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小說)]/- <소년 시절(完) >

<단편소설> 기억 너머 저편 - 소년시절

Bawoo 2015. 5. 11. 06:35

 

 

"기억 너머 저편"

* 들어가기

 

얼마 전 신문에 놀라운 기사가 났다.

"70이 다 된 할머니가 서울 시내 고궁 근처에서 노인 할아버지들을 대상으로 매춘을 하다가 잡혔다는." 

믿기지 않는 이야기였다. 나보다 네댓살이나 더 많은, 내일모레가 70인 노인이 매춘을 하고 있다니. 그 나이에도 성생활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주변 70이 넘은 선배들한테 듣기는 했지만 몸을 파는 것이 가능하다니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아왔기에 그 나이에 매춘을 하고 있을까도 궁금했다. 매춘 장소라는 종묘 거리를 한번 가보고 싶어질 정도였다. 

그림 공부를 하는 내 일상은 일주일에 한 번은 인사동 전시장을 순례하며 다른 작가들의 작품을 보러 다니면 많은 도움이 된다. 그런데도 쉽사리 움직여지지는 않는다. 한 번 가면 최소 반나절은 소비해야 돼서 시간과 체력이 많이 소모되어 공부하는데 가장 중요한 직접 그림 그리는 일에 많은 지장을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급적 삼가고 있는 서울 나들이를 겸사겸사 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오랜만에 전시회도 볼 겸 도대체 어떤 모습을 한 할머니들일까 모습이 궁금해서. 젊은 시절 아무리 빼어난 미인이었다고 해도 매정한 세월 탓에 이젠 외모에서 아름다움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늙고 볼품 없어진 얼굴, 언제 세상을 뜨게 될지 알 수 조차 없는 그런 나이인데도 드링크제 박스를 옆구리에 끼고 다니며 성매수를 할 할아버지들을 물색하고 다닌다는 할머니들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가 궁금해서였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림 전시회를 보러 다니느라  2주에 한 번 정도는 인사동엘 갔었다. 그때도 인사동 바로 근처에 있는 파고다 공원에 모이는 할아버지들을 대상으로 매춘을 하는 할머니들이 있다는 신문 기사를 본 적이 있었다. 그래도 별 관심이 없었는데 이번엔 달랐다. 할머니 매춘이라고 해도 나이가 아무리 많아봐야 60 전후 정도라고 생각을 했지 70이 다 된 노인이 있으리라곤 생각을 못 했기 때문이다. 언제 삶을 마감하게 될지 모르는 그 나이에 매춘을 하고 있는 것이라면 이게 과연 생계형일까 아니면 늙어서도 사그라들지 않는 성적인 욕구가 있는 때문일까도 궁금했다. 거의 생계형일 것으로 짐작은 되지만 성에 관한 한 알 수 없는 게 사람들 특히 여자들의 심리일 테니 말이다. 고대 로마제국에는 나라 최고의 신분인 왕비이면서도 매음굴에서 몸을 파는 짓을 한 여인이 있었다지 않는가.  물론 젊은 아내의 넘치는 성욕을 모르쇠로 일관한 늙은 황제의 책임이 전혀 없다고는 못 할 것이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왕비 본인이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이성과 도덕으로도 도저히 억제할 수 없는 끝없는 성욕. 경우는 조금 다르지만, 우리나라도 조선 시대에 어우동이란 여성이 있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단속을 한다고 사라질 일은 아닐 터. 하긴 생계형보다는 덜 절실한 일일테니 단속을 하면 슬그머니 사라졌다가, 뜸해지면 다시 나타날 것이 뻔한 일이겠지만 그런 것이 내 관심사는 아니었다.

기사를 보고 문득,  아직 사춘기도 아니었던 중학교 2학년 열댓 살 소년 시절에 몇 달간 한 집 옆방에 살았던 양색시 생활을 하던 누나가 생각나서였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70대 할머니의 매춘 기사를 보고 왜 그 누나가 생각이 난 것인지는. 50년도 더 전 일인데 말이다. 같이 산 기간도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불현듯 생각이 난 것이다. 워낙 특이한 경험을 한 탓이었을까? 아니면 바야흐로 이성에 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하는 사춘기가 시작되려고 해서였을까. 이 글을 쓰는 지금 생각해도 답은 알 수 없다. 난생 처음 본 유난히 아름다운 아가씨 모습이었던 때문 아닐까 어렴풋이 짐작이 되는 정도였다. 이리 아름다운 아가씨를 본 적은 그때까지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1.

국민학교 4학년이 끝나갈 무렵 우리 가족은 살고 있던 서울을 떠나 전방 지역인 파주로 이사했다.  내가 다니게 될 국민학교, 중학교가 있는 P리라고 불리는 그 지역의 면 소재지로 엄마, 나 그리고 3살 아래인 여동생 이렇게 셋이. 이사는 우리 세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지금은 이 세상에 안 계신 아버지의 뜻이었다. 서울 집을 담보로 빚을 내어 하던 장사가 잘 안 되어 집이 남에게 넘어가게 되어서였다. 원래 시골 출신인 나의 서울 생활 불과 2년만에 다시 시골 생활로 되돌아 간 것이다. 그러니 서울을 떠난다고 해서 특별히 서운한 마음은 없었다. 오히려 좋은 편이라고 해야 했다. 사람 북적이는 서울은 어린 시절인데도 마음에 안 들어서였다. 난 고향에 살 때가 더 좋았다. 구멍가게 하나 없는 깡촌이지만 집성촌인지라 이웃이 다 가깝고 먼 친척이었다. 낯선 사람은 눈 비비고 볼래야 볼 수 없었다. 어디를 가서 놀아도 거칠 것이 없었다. 그러나 서울살이는 달랐다. ====== 다른 게 있다면 서울 남쪽에 있던 내가 나고 8살까지 살았던 정든 내 고향이 아닌 북쪽 전방 낯선 지역이라는 점이었다. 낯선 모습은 또 있었다. 내 고향이나 서울에서는 눈 씻고 볼래도 볼 수 없던 미군들과 그들이 복무하고 있는 부대들이 마을 인근 거리, 산, 들판에서 아주 쉽게 눈에 뜨인 것이다.

 

미군이 우리나라에 많이 들어와 있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나 태어나던 해에 일어난 동족 간 전쟁, 말은 그렇지만 실제로는 국제전이었던 전쟁에서 내가 태어난 남쪽을 지원하기 위해 들어와 전쟁이 끝난 뒤에도 그냥 그대로 주둔해 있는 것이라는 것도. 그러나 미군 모습을 실제로 본 적은 이 지역으로 이사오기 전까지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이곳으로 이사와서야 매일같이 보게 된 것이다. 이 미군들 때문에 우리나라 많은 사람들이 그들과 연관된 일을 하면서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관련된 일을 할 수 있을까 막연한 기대를 하고 몰려도 들었다. 나고 자란 고향에서는 먹고사는 문제를 도저히 해결할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하게 태어난 사람들이 가족들을 데리고 아니면 혼자서.  이 중에는 한창 젊고 예쁘게 생긴 아가씨들도 있었다. 수를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많은 꽃다운 아가씨들이 자신의 몸을 밑천으로 삼아서 다른 나라 젊은이들인 미군을 상대로 몸을 팔아 돈을 벌기 위하여. 외국인에게 몸을 파는 여자들을 부르는 말인 양색시 또는 양공주라는, 심한 경우는 양갈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을 감수하며.  그리해서  힘들게 번 돈으로 가족들을 뒷바라지하기 위하여. 양식이 떨어지는 봄이 되면 보리고개라고 불리던 그 지긋지긋한 궁핍을 벗어나기 위하여. 공부는 잘하지만 집안에 돈이 없어 상급학교에 갈 수 없는 오빠, 동생들을 자기 몸 팔아 번 돈으로 뒷바라지하여 집안을 일으켜주기 바라는 마음으로. 어쩌면 한창 성욕이 한창 왕성한 나이 때인 것이 작용했을 수도 있겠다. 돈도 벌고 성욕도 자연스럽게 해소할 수 있는 한 방편으로. 어차피 가족들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라면 기왕이면 잘 사는 나라 젊은이들을 상대로 하는 것이 훨씬 실속이 있겠다는 생각으로.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것에 모두들 색안경을 끼고 보겠지만 그래도 덜 힘들게 더 많은 돈을 벌 수도 있고 성욕도 자연스레 해소할 수 있는 그런 일이라는 생각으로.

 

내 아버지도 이런 사람들 중의 한 명이었다. 집이 아주 턱없이 가난한 것은 아니었다. 보리고개를 겪을 정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게 다였다. 1년 뼈 빠지게 땅과 씨름을 해봤자 겨우 먹는 문제만 해결되는 정도밖에는 안 되었던 집. 그것은 앞날에 희망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땅은 그대로 있는데, 그래서 나오는 식량은 정해져 있는데, 식구들은 저절로 늘게 되어 있었다. 노동력이 필요해서든, 피임할 방법이 없어서든 자연스럽게. 먹는 입이 늘어남에 따라 먹을 양은 줄어들 수밖에 없었을테고, 이는 점차 가난의 길로 빠져들 수밖에 없는 것을 의미했다. 굳이 남의 땅을 부쳐먹고 사는 소작농이 아니더라도 그랬다. 워낙  쥐꼬리만한 소출이라 세금 명목으로 착취를 당하는 일이 없어도 도 그랬다.

 

아버지는 그래서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와 같은 팔자를 타고 난 다른 모든 가난한 시골 출신들처럼. 살아갈 날이 산 날보다 훨씬 더 많았을 젊은 시절, 그 살아갈 날이 즐거움보다는 고통스러움이 더 많은 나날일 것이 눈앞에 빤히 보여도 어떻게든 살아낼 수밖에는 없는 삶. 살아갈 날이 아무리 고통스러워 보여도 스스로 목숨을 끊어낼 생각보다는, 비록 내 의지와 관계없이 태어난 목숨이지만 그 목숨 저절로 수명을 다하기 전까지는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며 살아내게 되어 있는 것이 우리네 인간들의 숙명이니까. 내 아버지는 이러한 삶을, 일제강점기에 태어나는 참 더럽게도 시운을 잘못 타고난 팔자를, 그래도 억세게 운이 좋아 일본 놈들에게 거의 강제로 끌려가다시피 했을 징용터에서도, 해방되자 몇 년 지나지 않아 일어난 동족 간 전쟁에 끌려가서도, 그저 살아남기 위해서 동족이지만 적인 상대방에게 총을 쏠 수밖에 없었을 그 더러운 전쟁터에서도 살아남으면서 이어갔다. 그리 힘들게 살아남아봤자 기다리고 있는 것은 다시 힘들게 하루하루를 살아내야 하는 삶뿐이 아무 것도 없었지만,  내 어릴 적 그즈음엔 아버지 당신 책임하에 먹여 살려야 할 처자식인 어머니, 나, 여동생 그리고 작은 집 식구들까지 있어 살아내야 하는 삶의 무게가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무겁게 양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그런 상황이었을 테지만.

