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스타프 3세
구스타프 3세(Gustav III, 1746년 1월 13일(양력 1월 24일) - 1792년 3월 29일)는 스웨덴 왕국 홀슈타인 - 고토르프 왕조의 제2대 국왕(재위 : 1771년 - 1792년)이다. 러시아 제국과 덴마크와 싸워 승리하여 유럽에서 명성을 높였다. 또한 한스 폰페르센을 신하로, 프랑스와 우호 관계를 다졌다.
구스타프 3세의 시대는 스웨덴의 중흥의 시대이며, 또한 문화면에서 “로코코 시대”라고도 불렸다.
구스타프 3세는 어머니 로비사 울리카 폰 프로이센의 기대를 받으며 어려서부터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25세 때 부왕 아돌프 프레드리크가 죽자, 국왕의 자리를 이어 받는다. 당시 스웨덴의 정권을 농민, 시민과 귀족들에 의한 신분제 의회가 쥐고 있어 사실상 귀족들의 영향이 컸다. 로비사 울리카는 국왕이 내정 등 나라를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도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실패했다.)
그런 교육을 받은 구스타프 3세는 국왕이 된 후 즉석에서 왕당파의 지지아래, 근위병을 임용하고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잡고 있던 귀족들을 몰아내고 의회에 새로운 헌법을 통과시킨다. 이 배경에는 스웨덴을 약화시킨 “자유의 시대”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귀족정치에 실망한 농민이나 부르주아 등의 왕당파에 의한 지지가 있었다. 쿠데타는 무혈로 성공했고, 구스타프 3세는 스톡홀름 시민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시인 컬 미카엘 벨 맨은 축시를 보내, 보르테이르로부터도 찬미의 편지가 도착했다. 구스타프 3세의 무혈 쿠데타의 성공으로 “왕국의 재건자”라 칭할 수 있었지만, 대외적인 문제는 해소되지 않았다.
구스타프 3세는 일반적으로 절대 군주로 알려져 있지만, 한편, 계몽사상을 가진 어머니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내정 개혁을 실시했기 때문에, 계몽 전제 군주라고 부르기도 한다. 구스타프 3세는 자신 국정에 관여한 신분제 의회를 존중하면서도 독재 군주로 행동하며, 그 때까지 귀족이 중심이 되어 국정을 좌지우지 해왔던 “자유의 시대”의 종말을 고했다.
구스타프 3세는 어머니에게 배운 것처럼 위대한 군주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의상 등에도 과거의 위대한 왕들의 의상 아이디어를 도입했다. 또한 그는 프랑스 문화를 경애하고 하가 백작이라는 가명을 사용하여, 종종 프랑스를 방문했다. 구스타프 3세는 계몽주의 사상에 감화되어, 루소, 달랑베르, 볼테르 등의 사상가나 철학자들과도 교류했다.
구스타프 3세는 왕비 소피아 막달리나와 불화를 겪었으며, 또는 젊은 여성에게 흥미가 없었던 동성애자라고 소문도 있었다. 일부에서는 구스타프 4세 아돌프는 그의 친자식이 아니라고 하는 설도 있다. (이렇게 소문을 낸 것은 왕비와 불화를 겪었던 왕태후 로비사 울리카였다고 한다.) 소피아 막달리나는
덴마크 공주로 정략결혼을 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두 명의 자녀가 있지만, 성인이 된 것은
구스타프 4세 아돌프 뿐이었다.두 사람은 상반된 성격으로 잦은 언쟁을 했다. 구스타프 3세에게 있어서 결혼 생활은 불행 이외의 무엇도
아니었다.
어머니의 강한 영향이나 왕비와의 관계로 인해 구스타프 3세의 여자 관계는 깨끗했다고 한다. 그러나 구스타프 3세가 여자 관계는 전혀 없었다 뜻이 아니라, 파리에서 만난 에그몬트 후작처럼 특별한 관계가 된 적도 있었다. (그러나 부인은 요절 했다). 구스타프 3세의 경우, 여자 관계는 육체적이라기보다는 정신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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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stav III painted in 1777 by Alexander Roslin
구스타프 계몽주의 시대(또는 스웨덴 계몽주의 시대)로 알려진 통치기간에 의회에 대항해 왕권강화를 주장했다. 아돌프 프레드리크 왕의 맏아들인 그는 지성과 교양을 갖춘 계몽주의 옹호자였다. 1766년에 덴마크 왕 프레데리크 5세의 딸 소피아 마그달레나와 결혼했으며, 1720년 이른바 '자유의 시대'가 시작된 이래 의회에 종속되어 약화된 상태에 있던 스웨덴 왕위를 1771년 계승했다.
1772년 8월 구스타프 3세는 명실상부한 정권을 손에 쥐어 자유의 시대에 종지부를 찍었고, 곧 자유무역 증진, 출판의 자유, 빈민법 개정, 해군력 강화를 비롯한 여러 계몽주의 개혁을 실시했다.
하지만 반대자들이 그의 원만한 성격과 적절한 통치에도 만족하지 않고 있었던 상황에서 그가 일으킨 달갑지 않은 러시아-스웨덴 전쟁(1788~90)과 핀란드 전선에서 일어난 장교들의 반란으로 그의 입장은 더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스벤스크순드 해전에서 승리하여(1790. 7) 전쟁에서 완패하는 것을 모면했으며, 또한 자신의 인간적인 매력으로 애국심의 물결을 일으킬 수 있었다.
그러나 귀족들은 그를 겨냥한 음모를 꾸몄다. 1792년 3월 구스타프는 스톡홀롬 오페라하우스의 자정 가면무도회에 참석했다가 야코프 요한 앙카르스트룀 대위의 저격으로 치명상을 입고 며칠 뒤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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