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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그리는 만화가 이두호

Bawoo 2015. 4. 18. 12:41

 

왕후장상 얘기 재미없다
‘바지저고리’는 나의 운명

 

이두호씨는 한국만화계의 선생님으로 불린다. 역사만화라는 큰 숲을 일궜다. 그의 뒤로 ?임꺽정? 포스터가 보인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6·25 포성이 멎은 직후였다. 경북 고령군 시골마을에서 대도시 대구로 전학 온 초등 2학년생이 있었다. 등교 첫날 아이는 바지저고리 차림이었다. 친구들이 놀렸다. “촌놈이다!” 꼬마는 기가 꺾이지 않았다. 돌아가며 시비를 걸었고, 싸움을 벌였다. “천방지축 고집불통이었다”고 기억했다.

 60여 년 전 만화가 이두호(72)씨의 모습이다. 그때의 ‘바지저고리’가 자신의 등록상표가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조선을 그리는 작가’ ‘한국 역사만화의 대부’로 불리는 그다. 이 땅에 살다간 째마리(못난 사람이나 물건)의 숨과 땀에 혼을 불어넣어 왔다. 까목이·허풍대·장독대·머털도사 등 그가 빚은 캐릭터는 우리 아버지·어머니의 얼굴이었다.

 이씨의 대표작 중 하나인 『객주』(전 10권)가 13년 만에 복간됐다. 조선 후기 보부상 천봉삼을 중심으로 민초(民草)의 사랑과 배신, 신뢰와 탐욕 등을 되살렸다. 소설가 김주영의 원작을 마치 손에 잡힐 듯이 옮겨놓았다. 1988년부터 5년간 만화주간지에 연재됐던 것으로, 이번에 단행본으로만 세 번째 묶여졌다. 생명력이 질기다.

 - 30년 가까이 됐는데도 낡아 보이지 않는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건 똑같지 않을까. 이익을 위해서라면 서로 싸우고 죽이고…. 약육강식의 세상, 요즘에는 TV를 틀기가 싫을 정도다. 인권문제는 비교할 수 없이 좋아졌지만 말이다. 옛날 권력자는 사람 한둘 죽이는 게 일도 아니었다. 지금이라면 난리가 날 것이다.”

 - 세 번째 복간은 흔하지 않은데.

 “원작 덕분이다. 독자의 마음에 깊게 남아 있다. 『객주』는 제게 참고서, 이정표 같은 작품이다. 그전에 몰랐던 우리 말과 글의 매력을 느끼게 됐다. 처음에는 외계어처럼 들렸다. 그때 얻은 지식을 100% 활용할 수 없겠지만 『임꺽정』 등 이후 작품에 큰 영향을 주었다. 분수령 비슷하다. 부록으로 『객주우리말사전』도 이번에 새로 만들었다.”

 - 그럼에도 부끄러움이 앞선다고 했다.

 “연재 초기에는 좋은 작품을 만들자고 작심한다. 한데 횟수가 쌓일수록 초심을 잃는다. 한창 때는 보통 작품 5~6개를 동시에 연재했다. 시간이 모자랐다. 한 달이 35일이었으면 했다. 정성을 다할 수 없었다. 책으로 묶인 걸 보면 미흡한 대목이 있다.”

 - 『객주』의 예를 들자면.

 “김주영 선생이 ‘(만화가)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등장인물 중 월이를 매월이와 구분하기 위해 잔금이로 바꾸고 못된 짓만 하는 길소개를 죽이는 등 일부 설정을 변경했다. 이야기를 좀 더 일관성 있게 몰고 갔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결말에 좀 더 짙은 여운을 남길 수 있을 것 같고….”

 - 소설을 통째로 외웠다는 말이 있다.

 “아니,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나. 와전이다. 작품 전체를 녹음해 짬 날 때마다 들었다. 만화는 소설과 다르다. 소설의 ‘바지저고리를 입고 나갔다’라는 구절을 그림으로 풀어야 한다. 따로 공부해야 한다. 복식·음식·속담·건축사전 등을 부지런히 뒤졌다. 민속촌·사찰·고궁 등 현장답사도 자주 다녔다.”

