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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태평양 전쟁(미국)]바탄 죽음의 행진

Bawoo 2015. 3. 5. 23:55

 

 

 

 

바탄 죽음의 행진

Bataan Death March , ― 行進

 
바탄 죽음의 행진 경로

죽음의 바탄 행진(-行進, 영어: Bataan Death March, 타갈로그어: Martsa ng Kamatayan sa Bataan, 일본어: バターン ()行進 (こうしん))은 태평양 전쟁 초기에 일본군이 7만 명의 미군과 필리핀군 전쟁포로를 학대한 행위로, 1942년 4월 9일 필리핀 바탄 반도 남쪽 끝 마리벨레스에서 산페르난도까지 88km를 강제적으로 행진하게 한 것이다.

다시 카파스부터 오도널 수용소까지 13km를 강제로 행진하였는데 전쟁 포로 70,000명이 행진 과정 중 구타, 굶주림 등을 당했고 낙오자는 총검으로 찔려 죽음을 당했다. 결국 7,000명~10,000명의 전쟁 포로들이 행진 도중에 사망했고 54,000명만 수용소에 도착했다. 그리고 나머지는 정글 속으로 도망쳤으며 이 책임으로 필리핀 침공작전을 계획한 사령관 혼마 마사하루 중장은 1946년 4월 3일 마닐라 군사 재판에서 유죄를 선고받고 처형된다. 하지만 고의적 명령 왜곡으로 이 사태를 초래한 쓰지 마사노부 중좌는 처벌은 커녕 전범으로 기소되지도 않았다.<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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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지 마사노부(일본어: 辻 政信, つじ まさのぶ, 1902년 10월 11일 ~ 1968년?)는 일본의 육군 군인, 정치가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활약했으며, 종전 후에는 대좌(대령)으로 예편하여 정치인으로 입문하였고, 베트남 전쟁 와중에서 라오스를 방문했다가 실종되었다.

말레이 작전에서 기자들에게 여러가지 작전을 유창하게 설명하면서 자칭, 혹은 타칭으로 "작전의 신"(作戦の神様)으로 알려졌다. 그 외에도 일본 육군사관학교 사건, 할힌골 전투, 숙칭 대학살, 바탄 죽음의 행진, 포트 모르스비 전투, 과달카날 전역에서의 과장된 언론플레이로 유명하며, 2차대전이 종전한 후에도 일본 미군정은 쓰지를 ‘제3차 세계 대전을 일으킬 남자’(第三次世界大戦さえ起こしかねない男)라고 평가하고 위험시했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필리핀, 말레이시아, 버마, 과달카날 전투에 각각 참모장교로 파견되었으나, 자주 지휘권을 간섭하여 특히 과달카날에서는 파국적인 결과를 초래하였다. 근대적인 물량전을 이해하지 못하는 당시 일본육군 장교의 상징이다. 또한 포로 집단처형, 식인 등 일본군의 각종 잔혹행위를 명령하기도 했으나, 처벌은커녕 전범으로 기소되지도 않았다.

참의원 재임 중인 1961년 4월에 동남아시아 시찰을 위해 출국, 라오스에 건너갔다가 흔적없이 증발했다. 그 뒤 1968년 7월 20일에 사망선고가 내려졌다. 이 실종 사건에 대해서는 각종 의견이 분분했으나 확실한 것은 하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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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초 일본군에 사로잡힌 7만 명의 미국인과 필리핀 전쟁포로들이 강제적으로 행한 행진.

1942년 4월 9일 바탄 반도의 남쪽 끝 마리벨레스를 출발한 대열은 산페르난도까지 88㎞를 강제 행진했고 이어 카파스까지는 열차를 이용했으며 다시 카파스부터 오도넬 수용소까지 마지막 13㎞를 행군했다. 이들은 행군과정에서 굶주림에 시달렸고 구타를 당하기도 했으며 낙오자는 총검에 찔려 죽음을 당하는 등 숱한 박해를 받았다.

