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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동양화와 서양화의 차이는 어떤 것일까요?

Bawoo 2013. 12. 4. 22:18

 

동양화와 서양화의 차이는 어떤 것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여러가지 대답이 있겠지만, 저는 동양화와 서양화의 차이의 핵심은  아마도 "빛"이 아닐까 합니다.

서양화의 역사는 처음 수 백년은 "구도(공간)"를, 다음 몇 백년간은 "빛(색채)"을 쫓아다닌 역사에 다름 아니지만. 동양화는 원래 처음부터 빛을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서양화는 빈 곳이 없고, 동양화는 반대로 비움이 많습니다.

(서양화에서 빛은 흰색이고 어두움은 검은색으로 채워지지만, 동양화에서는 빛과 어두움을 모두 여백으로 남깁니다.)

이렇게 동양화를 구성하는 제 1의 덕목인 "여백"에 대한 기본정서는, 태허(太虛) 즉 크게 비어있음은 " 없음"이 아니며, 無生의 공간이 아니라 오히려 기로 가득한 生의 공간이라는 동양적인 사고에서 출발합니다.

즉 동양화에서 비어있음은 無가 아닌 充이며, 死가 아닌 生인 것입니다. 또 동서양 회화의 두번째 차이로는 고졸미(高拙美)를 들 수 있습니다.

이것은 완전하지 않고 무엇인가 부족한 듯한 느낌, 즉 "인위"로 가득 채우지 않고 "무위"로 비운 듯한 느낌을 말하는 것 인데. 이것은 항상 무엇인가로 심지어 물감을 덧칠을 해가면서까지 공간을 가득 채워야만 하는 서양화와는 달리, 넘치면 모자람만 못하다는 동양미학의 핵심입니다,

마지막으로 동양화의 세번째 특징으로 사의(寫意)를 들 수 있습니다,

이것은 문자 그대로 "뜻을 베낀다", 즉 "뜻을 그려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림만으로 뜻을 표현하기란 쉬운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직업적 화가가 아닌 문인화에서는 작자가 시(詩)와 서(書)를 덧붙임으로서 뜻을 부(附)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럼으로서 이것은 동양화를 규정하는 양식의 하나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위에 첨부한 그림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를 한번 살펴봅니다,


사실 세한도는 절대 "잘 그려진" 그림이 아닙니다, 그저 평범한 한 서생의 수수한 그림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이 그림은 왜 그렇게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이 그림이 앞서 말한 세가지 조건을 절묘하게 충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림의 우측에 있는 글씨와, 잔잔하게 여백을 채워나간 글씨 자체의 향취, 그리고 움막과 소나무 위를 가득 채운 여백미, 그리고 소나무 그림에서 풍기는 고졸미가 "한 덩어리" 가 됨으로서 이 작품이 위대한 생명력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즉 우측의 글씨나, 좌측의 그림만을 따로 떼어놓고 바라보면 이것은 그저 평범한 범작에 지나지 않으나, 이들이 전체로 하나가 되는 순간에 바로 추사 최대의 걸작이 되는 것 입니다.

추사의 세한도는 제주에 유배된 추사가, 자연을 벗삼아 때를 기다리며 세월을 삭히는 심경을 표현한 그림입니다, 조정에는 간신배가 들끓고, 세상은 그를 알아주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를 잊지 않고 그를 믿어주는 주변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과 애끓는 정을 담아 그린 그림입니다.

 



추사는 이 그림에서 자신의 심경을 글로 표현하지 않습니다. 그림에 딸린 글씨는 자신을 찾아 준 사람에 대한 고마움을 담고 있을 뿐, 자신의 심경과 의지는 눈 내린 겨울, 외딴 민가 옆에 추운 겨울에 홀로 서 있는 고독한 소나무에 가만히 담아 냅니다

즉 추사는 이 그림에서 무엇인가를 억지로 말하기 위해, 글을 쓰거나 공간을 채우지 않았고, 오히려 넓은 여백에 한 그루 소나무로서, 추운 겨울의 삭풍과 그에 흔들리지 않는 강한 신념과 강기를 담아 내었던 것인데 , 이것이 이 그림의 사의(寫意)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저는 이런 추사의 세한도를 볼 때마다 가끔 김근태라는 한 사람의 정치인을 떠 올립니다.

청년시절부터 지금까지, 한번도 무엇이 되기 위해 억지로 여백을 채운 일이 없는 사람, 그러나 누군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것이 아무리 고통 스러운 일이라 하더라도 피하지 않았던 사람, 어슬픈 타협보다는 차라리 용서나 화해가 어울리는 사람....

그러나 정치인으로서는 항상 무엇인가가 부족한 사람. 이렇게 그를 규정하는 여러가지 특성들은 다분히 동양화적입니다,

그는 세상 사람들이 모두 캔버스에 달려들어 무엇인가를 열심히 그리고 채색을 하고, 그것도 모자라 덧칠까지 하는 시대에, 그는 그저 세한도에 소나무를 그리던 추사처럼 그렇게 여백많은 소나무를 그리는 사람입니다,

또 모두가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웃어 넘기는 부끄러운 이야기들도 그에게는 절절한 마음으로 고백해야 하는 양심의 문제가 되는 사람입니다.

때문에 그는 늘 부족합니다.

현실 정치인으로서는 연출 감각이 떨어지고, 화려한 수사학이나 연기가 부족한 사람입니다, 자랑은 고사하고 변명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데다, 말은 항상 너무 진지하고, 지나치게 무거운데다, 더우기 표정마져 억지 웃음을 지으려들면 오히려 울상이 되어 버리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그는 항상 무엇인가가 부족한 듯한 느낌을 줍니다,

여론조사에서도 무언가 부족하고, 심지어 유약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이렇게 2 % 부족한 느낌..
아쉽지만 그것이 지금의 그의 이미지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의 그런 부족한 모습에서 감춰진 고졸미를 읽습니다,

저는 캔버스를 가득 채우기 위해, 속을 감춘 미소와, 화려한 수사의 가면뒤로 숨어 버리는 번쩍이는 색채의 다른 정치인들에 식상합니다, 그리고 그의 어눌하고 진실한 모습에서 고졸미를 발견합니다, 텅 비어 있는 공간, 언제나 무엇이던 채울 수 있는 여지를 남긴 공간, 그러나 도통 채울 것 같지는 않은 공간..

저는 이렇게 그의 비어 있는 여백을 사랑합니다,

여백, 고졸미, 사의..

동양화를 읽는 이 세가지 미술용어가 김근태를 가장 잘 표현하는 키워드라면 제가 견강부회하는 것일까요?

김근태의 여백을 믿는 사람들, 그의 사의(寫意)를 읽을 줄 아는 사람들, 그리고 그의 고졸미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보금자리,, 그곳이 바로 이곳이 아닐런지요..?

출처 : 장계인의 그림 이야기
글쓴이 : 장계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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