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술(美術) 마당 ♣/- 화가[畵家]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 -들라크루아

Bawoo 2015. 3. 4. 21:41

 

 

 

사르다나팔루스는 고대 아시리아 제국의 마지막 왕이다. 반란을 일으킨 폭도들이 왕의 군대를 섬멸하고 궁전으로 물밀듯이 밀려들어오는 마지막 순간에, 그는 항복이라는 굴욕 대신 자살을 선택한다. 높이 쌓은 장작 위에 침대를 얹고, 그 위에 비스듬히 누운 왕은 충성스런 시종들에게 명하여 불을 붙인다. 화염과 함께 화려한 쇼가 시작된다. 왕은 결코 혼자 죽지 않는다. 그는 지금까지 그에게 기쁨과 쾌락을 주었던 모든 것을 불길 속에 던지라고 명령했다.

 

금빛 장신구를 주렁주렁 매단 백마가 흑인 노예에게 끌려 올라오고, 왕의 식탁을 수놓았던 화려한 집기들과, 매끈한 피부에 육감적인 몸매가 매혹적인 하렘의 여인들이 장작더미 위로 올라왔다. 왕의 총애를 받았던 애첩은 스스로 침대에 몸을 던졌고, 저항하는 여인은 강인한 병사에게 팔을 비틀린 채 칼에 찔려 죽어간다. 그림 속에서는 정작 한 방울의 피도 찾아볼 수 없지만, 흐르는 듯이 과감하게 온 화면을 뒤덮고 있는 붉은 물감과 틀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어지럽게 꿈틀대는 곡선의 향연은 피보다 자극적이다.

 

메인작품 보러가기
 


파멸의 순간을 음미하는 제왕의 카리스마

 

이 장면이 영화였다면, 폭도들의 함성과 여인들의 처참한 비명과 백마의 울음소리가 어지럽게 귀를 울렸을 것이다. 뮤지컬이었다면, 검은 연기가 시야를 가리고 뜨거운 불꽃이 무대를 달구었을 것이다.

 

 

3-D 영화였다면, 활처럼 몸을 휘는 여인의 몸부림에 움찔하거나 장작 위에서 굴러 떨어지는 금은보화와 백마의 거친 뒷발질에 몸을 사렸을 것이다. 눈 앞에서 펼쳐지는 이 모든 혼란의 꼭대기에 사르다나팔루스가 있다. 어둠에 몸을 반쯤 가린 그는 우아하고 냉정하기 그지없는 자태로 파멸의 순간을 음미하는 중이다. 폭력성과 선정성을 따지자면 별 다섯 개 감이지만, 이국적인 제왕의 카리스마는 잔인한 폭력을 매혹적인 드라마로 미화했다. 들라크루아가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에서 보여준 폭발적인 상상력과 강렬한 표현력은 머리 보다는 눈을 먼저 현혹시켰고 보는 이의 감정을 세차게 뒤흔들었다. 시인 샤를 보들레르는 들라크루아를 낭만주의의 화신이라고 불렀다.

 

1827~1828년의 파리 살롱에 등장한 이 작품은 모든 면에서 그 이전까지 신고전주의가 지배했던 미술의 규범을 파괴했다. 신고전주의 미술의 질서정연한 구도와 안정된 표현, 도덕적 교훈과 이지적인 영웅담은 폭발적인 색채와 혼란스런 구도, 자유분방한 열정과 극도의 폭력성으로 교체되었다. 사실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은 1821년에 영국의 시인 바이런경이 발표한 시에서 영감을 얻어 제작된 작품이다. 그러나 정작 바이런의 시에서 반란군으로부터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 의연하게 불길로 걸어 들어간 사르다나팔루스의 고귀한 희생 정신은 들라크루아의 그림에서 폭력마저 쾌락으로 즐기고 마는 잔인한 폭군의 자기파괴적 욕망으로 변모했다.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을 발표한 직후에 들라크루아는 르네상스의 거장 미켈란젤로에 대한 에세이를 쓰고, 그의 모습을 그림으로 남겼다. 자신의 예술혼을 이해하지 못하는 후원자들과의 갈등에 시달린 나머지, 스스로의 작품 가운에 앉아 끌을 바닥에 던지고 사색에 빠진 미켈란젤로의 모습이 파멸을 즐기는 사르다나팔루스의 모습과 대단히 닮았다. 고대의 제왕과 과거의 거장이 공유했던 것, 즉 파괴적인 절망이 바로 낭만주의의 원동력이었다.