결국 7,000~1만 명의 포로들이 행진중에 사망하고 단지 5만 4,000만명이 수용소에 도착했으며 나머지는 정글 속으로 도망쳤다. 전쟁이 끝난 뒤, 그 행진의 책임을 물어 당시 필리핀 침공작전을 수행한 일본군 사령관 혼마 마사하루 중장이 기소되었으며 1946년 1~2월 마닐라에서 개최된 미국 군사위원회의 재판 결과 유죄가 인정되어 4월 3일 처형되었다. <브리태니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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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탄 죽음의 행진




당시 포로 이송 장면


일본군의 포로 학대를 표현한 일러스트.

영어: Bataan Death March
일본어: バターン死の行進

태평양 전쟁 기간인 1942년 4월 9일부터 시작된, 일본군이 바탄 반도를 점령하여 76,000명 규모의 연합군 포로들을 잡아 마리벨레스에서 카파스까지 120㎞를 강제이동시키면서, 포로 다수를 학대하고 살해한 행위. 일본군의 주요 전쟁범죄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다.

 
1. 바탄 전투의 패배
더글러스 맥아더 육군원수필리핀을 떠난 후 남겨진 7만여 명의 미군&필리핀군은 한동안 바탄 반도에서 저항하였으나 바탄 반도가 말라리아의 온상지(...)였던 데다가 보급마저 차단된 지 오래고 얼마 되지 않는 비축 식량은 거의 모두 소모한 상태였다. 이런 상태에서 조나단 웨인라이트 중장장병들에게 며칠만이라도 더 싸우자고 호소하지만. 이들은 이미 싸울 힘을 잃은 지 오래된 상태였다. 웨인라이트는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항복을 승인받은 후 1942년 4월 9일 일본군에게 항복한다.

이때 싱가포르를 접수한 야마시타 토모유키 장군의 간청으로 그 유명한 츠지 마사노부 육군중좌가 필리핀

 14군으로 파견나와 있었는데, 그는 여기서도 근성을 외치는 지휘를 하다가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명령을 왜곡, 14군 전체에 "포로 감시를 엄중히 하라" 라는 명령을 "미군필리핀군 포로를 처형하라" 는 지시로 바꾸어 내렸다.

2. 참상


바탄 반도에서 일본군이 졸전을 펼쳐 일본군도 보급선이 끝을 향해 달리는 상태였고 지역의 일본군이 별로 기계화되지도 않았고 게다가 포로의 규모도 잘못 예측했던 터라 포로 학살 명령은 실탄을 소모하지 않고도 수송 수단이 필요가 없는 식량 배급 없는 행군이라는 효율적인(...) 방법으로 실행되었다.

포로 학대로 유명한 일본군은 포로들을 바탄 반도의 남쪽 끝 마리벨레스를 출발해 산페르난도까지 88㎞를 강제 행군시켰으며 여기서 카파스까지는 열차를 이용한 뒤 다시 카파스부터 오도넬 수용소까지 마지막 13㎞를 행군시켰다. 이 과정에서 포로들에게 물과 식량은 거의 지급되지 않았고 탈락자는 총검으로 살해하였다. 결국 육군대좌 하나가 "포로를 처형하라" 는 지시에 의구심을 품고 대본영에 명령 확인 요청을 하였고, 대본영은 "그러한 명령을 내린 적이 없다" 는 답을 보냈다. 후에 14군 내의 자체조사결과 츠지 마사노부가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명령을 왜곡하여 지시를 내린 것으로 판명된다.

사실 일본군 내에서 미국통으로 통하는 14군 사령관 홈마 마사하루 육군중장은 연합군 포로를 수용 후 포로 간의 자치조직을 결성해서 간접적으로 지배하고 노동을 시키는 형태를 주장했다(사실 이게 서유럽에서의 전쟁 당시 양측의 포로 관리였다). 포로 학살 명령이 파견 온 아저씨의 개소리란 것에 놀란 14군은 명령을 즉시 철회하지만 이미 '죽음의 행진' 이 터지고 난 뒤라 10,000여 명의 포로가 사망한 상태였다.

