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ésar (Auguste) Franck
<1822. 12. 10, 네덜란드 리에주~1890.11.8 파리> composer, pianist, organist, and music teacher who worked in Paris during his adult life.[영문 자료:César Franck] | |
|
|
---|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교향적 변주곡〉 같은 낭만적 대작으로 유명하다. 발롱 지방 출신인 아버지와 독일 혈통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8세에 놀라운 재능을 보여 리에주 음악원에 입학했다. 피아노의 연주 솜씨가 뛰어나 그의 아버지는 1834년 프랑크를 데리고 엑스와 브뤼셀 등 여러 도시로 연주 여행을 떠났으며 1년 뒤 파리로 보내 파리 음악원 교수로 있던 보헤미아의 작곡가 안톤 라이하에게 배우게 했다.
< 작품 모음>[List of compositions by César Franck]
1851년 생장생프랑수아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로 임명되었으며, 1858년에 성가대 지휘자로 일하고 있던 생트클로틸드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가 되었다. 화려한 연주와 기교적 성향의 작곡의 대가였던 그는 초기에도 뛰어난 음악적 감각을 보여주었는데, 그러한 예가 나타나고 있는 작품으로 피아노를 위한 프렐류드(1887 완성, 마지막 악장)과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교향적 변주곡〉(1885) 등을 들 수 있다.
한편 프랑크의 음악적 쇠퇴기의 몇 작품은 페렌츠 리스트, 리하르트 바그너, 더욱 멀게는 베토벤의 예를 들면서 피상성과 강렬한 정서의 배양에 대하여 지나칠 만큼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19세기의 마지막 25년 동안 프랑스 음악의 새로운 진지함은 프랑크와 그의 제자들에게서 유래한다.
1836년에는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요제프를 비롯한 가족이 파리로 이사했으며 1837년 파리 음악원에 들어갔다. 1년이 못 되어서 그는 독보력(악보 읽는 능력)시험에서 명예대상(Grand Prix d'Honneur)을 받았으며, 1840년에는 푸가 부문에서 1위, 1841년에는 오르간 부문에서 2위를 차지했다. 이어 로마 유학이 상으로 주어지는 로마 대상의 준비를 해야 했으나 아버지는 바이올린 연주자인 그의 동생과 프랑크에게 대가로서의 경력을 만들어 주기로 결심하고 연주회를 열었다. 그리하여 음악원을 도중에 그만두어야 했다.
아버지를 만족시키고 돈을 벌기 위하여 연주회를 열었는데 연주회의 레퍼토리는 주로 그당시에 유행했던 오페라 접속곡과 직접 작곡한 대중적 환상곡이었다. 1840년 이후 관심이 오르간 쪽으로 기울자 작품은 진지해졌으며 그때 작곡한
=============3개의 트리오(삼중주곡)================는
헝가리 작곡가 프란츠 리스트에게 감동을 주었다.
1846년 1월 4일 파리 음악원 무대에서 처음 연주되었던 칸타타 〈루트 Ruth〉는 그의 야심작이었다.
프랑크는 내키지 않는 연주회 공연, 수많은 언론의 악평, 수입을 위해 강행해야 하는 교습으로 인해 건강이 악화되었다.
자신의 재능을 착취하는 이기적인 아버지에게 대항할 수 있게 된 다음에야 비로소 정신적으로 성숙하고 마음의 평정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프랑크는 본명이 펠리시테 사일로트인 여배우 데스무소와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그녀의 부모가 극장에서 일한다는 이유로 아버지가 결혼을 반대하자 프랑크는 1848년 결혼을 앞두고 잠시 집을 떠나 있어야 했다. 결혼하고 나서 그의 생활 방식은 그뒤 42년 동안 거의 변하지 않았다. 오르간 연주자와 교사로서 생계를 유지했는데 생활은 소박하다 못해 금욕적이기까지 했다. 여름과 겨울에는
새벽 5시 30분에 일어나 2시간 뒤부터 하루 종일 계속되는 교습을 시작했다. 작곡은 주로 이른 아침 시간과 여름휴가 동안에 했다.
