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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미국 전쟁(Mexican-American War)

Bawoo 2015. 1. 20. 22:25

멕시코-미국 전쟁(Mexican-American War)1846년1848년 사이 멕시코미국 사이에 발생한 군사 분쟁이다. 맥락에 따라서 멕시코 전쟁, 그리고 당시 미국 대통령인 제임스 포크에서 따서 포크의 전쟁로 불리기도 한다.

 

이 전쟁은 1836년 텍사스 혁명으로 텍사스 공화국이 성립되었지만, 멕시코는 이 땅을 자국의 영토로 여겼다. 그러나 1845년 텍사스 합병으로 텍사스가 미국의 주가 되자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전쟁의 원인은 1836년 텍사스 혁명으로 텍사스 공화국멕시코로부터 독립을 하면서 싹트게 된다. 텍사스 공화국이 1845년 텍사스 합병을 통해 미국의 28번째 주인 텍사스 주가 되자 종주국이라고 생각한 멕시코는 이 합병을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이듬해 1846년 발발한 전쟁이 멕시코-미국 전쟁이다.

 

멕시코와 미국은 각각 텍사스에 대한 종주권을 주장하였다. 텍사스는 멕시코와 싸워 독립을 쟁취한 지 오래지 않았으며 멕시코는 텍사스를 반란 지방으로 인식해 독립을 인정치 않고 있었다. 전쟁의 근본 이유는 미국의 서진 확장 경향과 최근 멕시코 독립 전쟁을 통해 독립한 멕시코의 정치적 불안정이었다. 미국은 멕시코와 협상을 하는 것이 어려운 시점이었으며 멕시코는 북부 지방을 관리하는 것이 어려운 시기였다. 텍사스는 전쟁을 지지했다. 미국 내부에서 휘그당이 거세게 전쟁에 반대했다. 멕시코에서 전쟁은 방어 전략상 필요 수준으로 여겨졌다.

 

전쟁의 가장 중요한 결과는 멕시코가 캘리포니아뉴멕시코를 미국에 팔아넘기게 된 것이었다. 미국 정계는 새로 획득한 주에서 노예 제도와 관련하여 격렬한 논쟁을 벌여 ‘1850년의 타협’을 보았다. 멕시코에서는 정치적 혼란기가 계속되어 전쟁은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또한 이 전쟁은 유럽의 1848년의 혁명과 거의 때를 같이하고 있어 더욱 중요한 의미가 있다.

역사적 맥락

멕시코 제1공화국과 제2공화국의 행정구역. 붉은 구역은 텍사스 공화국이 영유권을 주장한 지역이다.

 

멕시코-미국 전쟁 이전 이미 미국의 산악인들과 무역상들은 산타 페 길캘리포니아 길(California Trail)을 통해 이 땅에 자주 접촉하고 있었다. 미국 상선들은 활발하게 무역을 하고 있었다. 이 지역은 30년간 멕시코 공화국의 영토였으며 그 이전에는 에스파냐 제국의 영역이었다.

 

미국이 루이지애나 주를 구입한 이후 에스파냐 제국의 토지 제공에 힘입어 미국의 백인 정착자들이 서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멕시코가 독립 전쟁 이후 이 영토를 거느리게 된 이후로도 서향 이민은 계속되었다. 멕시코 정부는 자국의 국교인 로마 가톨릭이 아니라 개신교를 믿는 이들 정착자들과 불편한 관계를 형성했다. 멕시코가 전국적으로 노예 제도를 폐지 했을 때에 일부 백인 이민자들은 법의 이행을 거부했다. 멕시코 중앙 정부의 간섭과 하나되어 텍사스 혁명이 일어나게 된다.

 

멕시코 독립 전쟁으로 인하여 약화되고, 재정 능력을 상실한 맥시코 정부는 수도에서 몇천 킬로미터씩이나 떨어진 북방 지방을 제어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텍사스는 산타 안나가 지도하는 멕시코 군대를 물리치고 1836년 독립을 달성하였다.

전쟁 과정

그 뒤 텍사스 공화국은 연방에 가입해 미국의 한 주가 되고 미국과 멕시코의 캘리포니아애리조나 등지의 문제로 인해 갈등이 생겼다. 그리고 1846년 리오그란데에서 미군의 도발로 충돌이 일어나 미군 16명이 멕시코군에게 살해당하자 이 사건으로 1846년 5월 미국이 멕시코에 선전 포고를 하면서 전쟁이 일어났다. 미군은 멕시코군의 4배나 되는 대군으로 멕시코군을 격파하여 뉴멕시코의 수도 샌타페이를 점령했고 1847년 3월에는 역사상 최초의 수륙양용 군사작전을 수행해 멕시코 베라크루스에 상륙했다. 멕시코 사령관은 항복하고 1847년 9월 14일 멕시코의 수도 멕시코시티는 미군에게 함락되었다. 결국 1848년 1월 멕시코는 평화 협정을 요청해 1848년 2월 2일 멕시코 과달루페 이달고에서 《과달루페-이달고 조약》을 맺어 전쟁은 종결되었다.

