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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예 반란> 내트 터너(Nat Turner)의 반란

Bawoo 2015. 3. 19. 23:03

 Nat Tur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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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트 터너(Nat Turner/Nathaniel Turner, 1800년 10월 2일 ~ 1831년 11월 11일)는 미국흑인 노예이다. 1831년 8월 21일버지니아 주 사우스햄턴에서 백인 지주 새뮤얼 터너의 억압에 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 사람이다. 2월 11일 반란 중에 그가 보여준 백인에 대한 조직적인 살인 방식은 여전히 논쟁의 대상이다.그는 많은 백인을 닥치는 대로 살해했고, 또한 그가 반란을 일으킨날, 무려 50명의 백인의 시체가 길거리에 있었다. 그가 태어났을 때는 이 없었으며, 노예 주인이 지어준 냇(Nat)이라는 이름으로만 알려졌다. 터너(Turner)라는 성은 그의 소유주였던 새뮤얼 터너(Samuel Turner)의 성이다. 그가 주도한 반란은 불과 이틀 만에 진압되었으며, 몇 달 동안 숨어다녔던 냇 터너는 10월 30일에 체포되어 11월 5일사형 선고를 받고 11월 11일교수형에 처해졌다.

 

생애

냇은 평생 버지니아 사우스햄턴 카운티에서 생활했지만 그곳은 압도적으로 흑인 인구가 백인에 비해 많은 지역이었다.[1] 반란 후 그 특징을 다음과 같이 썼다.

키는 5피트 6내지 8인치(168-173cm), 체중은 68 ~ 72kg 정도에 안색이 약간 밝지만 혼혈이 아니다. 넓은 어깨에, 크고 넓적한 코, 커다란 눈, 넓고 평평한 발, 약간 안짱다리에 활기차고, 활동적으로 걷는다. 머리 위의 모발은 매우 가늘고, 입술 위와 턱 끝을 제외하고 수염은 없고 한쪽 관자 놀이와 목 뒤에 흉터가 있다. 오른손의 뼈의 손목 근처에 구타로 생긴 큰 마디가 있다.[2]

냇은 젊은 시절에 읽고, 쓰기를 배워서 똑똑했다.[3] 성장하면서 신앙심이 두텁워 단식과 기도를 자주 하거나 성서를 읽고 있는 모습이 목격되었다. 냇은 종종 환상을 봤는데, 그는 이것을 신의 전언이라고 해석했다. 이 환상은 이후 냇의 인생에 큰 영향을 주었다. 예를 들면 냇이 21세 때 주인이 있는 곳에서 뛰쳐나왔지만 그런 환상을 본후에 1개월 만에 돌아왔다. 냇은 종종 침례파의 예배를 했으며, 동료 노예에도 설교를 했기 때문에 동료들에게서는 ‘예언자’로 불렸다.

 

주석

  1. 이동 Drewry, William Sydney (1900년). 《The Southampton Insurrection》. Washington, D. C.: The Neale Company. p108쪽. 
  2. 이동 Description of Turner included in $500 reward notice in the Washington National Intelligencer on September 24, 1831, quoted in Aptheker, American Negro Slave Revolts, p. 294.
  3. 이동 Aptheker (1993), p295.<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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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노예 지도자.

미국 역사상 유일하게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친 노예 반란(1931. 8)을 이끈 흑인 노예이다. 남부의 백인 사회 전체를 공포로 몰아넣은 그의 활동은 노예의 교육과 이동 및 집회를 금지하는 억압적인 법률을 제정하는 새로운 물결을 일으켰다. 또한 터너의 반란은 폐지론에 반대하는 노예제 지지론자들의 입장을 더욱 강경하게 만들었는데, 이러한 분위기는 남북전쟁(1861~65)이 일어날 때까지 남부에 지속되었다. 터너는 버지니아의 오지에 있는 작지만 번창하는 농장에서 태어날 때부터 농장 주인의 재산이 되었다. 아프리카 태생인 그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노예제에 대한 강한 증오심을 심어주었다. 터너는 주인 아들에게 글 읽는 법을 배웠고, 집중적인 종교교육을 열심히 받아들였다. 1820년대초에 그는 가난한 이웃 농장에 팔려갔다. 그후 10년 동안 그의 종교적 열정은 거의 광신에 가까워졌고, 하느님이 그의 종족을 굴레에서 해방하라고 명령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인근에 사는 많은 노예들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으며 흑인 노예들은 그를 '예언자'라고 불렀다.

1831년 그는 또다시 조지프 트래비스라는 기능공에게 팔려갔다. 그직후 일식이 일어났으며 터너는 그것을 공격 시간이 가까웠다는 신호로 믿게 되었다. 군청소재지인 예루살렘을 공격해 무기창고를 점령하고 많은 신병을 모은 뒤, 동쪽으로 48㎞쯤 떨어진 디즈멀 습지대로 들어가 추격대를 따돌리는 것이 그의 계획이었다. 그해 8월 21일 밤 터너는 그가 신뢰하는 7명의 노예와 함께 백인들을 완전 몰살하는 작전에 착수했다. 그는 잠자고 있는 주인 트래비스와 그의 가족을 죽이고 예루살렘을 향해 피비린내 나는 행진을 시작했다.

 

2일 낮과 밤 동안 60명의 백인이 무자비하게 살해되었다. 터너의 반란은 추종자들의 훈련 부족과 그의 대의명분에 동참한 흑인 노예가 75명뿐이라는 약점이 있었으며 처음부터 성공할 가능성이 희박했다. 백인들이 터너에 맞서 무기를 들었으며 3,000명이나 되는 주 민병대가 도착해 반란군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가했다. 군청소재지를 불과 몇㎞ 앞두고 반란군은 뿔뿔이 흩어져 죽거나 사로잡혔고, 그후에도 흥분상태가 계속되어 죄없는 노예들이 수없이 학살당했다. 터너는 추적자들을 피해 6주 동안 도망다녔지만, 마침내 잡혀 재판을 받고 교수형을 당했다.

 

터너의 반란은 노예들이 자신의 운명에 만족하고 있거나 비굴한 노예근성에 젖어 있기 때문에 무장봉기를 일으킬 수 없다는 남부 백인들의 신화를 깨뜨렸다. 사우샘프턴 군의 흑인들은 '냇의 싸움' 또는 '냇의 전쟁'을 연도를 세는 기준으로 삼았다. 오랫동안 사우샘프턴 군 전역의 흑인 교회에서는 예루살렘이라는 이름이 성서의 지명을 가리킬 뿐만 아니라, 반란노예가 죽음을 당한 곳을 암시하기도 했다. 터너는 윌리엄 스타이어런의 소설 〈냇 터너의 고백 The Confessions of Nat Turner〉(1967)으로 널리 알려졌다. <브리태니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