1851년 생장생프랑수아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로 임명되었으며, 1858년에 성가대 지휘자로 일하고 있던 생트클로틸드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가 되었다. 생트클로틸드의 오르간실에서는 다른 오르간과 합창곡의 역작과 더불어 그를 유명하게 한 즉흥연주가 시작되었다. 이 즉흥음악은 연주하는 날의 기분에 따라 달라지는데 공식적인 직분을 맡기 전에 작곡된 음악으로 날렵하면서도 부드러우며, 달콤하고 서정적이다. 그러나 프랑크와 그의 친구인 샤를 구노가 교회의 직분을 맡게 되면서 그들의 교회음악은 어려워지고 엄격해지게 되었다.
1872년에 파리 음악원의 오르간 교수로 임명됨으로써 작곡가로서의 중요한 경력이 시작되었는데 이것은
그의 예상과 관심밖의 일이어서 무척 놀라워했다. 대인관계에서 솔직하고 직선적이었기 때문에 학생들 사이에서 호감과 반감을 동시에 얻었다. 그에 대한 적대감은 그가 오르간 수업시간을 작곡 수업시간으로 만들어버리고, 보수적인 그의 작곡 기법에 반감을 품은 학생들이 늘어나자 더해졌다.
1860년대 후반에 이미 프랑크에게서 개인교습을 받았던 앙리 뒤파르크와 알렉시스 드 카스티용이 그의
제자들 중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1871년 2월 25일 국립음악협회가 설립되어 진지함, 정서적 안정, 기술적 기초가 마련될 준비가 갖추어지고 난 후 비로소 그는 저술과 학생들과의 대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872년 프랑크의 제자가 된 프랑스의 작곡가 뱅상 댕디의 열정적인 선전은 피아노 연주와 작곡의 대가가
되는데 실패해서 의기소침해 있는 프랑크의 권위를 회복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1880년대 초반 에른스트 쇼송, 피에르 드 브레빌, 샤를 보르드, 기 로파르츠를 포함한 프랑크파(派)가 형성되었다.
그뒤 뱅상 댕디가 〈세자르 프랑크 전기〉(1906)에서 보인 열렬한 찬사는 한때 프랑크가 '제자들이 만들어낸 인물'이라는 의혹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1880년부터 1990년 그가 죽기까지 작곡한 음악을 보면 위의 말이 사실이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다. 화려한 연주와 기교적 성향의 작곡의 대가였던 그는 초기에도 뛰어난 음악적 감각을 보여주었는데, 그러한 예가 나타나고 있는 작품으로 피아노를 위한 〈Prélude, aria et final〉(1887 완성, 마지막 악장)과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교향적 변주곡〉(1885) 등을 들 수 있다. 한편 프랑크의 음악적 쇠퇴기의 몇 작품은 페렌츠 리스트, 리하르트 바그너, 더욱 멀게는 베토벤의 예를 들면서 피상성과 강렬한 정서의 배양에 대하여 지나칠 만큼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1890년 프랑크는 길가에서 마차채에 옆구리를 찔려 늑막염에 걸려서 죽었다. 19세기의 마지막 25년 동안 프랑스 음악의 새로운 진지함은 프랑크와 그의 제자들에게서 유래한다. 프랑크의 천사같이 부드러운 마음씨와 고결함, 세상사에 대한 순박함은 작품의 경향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반면 활기 없다는 평도 있어서 자신의 음악적 특성과 상반되는 경향을 가진 작품 창작요구에 직면했을 때 그의 특성이 결점이 되기도 했다. 이러한 예가 되는 작품은 1870년대에 작곡되어서 사후에 연주되었던 오라토리오 〈Les Béatitudes〉와
교향시 〈저주받은 사냥꾼 Le Chasseur maudit〉(1882)·〈귀신 Les Djinns〉(1884)이 있다.
한편 1886년에 작곡한
=================바이올린 소나타 ========================
'♣ 음악 감상실 ♣ > - César Franck' 카테고리의 다른 글
César (Auguste) Franck - Piano Concerto No. 2 in B minor, Op 11, [13세에 작곡한 곡]*****] (0) | 2017.03.19 |
---|---|
César Franck: String Quartet in D Major (1889) (0) | 2017.03.19 |
Cesar Franck - Symphony in D Minor (0) | 2017.03.19 |
César Frank, - Violin Sonata in A major (0) | 2017.02.14 |
César Franck - Piano Trio 전곡(No. 1 ,2, 3, 4번) (0) | 2015.08.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