 

아버지는  이곳에서 자그마한 과자공장을 하셨다. 나 고향에 살 때 다니셨던 미군부대는 나는 아직 어려서 모르고 있던 언제부터인가 그만 둔 뒤에,  그 미군부대 다닐 때에 번 돈으로 샀을 서울 우리가 살던 집을 담보로 빚을 얻은 돈으로 직원 몇 명을 두고서. 과자 공장은 잘 안 되었던 것 같다. 어디 납품할 곳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단지 소매 형태로 조금씩 파는 식으로 운영을 하다보니 수지타산이 안 맞았었나보다. 우리 세 가족이 그곳으로 이사를 갔을 땐 이미 정리 단계였던 듯 했다.  공장이 뜻대로 잘 안되자 집은 자연스레 빚쟁이한테 넘어 간 것이고 그러다보니 서울 집을 정리할 수밖에 없게 되어 별 수없이 당신이 사업을 하던 곳으로 우리 세가족을 불러 들인 것이고. 

 

 과자공장에 딸려 있는 방에서 우리 세식구가 산 기간은 1년 정도였다. 남의 손으로 넘어간 공장에 딸린 방에서였는데  아마 공장 양도 조건이 그랬던 모양이다. 여기에 사는 동안은 양색시라고 불리우는  아가씨들을 볼 기회는 없었다. 미군들도 마찬가지였다. 길거리에서는 볼 기회가 없었고 오가는 차에 타고 있는 모습을 보는 정도였다. 아마 마을이 미군들이 들어오기 오래 전부터 형성되어 있는 곳이라  부대가 들어앉을 만한 마땅한 땅이 없어서인 것 같았다. 부대들은 이 마을을 벗어난 지역에 있었다. 마을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는  않은 곳인 사거리 지역부터.  사거리는 내가 살던 곳에서 신작로를 따라 서쪽으로 좀  떨어진,  동서남북으로 길이 뚫려 있어 내가 그 지역에 사는 동안 움직였던 반경내에서는 제일 번화한 곳이었다. 아마도 미군들 덕분에  번성하게 된 곳일. 학교에서 단체로 영화를 보러 갔던 극장도 하나 있고  하교길에 단골로 들르던 만화방도 있고 커다란 굴뚝에서 하얀 연기를 뿜어내던 목욕탕도 하나 있는 곳. 양색시들은  이 사거리에 있는  시장 안쪽에 모여들 산다고는 들었지만 이는 중학생이 된 뒤에야 알게 된 일이다. 2년 쯤 뒤. 가 본 적은 한번도 없고.

 

이후 읍에서 조금 떨어진 마을로 이사를 했다. 사거리를 지나 서쪽으로 더 내려가야 있는 마을로. 국민학교 6학년 때였는데 남의 집 방 한칸을 빌려서였다. 서울 살 때도 역시 방 한칸에 세식구가 살았지만 그래도 우리집이어서 다른 방은 남들에게 세도 주는 집주인이었는데 반해 이제는 남의 집 방한칸을 빌려 사는 셋방살이 신세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나 그리고 어머니, 여동생을 부양하는 아버지의 사업 실패 탓에. 이후 내 스스로 내 집을 마련하게 되는 사회생활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30초반까지  기나긴 남의 집 셋방살이가 시작되었다. 끼니를 굶지는 않고 살았으나 마음 편하게 지낼 내 집은 없어 시도 때도 없이 이사를 다녀야만 했던 참 서러웠던 시절이었다.

 

우리 가족이 새로 이사 간 곳은 K리라고 불리우는 특정 성씨가 대대로 모여 사는 집성촌이었다. 처음 살던 P리에서 서쪽 멀리 기차 종점이 있는 M읍 쪽으로 차들이 다니는 커다란 길을 따라 30여분은 족히 걸어야 되는, 내가 다니던 국민학교, 중학교를 오가려면 사거리를 반드시 거쳐가야  되는 곳.  가구수는 어림잡아 30여호 정도였다. 대대로 농사를 짓고 사는 토박이들만 살던 마을이 미군들 때문에 들어와 사는 외지인들로 인해 마을 규모가 커진 것일 그런 마을.   마을에는 미군부대가 둘씩이나  주둔해 있었다. 마을 뒷산에 하나, 마을 앞  논들이 넓다랗게 펼쳐져 있는 들판에  개울을 끼고 하나. 뒷산은 높이가 50여미터도 채 안 될 나지막한 야산이었지만 옆으로는 제법 넓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서 내가 살게 된 마을 외에 마을 두 곳을 더 품고 있었다.  다 같은 K리로 불리웠고 따로 부르는 이름도 있긴 했던. 

 

마을 사이로는 신작로가 나 있었다. 동과 서를 이어주는 길. 동쪽으로는, 가까이는 가장 번화한 곳인 사거리와 바로 전까지 살았던 내가 다니는 국,중학교가 있는 P리, 멀리는 6.25전쟁때 서울 진입을 앞 둔 북한군이 머물었다는 W읍까지. 서쪽으로는 일제시대 북으로까지  이어지던 기차길의 남쪽 종점이 있는 M읍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아마도 일제 시대에 일본놈들이 내륙에서 나는 우리 산물을 기차역으로 실어나르기 위해 만들었을 길. 내 어리던  그 시절엔 주로 미군의 군사용 도로로 쓰이고 있는 길. 우리나라 차라곤 대중교통인 버스만 이따금식 볼 수 있었던 길. 지금은 집집마다 한 대씩은 다 있는 자자용은 눈 씻고 볼래야 볼 수 없었던 길.

길은 비포장이었다. 당연히 차들이 지나가면 먼지가 뽀얗게 일었다. 이 길을 통해서 학교를 다녀야 했던 나에게는 큰 고역을 안겨 준. 먼지를 피할 방법은 없었다. 기껏해야 차가 지나간 반대 쪽으로 피하는게 전부였는데 이 방법으로는 먼지를 다 피할 수는 없었다. '이러다가 재수없게 폐병이라도 걸리는 거 아냐' 걱정하면서 - 결국 고등학교 졸업할 무렵 이 병에 걸리게 되는 한 원인이 되었을 수 있는 그 먼지- 차들이 지나갈 때마다 속으로 쌍욕을 해대며 곱지 않은 눈으로 쳐다봤지만 무슨 효과를 바라고 한 일은 아니었다. 그저 먼지를 먹을 수밖에 없는 게  속이 상해서 이런 나의 마음은 아랑곳도 하지 않고 무심하게 자기들 목적지를 향해 달려가는 차들이 미워서였을 뿐이었다. 학교까지 먼지가 안 나는 곳으로 다닐 수 있는 동네에서 살면 되지 않느냐는 생각은 전혀 해보지 못했다. 당연히 어머니한테 그런 이야기를 해 볼 생각도 못해봤다. 비록 남의 집 단간방이지만 나와 여동생을 보살피는  어머니가 하는 일이니 다 옳은 일인 걸로 생각하고 아무 의문도 품지 않았다. 나 스스로 세상을 보기 시작하는 눈이 생긴, 세상에 대해 아직은 아는 것이 거의 없어 정확한 판단력이 결여된 그런 눈이기는 했으나 어쨌던 생겨나기 시작했던 사춘기 고등학교 3학년생이 되기 전까지는 아무런 불만도 품지 않고 그저 당연한 것이라고 받아들이기만 했다.  

단지,  "서울처럼 아스팔트가 깔려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만 했다. "그러면 먼지가 안 나 참 좋을텐데"라고. 나라가 가난하여 시골 지역 길까지 아스팔트를 깔기에는 어림도 없었을 시절,  "우리집이 가난하지 않고 부자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허황된 생각하고 똑 같은. 그로부터 십오륙년 뒤  나라 살림 점점  좋아지면서 이 길, 나 먼지 잔뜩 먹이던 길 아스팔트로 맵시있게 포장되어 먼지 하나 안 나는 길이 되고 나도 내 집이 생기고 그랬지만, 그 시절 내 나이 어린 소년기 시절에는 전혀 알 수 없었던  일이었다. 나라 살림살이나 훗날 내 책임 아래 꾸려나가야 했던 우리 집 형편이나. 그래도 나는 중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내 국민학교 동창 120여명 중에 2/3 이상이 못 간 중학교를, 그 중에 여자 아이들은 열댓명 정도나 다녔을까? 그러니 나는 부자인 것이었다.  자식들 중학교에 못 보내는 집들이 넘쳐나는 시절에 중학교를 다닐 수 있었던  가난한 부자.

 

                                                 *    *    *

 

마을 앞 평야지대 개울가에 자리잡고  있는 미군부대는 정문이 신작로 쪽으로 나 있었다.  개울을 부대 한 쪽 울타리로 삼아 주둔하고 있었기에 그런 것 같는데 부대 정문 바로 앞 신작로 건너 쪽은 다시 논들이 있는 벌판이었다. 이 벌판이 끝나는  신작로 양 쪽 중 서쪽에는 내가 사는 마을인 K리가 있는 것이고 사거리 쪽인 북쪽으로는 새로 생긴 마을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었다. 15여호 정도 되는 작은 마을. 마을은 기존 마을과 구분하여 신K리라고 불렸다. 행정상으로는 같은 K리였지만 사람들이 굳이 그리 구분하여 불렀다. 바로 미군들을 상대로 하여 몸을 파는 일을 하는 양색시들이 따로 모여 사는 곳.  기존 마을에 있기엔 뭔가 불편하고 눈치가 보여 자기들끼리 따로 모인 곳일.