그러나 이상은 단순한 홈마의 주장에 불과하고 그가 실제로 포로들에 대해 어떤 조치를 취한 건 없다. 더군다나 바탄 죽음의 행진에서 사망자들은 처형으로 죽은 건 얼마 없으며 대부분 탈진과 질병과 가혹행위가 원인[1]이기 때문에 츠지 마사노부의 명령으로 이렇게 되었다고 할 수는 없고 14군의 사령관인 홈마의 책임이 크다고 할 수밖에 없다.[2] 때문에 당사국인 미국에서는 바탄 죽음의 행진은 홈마의 책임으로 판단하지 츠지 마사노부는 언급조차 잘 안하는 편이다.

 

3. 사건 이후

바탄 반도 전투가 끝난 뒤 당시 14군 사령관 홈마 중장은 도조 히데키와의 마찰로 예편하였으나 전후 전범 재판에서 민간인 신분으로 필리핀에 압송되어 바탄 반도에 펼쳐진 죽음의 행진에 관해 인도에 반하는 죄(crimes against humanity)로 전범 재판에 기소되어 잔학행위 등이 인정되어 총살형을 선고받았다.[3] 한편 어딘가로 숨어버린 츠지 마사노부는 공식적인 개입이 확인되지 않은 데다가 그의 지시가 일선 부대에서 이행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는 점이 고려되어 전범 재판에 기소되지 않았다.

이 참상이 알려진 이후 미국 전역에 극도의 적개심과 일본에 대한 응징의 의지가 충천했다.

AntiJapan2.jpg
[JPG image (490.8 KB)]

살인자 일본놈을 다 쓸어낼 때까지 임무를 계속하자 라고 쓴 당시의 포스터.


희생자들의 유해가 담긴 관이 성조기로 덮여있다.

전후에도 이 죽음의 행진을 기억하기 위해 미군 부대 곳곳에서 바탄마치라는 이름으로 마라톤 대회를 개최하고 있으며 해군의 와스프급 상륙모함의 5번함도 바탄으로 명명했다.

필리핀군 및 민간인도 많이 희생되었기 때문에 4월 9일은 필리핀의 공휴일인 용사의 날로 지정되어 있다.

1945년 1월 30일, 미 육군의 레인저 부대와 필리핀 게릴라 부대가 포로수용소를 습격해, 수감되어 있던 포로들을 구출하는데 성공한다. 당시 패퇴하던 일본군이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포로들을 학살하라는 명령이 내릴지도 모른다는 가정하에 작전을 벌였다. 이것이 카바나투안 포로 구출작전이다.

4. 일본의 반응

일본 위키의 변명

일본에서는 '일본군은 하루 10㎞나 20㎞를 걷는 건 당연하기 때문에 고작 몇십㎞ 걷게 한 걸로 죽을 줄을 몰랐다, 때문에 잔혹행위를 한다는 자각이 없었다, 이게 다 맥아더 탓이다' 라는 반응이다.
특히 바란가에서 산페드로에 이르는 53㎞ 구간은 트럭을 동원해서 포로를 수송했으며 산페드로에서 카파스까지 48㎞ 구간은 철도로 이동했으니 실질적인 행군은 42㎞에 불과하다는 입장이다. 물론 200대의 트럭으로 76,000명의 포로를 운반했다는 건 별로 중요한 일은 아닌 듯하다.  또 철도 구간에서는 열차칸 한 량에 100명 이상을 통조림처럼 창문, 환기구, 화장실 등 기본적인 위생시설도 없는 곳에 밀어넣었다는 것도 별로 중요한 건 아닌 듯하다. 참고로 필리핀은 적도에서 얼마 안 떨어진 열대기후이다. 숨 쉴 틈도 없이 빡빡하게 사람들을 밀어넣었으니 희생자가 많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오히려 포로들을 걷게 했으면 희생자는 더 적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될 정도.