 지난 13일 이씨를 만난 곳은 그의 자택인 서울 오륜동 올림픽선수촌아파트. 그는 지난해 10월 서울 광장동 작업실을 정리하고 집으로 들어왔다. 지난 50여 년 그의 자취가 한눈에 들어온다. 낡은 원고더미와 손때 묻은 펜촉, 각종 사전류와 그가 찍은 자료사진 등이 들어차 있다. “손님 오신다고 부랴부랴 치웠는데 아직도 어수선하다”며 겸연쩍어했다.

 - 중3 때 첫 만화 ‘피리를 불어라’를 냈다.

 “그걸 어떻게 작품이라 할 수 있겠나. 덕분에 난생처음 원고료를 받았다. 1년치 등록금 정도였다. 가난한 살림에 보탬이 됐다. 원래 꿈은 만화가가 아니었다. 화가가 되고 싶었다. 그림 재주가 있어 사생대회에서 시계·밥그릇 같은 상품을 탔다.”

 - 1969년 소년중앙으로 데뷔했는데.

 “소년중앙은 고향 같은 곳이다. 69년 창간과 함께 일을 맡으면서 배고픔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됐다. 홍익대 서양화과를 다니다 군대에 간 것도, 제대 후 만화를 하게 된 것도 오직 호구지책에서였다. 데뷔작은 SF물 ‘투명인간’이다. 당시 회사 다니는 친구 월급보다 서너 배가량 번 것 같다.”

 - 기자도 어린 시절 소년중앙 팬이었다.

 “야구·축구만화 등을 10년쯤 그렸다. 순수회화에 대한 미련이 되살아났다. 동료 한희작씨에게 내 만화를 대신 맡아 달라고 부탁했다. 스토리는 내가 쓰고 한씨가 그림을 그리며 수입을 반씩 나눴다. 2년 정도 남는 시간에 그동안 못했던 회화에 매달렸다.”

 - 역사만화를 다시 잡은 계기라면.

 “내가 고흐나 고갱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 실력을 확인했다. 일종의 한풀이였던 것 같다.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을 생각하다 우리 선조 이야기를 떠올렸다. 이후 ‘암행어사 허풍대’ ‘바람소리’ ‘초승달 나그네’ 등을 발표했다. ‘바람소리’에서 내 대표 캐릭터 중 하나인 장독대가 탄생했다. ‘바지저고리 이두호’의 새 출발이다.”

 - 웹툰 시대다. 서사만화는 흔하지 않다.

 “예전에도 그랬다. 100명 중 둘셋 정도 역사만화를 그렸다. ‘배가 불렀나 보다’라는 오해도 받았다. 1년 정도 지나니 아무도 간섭하지 않았다. 작가의 생명은 개성이다. 남들과 똑같은 그림을 그려서 뭐하나. 후배에게도 늘 강조하는 대목이다. 역사만화의 맥을 잇는, 나를 잡아먹는 후배가 나오길 고대한다.”

 - 보부상·화적·노비 등을 주로 그려왔다.

 “내가 왕후장상(王侯將相)으로 태어난 게 아니지 않은가. 핏줄의 문제다. 서민 이야기가 편하다. 궁궐 암투는 와 닿지 않는다. 워낙 가난하게 자랐다. 미대 다닐 때 서양화가 박서보(84) 선생님이 크로키 과제를 내준 적 있는데 그때 주로 그린 게 찌그러진 밥그릇, 휘어진 수저, 낡은 풍로였다. 창덕궁에 유화 실습을 갔을 때도 입장료가 없어 상상으로 그렸다.”

 - 우문이지만 다시 태어나도 만화를 택할까.