나는 이 곳을  매일 두 차례씩 지나다녀야 했다. 일요일과 방학때는 빼고.  학교가 이곳을 지나가야만  되는 곳에 있기  때문이었는데 지날 때마다 늘 묘한 기분이었다. 그 기분을 딱히 뭐라고 표현할 방법은 없다. 막연한 호기심 정도(?).  사람들이 보통 살아가는 방식인 직장을 다니거나, 농사를 짓거나, 아니면  장사를 하거나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인  자기 몸을 팔아 돈을 벌고 그렇게 번 돈으로  살아가는 여인들이 살고 있는 곳.  그 여인들이  한창 아름다운 시절인 20대 초 중반 아가씨들인 것 때문에 그럴 것이었다. 코흘리개 시절은 지나 있었지만, 아직은 열서넛 나이 어린 소년이어서 여자를 알 나이는 아니었지만 태어날 때부터  본능적으로  갖게 되는 이성에 대한 자연스러운 호기심. 고향에서 학교를 처음 들어간,  내 어린 일곱살인  국민학교 1학년 때 처음 생겼던,  예쁜 아이를 보면 자연스럽게 생겨나던  호기심의 연장선상이었다. 나만큼 공부를 잘했던 큰댁 아저씨 딸인 정임이, 아버지가 국민학교 교감선생님이어서인지 공부를 썩 잘 했던 명임이. 그러면서 얼굴도 예뻤던 둘을  보면서 저절로 생겨나기 시작한 호기심. 둘 다 같은 성씨, 멀고 가까운 차이만 있을 뿐인 친척 아이들이었지만, 그래서 우리들이 설사 이성 교제를 할 나이가 되더라도 절대로 교제를 할 수는 없는 사이인데도 저절로 생겨난 호기심의 연장선상.

 

그 몸 파는 아가씨들은 나보다 적어도 대여섯 살은 많은  스물은 족히 됐거나 넘어 있어서  한참 누나뻘일텐데도  그랬다. 어떻게 생긴 모습일까, 얼마나 예쁜 얼굴들일까가 궁금했다. 그러나 볼 기회는 거의 없었다. 내가 등교를 하는 시간은 밤 늦게까지 미군들을 상대하는 일을 하는 그녀들에게는 너무 이른 시간이어서 그랬고, 하교를 하는 시간은 그녀들이 영업을 하기에는 또 이른 시간이어서 그랬다. 어쩌다가 호주머니에 푼돈이 생겨 사거리 단골 만화방에서  만화에 홀딱 빠져 시간가는 줄 모르고 있다가 집에 가는 시간이 늦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만화에 빠져 있어도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는 책가방을 들고 만화방을 나서는게 습관처럼 몸에 배어 있는 성격인 탓에 그녀들이 영업을 위해 거리에 나와 있는 시간과는 맞지를 않았다. 굳이 어머니가 이야기하지 않아도 알아서 집에 너무 늦게 들어가면 안되는 걸로 알았던 성격인 탓에.

그녀들이 영업을 위해 미군들이 지나다닐 길을 보며 집 앞에 놓여있는 기다란 의자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은 해가 서산 너머로 사라진, 그래서 어둠이 서서히 찾아오기 시작하는 시간이 되어서라야였다.   나는 볼래야 볼 기회가 안 되는 시간. 그 시간의 나는 아마도 그냥 멍하니 집에 있었을 것이었다. 테레비는 커녕 전기도 아직 안 들어오던 시절이었다. 공부를 파고 드는 공부철이 든 것도 아니었다. 집에 읽을 거리가 있는 여유있는, 어머니가 배운 분이라서 알아서 읽을 책을 정해 줄 정도도 못 되었다. 그럴 돈도 없을 집안 형편이었지만, 그 시절 대부분의 집들이 다 그럴 것이었지만. 라디오는 있어서 연속극을 들었나, 아마 그럴 것이었다. 아니면 한 동네에 사는 같은 반 대영이네 집에 가서 놀다가 잘 시간이 되어서야 집에 돌아왔던가.

 

그래도 어쩌다 한 두번 본 행운(?)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이 나긴 하는데 그때는 너무 당황스러워서 제대로 쳐다 볼 수도 없었다. 그녀들을  보고 싶은 마음을 갖고 늘 그 마을 앞을 지나다니기는 했지만 막상 보게되니 이에 대한 대비는 전혀 되어 있지 않은 것이었다.   만약 쳐다보았다간 무슨 쌍욕을 들을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아마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라고 혹 그러지 않았을까? 그녀들 눈에는 내가 아직 한창 어린 소년으로밖에 안 보였을테니까. 같은 반 또래  아이들보다 키가 작은, 반 아이들을 키 작은 순으로 매기는 번호가 5번을 넘어 본적이 없는, 작은 키여서 또래들보다  더 어려 보였을테니까.

 

몸을 파는 일을 하는 것이 설사 가족들을 위해 희생하는 한 방편으로 택한  일일지라도, 어느 정도는 본인의 성에 대한 욕구를 해소하기 위한 수단으로 택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가능하게 하는 행태를 보이는  불량스런 아이들을 기차통학하던 고등학생 시절에 꽤 봤다. 교복 치마가  무릎 위까지 올라가면 절대로 안 되었던 시절, 학교 교문이 보일 때면 접은 치마단을 무릎 밑까지 다시 내려오게 입을  망정 열차 안에서는 무릎 위까지 치마를 올려 입고 다니며 남자들의 눈길이 자기한테 머물 것을 상상하며 즐거움을 느꼈을, 턱 한 쪽에는 나는 불량소녀야라는 상징인 양 파스를 붙이고, 입으로는 껌을 질겅질겅 씹으며 열차 안 통로를 쓸데없이 오가던 불량여학생들. 그 아이들을 볼 때면 쟤들은 앞으로 어떤 방식의 삶을 살아낼 것인지 참 궁금했었다.  그런 여자애들이 얌전하게 한 가정의 아내, 엄마로 온전하게 살 것 같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었기에.  만약 이런 아이들 중 누가 양색시가 되어 있다면 그것은 가족을 돌보기 위한 것이 아닌 스스로 좋아서이거나 아니면 같이 어울려 다니던 불량스런 남자들의  꼬임에 빠져 그 길로 들어섰을 수도 있을 것이었다. 이런 아이들과 같은 방식의 삶을 산 아가씨들이라면 마음에 안드는 일을 겪으면 얼마던지 쌍욕을 해 댈수 있을 것이었다. 이는 물론, 내 중학생이던  그 시절에는 직접 겪어 본 일이 아니어서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일인데  지난 일을 추억하는 식으로 글을 쓰다보니 미래에 일어난 일을 과거 일에 대입해서 "그랬을 수도 있었겠구나"하는  생각을 내 마음대로 해보는 것이고.

 

그 날도 어김없이 하교를 해서 집에 가는 길이었다. 먼지를 흩날리며 달리는 차들에게 쌍욕을 해대며, 그 먼지를 피하기 위해 먼지가 없는  반대편으로 이리저리 오가며, 그래도 양색시 그녀들이 사는 동네에 가까워지면서는 먼지를 입으로 가릴 망정 미군부대가 있는 동네 맞은편 쪽 길로는 절대로 가지 않으면서. 오늘도  곁눈질로 그 동네를 흘끔흘끔 쳐다보며 가야겠구나 생각을 하며. 그런데  이런 나의 앞쪽에서 아가씨들 두 세명이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옆구리에 대야 같은 것을 끼고 있는 모습으로. 아마도 사거리에 있는 대중목욕탕을 가는 것 같았다. 읍에 유일하게 하나 있는 목욕탕.  나는 한번도 못 가본 목욕탕. 아마 내 또래 그 누구도 갈 생각도, 가보지도 못 했을 목욕탕. 어른들도 명절 같은 때나 겨우 한 두번 이용했을 목욕탕. 이 목욕탕을 몸을 파는 일을 하는 양색시들은  상품인 자기 몸을 깨끗하게 하기 위하여 자주 다녔을 것이었다.

직감적으로 양색시 그녀들인 줄 알았지만 막상 정면으로 부딛치게 되니 어떻게 처신을 해야될지 몰랐다. 못 보았을 땐 모습이 그리도 궁금했었는데. 어떻게 지나쳤는지 기억도 없다. 당연히 얼굴 모습은 보지도 못했다. 그저 당황스러워했고 아마 얼굴까지 빨개지지 않았을까? 그 양색시들은 이러는 나를 보며 속으로 "귀엽게 생긴 것" 그러며 지나갔을지도 모르고. 이후 양색시를 그리 가까이 본 적은 없다. 같은 집 옆 방에서 살게되는 그 양색시 누나를 보게 되는 중학교 2학년 무렵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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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이 작은 시골 동네에서 두번이나 이사를 했다. 내  국민학교 6학년부터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때까지 2년반 정도 되는 기간 동안. 이사를 다닌  이유는 정확히는 모른다. 남의 집 방 한칸을 얻어 사는 사람들이 다 그렇듯이 살기로 약정한 기간이 끝나서거나 집주인과 사이가 좋지않아서 일 가능성이 많지만 자세히는 모른다. 그런 것을 알기엔 아직은  어린 나이여서.  다만 1년 정도 산 이 동네 같은 성씨들의 종가집이 있는 샘말이라는데서는 종가집 작은 며느리와 싸운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은 든다. 대대로 뿌리를 내리고  살아온 성씨들의 제일 어른 격인 종가집의  작은 며느리와 어디서 굴러 들어온 지도 모르는 외지인인 어머니가 싸움을 한 것이니 그 곳에 계속 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싸움의  장소는 여자들이 늘 모이게 마련인 우물가였는데 이유는 아마도 종가집 작은며느리의 텃세와 질투심이 같이 작용한 것 아닐까 싶다. 텃세보다는 질투심이 더 크게 작용했을 듯 싶은.

 

종가집 작은 며느리는 내 어머니와 연치가 비슷했다. 나보다 국민학교 한 학년 선배인 영봉이란 이름의 아들이 제일 큰 아이였으니까. 영봉이 형은 중학교를 가지 못했다.  집안 형편 탓에 집에서 농사 일을 거들고 있었다.   영봉이 형하고 나하고는 죽이 잘 맞아 늘 같이 어울려 놀았다.  자치기를 하던 딱지치기를 하던 산이나 들로 쏘다니던 영봉이 형이 집안 농사일을 거들던 때가 아니면 늘 그랬다. 영봉이형  엄마는 이것도 싫었었나 보다. 자기 아들은 중학교를 못 보내서 가슴이 쓰려죽겠는데, 어디서 굴러 들어온 지도 모르는 외지인, 그것도 겨우  겨우 방 한칸을 얻어 사는 주제에, 아들을 중학교에 보내고 있는 것에 대한 시샘까지 작용하여 어머니에게 폭발시킨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게는 제법 추억이 많은 곳, 특히 아직은 사춘기도 안된 나이였지만 처음으로 이성을 좋아하는 마음이 생긴,  그렇지만 아직은 사랑하는 마음은 아닌 것인, 나보다 국민학교 몇 년 선배였던 경순이 누나를 본 것도 바로 그 곳이었는데.

