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젠 들라크루아
외젠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 1798년 4월 26일 ~ 1863년 8월 13일)는 프랑스 낭만주의의 중요한 화가이다.[1] 19세기 낭만주의 예술의 최고 대표자로 손꼽힌다.
개요
들라크루아의 색채사용법은 인상파와 후기인상파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주로 과거와 당대의 사건이나 문학에서 영감을 얻었고, 1832년에 모로코를 방문한 뒤로는 좀더 이국적인 주제도 다루게 되었다.
초기생애
들라크루아는 빅투아르 외벤과 샤를 들라크루아 사이의 4번째 아이로 태어났다. 어머니 외벤은 17~18세기에 왕실과 궁정에서 사용할 가구를 만들었던 외벤 리즈너 가문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정부 관리로서 1798년 당시 네덜란드 주재 대사였고, 보르도 지사로 재직하다가 1805년에 세상을 떠났다. 일설에 따르면 들라크루아의 진짜 아버지는 정치가인 샤를 모리스 드 탈레랑 페리고르라고 한다. 그는 어린시절에 자신의 출생에 대한 의혹으로 괴로워한 적이 한번도 없었고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존경심을 끝내 잃지 않았다.
17세가 될 때까지 고전을 공부하며 예술을 사랑하는 명문 집안에서 음악과 연극에 대한 열정을 키웠다. 1815년 그는 유명한 관학파 화가인 피에르 나르시스 게랭 남작의 제자가 되었다. 그는 역사화가인 앙투안 장 그로를 알고 있었고 젊은 시절에는 왕당파 화가인 프랑수아 제라르 남작의 살롱을 방문했다. 1822년에 이미 그는 정치가이자 역사가인 루이 티에르의 후원을 받게 되었는데 1830년대에 프랑스 내무장관을 지낸 티에르는 건축물의 장식을 들라크루아에게 맡겼다.
낭만주의 시대에 자란 들라크루아는 화가 테오도르 제리코와 그의 친구들인 영국 화가 리처드 파크스 보닝턴, 폴란드 태생의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 프레데리크 쇼팽, 프랑스 작가 조르주 상드의 낭만주의에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빅토르 위고와 엑토르 베를리오즈 등, 많은 예술가들이 참여한 낭만파 운동의 투쟁에는 가담하지 않았다.
성숙한 화풍의 발달
그의 첫번째 걸작인 〈지옥의 단테와 베르길리우스 Dante and Virgil in Hell〉는 단테의 〈신곡 Divine Comedy〉에서 영감을 얻었지만, 그 비애감은 미켈란젤로와 루벤스를 연상시킨다. 들라크루아는 키오스 섬에서 그리스인들이 투르크인들에게 대량으로 학살당한 그당시의 사건에서 영감을 얻어 〈키오스 섬의 학살 The Massacre at Chios〉이라는 대작을 완성, 1824년 파리 살롱전에 출품했다. 여기에는 정복자들의 오만한 자부심, 죄없는
그리스인들의 절망과 공포, 드넓은 하늘의 광채 등이 풍부한 표현의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그의 천재성이 유감없이 드러나 있다.
친구인 보닝턴과 필딩 형제들(테일리즈, 코플리, 시어도어, 뉴턴)의 섬세한 기법에 이미 흥미를 갖고 있었던 들라크루아는 1824년 파리에서 전시회를 연 영국 화가 존 컨스터블의 풍경화에도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는 회화 기법을 더욱 익히고 문화적 교양을 쌓기 위해 1825년에 런던으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터너, 컨스터블, 토머스 로렌스 경과 만나면서 그의 기법은 발전해갔고 루벤스의 화풍에서 따르고자 하던 자유로움과 유연성을 얻게 되었다.
1827~32년에 잇따라 걸작들을 그렸는데 역사적 주제를 다룬 그림으로는 〈낭시 전투 The Battle of Nancy〉·〈푸아티에 전투 Bataille de Poitiers〉가 있다.
또 영국 시인 바이런의 시에서 주제를 따온 그림도 그렸으며, 괴테가 쓴 〈파우스트 Faust〉의 프랑스어 번역판에 삽입할 17점의 석판화도 제작했다. 1830년 혁명에서 영감을 얻은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Liberty Leading the People〉은 그가 낭만주의 화풍으로 그린 마지막 작품이다.
