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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와이탕이 조약

Bawoo 2015. 2. 6. 21:58

와이탕이 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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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탕이 조약(Treaty of Waitangi)은 1840년 2월 6일, 뉴질랜드 북섬 와이탕이에서 당시 무력 충돌이 끊이지 않았던 원주민 마오리 족영국과 체결된 조약이다.

 

 

 

19세기 초 뉴질랜드에는 아일랜즈 만 등지를 찾아온 무역업자나 포경선, 물개잡이 등의 행동으로 마오리 족 원주민들은 불안해 했다. 머스켓의 보급과 19세기 초에 벌어진 일련의 머스켓 전쟁은 마오리의 인구를 급감시켰다.

 

뉴질랜드에 도래한 백인들은 마오리 사람들을 속여 물건을 약탈하고 죽였다. 뉴질랜드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무질서한 곳이었다. 그 이후부터 뉴질랜드회사, 오타고협회, 캔터베리협회 등을 통하여 각지에서 이민자가 건너오기 시작하였다.

 

그러한 이곳에 이주를 재촉한 사람이 에드워드 와케필드이다.

1837년에 그는 영국에 뉴질랜드협회를 세우고 식민운동을 시작했다. 다음 해 뉴질랜드 토지회사를 설립하고는 뉴질랜드의 토지를 마음대로 팔았다. 이 토지를 매입한 사람들이 제1차 조직 이주민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원주민과 유럽인과의 접촉이 잦아지면서 교역이 시작되었고 그러면서 점차 마오리들의 입장에선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영국의 식민지가 되기를 원했다.

 

첫째로 대영제국의 막강한 해상 장악력 때문이었다. 당시 영국 해군은 프랑스 나폴레옹군을 해전에서 무찔러 해상에서 막강한 기세를 떨치고 있을 때였다.

 

두 번째로 뉴질랜드는 당시 중앙정부가 존재하지 않았고 통합된 지도자가 없어 유럽 이주민들과의 교류도 각 부족별로 이루어졌으며 따라서 협력과 커뮤니케이션에도 근본적인 한계가 있었다.

 

셋째로 전혀 다른 문화적 배경을 지닌 두 민족이 부딪히다 보니 충돌이 잦아졌고 유럽 이주민이 늘어나고 있음에도 이들을 다스릴 법률이나 규범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교역이 이루어지면서 마오리 소유의 땅이 비조직적으로 무차별 팔려 나갔으며, 일부 마오리 추장들은 뉴질랜드가 프랑스에 의해 정복되지 않을까 심한 우려를 표명하여 영국의 보호를 요청하던 차였다.

 

실지로 1831년 13명의 북쪽 추장들은 영국의 윌리엄 4세에게 프랑스의 침공으로부터 지켜달라는 공식 청원을 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마오리나 파케하 모두 법과 질서, 그리고 어떤 형태든 영국의 보호를 요구하고 있었다.이러한 상황 중에 1840년 영국해군 장교 윌리엄 홉슨이 총독으로 뉴질랜드를 찾아온다. 그는 당시 영국인의 대리인으로서 와이탕이에 장기간 살고 있던 제임스 버스비의 집으로 가서 뉴질랜드를 영국의 식민지로 삼기 위한 협의를 한다. 그리고 1840년 2월 6일 아일랜즈 만와이탕이에 있는 제임스 버스비의 집에 각지의 마오리 추장 46명을 모아 뉴질랜드를 사실상 영국의 식민지로 하는 《와이탕이 조약》에 서명한 것이다. 그 후 7개월 동안 영국 관리들은 전국을 돌며 500명 이상의 추장 사인을 받아냈으며, 39명의 와이카토 추장들을 제외하곤 모두 사인을 했다.

내용

서명인 중 한 사람인 혼 헤케와 그의 아내 하디아타

 

와이탕이 조약은 3개조로 되어 있는 간단한 것이다.

  • 모든 마오리족은 영국 여왕의 신민이며, 뉴질랜드의 주권을 왕권에 양보한다.
  • 마오리 토지 보유권은 보장되며, 그 토지는 모두 영국 정부를 통해서 판매된다.
  • 뉴질랜드는 영국 국민으로서의 권리를 인정받는다.

이 조약이 체결되고 뉴질랜드는 영국의 식민지로 출발하게 되었다. 와이탕이 조약은 뉴질랜드를 2민족 국가로 규정짓는 성격의 것이었다. 그리고 뉴질랜드는 뉴사우스웨일스 식민지로부터 분리되어 영국의 직할 식민지가 되었다.

홉슨은 1842년 9월에 사망했고, 새로운 총독으로 로버트 피츠로이가 와서 마오리족의 관습을 인정하는 법률적인 조치를 취하게 된다.

논란

그러나 조약을 영어에서 마오리어로 번역한 번역문에 문제가 있어, 21세기인 오늘날에도 마오리 권리의 문제로 논쟁이 끊이지 않는다. 예를 들면 "주권"(sovereignty)을 나타내는 마오리어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오리족의 조어 "카와나탄가"(kawanatanga)를 썼다. 하지만 그 조어는 영어로 번역하면 "주권"보다 "지배"(governance)에 가까웠다. 이런 이유로 마오리 측은 "모든 토지는 자신들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반면에 백인 측은 "뉴질랜드는 영국의 식민지이다"로 파악하고 있었다.

반란

이런 근본적인 견해 차이로 인해 1843년 30년간에 걸친 마오리 반란이 일어난다. 반란은 진압되었지만 뉴질랜드 정부는 이후 100년 동안 문제를 방치하였고, 1975년에 이르러 와이 심판소가 설립되었고, 와이탕이 조약에서 인정된 권리에 대해 다시 심의가 시작되었다. 그 결과 일부 강탈당한 토지를 반환하고, 공용어를 영어 뿐만이 아니라 마오리어를 추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