더군다나 죽은 사람 대부분은 말라리아가 원인이 되어 사망한 것이지 특별히 학대 행위가 원인은 아니라고 변명하고 있으며 그나마 마지못해 인정하는 학대 행위도 대부분 츠지 마사노부 참모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고 있다. 정작 전범 재판에서조차 츠지 마사노부의 지시는 이행된 사례가 거의 드물어 그가 학살에 적극 가담, 기여한 건 아니라고 결론내렸는데도 말이다.

마찬가지로 일본 타츠노코 프로 에서 제작한 애니멘터리 결단(1971) 에서는 2300명이 희생되기는 했지만 7만명이 그대로 방치되어 전멸 하는 것 보다는 그나마 나은 결정 이라고 하는 일본군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는 식으로 평가 하였다. 88km를 걸어야 했다는 점은 나오지만 포로를 학살, 학대 살해 했다는 서술은 전혀 없다.
애니멘터리 결단 11화 바탄 코레히도르 공략 19분 부터

 

5. 기타

존 웨인이 주연한 영화 "바탄으로의 귀환" 에서 이 사건이 묘사된다. 영화는 전반적으로 엄친아 미군과  동맹자 필리핀 민중들이 천하의 개쌍놈에 찌질이[4] 일본군을 물리친다는 수준의 영화이지만 죽음의 행진은 나름 잘 묘사한 편. 영화 앞부분과 뒷부분에 포로 수용소 해방 장면에서 출연하는 엑스트라들은 실제 죽음의 행진의 생존자들이다.[5] 극중에서 학살 현장에서 구조된 필리핀군 장교가 바로 안소니 퀸(...)

바탄의 천사들이라는 이름으로 이 행진에 참가한[6] 미국 간호원들의 이야기도 있다. 전시에도 이들을 구하자는 선전 방송이 미국에서 있었고 이 중 몇 명은 탈출해서 레지스탕스에 가담했다. 이들을 다룬 수잔 서랜든 주연의 TV 영화가 있었고 한국에서도 방영되었다. 다만 쓸데없는 노출과 실제는 없었던 강간 장면이라든가 바탄 전투를 겪은 여자들이 너무 깨끗하다는 평을 들었다(...)

유유백서에서 "죽기 위해 행진하는 사람들을 본 적 있냐" 는 말이 나오는데 이걸 말하는 건지는 불명.

 

6. 그 밖의 죽음의 행진


 

6.1.1. 국민방위군 사건

대한민국의 수치스러운 사건. 보도연맹 학살사건과 더불어 한국전쟁의 최대의 병크 중 하나이자 대형참사. 적군도 아니고, 조국인 대한민국의 부정부패와 인명경시로 인해 100여일 사이에 전투에 참가는 커녕 총도 못 만져본 장병 수 만명이 행군 중 굶어죽고 얼어죽고 맞아죽어 목숨을 잃고 전체의 80%가량이 폐인이 되다시피한 엄청난 사건이다. 이 사건에 대해선 역사학자 중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을 가장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유영익 교수조차 "9만명가량의 군인이 동사ㆍ아사ㆍ병사한 천인공노할 사건"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승만은 외교에는 귀신, 내치에는 병신, 인사에는 등신'이라는 표현을 더 설득력있어보이게 하는 데에 일조했다(관련자가 그 유명한 신성모..)위키피디아 관련기사

 

6.2. 북한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개전된 이후 인민군은 개성, 서울 등지에서 교황청 특사인 벨 주교, 미 육군 제24사단장 딘 육군소장,[7] 베아트리체, 베르나도테를 비롯한 가톨릭 교회 수녀들, 개신교 선교사, 미국 고문단을 비롯하여 상당수의 서양인들을 포로로 확보했는데 이들을 개성에 모았다가 평안북도 지역의 포로 수용소로 이동시켰다. 그런데 상당수의 포로들이 80을 눈앞에 두거나 80을 넘은 고령이라 몸을 제대로 가누기도 어려웠는데도 불구하고 이들에게 어떠한 탈 것을 제공하지 않았으며 먹을 것, 마실 것도 잘 주지 않은 채 엄동설한에서 행군을 강행시켜 상당수의 포로들이 동사 혹은 아사하거나 인민군들에게 살해되었다.