 “그렇다. 무엇보다 싫증이 나지 않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덩더꿍』에 애정이 간다. 세조 때 권력자 홍윤성을 모델로 했다. 그는 온갖 악행과 탐학을 일삼았는데도 천수를 누렸다. 당시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주려고 그를 처벌하는 장면을 집어넣었다. 가슴이 후련했다.”

 - 좋은 만화가의 조건이 있을까.

 “그림에 대한 소질은 물론 글을 쓸 줄 알아야 한다. 다양한 독서만 한 게 없다. 또 메모 습관을 키워야 한다. 24시간 만화만 생각하며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을 정도는 돼야 한다. 지금도 노트와 볼펜을 곁에 두고 잠자리에 든다. 꿈에서라도 아이디어나 대사가 생각나면 바로 몇 자 적어놓기 위해서다. 심심할 때면 국어·역사 사전도 들춰보고….”

 - 2008년 세종대 교수에서 퇴직했다.

 “정년 이후 매달려온 『이두호의 머털이 한국사』가 이달 말께 10권으로 완간된다. 고대부터 현대까지 훑었다. 요즘에는 소나무에 푹 빠져 있다. 동네 올림픽공원을 산책하며 소나무 스케치 200여 장을 그렸다. 위로, 아래로, 제 마음대로 가지를 뻗는 소나무에서 예술가의 지조와 자유를 배웠다. 정치의 요체도 백성을 자유롭게 해주는 데 있을 터다.”

 - 아직도 못 그린 게 있다면.

 “소나무를 닮은 만화에세이를 남기고 싶다. 구획된 칸과 정해진 대사에서 벗어난 작품이다. 우리의 어제와 오늘을 짚어보는 작업이 될 것이다. 『머털이 한국사』처럼 한국사 전반을 미리 공부했다면 『객주』와 『임꺽정』도 지금과 다른 모습이 됐을지 모른다.”

* 중앙일보:글=박정호 문화·스포츠·섹션 에디터  /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S BOX] “형님, 우리가 누구 때문에 있는 건데요”… 한 방 먹인 후배 셋

왼쪽부터 허영만, 김수정, 이현세.

삼인행 필유아사(三人行 必有我師). 먼 옛날 공자(孔子)의 말이다. 세 사람이 길을 가면 그 가운데 반드시 스승이 될 만한 사람이 있다는 뜻이다. 공자뿐이랴. 누구에게나 삶의 척도가 되는 사람이 있다.

이두호씨는 그의 만화 인생에 충격을 준 작가로 후배 셋을 꼽았다. 뜻밖이다. 하기야 공자는 이런 말도 남겼다. 후생가외(後生可畏). 두려워할 만한 후학을 가리킨다. 다음은 그들에 대한 이씨의 촌평이다.

 ①허영만(68)=1980년대 중반쯤이었다. ‘장타령’을 연재하던 잡지사에서 원고료를 깎아달라고 했다. 경영난이 이유였다. “안 됩니다”라고 한마디로 거절했다. 다음 날 허영만에게 연락이 왔다. “저는 깎아줬는데요. 몇 푼 때문에 자식 같은 작품을 죽일 수는 없잖아요.” 돈보다 작품이었다.

 ②김수정(65)=김수정의 히트작 ‘둘리’는 간단해 보여도 사실 시간이 많이 드는 캐릭터다. 김씨는 마지막 인쇄소에 넘기는 순간까지 그림을 매만진다. 철두철미하다. 나는 데생은 열심히 하지만 시간에 쫓기면 마무리를 대충 하곤 했는데…. 부끄러웠다. 진정한 프로의 자세를 보았다.

 ③이현세(59)=언젠가 이현세와 함께 있는데 검은 세단에서 누군가 내렸다. 그가 이현세에게 사인을 부탁했다. 이씨가 기꺼이 응했다. 나 자신은 만화 행사에서도 귀찮다는 이유로 독자 사인을 안 하던 때였다. “형님, 우리가 누구 때문에 있는 건데요.” 한 방 세게 맞은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