결과 및 영향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으로 미국은 겨우 1,825만 달러를 지급하고 멕시코로부터 뉴멕시코, 캘리포니아, 콜로라도, 애리조나, 네바다, 유타 주 등을 할양 받아 한반도 넓이의 15배에 달하는 300만 평방킬로미터의 영토를 넓혔다. 미국은 겨우 멕시코인들에게 진 빚 325만 달러를 떠맡도록 하였고 군사비 지출도 9,800만 달러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전쟁 직전 일부 미국 여론들은 전쟁을 반대했는데 지식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전쟁세를 내는 대신 감옥에 가는 것으로 항의했고 랄프 왈도 에머슨은 미국의 폭력을 부끄러워하며 멕시코가 미국에게 독이 될 것이라고 했다. 또한 남북전쟁의 전쟁 영웅 율리시스 그랜트 역시 이를 두고두고 한탄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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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모 Alamo

미국 텍사스 주 산안토니오에 설립된 18세기 프란체스코 수도회 전도소.

알라모

미국 텍사스 샌안토니오에 있는 알라모

 

미국인 결사대가 멕시코로부터 텍사스를 독립시키기 위해 싸운(1836) 역사적인 저항 요새이다. 이 전도소의 건물은 원래 1716~18년 프란체스코 수도회 수사들이 세운 산안토니오데발레로 전도부 예배당이었다. 18세기 말엽에 프란체스코 수도회는 이곳에 대한 전도를 포기했고, 건물들의 일부는 폐허로 변했다. 1801년 이후 이 전도소는 스페인 군대가 이따금씩 점령했다. 스페인 군대의 주둔기간중 이 낡은 예배당 주변에 미루나무 숲이 있다고 해서 '알라모'라는 이름을 얻은 것 같다.

 

1835년 12월 텍사스 독립전쟁 초기, 텍사스 의용군 부대는 산안토니오에서 멕시코 군대를 몰아내고 알라모를 점령했다. 샘 휴스턴을 포함한 몇몇 텍사스 지도자들은 소규모의 군대를 가지고 산안토니오를 방어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으로 판단하고 산안토니오를 포기하기로 결정했으나, 알라모의 의용군들은 배치된 위치에서 후퇴하기를 거부했다. 1836년 2월 23일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안나 장군이 이끄는 멕시코 군대는 리오그란데 강의 남쪽에서 접근하여 즉각 알라모에 대한 포위공격을 시작했다. 소수의 미국 수비대는 나중에 증원군이 약간 보강되었다.

 

이들을 지휘한 사람은 제임스 보이 대령과 윌리엄 B.트래비스 대령이었고, 유명한 데이비 크로킷도 이 수비대의 일원이었다. 13일 동안 알라모의 수비대는 저항했으나, 3월 6일 아침 멕시코군(이들의 병력수는 1,800명이라는 설부터 6,000명이라는 설까지 다양함)은 안마당 외벽의 무너진 틈을 통해 물밀듯 들어와 텍사스인들을 덮쳐버렸다. 산타 안나는 단 1명도 살려두지 말라고 명령했다. 수비대 중 183명이 사살되었다(대부분이 부녀자와 아이들로 약 15명만이 살아남았음). 멕시코 군대도 엄청난 사상자를 냈다. 믿을 만한 통계에 따르면 1,000~1,600명 정도의 병사가 전사했다. 이처럼 엄청난 사상자를 낸 데다가 알라모를 점령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기 때문에 산타 안나의 작전은 엉망이 되어버렸고, 그 덕분에 휴스턴은 텍사스를 방어하기 위한 완벽한 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 알라모는 텍사스인들에게 영웅적 저항의 상징이 되었다.

 

1845년 이후 여러 해 동안 알라모는 미국 군대의 숙영지 및 병참기지로 사용되었다. 1883년 텍사스 주는 알라모를 매입했고, 1903년 옛 전도소 마당에 남아 있는 것들에 대해 권리를 얻었다. 알라모와 그 부근의 건물은 복원되어 역사 유적지로 보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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