딘 장군의 경우, 종전 후 포로 교환으로 석방될 때까지 몇 차례 대남 선전용 삐라에 등장하기도 했는데, 양복을 입고 쌀밥에 반찬들이 놓인 밥상을 받고 있는 모습을 연출해 포로가 되면 후하게 대우해줄 거라는 환상을 심어 주려 했다. 물론, 형편없는 대우로 인해 수십㎏이나 살이 빠져 비쩍 마른 장군의 모습을 본 UN군들은 아무도 안속았다(...).

6.3. 베트남

(1차 베트남 전쟁 또는 인도차이나 전쟁이라고도 불리는)베트남 독립 전쟁, 특히 디엔 비엔 푸 전투 당시 베트민군도 외인부대원 등 프랑스군 포로를 상대로 장거리 행진을 시켰다. 먹을 거라곤 하루에 미숫가루나 생쌀 한 줌이나 주었을 정도였고, 베트남인들에게 식민지 프랑스인 및 용병인 외인부대에 대한 증오로 가혹하게 대하면서 1만여 명이 넘는 포로 가운데 3천 명 정도만 살아남았다. 예외적으로, 독일 국적의 외인부대원 중 동독으로 귀국할 의사를 피력한 포로에 한해 동맹국과의 우호 강화 차원에서 조기 석방 및 귀국시켜줬다.

웃기게도 프랑스는 내외 선전을 위하여 베트남 포로들을 일단 배불리 먹여서인지 몸매는 그다지 마르지 않은 이들과 이 행진으로 뼈만 남은 채로 마른 프랑스군 및 외인부대 포로들이 극과 극으로 포로교환이 되는 일이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프랑스가 베트남인에게 잘 대한 건 절대 아니다.단두대 항목에도 나오듯이 실제로는 베트남 저항인사를 고문 및 단두대로 참수하던 프랑스가 선전 홍보에 지나지 않았다.

참고로 이는 이후 남베트남이 멸망한 다음 벌어진, 피살자만 8~10만 명에 달하는 대규모 보복을 예고한 것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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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직접적으로 지휘관의 명령으로 처형된 인원이 수가 적었던 건 사실이지만 폭행과 가혹행위는 매우 흔했고 일본 지휘관들은 이를 방관하거나 오히려 조장하기도 했다.
  • [2] 애초에 포로의 수조차 판단하지 못했고 식량과 식수 조달에 관해 아무런 운송 계획도 없기 때문에 이런 비극이 벌어졌으니 이에 대한 책임은 사령관에 있는 게 당연하다. 이러고도 전범 재판에서는 포로들은 공정히 대우받았다고 진술했으니 할 말 없다.
  • [3] 직접적인 학대 행위를 지시한 것은 확인되지 않았으나 부하들의 학대 행위를 못 본 척 방치했다는 점은 명백히 인정받았다. 원래대로라면 교수형에 처해졌겠지만 총살형은 어느정도 봐준거다.
  • [4] 상당히 후덕하고 네이티브 수준의 영어를 구사하는 홈마 중장이 비리비리 마른 히틀러 체형에 알아듣기 어려운 억양의 영어로 찌질거린다. 그나마 필리핀 패망 때까지 존 웨인에게 발린다.
  • [5] 일부 엑스트라들이 손발이 없는 장애인으로 나오는데 실제 그때 장애를 입은 사람들.
  • [6] 정확하게 이 사람들은 완주하지 않고 중간에 차량을 이용했다. 완주했으면 전멸 크리.
  • [7] 이 사람은 대전 전투 패배 이후 패주하다가 포로가 되었다.

* 출처: 엔하위키미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