종가집 할아버지  동생의 큰 딸이었던 이 누나, 아버지가 할아버지로부터 물려 받은 땅이 적은 탓에 상급학교인 중학교에 진학을 못하고 미용기술을 배워 동네 아줌마들에게 머리를 해주러 다녔다.  어머니도 단골이어서 머리를 해주러 온 것을 딱 한번 본 적이 있었던. 난 아직 구슬치기를 손에서  못 논 철부지면서도 이 누나가 집에 왔을 때 너무 좋아 구슬을 내놓고 자랑을 했던 지금 생각하면 참 낯이 뜨겁기 그지없는 추억이 있는. 

 

이후 다시 신작로변 마을로 이사를 했다. 집은 전에 살던 집이 아닌 다른 집으로. 이사와서야 알게 된 것이지만 집주인이 너댓살 되어 보이는 아이까지 있는 양색시 출신 여인인 집으로. 나이는 기껏해야 20중 후반 정도로밖에 안 보이는 빼어나게  아름다운 모습인.  나 태어나서 제일 처음 본 아름다운 모습의 성인 여인인, 그렇지만 마음에는 들지 않은, 예쁘게는 생겼지만 어딘지 모르게 쌀쌀하고 도도한 분위기가 나서 싫었던, 아마도 자기가  좋아 스스로 이 직업을 택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게하는 분위기가 나는 여인의 집으로.

 그 당시에는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던 나이가 아닌 때여서 전혀 그런 생각은 못했었고.

 

이 마을에 양색시가 있는 줄은 몰랐었다. 신작로변이고  미군부대가 둘씩이나 있기에 충분히 가능은 한 일이었지만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에.  그도 그럴 것이 이 마을은 원래 미군들이 들어오기 훨씬 이전부터 대대로 농사를 짓고 사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이었다.  미군들 때문에 외지인들이 덩달아 들어와 살게 되어 마을 규모가 커지기는 했지만 몸을 파는 일을 하는 아가씨들이 살기에는 분위기가 맞지를 않는 곳이었다.  30여호 남짓 되는 집은 다 정상적인 가정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토박이이건 외지인이건 정도의 차이는 조금씩 있겠지만, 다들 여유없는 가난한 살림살이였지만, 그래도 가정을 이루어 자식 낳고 키우며 사는 그런 집들이었다. 그러니 몸을 파는 일을 하는 양색시들이 자리잡고 지내기엔 불편할 수밖에 없었을 터였다.

집집마다에 누가 사는지는 대충 알고 있었다.  친구인 대영이와 중학교 한 학년 후배 둘 이렇게 넷이 죽이 맞아  동네가 비좁다고 휘젓고 다니며 구슬치기, 시계부랄 놀이를 하며 놀았기에.  다른 아이 몇몇은 자기가 어울리려고 하지 않아서이거나 엄마가 말려서 같이 못 놀았다. 내가 대영이를 만나러 가려면 마을 한 골목을 꼭 지나쳐야 했는데 이 곳에 외지인이 사는 두 집이 울타리를 맞대고 같이 있었다. 이 집들에는 나보다 두 학년 정도 늦은 두 아이가 있었는데 내가 골목을 지나가면서 부르면 어김없이 뛰어나와 같이 놀려고 했다. 그러나 이 시도는 번번히 실패했다. 이유는 그 아이들 엄마가 나가지 못하게 막아서였는데 그 막는 이유가 서로 달랐다.

 

한 아이의 엄마는 너는 저런 아이와 어울려 놀면 안된다는 듯한 느낌이었고 다른  아이 엄마는 너는 그런 아이와 놀면 안된다는 느낌이었다. 왜 그러는가 나중에 알고보니 한 아이는 아버지가 마을 뒤에 있는 미군부대를 다녔는데 미군들 허드렛일을 해주는 것이 아니라 통역관이라고 했다.  허드렛 일처럼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전문적인 영어실력이 있어야 가능한. 다시 말하면  아버지란 사람의  격이 시골에서 농사나 짓는 농사꾼이거나 같은 미군부대를 다녀도 허드렛 일을 해주고 거기서 나오는 수입으로 생활하는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것이었다. 뭐 실제로 그렇기도 한 것이지만 아무튼 이 아이, 잘 난 아버지를 둔 적에 우리들하고 놀 기회는 박탈을 당했다. 너는 이런 시골 동네에 사는 가난한 집안 아이들하고는 다르게 커야된다는 자기 엄마의 통제 탓에. 그 농사꾼 아들이나 미군부대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사람들의  아들들이 자기 아들보다 더 나은 삶을 살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절대 안 해 봤을. 그저 " 넌 그런 애들과 놀면 안 되는 잘 난 아버지를 둔 아이야"라는 생각만 했을 잘 난 엄마.

 

다른 한 아이는 이유가 정 반대였다. 자기 아들이 우리와 놀다가 혹 상처를 받지 않을까 해서였던 것 같았다.아이의 엄마는 미군과 살고 있었다. 아마 양색시 출신일. 그러나 정식으로 결혼해서 사는 것 같았던. 아이도 당연히 그 미군이 아버지일 것이고. 내가 그 집 앞을 지나며 아이 이름을 부르자 밖으로 뛰어 나오는  아이를 대문 밖으로 못나가게 잡는 모습을 얼핏 본 적이 있는데 내 어머니 또래로 보이는 30중반 쯤의 아주 빼어난  미모, 그러나 전성기는 지나 몸이 좀 불어있는 듯한 모습의 여인이었다. 하여튼 그때 아이를 못나가게 막는 모습에서는 아들이 상처받지 않게하려는 보호본능의 모습이 보였다. 질겁을 하며 아이 손을 잡고 못나가게 하는 모습에서 나 그리고 같이 노는 아이들한테서 혹 상처를 받게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보이는 모습. 나나 같이 놀던 아이들 모두 심성이 착해서 절대 그럴 리 없는데도 제 풀에 겁을 먹고 미리 막으려는.

 

국민학교 동창이면서 집안 형편 탓에 중학교에 바로 진학을 못해 중학교는 1년 후배가 된 영창이는 우리들과 어울려 놀지를 않았다. 그 이유는 지금도 수수께끼인데 농사를 짓는 집인 탓에 집 농사일을 거든 탓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아무튼 그랬다.  공부를 잘 하는 것도, 다른 특별난 재능이 있었던 것도  아닌 그저 평범한 아이였는데.  위로 형들이 있어 우리들과 놀지 않아도 충분했던 것인지.

그러고 보면 우리 놀이패 넷은 다 형제가 없었다. 누나나 누이는 있었으나 남자 형이나 동생은. 이게 서로를 필요로 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집에서는 같이 놀 사람이 없어서 일. 결과적으로  우리 넷은 서로가 필요한 존재였던 것이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철이 들면서 그런 놀이들이 시들해지고  집이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게되어 헤어지게 되면 그것으로 인연이 끝나버리기도 하는 사이. 때론 그때의 인연이 죽을 때까지 이어지기도 하는. 나는 이사가는 것으로 인연이 끝나버리고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서야 문득문득 그때 그 아이들  어떻게 지내왔을까가 궁금해지기도 한.

 

학교를 가기 위해 일요일을 빼놓고 매일 지나다녀야 되는  신작로가에 있는 집은 대충 열 서너채 정도였다. 논밭과 개울이 있는 쪽 길가에  댓 집, 미군부대가 있는 산 쪽으로 나머지 집들.  이중에 상점이 네 다섯곳 정도 되었고 나머지는 그냥 가정집이었다. 기와집은 한 채도 없었고 초가집도 없었다. 아마도 미군부대에서 나온 자재들이 대부분일 레이션 박스 상자나 루삥이라는 이름의 자재를 활용하여 지었을 그런 집들. 레이션 박스는 울타리를 만드는데 쓰였고 루삥이라는 자재는 지붕에 쓰였다. 새까만 색이고 불에 태우면 그리도 잘 타던 자재. 초가집은 대대로 농사를 짓고 사는 집들만이었다. 길가를 벗어난  마을 안  산이 있는 쪽에. 벼농사를 짓기 때문에 볏짚이 늘  있는 집들만.

가게들은 장사를 하는 곳이라 울타리가 없이 문이 늘 열려 있어 누가 살고 있는지 저절로  알게 마련이었다. 가정집인 나머지 집들도 늘 대문을 열어놓고 지내서 적어도 누가 살고 있는지 정도는 알 수 있었고. 그 중에는 내 또래인 춘자라는 촌스러운  이름의, 그렇지만 얼굴은 아주 예쁘게 생긴 여자아이도 있었다. 아버지가 무면허 돌팔이 의사고 엄마도 새엄마인 탓인지 중학교도 못가고 이복동생일 갓난 아이를 등에 업고 길가에 나와 서성이다가  어쩌다  나와 마주 칠때면 서로 빤히 바라만 보았던. 고등학교 1학년 때인 어느 날 학원을 가기 위해  탄 시내버스에서 차장일을 하고 있던 그 아이를 보고도, 나는 놀라고 당황스러워서  아는 체를 못했고, 그 아이는 아마도 버스 차장일을 하고 있는 자기의 지금 모습이 창피해서 차마 아는 체를 못 했을.  그 뒤로는 단 한번도 보지를 못 한. 얼굴이 예쁘장하게 생긴 탓에,  자기 관리를 잘 못했다면 그리 밝은 삶은 살지 못했을 가능성이 많은.

 

그런데 유독 한 집이 늘 대문이 닫혀  있어서 오갈 때마다 이 집엔 사람이 안 사나  궁금했었는데 바로 이 집으로  우리가 이사를 간 것이었다. 집은 평상시에는 비어 있었던 것이 맞았고 집 주인은 가끔씩만 드나들어 볼 기회가 없었던 것이었다. 주인 여자도 그 집에서 영업을 한 것은 아니었다. 신K리나 다른 어느 곳에서 영업을 하다가 자기를 마음에 들어하는  미군을 만나  결혼을 전제로 동거 생활을 하기 위해 이 집을 산 것이고 아이까지 난 것 같았다. 우리가 세를 들어간 그즈음에는 아이 아버지일 미군은 제대를 하여 자기 나라로 돌아갔고, 돌아가면서 " 초청장을 보낼테니 기다리라"는 말을 했을테고. 그 말을 믿고 기다리고 있었으나 초청장은 커녕 생활비조차  오지를 않고. 그래서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아 그 집에서 살 수가 없어 세를 놓으려고 했는데 여의치가 않던 중에 우리 식구가  세를 살게 된 것이었다. 주인여자는 아마도 틀림없이 다시 양색시 일을 할 수밖에 없었을, 아이가 달려있어 전보다 훨씬 나쁜 조건으로 그 일을 해야했을 가능성이 있는.

