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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바르톨로매오 축일 학살(프랑스어: Massacre de la Saint-Barthélemy)

Bawoo 2015. 1. 17. 10:53

성 바르톨로매오 축일 학살(프랑스어: Massacre de la Saint-Barthélemy)은 기독교의 역사상 1572년 8월 24일부터 10월까지 있었던 로마 가톨릭교회 추종자에 의한 개신교 신도들을 학살한 사건을 가리킨다. 당시 대비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딸이자 국왕 샤를 9세의 동생인 마르그리트개신교 신자인 나바르의 앙리[1]와의 결혼식을 축하하기 위해서 모인 개신교 지도자 콜리니를 포함한 약 3만에서 7만여 명의 개신교도가 로마 가톨릭 교도에 의해 학살당했다.

 

개신교 신도들을 학살하는 로마 가톨릭 신도들 (프랑수아 뒤부아 그림)

 

이 소식은 곧 유럽으로 전파되었다. 신실한 가톨릭교도였던 당시 황제 막시밀리안 2세까지도 이 소식을 듣고 공포를 금치 못했다고 한다. 영국은 엘리자베스 여왕이 상복을 입고 이들의 죽음을 애도하였다고 한다. 제네바에서는 이 비통한 소식을 듣고 금식을 선포하였다.

 

의미[편집]

성 바르톨로매오 축일 학살은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 교회간의 대립과 개신교의 정치적 영향력을 우려한 예수회가 매디치가의 카트린과 귀제(Guise)가를 부추겨 일으킨 만행이었다.[2]

교황의 축하[편집]

교황 그레고리오 13세는 이 학살의 날을 축하하여 ‘하느님께 찬양’이란 뜻의 ‘떼 데움’(Te Deum)이라는 성가를 부르도록 명하였고 특별 감사의 미사를 집전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날을 기념하여 기념 메달을 주조하였다. 또 로마에서는 축제 분위기 속에서 3일간 불을 끄지 않았다고 한다. [3]

문화적인 배경[편집]

주석[편집]

  1. 이동 후에 앙리 4세가 된다.
  2. 이동 예수회의 비밀역사
  3. 이동 이상규<<교회개혁사>>
  4. ========================================================================

 

<다음 백과>

 

프랑스의 가톨릭 귀족과 시민들이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음모에 따라 파리에서 위그노(프로테스탄트)들을 학살한 사건(1572. 8. 24/25).

이 사건은 16세기말 프랑스 전역을 시끄럽게 했던 가톨릭과 위그노사이에 벌어진 종교전쟁 가운데 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의 뒤에는 프랑스 궁정 내의 정치적·종교적 알력이 자리잡고 있었다. 위그노의 지도자인 가스파르 2세 드 콜리니 장군은 스페인에 대항해 저지대지방(지금의 베네룩스 3국)에서 일어난 전쟁을 지원했다. 이는 내란의 재발을 막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으며 또한 프랑스의 국왕 샤를 9세가 1572년 여름에 승인하려 했던 계획이었다. 그러나 샤를 9세의 어머니인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국왕에 대한 콜리니 장군의 영향력이 커질 것을 우려해서 당시 가톨릭교도인 기즈 가문 사람들이 콜리니 장군을 암살하려고 짜놓은 계획을 승인해주었다. 기즈가 사람들은 콜리니 장군이 프랑수아 드 기즈의 살해사건(1563)에 대해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1572년 8월 18일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딸 프랑스의 마르그리트(마르그리트 드 발루아)는 위그노였던 나바라의 엔리케(훗날 프랑스의 앙리 4세)와 결혼하게 되어 많은 위그노 귀족들이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파리로 왔다. 그로부터 4일 후 콜리니 장군을 암살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실패로 돌아가고 콜리니 장군은 상처만 입는 데 그쳤다. 흥분한 위그노들을 달래기 위해 정부측은 암살음모를 조사하기로 했다.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자신이 연루된 사실이 탄로날 것을 우려해 튈르리 궁에서 일단의 귀족들과 은밀히 만나, 당시 결혼식 축하행사를 위해 파리에 머물고 있던 위그노 지도자들을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샤를 9세를 설득해 이 계획의 승인을 얻어냈다.

 

8월 23일 밤 파리 자치지역 요원들이 루브르에 소집되고 각자에게 명령이 내려졌다. 24일 동트기 직전 생제르맹로세루아의 종이 울리자 학살이 시작되었다. 최초의 희생자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콜리니 장군이었는데 그는 앙리 드 기즈가 직접 지켜보는 가운데 살해당했다. 나바라에서 온 참석자들도 살해되었으며 나바라의 엔리케와 콩데 공 2세인 부르봉의 앙리 1세는 간신히 살아 남았다. 위그노들의 집과 상점들이 약탈당하고 그 안에 있던 사람들은 무참히 살해당했으며 수많은 시체들이 센 강에 내던져졌다. 25일 살육행위를 중단하라는 국왕의 명령이 내려진 후에도 파리에서 유혈사태가 계속되었으며 지방까지 확산되어 루앙·리옹·부르주·오를레앙·보르도에서도 위그노 희생자가 발생했다. 그해 10월까지 지속된 소요사태에서 희생된 사람의 숫자는 가톨릭 측에 따르면 2,000명에 이르고, 당시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위그노 쉴리 공작은 7만 명이나 된다고 주장했다. 현대 역사가들은 당시 희생자 수를 파리에서만 3,000명 정도였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학살사건에 관한 소식을 듣고 스페인의 펠리페 2세는 환영하는 입장을 나타냈으며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는 이 사건을 기념해 메달을 주조하도록 했다. 반면 프로테스탄트 국가들은 공포에 사로잡혔다. 국가의 수장으로서 사건에 책임을 지고 있던 샤를 9세는 왕권에 대항한 위그노의 음모가 있었다고 주장하며 사건 경위를 설명했다. 카트린 드 메디시스가 기대했던 대로 위그노는 무기력해지지 않고 오히려 학살사건을 계기로 가톨릭교도와 위그노 사이에 증오가 되살아났으며 새로이 적대감정이 싹텄다. 그때 이후로 위그노는 왕권에 복종하라는 장 칼뱅의 원칙을 버렸으며 특정한 상황에서는 반란세력과 폭군을 살해하는 행위가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견해를 지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