 

들라크루아 [작업실의 미켈란젤로], 1850년
캔버스에 유채, 41x33cm, 파브르 미술관, 몽펠리에
© Photo RMN, Paris - GNC media, Seoul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MN) 지엔씨미디어
작품 보러가기

 

 

 

 

합리성에서 벗어나 환상으로의 도피 – 낭만주의 회화

18세기가 계몽사상의 시대였다면, 낭만주의는 그 환멸에서 출발했다고 볼 수 있다. 프랑스 혁명과 미국의 독립으로 유럽인들은 잠시나마 인간의 이성과 합리적 선택으로 이상적인 사회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환상에 도취했었다. 그러나 혁명 이후의 정국은 전대미문의 공포정치로 흘러갔고 수만 명의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형장에서 사라졌다. 공포와 혼란 속에 새로운 영웅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구세주처럼 등장했다. 그러나 온 유럽을 초토화한 나폴레옹 정복전쟁은 그 또한 제국을 꿈꾸는 또 한 명의 독재자였을 뿐임을 증명했다.

 

1815년, 나폴레옹은 완전히 역사에서 사라졌지만, 혁명과 전쟁은 계속되었다. 어떤 이성적인 판단이나 합리적인 논리도 유럽이라는 ‘문명사회’에서 일어나는 잔인한 사건들을 설명할 수 없었다. 결국 공포와 비탄, 좌절과 허무 속에서 머나먼 미지의 땅이나 전설적인 과거의 한때, 혹은 의식 속에 깊이 숨겨진 인간의 어두운 내면으로 도피하고자 하는 정신적인 열망이 낭만주의를 낳은 셈이다.


이국적인 동양에 대한 낭만적인 호기심은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과 함께 증폭했다. 안-루이 지로데가 그린 [카이로의 폭동]에서, 죽어가는 장군을 한 손으로 우아하게 끌어안은 채 격렬하게 싸우는 이슬람 군인의 강인한 누드는, 화려한 유니폼을 갖춰 입은 프랑스 장교만큼이나 매혹적이고 장엄하게 그려졌다.

 

나폴레옹의 종군 화가였던 앙투안 장-그로는 [자파의 페스트 병동을 방문한 나폴레옹]에서 이집트 원정에 대한 환상을 부풀렸다. 원정 중에 프랑스 군영에 페스트가 창궐했고, 패닉 상태에 빠진 군인들을 안정시키기 위해 나폴레옹이 병동을 방문했다. 그의 부관은 썩어가는 환부에서 풍기는 역한 냄새를 참지 못하고 코를 틀어막고 있지만, 나폴레옹은 끼고 있던 장갑 마저 벗어 들고 맨손으로 거리낌없이 환자를 어루만지고 있다.

 

 

 

안-루이 지로데 [카이로의 폭동] 1810년
캔버스에 유채, 356x500cm, 베르사이유와 트리아농 궁 소장
© Photo RMN, Paris - GNC media, Seoul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MN) 지엔씨미디어
작품 보러가기

 

 

앙투안-장 그로 [자파의 페스트 병동을 방문한 나폴레옹] 1804년
캔버스에 유채, 532x720cm, 루브르 박물관
© Photo RMN, Paris - GNC media, Seoul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MN) 지엔씨미디어
작품 보러가기

 

 

 

나폴레옹의 ‘치유의 은사’를 더욱 극적으로 만드는 것은 화면 하단의 어둠 속을 가득 메운 채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병사들의 처절한 현실이다. 이슬람 복장을 한 의사들과 뾰족한 아치와 말발굽 모양의 창틀 등 이국적인 풍경 속에서 펼쳐지는 어둡고 침울한 전쟁의 참상과 기적 같은 영웅담의 격한 감동은 틀림없이 이전 시대의 신고전주의와는 달랐다. 물론 현실은 그리 감동적이지 않았다. 나폴레옹은 결국 환자들을 모두 독살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퇴각했다.