그는 결국 낭만주의를 거부하게 되었고, 이후로는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 The Death of Sardanapalus〉에서 나타났던 현란한 색채, 〈리에주 주교의 암살 The Assassination of the Bishop of Liège〉에서 보여주었던 대학살의 혼란, 겉만 지나치게 화려한 역사의 잡동사니 등 초기 작품의 특징들을 피하려고 애썼다. 그는 자신의 취향인, 세부 묘사나 극적인 표현의 문학적 서술에 치우치지 않으려 했으며 내면을 고양시켜 주는 원천인 리얼리티를 대면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그는 1832년의 모로코 여행에서 그 현실을 발견했다. 그해 1~7월에 그는 루이 필리프 왕이 술탄에게 보낸 외교 사절 드 모르네 백작과 함께 여행하였다. 생기에 가득찬 자연풍경, 매력적인 아라비아산 말, 아라비아인 및 그들이 입은 옷, 그 원시적 야만성의 아름다움은 그의 기억 속에서 더욱 강해져 그에게 줄곧 영감을 주었는데, 그의 마지막 작품까지도 이 여행의 영향이 지속되었다. 교양있는 프랑스인인 그는 자신이 갈망했던 고대인의 고귀한 균형을 모로코 사람들에게서 발견했고, 그후 1846년에 인류학자이자 화가인 조지 캐틀린이 미국에서 유럽으로 데려온 오지브웨이족 인디언들의 위엄있는 모습에서도 그런 점을 발견했다.
건물장식
들라크루아가 정부 관청을 장식해달라는 의뢰를 처음 받은 것은 1833년이었다. 부르봉 궁전의 알현실에 벽화들을 그리는 이 작업은 건물 장식이라는 특별한 문제를 안고 있기 때문에 그는 베네치아 화가들, 루벤스, 퐁텐블로에서 활동한 이탈리아 르네상스 화가인 로소와 프란체스코 프리마티초에게서 영향받은 색채를 통해 이 문제를 보완하려 했다. 그는 색채를 능숙하게 다룸으로써 그림의 각 요소들을 통합하여 매우 시적으로 묘사했다. 그때부터 그의 건물 장식은 르네상스 시대 걸작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그가 베르사유의 역사박물관을 장식해 달라는 의뢰를 받고 그린 〈타유부르 전투 The Battle of Taillebourg〉·〈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입성 The Taking of Constantinople〉은 특히 유명하며, 여기에서 그는 역사, 신화, 철학, 종교, 인간의 고통을 결합하여 장대한 걸작을 만들어냈다.
1835~61년까지 그는 수많은 대형 벽화를 제작했다. 부르봉 궁전에서는 알현실로 들어가는 입구 위의 벽과 천장에 우의적인 그림을 그렸고, 도서실 천장에는 2점의 반원형 그림과 20점의 펜던티브 그림을 그렸다(1847). 루브르 박물관의 아폴로 전시실에 중앙 천장화를 그렸고(1851), 파리 시청(1871년에 화재로 소실)에 있는 평화의 방에는 천장화와 8점의 패널화 및 팀파눔에 11점의 그림을 그렸다(1849 시작). 생쉴피스 교회의 성천사 예배당의 천장에 성 미카엘을 그렸고, 벽에는 야곱과 천사 및 헬리오도루스를 프레스코로 그렸다(1861).
그는 작품에 무리하게 몰두하여 건강을 해쳤다. 게다가 1849년경에 그는 가장 가까운 친척과 친구들을 모두 잃었는데, 1844년에는 조카가 미국의 뉴욕 시에서 죽었고, 1845년에는 형인 샤를 들라크루아 장군이 죽었으며 1849년에는 그와 절친했던 쇼팽이 죽었다. 그후 그는 오로지 상상을 통해 그림을 그리는 데만 전념했다. 그가 죽은 뒤 파리 퓌르스텐베르 광장에 있는 그의 아파트는 그를 기념하는 국립박물관이 되었다.
* 출처: 브리태니커,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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