(別墅幽居)·야외아집류(野外雅集類) 등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특히 금강산과 관동지방, 한양 근교의 경관이 가장 많이 다루어졌다. 화풍은 실경산수화의 전통에 새롭게 유행하기 시작한 남종화법(南宗畵法)을 곁들인 것으로, 이는 정선(鄭敾)에 의하여 개발되었다.
그는 실제로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산천의 특색을 남종화법을 바탕으로 그려 진경산수화풍의 정형(定型)을 수립한 것이다. 정선의 화풍은 강희언(姜熙彦)·김유성(金有聲)·최북(崔北) 등으로 계승되었으나, 18세기 후반에 새로 등장한 강세황(姜世晃) 등의 화가들에 의해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들은 형식화된 당시의 진경산수화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실제 경관과 부합한 사실적인 기법을 강조하였는데, 그들의 이러한 화풍은 김홍도(金弘道)에 의하여 구도와 필법이 더욱 치밀하고 박진감 넘치는 화풍으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다시 이인문(李寅文)·이재관(李在寬) 등으로 계승되었다. 조선 후기의 진경산수화는 정선과 김홍도파 이외에 심사정(沈師正)·이인상(李麟祥) 등의 문인화가들도 하나의 조류를 형성하였다.
이들은 남종화법과 함께 문인풍의 격조 높은 화풍을 바탕으로 색다른 개성미를 보여주면서 이 시대 진경산수화의 다양한 흐름에 이바지하였다. 이처럼 진경산수화는 실경을 사실 그대로 묘사하려 하였던 근대지향적인 의의를 지니면서 조선 후기의 회화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리고 이는 다시 근대 및 현대에 생긴 어떠한 특정 경관이 아닌 생활주변의 일상적인 풍경을 그린 사경산수화(寫景山水畵)로 그 전통이 계승되어 지속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정선의 《인왕제색도(仁旺霽色圖)》를 비롯하여...
강희언의 《인왕산도》, 김석신(金碩臣)의 《도봉산도》, 이인상의 《구룡연도(九龍淵圖)》, 강세황의 《송도기행명승도첩(松都紀行名勝圖帖)》, 김홍도의 《사군첩》, 이인문의 《단발령금강전도(斷髮令金剛全圖)》, 조정규(趙廷奎)의 《금강산병풍》 등이 있다.
조선시대 3齋 3園의 그림
정선 - 불정대와 십이폭포(이백과 여산폭포)-통천문암(通川門巖)
실경산수화
중국의 회화는 산수화, 화조화, 영모화, 인물화 등으로 나누어지는데 가장 중요한 부문은 산수화다. 그러나 양주팔괴 이후 화단의 주류를 이룬 것은 화조화를 중심으로 하는 문인화였다. 크게 보아 사의화로 분류할 수 있는 이러한 그림들은 그 주제가 사군자, 초목, 새, 어류 등이었으며 커다란 나무를 대상으로 하더라도 전체를 그리지 않고 일부만을 취하여 화가의 의경을 전달하고자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웅대한 구도의 산수화는 거의 자취를 감추고 설령 산수화를 그려도 문인화풍의 음풍농월이나 고아한 정취의 풍경만을 표현하였다. 한마디로 작가의 의경意境을 강조하며 청미담원淸微澹遠의 세계를 중시한다. 서화동체書畵同體를 바탕으로 하는 이러한 화풍은 청조의 고증학과 맞물려 금석학이나 비학의 영향을 받아 20세기를 전후로 하여 오창석이나 제백석과 같은 대가들을 배출한다.
그러나 이러한 그림들은 근대화 과정에서 비현실적이고 관념적이라는 이유로 배척을 당하며 문제점을 노출한다. 또한 동양화의 주종이라 할 수 있는 산수화부문에서 전혀 새로운 발전을 이룩하지 못하였다는 사실도 간과할 수 없다. 리커란의 산수화가 주목을 받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리커란은 전통화의 이러한 한계점에 돌파구를 마련한다.
리커란은 먼저 그가 살아가고 있는 조국의 산천을 새삼스레 다시 쳐다본다. 먼 옛날 위대한 화가들이 산천을 유람하며 호연지기를 키우고 산수화를 그렸음을 상기한다. 송대 곽희는 "임천고치林泉高致"에서 “산수를 그리는 데는 근본이 있으니 펼쳐냄에 있어 구도를 크게 하되 남음이 없고, 줄여서 작은 경치를 만들어도 작게 보이지 않아야 하며, 또한 산수를 바라보는 데도 근본이 있으니 자연의 마음으로 임하면 그 가치가 높을 것이요, 교사한 안목으로 임하면 그 가치가 낮을 것이다.” 畵山水有體, 鋪舒爲宏圖而無餘, 消縮爲小景而不少, 看山水亦有體, 以林泉之心臨之則價高, 以驕侈之目臨之則價低 라 말한 바 있다.