주인여자가 어떤 형태의 양색시일지는 그 당시는 생각을 못 해봤다. 가족을 뒷바라지하기 위한 생계형인지, 빼어나게 아름다운 외모를 타고 난 탓에   남자애들의 시선을 한 눈에 받고 자라다 보니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해 방종의 길로 들어선 것인지는. 그저 아름답게 생긴 모습, 어딘가 모르게  도도해 보이면서 아름다운  모습에 마냥 넋을 잃고  바라만 봤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도 후자일 가능성이 더 많은 것 같은.

 

집은 우리집이나 다름없었다. 주인여자는 어쩌다 한번 들르는 정도였다. 아마도 방세를 받으로 오는  것이었을. 그러니 내가 주인여자를 본 기억은 서너번 정도가 다이다.  그런데도 그녀를 본  인상은 아직도 강렬하게 남아있다. 아마도 세상에 태어나 처음 본 아름다운 여인이었던 탓에 그럴 것이었다. 부드러운 느낌보다는 뭔가 성격이 조금 날카로운 느낌은 났지만 그것이 이 여인의 아름다움을 까먹게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것이 더 매력으로 작용했을 수도 있는 참 묘한 아름다움(?), 뭐 그런 느낌이었다. 양색시 노릇을 하는 여자를 가까이서 본 것도 처음이고 20 중반 한창 아름다운 시기의 여자를 본 것도 처음이지만 이렇게까지 예쁘게 생긴 모습일 줄은 미처 몰랐다. 이 집으로 이사오기 전까지 살던 마을에서 본 경순이 누나도 이 정도로 예쁜 것 같지는 않았다.  경순이 누나는 아직  사춘기 소녀여서  여인이라고 부르기는 이른 감이 있기는 했지만. 사내의 몸을 안 여자와 아직 사내를 모르는 여자의 차이는 또 있는 것임을 세월이 지난 뒤에는 알게 되지만 그 때는 몰랐으니 경순이 누나가 어딘지 모르게 뒤쳐진다는 생각이 들게 한.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목욕하러 가던 양색시들은 더더구나 비교가 안 되었다. 앞에서 오는 그녀들을 너무도 당황스러워 자세히 보지도 못했지만  그래도 전체적인 분위기는 알 수 있었는데 절대 비교가 안되는 느낌이었다. 이리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으니 비록 몸을 파는 여인이지만  홀딱 빠져 결혼해서 같이 살자는 미군이 있었겠구나 싶었다. 그러면서고 이건 뭔가 좀 억울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토록 아름답게 생긴 여인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짝이 되어야 할 일이었다. 그런데 다른 나라 군인들을 상대로 몸을 팔고 아마도 버림을 받은 것이 틀림없을 그런 삶을 살고 있어야 하다니. 아마 그러한 삶을  스스로 원해 택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라니.

 

주인 여자는 아름답고 도도한 모습이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초조해하는 분위기가 풍겼다.  그 이유는 곧 알게 되었다.   도도해 보이는 이유는 남들보다 빼어난 자신의  미모 때문일 터였고 초조해 보이는 이유는 아이의 아버지인 미군으로부터 초청장이 안 온지가 꽤 오래 된 때문일 터였다.  사람들이 늘 찬탄의 시선으로 자기를 보는 것을 잘 알고 있다는 듯한 태도. 남들보다  나은 그 무엇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은연중 풍기게 되어 있는 그런 분위기.  좋은 부모, 잘 사는 집, 높은 학력과 학벌, 빼어난 외모, 뛰어난 머리 등등. 아무튼 남보다 조금이라도 나은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의례히  풍기게 되어 있는 그런  분위기였다.  자신이 남들이 손가락질 하는 일인 몸을 파는 일을 하고 있는 데 따른, 그런 일을 하지않는 사람들을 보면 뭔가 모르게 주눅들게 되어 있는 분위기는 전혀 없었다. 적어도 그 시절, 열다섯 중학교 2학년인 내가 보기에는.

그 이유가 우리 가족이 자기 집에 세를  들어 사는 것이어서 집주인 행세를 하느라 그런 것인 면도 작용했음을 부인할 수는 없겠다. 자기 신분이야 어쨌던 우리 가족에게는 일단 집주인 자격이었으니까. 그것은 세를 살고 있는 우리 식구들에게는 당당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것을 의미했으니까. 그러나 그것보다는 아직은 희망을 걸고 있을, 자기 나라로 돌아간 적어도 같이 살 동안은 남편 노릇을 했을 미군에 대한 기대감이 더 크게 작용한  때문이었을 것이다. 초청장이 와서 미국에 가서 부부로 같이 살게되면 아주 자랑스러울 남자. 가난한 내나라 변변치 못한 남자들보다는 백배천배 나을 남자. 거기다가, 아이의 아버지일  동거한 미군은 백인인데다가 장교 출신이라고 했다. 흑인이 아닌 백인인 것만으로도 차고 넘치는데,  장교 출신이라는 것이었다. 그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눈으로 직접 보지를 못했으니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가 살고 있는 옆 방에 살게되는 양색시 누나의 말로 미루어 보면 사실인 것 같기는 했다. 언니, 동생 사이로 지내는 두 여인이 서로 입을 맞춘 것인지까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고. 

 

몸을 팔더라도 그 상대가 백인이냐 흑인이냐는 큰 차이가 있었다. 과거에 백인은 주인이었고 흑인은 노예였다. 흑인들이 노예 신분에서 해방이 되어 같은 군인 신분으로 다른 나라에 왔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겉모습만 그럴 뿐이었다. 양색시들도 자연스레  급이 갈렸다. 자기들 스스로 그리 정한 것도 아닐테고 몸을 파는 처지에 늘 그리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니었겠지만 백인 병사를 상대하는 여자, 흑인 병사를 상대하는 여자로 저절로. 백인들이 늘 찾는 여자들은 상대적으로 더 예쁜 축에 들었을 것임은 충분히 짐작이 가는 일이고.

주인 여자는 백인 병사를 상대로 몸을 판 것이었고 그 중에서도 자기에게 홀딱 반한 장교를 만나는 대박이 터진  것이었다.  내가 태어나 살고 있는 이 나라의  군인들도 장교 신분이라면 사병과는 다르게 보이고 실제로 그런 법인데 미군들은 어떠했겠는가? 실제로 길거리에서 볼 수 있는 미군은 모두 사병들이었고 장교들은 운전병이 모는 짚차를 타고 가는 모습을 본 게 전부일 정도로 눈에잘 뜨이지를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귀한 존재인  장교와  연이 닿아 결혼을 하여 미국으로 들어가는 전제로  동거를 하고  아이까지 난 것이었다. 미국이라는 세계에서 제일 잘 사는 나라의 백인 남자와 평생 같이 살게 될 수 있게 된다는 꿈에 부풀어. 이 지긋지긋하게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집에 태어나 그것이 핑계가 되어 남의 나라 남자들을 상대로  몸을 파는 일을 하는 길로 들어설 수밖에 없었던, 그래서 이 나라에 있어봤자 양색시 출신이라는 딱지를 평생 주홍글씨처럼 달고 살아가야 할 운명일 수밖에 없는.  그런데 이런 자신의 운명에서 벗어나게 해 줄 남자가 더구나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의 남자가, 그 나라에서도 인정받으며 잘 지낼 수 있는 장교 신분의 남자가, 자신이 온갖 남자에게 몸을 파는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을 다 알고 있는 남자가,  그것을 다 이해하고 평생을 같이 살자고 해서 같이 살면서 아이를 낳았고 이제 초청장만 오면 이 지긋지긋한 나라는 떠나게 되는 데까지 와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초청장이, 아이 아버지인 미군이 자기 나라로 돌아가면 금방 보내주겠다고 철썩같이 약속한 그  초청장이 약속했던 기간보다 길어진 상황에서 아직 오지를 않고 있어, 혹시 버림받은 것은 아닌가 하는 마음이 겉으로 나타나 있는 것이었다. 미군은 아마도  자기 나라로 돌아가 마음을 달리 먹으면서 깨어졌을 가능성이 더 많은 것이고 여인은 긴가민가 하면서도 일말의 기대를 품고 기다리고 있는 상황일테고.

 

그 상황은 우리 가족이 그 집을 떠나 학교를 버스를 타고 다녀야 할 좀 더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사를 갈 때까지 달라지지 않고 있어 주인 여자의 아이는  아마도 자기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른채 양색시 출신 엄마 품에서 계속 자라던지 아니면 입양을 가던지 그랬을 것지만  거기까지는 난 모르는 채 그저 막연히 추측만 해보는 상황으로 그 집을 떠나 이사를 한  것이고.

 

그 미군 장교는 아마 이랬던 것 아닐까?  차를 타고 가다가 우연히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양색시를 봤고 그래서  그 아가씨가 영업하는 곳을 알아뒀다가 찾아가 몇 번 만나보고 그래도 마음에 드니  동거를 하자는 제안을 했던 것 아닐까? 사병들이 드나드는 집에 장교가 뻔질나게 드나들기도 좀 뭣 했을테고  그래야 여자가  이 남자 저 남자에게 아랫도리를 내어주는 일을 못하게 막고 독점을 할 수 있으니까. 남의 이목도 있고 하니 아예 집을 한 채 사서 자기들만의 공간을 마련해버린 것이고. 가난한 나라의 시골집 한 채 값이라야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의 장교 신분인  자기가 받는  수입에 비하면 얼마되지 않았을테니, 이건 뭐 식은 죽 먹듯이 쉬운 일이었을테니.