 

 

폭력과 절망, 관능과 색채의 역동적 화면을 창조

폭력과 관능이 공존하는 이문명에 대한 매혹과 공포, 환상과 환멸은 나폴레옹의 영광과 참패가 프랑스인들에게 가져다 준 유산 중 하나였다. 들라크루아의 [키오스 섬의 학살]은 유럽의 낭만주의자들을 자극했던 가장 극적인 사건, 오스만 투르크에 대항한 그리스 독립전쟁의 한 장면을 그렸다.

 

1821년에 시작된 그리스 독립전쟁은 근 십 년 동안 계속되었다. 서유럽 문화의 원천이자, 영원한 이상향으로 각인된 고대 그리스의 후손들이 이슬람 제국에 대항해 벌이는 독립전쟁은 유럽인들에게 연민을 살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바이런은 그리스를 위해 자원하여 참전했고 미솔롱기의 전장에서 열병으로 사망했으니, 그야말로 낭만주의의 ‘본좌’라고 칭할 만하다. 

 

 

 

 

  • 1들라크루아 [키오스섬의 학살] 1822~1824
    © Photo RMN, Paris - GNC media, Seoul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MN) 지엔씨미디어
    작품 보러가기

     


  • 2들라크루아 [알제리의 여인들] 1834년
    © Photo RMN, Paris - GNC media, Seoul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MN) 지엔씨미디어
    작품 보러가기

     

 

 

 

시인 호머의 고향으로 불리는 섬 키오스는 투르크 군대에 의해 완전히 짓밟히고 주민들은 학살당하거나 노예로 끌려갔다. 들라크루아는 세로로 긴 화면에 배경은 흐릿하게 처리하고 전면의 반 이상에 참담한 지경에 빠진 키오스섬의 주민들을 담았다. 신고전주의에 익숙한 당시의 관중들은 우선 파격적인 구도와 눈을 찌르는 듯한 현란한 색채에 충격을 받았고, 들라크루아가 존경하는 선배화가였던 그로 마저 이 작품을 일컬어 ‘회화의 학살’이라고 불렀다.


색채만큼이나 그 등장 인물들도 충격적이었다. 노예가 되어 각각 따로 팔려나가게 될 연인들은 작별의 순간을 앞두고 절망하며, 젖을 찾는 어린 아이를 바라보는 엄마는 슬픈 얼굴로 죽어가고, 운명을 기다리는 노파는 망연자실한 채 주저앉아있다. 그러나 들라크루아의 작품은 충격과 더불어 감각적인 쾌락을 이끌어내는 것이 사실이다. 날뛰는 말 위에 능숙하게 올라타 반라의 여인을 끌고 가는 투르크인의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은 이슬람에 대한 유럽인들의 낭만적이고 선정적인 환상을 자극할 수밖에 없었다.

 

동양에 대한 환상은 하렘의 여인들을 그린 [알제리의 여인들]에서 전형적인 모습으로 드러났다. 들라크루아는 1832년 실제로 북아프리카를 여행하면서 남긴 수많은 스케치들을 토대로 이국적인 땅의 정취를 전달하는 작품들을 남겼다. 그리스인들에 대한 동정과 유럽 문명의 우월성에 대한 자부심은 여전히 동양에 대한 열정적인 찬미와 이국 문화에 대한 끝없는 동경과 뒤섞여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