리커란은 산수화를 그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대상으로의 자연을 올바른 마음가짐으로 정확하게 바라보아야 함을 깨닫는다. 또한 중국 산수화의 근본정신이라 할 수 있는 장조張璪의 “겉으로는 자연을 배우고 안으로는 마음의 근원을 얻는다 外師造化 中得心源”이라는 격언을 명심하였을 것이다.
선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리커란도 고국산천을 여행한다. 과거의 유명 화가들은 장자의 소요유와 같은 자연합일의 경지를 꿈꾸며 산천을 유람하였지만 리커란은 또 다른 목적을 분명히 하고 여행을 한다. 그림을 그리기 위한 기초자료의 수집이다. 마음을 함양하여 높은 정신적 경계를 획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자연의 산과 강을 있는 그대로 사실적으로 확인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1954년 봄에 그는 무석, 소주, 항주, 부춘강, 황산 등지를 석 달 동안 여행한다. 56년에는 강소, 절강, 안휘, 호남, 사천 등 오개의 성을 무려 여덟 달에 걸쳐 갖은 고생을 하며 돌아다닌다. 57년에는 넉 달 동안 유럽의 동독에서 체류하며 사생을 하고, 59년에는 학생들과 함께 남쪽 계림으로 여행을 다녀온다. 완칭리의 리커란, 73, 79, 84쪽 그 이후에도 리커란은 틈만 나면 수시로 여행을 하며 기초 데상을 준비한다.
수많은 여행을 통하여 리커란은 또 다른 깨달음을 얻는다. 자연은 과거 전통적인 개념의 자연 즉 인간이 완전히 흡수되어 버리거나 또는 인간의 궁극적인 완성으로서의 이상향적 자연만이 아니라 눈앞에 실경으로 보이는 자연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자연은 숨김없이 인간의 눈앞에 사실적으로 펼쳐지며 인간은 그 부분으로서 현실적인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어떤 면에서 자연은 인간의 삶과 생활이 존재하기에 상대적으로 존재 가능할 수도 있다. 서구처럼 인간을 중심으로 한 상대적 대칭적 또는 적대적이며 분석적인 자연관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인간과 자연의 합일에 있어서 인간의 실제적인 생활이 소홀하게 다루어질 수 없음을 리커란은 분명하게 인식하게 된다. 이러한 생각은 문인화풍의 그림이나 관념적 산수에서 대단히 진일보한 생각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리커란 자신은 “생활”이라는 개념을 여러 번 강조하였다. “생활”이라는 화두를 꺼내게 된 것은 당시 모택동이 이끄는 사회주의 현실에서 비판 받을 지도 모르는 관념적 자연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면도 없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리커란이 이야기하는 “생활”이 무슨 사회주의 이념적인 요소와 연관이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리커란이 이야기하는 생활이란 궁극적으로 사람의 정情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산수화란 지리책이 아니다. 중국의 산수화나 화조화란 모두 사람을 표현한 것으로 이른 바 경물을 보고 정을 느끼는 것이며, 경치를 그린다 함은 또한 정을 그려내는 것으로 사물을 빌미로 정을 기탁하는 것이다” 山水畵不是‘地理志’, 中國的山水, 花鳥畵都是表現人, 所爲‘見景生情’, 寫景亦卽寫情, 緣物以寄情. 리커란의 말이다. 즉 자연은 사람들이 생활을 하는 공간이며 동시에 사람들의 감정이 투영되는 곳이기도 하다.
그의 이러한 생각들은 그림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나게 된다. “영은다좌靈隱茶座(1956년)”는 고즈넉한 오후의 풍경을 그린 것인데 숲속에서 탁자를 놓고 한가하게 차를 마시고 있는 사람들도 보이고 가방을 메거나 양산을 쓰고 숲길을 거니는 사람도 보인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볼 수 있는 그런 풍경이다. “가릉농사嘉陵農舍(1956)”은 내용이나 기법 모든 면에서 주목할 만한 그림이다. 강 또는 호숫가 숲속의 농가가 화제다. 골기와를 포개 놓은 중국의 전형적 지붕을 지닌 집의 문 앞에는 바구니를 옆에 낀 여인이 있고 마당에는 방육된 돼지 세 마리가 보인다. 꽉 찬 구도의 위쪽으로 호수가 보이는데 새가 몇 마리 날아다니고 있다. 얼른 보아 산수화에 틀림없지만 고답적인 그런 풍경이 아니라 일상적인 삶의 모습이 녹아들고 있다. 54년도에 그린 “가가도재화병중家家都在畵屛中”은 아름다운 그림이다. 산수화 같기도 하고 서양화의 수채화 같기도 하다. 굽어 흐르는 계곡의 강 양쪽으로 마을이 보이고 강에는 배들이 보인다. 어설프게 놓은 다리도 눈에 띈다. 후경으로는 숲이 우거진 산들이 배치되어 있다. 이 그림에서 리커란은 꿈에서나 볼 수 있는 신비스런 자연산천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마을과 배 그리고 사람들이 오가는 다리를 통하여 우리가 살고 있는 실재의 자연을 보여준다. 삶과 생활이 있는 그런 자연인 것이다. 물론 자연으로서의 아름다운 품위는 전혀 잃지 않고 정말 이런 곳이 있으면 여행을 가고 싶겠다는 마음이 일어날 정도로 경치가 뛰어난 곳이다. 또는 리커란의 말대로 리커란의 아름다운 정 즉 마음이 투영되어 그렇게 그림을 구성하였는지도 모른다.