 동거 당시의  마음은 자기 나라로 돌아가게 되면 여자와 아이들을 불러들여 같이 살 계획을 실제로 했었을지도 모르겠으나 막상 돌아가 자기 나라 여자들을 보니 마음이 변한 것이거나 아니면 처음부터 자기 나라로 데리고 갈 생각까지는 없었으나 그리 말을 해서 여자가 믿게 한 것일테고.  불과 5~6년 뒤인 내 고등학교 3학년 시절부터  몇 년동안 월남에 파병간 우리나라 군인들이나 취업하여 간 기술자들이 월남 여자들에게 미군들이 우리나라 여자들에게 한 행태를 똑같이 되풀이 한 걸 보면, 어떤 이유로건 자기네 나라보다 가난한 나라에 가게되면 그래서 자기들을 필요로 하는 여자들이  얼마던지 있게 되면 똑같은 행태를 되풀이하는 인간들이 있다는 것을 입증하게 해 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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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집에 살고 있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옆 방에  누가 새로 이사를 왔다. 원래는  비어 있던 곳이었는데. 비어 있는 이유가 집주인이 양색시 출신이어서 사람들이 이사 오기를 꺼려서 그런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방의 규모가 여러 식구가 살기엔 너무 작기도 했으니까. 새로 이사 온 여자도 여염집 여자가 아닌 양색시, 집주인 여자보고 언니, 언니하고 부르는 양색시였다.  20초반 정도로 보여서 나보다는 대여섯살 정도 많아보이는 누나뻘일  아가씨. 이 아가씨와 한 집에서 몇 달을 같이 살게 되었다. 집주인 여자처럼 아주 빼어나게 아름다운 모습의 아가씨. 그렇지만 어딘가 모르게 수더분하고 착한 인상이여서 날카로운 분위기를  풍기는 주인여자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아마도 이런 아가씨라면 모르긴 몰라도 십중팔구는 진짜 집안 살림에 보탬이 되기 위해 자기 한 몸 희생하겠다는 마음으로 몸 파는 일을 하기 위해 나섰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모습, 동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친근한 누나와 같은 모습이었다.

 

나는 이 아가씨 아니 누나하고 이야기를 나눠 본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그저 한 집에 살면서 어쩌다 한번씩 마당에서 마주치는게 전부였다. 남의 나라 군인에게 몸을 파는 여자라서 그런 것은 절대 아니었다. 이야기도 해보고  싶고 누나, 누나 그러며 응석도 부리고 싶었으나 마음 뿐이었다. 나보다 나이가 많아서 그런 것은 절대 아니었다. 설사 내  또래여도 마찬가지였을테니 내 성격이 문제였다. 지극히 내성적인 성격. 이사를 자주 다니고 가장인 아버지와 같이 살고 있지를 않아 결손 가정이나 다름없는 환경에서 자라는 탓에 저절로 생기게 되었을 지극히도 내성, 소극적인 성격 탓이었다. 그 뒤 불과 2년도 채 안 된  고등학교 1학년 새학기, 본격적으로 사춘기에 접어 든 이때에 첫 눈에 반한 아이에게 2년여 동안 말 한마디 건네보지 못하고 가슴앓이만 하다 저절로 끝내고 만 용기없는 성격 탓.  몸을 파는 아가씨라서 더럽다거나 그런 생각은 전혀 없었다. 집에서 영업을 한 것이 아니어서 몸을 파는 아가씨라는  생각이 들지도 않았다. 신분이 양색시라는게 알려져서일 뿐 여늬 아가씨와  조금도 다를 바 없었다. 그것도 빼어나게 아름다운 모습의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아가씨. 마음씨도 착하면서 외모도 아름다운. 주인여자와는 정반대의 분위기를 풍기는.

이 양색시 누나는 누나대로 내가 어려웠을 수도 있을 것이었다. 몸을 파는 신분인 자신의 처지에 대한 자격지심 탓도 있을테고 아직은 어리지만 결국은 한 사내로 자라 여자의 몸을 탐하게 될  내 앞 날을  미리 보고 있는 때문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내가 누나 누나하며 붙임성있게 따른다면 달라질 수도 있었겠지만 나는 그런 성격도 못되었다. 그러니 말 할 기회가 있을 수 없었다. 그저 한 집에서 같이 산다는 게 전부인 사이였다. 나보다 세살이 어린 여동생은 언니, 언니하며 잘 따랐고 어머니는 반찬도 주고 그러면서 친하게 지내는 것 같았지만 나는 그러지를 못했다. 아직은 어리지만 사내애라서,  내성적이고  소심한 성격이어서.

 

이 누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군 한 명을  집에 드나들게 했다. 백인이고 아주  훤칠하게 잘 생긴 미군을. 나의 이런 시각은 이 미군이 부자 나라 사람이어서, 백인이라서 부러운 생각이 작용한 착시적인 면도 있을 것이다. 만약에 흑인이라면 아무리 부자나라 사람이라도 부럽다는 생각은 절대 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흑인을 멸시해서가 아니라 왠지 모르게 저절로 갖게 되는 외모에 대한 혐오감 뭐 그런 것 때문일.  천연두를 앓아 얼굴이 잔뜩 얽어 있는 사람들을 볼 때의, 이유가 뭔지는 모르지만 얼굴에 벌겋게 뭔가 나 있어 보기 가 왠지 징그러울 사람을 봤을 때 생겼던  그런 혐오감이었다. 그러나 이 미군은 달랐다. 얼굴이 깨끗하고 잘 생긴 백인이었다. 혐오감 같은 걸 절대 느낄 수 없게 하는, 키 작은 내가 키 큰 아이들을 볼 때마다 늘 부러워했던 그런 마음이 들게 하는 .  당장은 내가 그리도 먹고 싶은 초코렛을 언제던지 먹을 수 있다는 것이, 양색시 누나를 만나러 올 때마다 봉지에 뭔가 가득, 아마도 먹을 것이나 화장품 같은 것이 틀림없을 것들을 가득 들고 오는 것이  부러워서이기도 한.

 

양색시 누나는 이 미군을 집에 들이면서 우리 세식구 보기가 민망했던지  결혼해서 같이 미국에 갈 남자라고 했다. 당시에는 믿을 수밖에 없었고 실제로 그리 생각했었던. 지금 생각해보니 혹 거짓말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그러나  집에 들인 미군은 그 미군 딱 한 명이었고 당시 이 누나가 한 행동으로 봐서는 진실인 쪽이 더 맞는 것 같다.  그것이 혹 우리 가족에게 거짓말을 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건 이 글을 쓰는 지금인 50년은 족히 지난 뒤의 일이다. 자기가 몸으로 받은 미군 중에 자기를 유독 좋아해서 단골로 찾아오기에 아예 집으로 오게했을  가능성. 아무튼 그때는 결혼해서 미국으로 가는 걸로 알았었다. 실제로 이 미군은  양색시 누나를 무척 좋아하는 것 같았다. 자기 나라로 돌아가면 변할 가능성이 많은 것이었지만  그 당시에는 그리 보였다. 그 좋아하는 마음이 시도 때도 없이  솟아나는 주체할 수 없는  성욕의 해소를 위해 필요한 이유에서 생긴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다들 그래서 좋아하는 이성을 찾게되고, 짝을 지어 일평생 같이 살게되는 것임을 부인할 수 없게 되어 있는게 우리 인간들이니까.

 

양색시 누나의 말을 믿게 된 이유는 또 있었다. 뭔가하면, 그 어느 날 고향에서 엄마라는 분이  이 누나를 만나러 온 것이었다. 머리를 곱게 쪽지어 넘기고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시골 여인같지 않게 참 곱게도 생긴 모습을 하고서. 결혼을 일찍 한 것인지 내 어머니 또래인  40 초반 쯤으로밖에 안  보였는데도 나보다 대엿살은  많을 누나를 자식으로 두고 있는, 아마도 집안이 찢어지게 가난해서 먹는 입이라도 하나 줄여보겠다고 부모가 일찍 시집을 보내 버린 것일 가능성이 많은.  그러나 시집간 집도 가난하기는 마찬가지여서 제일 큰 딸일 이 누나는 때마침 미군들이 들어와 있는 것을 기회로 몸이라도 팔아 집안 살림에 보태겠다는 생각으로 집을 나온 것일테고.

여인은 딸을 보러오기 위해 많은 고민을 한 끝에 결단을 내렸을 것이다. 비록 낳아준 것밖엔 해 준 것이 하나도 없지만, 이제는 그 딸 한테서 도움을 받고 있는 처지이지만,  그래도 내 배 아파 난 금쪽같이 귀한 내 새끼인데 그런 내 새끼를 좋아해서 결혼을 하겠다는 남자 그것도 외국인 남자가 어떤 모습일까가 궁금해서. 외국 남자에게 몸을 파는 딸이 사는 모습을 실제로 보는 것은 설사 몸 팔아 번 돈을 집으로 보내어 살림살이에 보태준다고  할지라도 커다란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지만, 남들이 보면 몸 파는 일을 하는 딸을 둔 에미라고 뒤에서 손가락질 하지 않으리라고 장담할 수는 없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내 배 아파 난 내 새끼하고 결혼하겠다는 남자가 어떻게 생긴 사람일까가 보고 싶어서.

 

그렇게 몇 달의 시간이 흘러갔다. 어머니와 여동생 그리고 나뿐이어서 쓸쓸하기 그지없는 우리 가족에게 활기라면 활기를 불어넣어준 이 양색시 누나와 한 집에서 사는 생활이. 이 누나와 나와의 관계에 특별한 진척은 없었다. 그저 한 울타리 안의 서로  다른 방을 쓰며 마당에서 어쩌다 마주치는 정도인 그런 사이일 뿐이었다. 나는 말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고 그 누나도 아마 그랬을 것일. 그러다가 이사를 갔다. 걸어서 학교를 다니기엔 좀 멀어 버스를 타고 다녀야 했던 곳으로. 이번에도 가장인 아버지의 뜻에 따라 아버지와 한 집 아니 한 방에서 같이 살기 위하여. 이틀에 한번만 우리 식구와 지내는 형식으로. 작은 집에서 하루, 큰 집인 우리 집에서 하루 그렇게.

 

아버지가 큰 집인 우리 식구들과 비록 반쪽짜리 동거이긴했지만 같이 살기로 결심을 한 이유는 잘 모른다. 조강지처인 어머니와 헤어질 수는 없고 애정은 없는 그런 상태에서 커가는 자식들 특히 장남인 나의 커가는 모습이 신경이 쓰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중에 늙으면 나한테 원망을 들을꺼라는, 실제로 그렇게 된, 친척들의 말에 영향을 받은 것 때문인지도 모르는. 아무튼 그 이후로도  작은 어머니가 아닌 또 다른 여인과도 살림을 차리고 사신 것을 보면 여자에 관한 한 좀 어리석은 삶을 산 것 같다, 아버지는. 

