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이선란(不二禪蘭)- 추사 김정희
문인화의 대표적 화목은 사군자이다. 조선의 문인사대부 선비들은 사군자를 통해 그들의사상을 그림으로 표현하고자 하였다. 그들은 실재 사물에 근거한 형상보다는 내면에 감추어진 고결한 정신세계가 더욱 중요함을 강조했다. 난초(蘭草)는 청초하고 기품 있는 꽃을 피워 그윽한 향기를 뿜어내는 식물로 선비의 덕목(德目)인 기개(氣槪)가 넘친다고 해서 매화, 국화, 대나무와 함께 사군자(四君子)의 하나로 조선 시대의 선비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위 난초 그림은 『불이선란(不二禪蘭)』이라는 이름이 붙은 추사의 난초그림으로 세한도(歲寒圖)와 함께 추사 김정희(金正喜)선생의 대표적 명작으로 가장 많이 알려진 문인화이다. 불이선란도는 난초에 대한 시각적 표현의 그림 보다 서예적 필묵 제발(題跋)이 만들어 낸 글씨의 비중이 더 큰 독특한 그림이다. 제발(題跋)은 모두 네 번에 걸쳐 쓰였으며 그림을 그리게 된 동기와 방식, 그림의 주인이 바뀌게 된 사연을 기록했다. 특히 제발은 화면의 전체적 공간 균형에 어긋나지 않게 그 위치와 문장의 진행방향을 적절히 안배하였는데 이는 그림의 여백을 활용하는데도 소흘히 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당파싸움에 휘말려 문초를 당하면서 자존심에 상처를 입고 12년간의 벽지에 귀양살이 하는 동안 현실에 대한 강한 불만과 거부감이 그의 심중에 자리잡았을 것이다. 이로 인해 그의 예술혼은 늘 도전적으로 표현되었다고 본다. 그러한 생활환경에서 그린것이 불이선란이니 평범하지 않은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이 작품은 제작배경설명, 화제의 글 내용, 화제 속 인물, 화제를 쓴 위치 등으로 보아 그 비중을 보여 줄 뿐 아니라 낙관 또한 그에 못지 않게 다양하게 찍혀 있어 마치 명작이라는 징표를 하나 더 더한 듯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또 이 작품에 찍힌 추사, 고연재, 김정희인, 묵장, 낙문유사 등은 추사의 도인(圖印)으로 추사선생이 직접 찍은 것이다. 그러나 오른쪽 아래에 찍혀있는 9개의 낙관과 왼편 위쪽의 호리병 도장은 소장자를 달리하면서 또는 감식가들에 의해 낙인된 것이다. 서체의 특징과 제발의 등장인물들로 보아 경기도 과천시절 작품으로 보인다. 추사는 불이선란 화제 첫머리에 不作蘭畵二十年 (난초그림을 안 그린지 스무 해인데) 偶然寫出性中天 (우연히 그렸더니 천연의 본성이 드러났네.) 閉門覓覓辱辱處 (문 닫고서 찾고 찾고 또 찾은 곳) 此是維摩不二禪 (이것이 바로 유마거사의 불이선이라네.)" 난초를 안 그린지 20년에 우연히 그렸다. 마음속에 자연의 문을 닫고 생각을 거듭해보니 이것이 바로 유마(維摩)의 불이선(不二禪) 이다." 무슨 뜻일까? 모든 보살이 선열(禪悅)에 들어가는 설명을 하는데 최후에 유마(維摩)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모든 보살은 말과 글자로 설명할 수 없는것이 진정한 선(法)이라고 감탄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난화(蘭畵)를 설명한 것은 종이에 그리는 것보다 마음속으로 그리는것이 난을 그리는 예술의 경지라고 추사는 말씀하고 있다. 또, 추사는 말씀하기를 "若有人强要爲口實又當以毘耶 無言謝之. 曼香 어떤 사람이 그 이유를 설명하라고 강요한다면 또한 비야리성(毘耶離城)에 있던 유마의 말 없는 대답으로 응하겠다. 계속해 말씀하시기를 " 以草隸寄子之法爲之 世人那得知 那得好之也. 謳竟又題 초서와 예서의 기자의 법으로 그렸으니 세상 사람들이 어찌 이를 알아보며, 어찌 이를 좋아할 수 있으랴. 구경우제 " " 始爲達俊放筆 只可有一不可有二 仙客老人 처음에 달준에게 주려고 그린 것이다. 이런 그림은 한 번이나 그릴 일이지 , 두 번 그려서는 안 될 일이다. 선객노인. " "吳小山見而豪奪 可笑 소산 오규일이 보고 좋아하며 빼앗아 가려하니 우습다. "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金正喜 (1786~1856)의 자는 원춘. 호는 추사(秋史), 완당(阮堂), 예당(禮堂), 시암(詩庵), 노과(老果), 농장인(農丈人), 천축고선생(天竺古先生)등 수백가지에 이른다. 조선 후기인 1786년 충청남도 예산에서 병조 판서 김노경의 아들로 태어나 스물네살 되던 해에 청나라 연경(燕京)에 가서 당시 이름난 학자인 완원, 옹방강 등에게 금석학과 실학을 배우고 돌아왔다. 박제가의 제자이기도 한 그는 한때 규장각 시교. 성균관 대사성을 거쳐 병조참판에까지 이르렀으나 말년에는 당쟁에 연루되어 제주도와 함경도 북청에서 12년 동안 귀양살이를 했다. 유배지에서 만난 선승들과의 교류를 통해 선불교에도 조예를 쌓았으며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주장하였고 서예에서는 독특한 추사체(秋史體)를 대성시켰으며 특히 예서.행서에 새 경지를 이룩 하였다. 문인화는 당대 최고로 평가받았다. 추사 김정희(金正喜)는 말년에는 봉은사에 머물며 대웅전(大雄殿)과 판전(板殿)의 편액을 썼다. 지금도 남아있는 판전의 편액은 기교를 전혀 부리지 않고 마치 어린아이가 쓴것처럼 삽필(澁筆)인데 이 편액에는 다음과 같은 글씨가 새겨져 있다. 칠십일과 병중작(七十一果 病中作). 1856년 10월 10일에 경기도 과천에서 71세로 그 파란의 삶을 마감한 것으로 보아 봉은사에 남아있는 ‘판전’이란 글씨야말로 추사의 마지막 절필임이 분명하다. 후세의 사람들은 추사 김정희를 애달퍼 하여 추사 비문을 세운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그 중 한 분이신 난곡 김응섭은 서울 봉은사에 추사 200주년을 기념하여 그 기념비를 세움과 더불어 봉은사 대웅전에 주련(柱聯)을 썼다. 그 주련(柱聯)은 지금도 봉은사 대웅전 정면에서 볼수 있다. [참고] 유마불이선(維摩不二禪)은 유마경(維摩經) 불이법문품(不二法門品) 에 있는 이야기 이다. '유마'는 중국의 1대 선종으로 알려진 '달마' 보다 이전 사람으로 유마경을 펴낸 사람으로 알려진 인도의 승려였다. 모든 보살이 선열<禪悅>에 들어가는 상황을 설명하는데 최후에 유마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이에 모든 보살들은 말과 글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진정한 법이라고 감탄했다는 것이다. 지면에다 그리는 것의 설명보다는 마음 속으로 체득하는 것이 난 예술의 진정한 경지를 이해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글쓴이-미상
출처 : 인주화실
글쓴이 : 행 복 한 나 그 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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