리커란은 1950년대 이후로 관념적인 산수화에서 완전하게 탈피하게 된다. 문인화풍의 그림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실제로 존재하는 산천을 그리고, 인간이 생활하며 숨을 쉬는 공간을 그림의 대상으로 삼는다. 물론 말년에 이르러 전통적인 胸中丘壑의 산수화가 나타나기는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한 인간이 궁극적으로 구현하고자 하는 이상적인 세계를 표현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롯되었을 뿐이며 이러한 그림들도 대개는 사실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일부 평자들은 리커란의 산수화에는 문인화의 품격이 결여되어 있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오히려 리커란의 위대한 점은 상투적인 전통화의 그늘에서 벗어나 그 외연을 내면 중심에서 밖으로, 그리고 사람의 실질적인 삶으로 적극 확대하였다는 사실이다.
전통화법의 심화 1954년부터 1959까지 리커란의 그림들은 다양한 면모를 보여준다. 여러 실험을 통해 그가 궁극적인 길을 모색하고자 하였던 흔적이다. 그는 스스로에게 다짐하기 위해 “귀한 것은 대담함이요, 필요한 것은 혼이다. 可貴者膽 所要者魂”라는 두 개의 인장까지 새긴다. 어떤 그림들은 같은 시기에 그린 같은 화가의 것일까 싶은 것들도 보인다. 이러한 작업 중에서 그가 심혈을 기울인 것은 전통화법의 심화이다.
첫 번째로 그가 시도한 것은 수묵을 통한 표현가능성의 극대화다. 실경산수화 또는 풍경화의 대상들을 생생하게 사실적으로 그리기 위해서는 전통적인 필묵법은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그렇다고 수묵만이 지니고 있는 현묘한 아름다움을 소홀히 하거나 버릴 수는 없었다. 리커란은 산수를 표현하는 전통적인 여러 가지 준법들을 시도한다. 이러한 노력으로 그려진 그림들이 바로 황산의 “천도봉天都峰(1954), ”우역기雨亦奇(1956)“, “소주호구蘇州虎丘(1956)”, “만현양도교萬縣?渡橋(1956)”, “무산백보제巫山百步梯(1956)”, “약양성略陽城(1956)”, “석조약양성夕照略陽城(1956)” 등이다. 산이나 바위 등을 표현하기 위해 전통준법인 소부벽준이나 절대준도 보이고 점을 사용하는 미점준도 엿보인다. 그리고 묵법으로는 옅은 선염의 바탕에 중묵을 가하는 적묵법도 보이고 또 파묵도 나타난다. ”우역기雨亦奇“는 섬세하면서도 간결한 그림인데 선염기법으로 배경의 먼 산과 강 한가운데 섬들, 그리고 그 그림자를 기묘할 정도로 잘 표현하였다. 근경의 구체적 대상들은 적묵으로 더 검게 칠하고 동시에 미세한 선을 사용하여 사물의 윤곽을 표현함으로써 빠지기 쉬운 수묵의 모호성을 벗어나 사실성을 획득한다. 또한 리커란은 과감하게 마른 붓을 사용하는데 갈필이다. 옅은 담갈색을 섞은 붓으로 대상의 바탕을 문지른다. 마른 붓이다. 일종의 준찰법?擦法이다. 부포석이 즐겨 사용한 산봉개화필散鋒開花筆 散鋒開花筆 - 붓을 흩어지게 하여 파묵의 효과를 내면서도 꽃이 피는 것과 같이 그리는 것 - “대륙을 품어 화폭에 담다”, 徐敬東, 장준석 옮김, 고래실, 250쪽의 기법을 연상시킨다. 그런 다음에 다시 적묵을 가한다. “무산백보제巫山百步梯”, “약양성略陽城”, “석조약양성夕照略陽城” 등은 리커란이 이미 전통화법을 완전 터득하고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만현양도교萬縣?渡橋(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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