가정을 가진 다른 대부분의 남자들이 뭐 그럴 줄 몰라서 안 그러는 것은 아닐테니까. 그러면 안 되는 것을 알기에 참으며 설사 아내 아닌 다른 여자들과 외도를 하기는 해도 가정을 깰 정도의 어리석은 짓은 하지를 않는 현명한 방식으로 사니까. 그래야 처, 자식들에게 상처를 안 준다는 것을,  남의 손가락질 안 받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까.  키운 자식들 장성하여 제 갈 길 가게되면 부모를 실망시키는 짓을 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건 자식들이 스스로 알아서 해야 할  자식들의 몫인 것이고,  가장인  내가 할 일은 자식들 잘 자라게 뒷바라지 하는 게 최선인 것을 알고 있으니까. 설사 그 방식이 세상에는 피해를 주더라도  나 자신만의 이익을 취하면 된다는, 더불어 잘 살아야 되는 인간의 사회성과는 동떨어진 방식일지라도. 대부분의 인간들이  다 그리 살고 있고 그리해서 생기게 되는 과실을 아주 맛있게 먹으며 자라는 자식들을 보며 흐뭇해 하는 지극히도  이기적인 모습일지라도,  그것이 처자식을 먹여 살리는 책임을 지고 있는 가장의 책무임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의 본연의 모습인 것을.

 

                                                   *  *   *

우리 가족이 새로 이사간 그 마을에도 미군부대가 있었다. 마을 뒷 쪽 논들이 있는 자그마한 들판 건너에 있는 나지막한 산에 하나,  마을 옆 다른 마을로 가는 사이에 있는 산에 또 하나. 당연히 양색시도 있었다. 미군들이 있는 곳이면 바늘에 실 가듯이 자연스럽게 그렇게. 마을이 신작로에서 안으로 좀 들어가 있고 이웃 마을이래봐야  걸어서 30분은 족히 걸릴 거리에 떨어져 있어서 그런지 마을 안에 클럽이 하나 있고 그 안에 양색시들이 있는 것이 바로 전까지 살았던 마을과 달랐지만.

아버지는 그 중에 마을 뒷 쪽 부대에서 일을 하셨다. 우리 식구, 작은집 식구 모두 합쳐서 여섯식구를 먹여 살리기 위해. 당연히 집안 형편은 여유롭지 않았으나 일자리가 없어 하릴없이 빈둥거리는 아버지 또래 가장들이 이 마을에도 넘쳐났으니 상대적으로는 여유로운 것이었다. 그 놈의 상대적이라는 것 때문에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세상을 보는 눈이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것임을 나중에 성인이 되어서도  한참 늦은 나이인 40이 넘어서야, 그것도 먹고 사는 기본적인 문제가 해결되면서 남에게 깔보이지 않을 정도의 스펙은 갖추어야 가능한 것임을 깨닫게 되지만. 이를테면 이름만 대도 다들 아는 번듯한 직장을 다닌다던가-거기다 명문대 출신이라는 학벌까지 있으면 더 좋을테고-, 그 돈을 어떻게 만지게 됐건 남부럽지 않게 쓸 수 있는 큰 돈이 있다던가 하는.

 

이곳으로  이사온 뒤 처음 얼마간은 학교까지 걸어다녔다. 족히 시간반 이상은 걸리는 거리를 산 하나를 넘고 개울도 하나 건너 신작로를 따라 오가는 차가 일으키는 먼지를 먹으며 급우 두명과 함께. 두 명중 한 명은 산을 넘기 전에 있는 동네, 밖으로 통하는 길은 우리 집이 있는 마을 쪽으로 난, 내가 학교 가기위해 다녔던 우마차나 다닐 수 있는 길이 유일했던  아주 외진 동네에 살았고, 다른 한명은 산을 넘어 내려가면 나오는 멀리 M읍을 경유하여  임진강으로 흘러들어가는 개울이 있는 벌판에 살았다.  벌판의 산자락 가까운 쪽에.  둘 다 상급학교에 다니기는 했으나 차비까지 댈 여유는 없는 집들이어서 걸어다닌 것이고-신작로에는 돈만 있으면 탈 수 있는 버스가 늘 다녔다. 물론 자주는 아니어서 시간을 맞춰 기다려야만 했지만- 나는 집안 형편에 조금이나마 도움이라도 되어보자는 제법 철이 든 생각에서 그랬다. 그 철 든 생각은 몸이 너무 힘든 바람에  한 달을 채 못 버티고 무너져 내려 마을 앞 신작로로 학교가 있는 B리까지 가는 버스를 이용하는 것으로 바뀌어 버렸고.

 

마을에서 10여분 정도 걸어나가면 있는 신작로에는 버스가 다녔다. 기차역이 있는 M읍과 학교가 있는 B읍을 왕복으로  다니는. 나는 이 버스를 중학교 졸업할 때까지  타고 다녔다. 대충 1년반 정도를 방학과 일요일을 빼곤 매일. 당연히 버스 운전사와 차장들하고는 낯이 익었다. 그냥 낯만 익은 사이. 나는 운전사 아저씨에게 인사를 안 했고 버스 차장들에게도 아는 체를 안 했다. 아니 하지를 못했다.  아는 체를 할 용기가 없을 정도로 소심, 내성적인 성격 탓에 . 이런 내 속사정을 모른 운전사 아저씨는 인사 한번 안 하는 내가 괘씸했을테고 차장들은 건방지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특히 내 국민학교 동창, 바로 전까지 살던 동네에서 같이 구슬치기를 하고 놀던 한 학년 후배 경승이의 누나인 경옥이까지 끼어 있었던 차장들. 나이가 많아봤자 나보다  겨우 몇 살 정도 위일, 집안 형편이 어려워 상급학교인 중학교를 못가고 버스차장 일을 하고 있을, 아가씨라고 부르기엔 아직 어린 소녀들. 그 중에는 내 마음에 들만큼 예쁘게 생긴 소녀도 한 명 있었고 나에게 아는 체를 하려고 한  소녀도 있었는데 그러지를 못했다.  단지 제 의사 하나 제대로  표현 못하는 내 내성, 소극적인 성격 탓에.

 

버스는 마을 두 곳을 경유해서 다녔다. J면 사무소가 있는 P읍과 미군부대가 가장 많이 주둔해 있어 양색시들이 가장 많이 몰려있는 Y골. 두 마을을 벗어나면 모두 산과 들이었다. Y골을 지나 사거리 가기 전에 있는   나즈막한 산 자락에도  나하고 같은 학년인 아이 두 명이  사는 마을이 있긴 했지만 규모가 작아 그런지 차 안에서는 거의 안 보일 정도로 숨겨저 있었다. 큰 개울도 하나 있었다. 내가 다니는 학교가 있는 P읍 북쪽   산골짝에서 시작돼서 P읍과 내가 전에 살던 K리 앞 쪽 벌판 사이를 굽이굽이 흘러 Y골을 경유하여 그 다음부터는 내가 모르는 곳을 지나며 흘러 결국은 서해 바다로  들어가는, 나 P리, K리 살 때 한 여름엔 고기 잡고 물 놀이 하고 한 겨울에도 고기를 잡겠다고 작살을 만들어 얼음장 밑의 고기를 영봉이 형하고 찾아 다녔던 추억이 있는.

그렇지만 이런 것들은 이제 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늘 보아 온  산이고 들이고 개울이었기에 무덤덤했다. 산, 들, 개울 모두 언제나 그 곳에 있을 것이기에, 나 나이 먹어가면서 세상도 같이 달라지면서 들판을 가로질러  새로운 길이 나고, 그 들판에 없던 집들이 새로 생겨 나고  그럴 것이지만  이것은 나중의 일이었다. 그 시절 내 소년기, 얼마 지나지 않아 사춘기에 접어드는 고등학생이 될 그 때쯤에  내 관심이 가는 곳은 이젠  자연이 아니었다.  내 관심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세상에 있었다. 세상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시피 한 어린 나이인 탓에, 싫던 좋던 앞으로 내가 살아가야 될 세상에 대해 너무 궁금한게 많아서.  한 세상 살아내고 나면 다들 별 것이 아니어서, 다 아는 일들이어서 시큰둥해지고 말 그런 것들이었지만 아직 세상을 채 알기도 전의 어린 나이이기에 그랬다. 세상을 어느 정도 살아낸 그런 나이가 되면 내 어릴 적 뛰어 놀았던 산, 들, 개울이 다시 그립고 그 곳들이 너무도 달라져버린  모습에 실망을 하고 가슴이 아프고 그럴 것이었지만, 어릴 적 추억을 되살릴 수 있는 것들이 너무나 변해버린 모습이어서 마음 아파할 것이었지만 그것은 먼 훗날의 일이었다. 아마도 30은 넘어야 될, 그 나이 쯤 되면 어느 정도 세상을 보는 눈이 생겨져 있을.

 

그런 내 소년기 당장 관심이 간 곳은 당연히 Y골이었다. 내가 다닌 국민학교, 중학교 , 살았던 마을들 중에서 양색시들이 가장 많이  모여 사는 곳. 미군 부대가 가장 많은 지역이어서 저절로 그리 커져 있는 곳.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이 아닌 자기 몸을, 특히 외국인인 미군에게 제공하여 돈을 버는 여인들이 모여 사는 곳. 나는 이 Y골을 하루 두 번씩 지나 다녔다. 일요일과 방학을 빼고는 매일, 버스를 타고. 그래서 양색시들을  볼 수 있었다. 날씨가 춥지 않아 집 밖으로 나와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 봄부터 가을까지는 늘. 등교 시간인 아침에는 시간이 너무 일러 볼 수 없었지만 하교 시간인 오후 두세시 쯤엔. 본격적인 영업시간은 아니었지만 워낙 많은 양색시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 그런지 길가에 내놓은 긴 나무 의자에 앉아 있는 그녀들모습을. 아직은 영업을 하는 시간이 아니어서 잠시 바람을 쐬는 그런 옷차림인, 집에서 대충 입는 그런 옷을 입고서, 입에는 담배를 피워 문 아가씨도 제법 보이는. 그녀들이 그런 모습이 아름답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뭔가 삶에 지치고 희망이 없어 보이는 듯한  모습. 어린 내 눈에 보기에도 그랬다. 한창 아름다울 20초 중반의 아가씨들이 대부분이었을텐데도. 그 이유가 자기가 원했던 안 원했던 수 많은 남자들한테 시달리는 일을 하기 때문에, 그 일이 남들의 손가락질을 받는 일이어서,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 살림에 보탬이 되고자이던, 스스로  방종한 삶을 택해서 이 길로 들어선 것이건 힘들기는 마찬가지여서 그랬을 것임은 성인이 된 뒤에야 알게 된 일이고 그 시절에는 그저 호기심으로 그녀들을 바라봤다. 학교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차창 밖을 통해서 눈에 들어오는 그녀들의 모습을. 내가 앞으로 살아갈 세상과는  동떨어져  있는 세상이겠지만  아주  동떨어져 있는 것은 아닐 수도 있는 세상에 머물고 있는 그녀들의 모습을.

 

그렇게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아직 사춘기도 안 맞은 철부지 소년인 나는 앞 날에 대한 설계를 할 줄도 모르면서 기계적으로 학교를 오갔고 집에 돌아오면 조금은 시들어지기 시작한 구슬치기 놀이를 아직도 하고 놀았다. 공부는 뒷전이어서 내가 공부 잘 한다고 난 소문은 시골 120명도 채 안되는 학교에서 시험 때 벼락치기 공부로,  시험이 끝나면 다 잊어버리는 그런 엉터리 공부로 얻은 허명이었다. 같은 동네에 살면서 M읍에 있는 중학교를 다녔던,  그리 친하지는 않았던 같은 또래 형국이는, 나처럼 공부 잘 한다고 소문이 나 있고 그 소문이 빈 껍데기뿐인 나와는 달리 진짜 공부를 잘 한 모양이던 형국이는,  집이 가난해서 대학 진학하기 위한 인문계 고등학교 진학은 엄두도 못낸  형국이는,  진작에 공부 철이 들어 명문 상고 진학하기 위한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던 그 학교를 진학하기 위해 차근차근 준비를 했던지 중학교 졸업 무렵에는 나에게도 입학원서를 가지고 왔다. 같이 시험보러 가자고. 별로 친하지도 않았는데 나의 허명만 듣고 자기처럼 실력이 있으리라 생각하고. 설사 내가 실력이 있어  오케이를 하게 되면  자기와 경쟁 관계가 되는 것일텐데도  같이 시험을 보자고 굳이 원서를 가지고 온 불가사의한 행동을 한 형국이란 아이. 그때 난 아직 내 앞 날에 대한 설계는 아무 것도 할 줄 모르는, 그저 뛰어놀기 놀기 바쁜 철부지 소년에 지나지 않았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이런 나를 닥달하지 않았다. 다른 부모들 같으면 공부하라고 닥달을 했을터인데 전혀 그러지를 않았다. 두 분이 그런 이유가 일제시대 그 힘들고 어려웠을 시절에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탓에 공부를 제대로 못 한 때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세상을 보는 눈은 공부를 많이 못 했다고 해서 꼭 무딘 법은 아닌 것이, 형국이 엄마만 해도 내 어머니와 똑 같이 일제 시대에 태어나 못 배운 분인데다가 6,25때 남편을 잃고 청상으로 지내면서 형국이와 그 위 형을 키우고 잘 키우고 있었으니 말이다. 덕분에  형국이는 일찍 철이 들어-이건 내가 철이 너무 안 든 것인지도 모르겠다- 명문 상업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준비를 하고 있었고. 그러니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어머니는 또 어머니대로 삶에 대한 낙이 없어 자식 특히나 큰 아들인 나에게 무심했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 같다. 당신 스스로 만든 일이지만 두 집 여섯 식구를  혼자 힘으로 먹여 살려야 했던 아버지의 버거운 삶, 나를 낳은 20대 초반에 시앗을 보아 아버지의 사랑이라곤 받아보지 못한, 그래서 삶에 대한 아무런 즐거움도 없이 그저 무기력하게 어린 자식을 품 안에 보듬고 있는 것으로 당신의 부모 노릇은 다 한 걸로 알고 사신 어머니. 이런 두 분에게서 나에 대한 장래 설계를 기대하기는 어려웠던 것인지도 모른다. 고등학교를 진학하느냐 못하느냐까지 걱정은 안 했으나 이런 집안 분위기였기에 내가 자극을 못 받은 것인지도 알 수 없고. 그 자극은 원치 않는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이곳에서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를 채찍질 하는, 남들보다 한참 늦은 출발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수반하게 되고.

 

그렇게 헛되이 시간을 보내며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던 어느 학교 가는 날, 버스 안에서 한 집에서 살았던 양색시 누나를 우연히 만났다.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난 것은 아니지만 이제는 존재조차 잊어먹고 있었던 그 누나를. 그렇지만 그 아름답던 모습은 내 머리 속에 꽉 남아있어 언제던지 다시 떠 올리게 될지도 모를 누나를. 

 

그날도  학교를 가기 위해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기는 싫지만 안 갈 수는 없는 학교.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기 좋은 일보다는 하기 싫은 일이 더 많다는, 그렇지만 안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가장 먼저 알게 해 준 학교를. 버스가 저만치서 보이기 시작하면 내 가슴은 늘 조마조마했다. 내가 손을 흔들면 버스가 서 줄 것인가 아닌가 때문에. 내가 아직 어린 나이의 중학생인 탓에 버스비를 어른의 반값만 내는 탓에. 그래도 버스는 이런 내 마음을 배반이라도 하는 듯이 나를 태우기 위해 늘 서 줬고, 나는 안도의 한 숨을 내쉬며 버스에 올랐고, 운전사 아저씨에게 인사를 못했고 차장 누나에게도 아는 체를 못했다. 마음 속으로는 수도 없이 아저씨 안녕하세요, 누나 안녕이라고 그러면서도.

버스 안 내 자리는 제일 뒷자리 창가였다. 앞 쪽에 자리가 비어 있어도 늘 그랬다. 운전사 아저씨나 차장 누나가 지정해 준 것도 아니지만 그래야 되는 것으로 생각했다. 버스를 타는 사람들 중 나는  제일 어렸기 때문에, 버스비를 반 값만 내기 때문에 당연히 그래야 된다고.  그런데 그 날은 내 자리에 누가 앉아 있었다. 눈이 나빠지기 시작한 때여서 또렷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어딘가 낯이 익은 모습의 젊은 아가씨였다. "이 이른 시간에 웬 아가씨지?" 나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뒷자리로 쭈볏쭈볏 다가갔다.  "오늘은 창가에 앉아 가기는 틀렸네" 그러면서.

 

아침 시간에 버스에서 아가씨를 보는 일은 거의 없었다. 볼 일이 있을 이유가 없었던 것이 아가씨들이 출근을 할만한 직장이 있는 지역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농사일이 전부인  농촌 지역에  미군부대가 주둔해 있는 것이 다인 곳이어서 아가씨들이 일 할 곳은 없었다. 뭐 굳이 시골 지역 때문이라서가 아닌 시절이기도 했다. 지금은 아예 있지도 않은 머리카락을 수집해서 가발을 만들어 수출을 하던 가발공장도 그 시절보다 몇 년 뒤에나 생겨날 터였으니까. 이젠 젊은 아가씨들은 쳐다보지도 않는, 먹고 사는 기본 문제는 부모가 해결을  해주고, 중학교 진학조차도 못하는 아이들이 더 많았던 내 중학교 다니던 그 시절과는 달리 대학 진학은 웬만한 집 아이들은 꿈도 못 꾸었던 그 시절과는 달리, 이제는  대학 안 나온 것이 이상한 시대가 되어 있는, 학교  졸업을 미루면서까지 남들 보기에 번듯해 보이는 직장만을  구하기 위해 취업 준비를 하는 그런 것이 취업난으로 사회문제가 되어 있는 지금은 상상조차 할 수도 없었던, 단지 하루 세끼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난했던 그 시절부터 일을 해 왔을 나보다 나이가  많거나 또래들일 여인들은 힘에 부쳐 은퇴를 했지만 10여년 정도  늦게 태어난  여인들이  이제 50이 넘은 나이가 되어 일을 하며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봉제 공장도 아직은 없던 시절이었으니까.

그러니 젊은 아가씨들이 일할 곳은 거의 없었던 시절이었다. 단지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직장조차도. 남들 보기에 번듯한 그런 직장이 아닌 저임금, 기나긴 노동 시간, 열악한 근무 환경 같은 것을  참고 견딜 수밖에 없었던 그런 직장도 변변히 없었던 시절이었다.  기껏해야 노선을 오가는 버스 안에서 하루 종일 서서  일해야 되는 버스 차장일 아니면 부자집 밥하고 빨래하는 일을 도맡아 해줘야 되는 식모, 이도 아니면 몸을 파는 일들을 해야했던 시절이었다. 그러니 눈에 뜨이는 젊은 아가씨들은 거의 다가 양색시일 것으로 보면 되는 곳이었다. 그러나 밤 늦게까지 영업을 하는 양색시들이 이른 아침에 버스에 타고 있을 일은 없었다. 그녀들은 밤을 새워 영업을 하고 골아 떨어져 있을 시간이었다. 그러니 내가 의문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 이른 시간에 웬 젊은 아가씨가?"라고 당연히 생각을 한.

내 자리에 앉아있는 아가씨와 거리가 가까워지자 비로서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낯이 익은 모습이었던 이유도. 바로 이곳으로 이사오기 전까지 같은 집에서 살았던 그 양색시 누나였다. 참 좋아했지만, 그 좋아하는 마음이 이성으로 사랑하는 마음인 것은 아니었지만, 누나가 없는 나여서 누나가 있는 또래 아이들이 부럽기도 한 마음이 늘 있어온 것이 작용한 것이었지만  그런데도   말 한마디도 못 나눠 본 누나, 바로 그 양색시 누나였다.

나는  "이게 웬 일이래. 이 누나를 버스 안에서 이리 이른 아침 시간에 만나다니" 속으로 그러며 쾌재를  불렀다. 겉으로는 전혀 내색을 않은 체. 근데 이 누나 얼굴 색이 말이 아니었다. 얼굴이 누렇게 뜬게 꼭 어디 아픈 사람 같았다.

"어디가 아픈가? 얼굴 색이 왜 저렇지? 그나저나 이 아침에 무슨 일이래? 어디 다른 곳에서 자고 집에 가는 길인가?"

마음 속으로만 궁금해하며 아는 체를 대충했다.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이 아닌 쭈볏쭈볏하는 몸짓으로. 그리고는 옆에 가서 앉았다. 모르는 사이도 아닌데 반대편 창가로 가서 앉으면 민망해 할 것 같아서였다. "이 아이가 내가 양색시라고 옆에 앉는 것을 꺼리는구나"라는 생각를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어서이기도 했다.  속마음도 그 자리로 가기는 싫었다. 같은 집에서 늘 보며 지냈지만 말을 해 본 적도, 곁에 있어 본 적도 없었지만 늘 말을 해보고 싶었고 누나, 누나 그러며 팔짱도 껴보고 싶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미군에게 몸을 판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구체적으로는 모르는 때이기도 했다. 남녀가 성관계를 한다는 것은 결국 알몸을 드러낸다는 것인데 내가 이 누나의 알몸은 커녕  다른 여자의 알몸을 보게 되기까지에는  이 시절부터 10여년의 세월이 더 지난  군대 제대할 무렵의 일이었으니까. 그러니 이 누나는 그저 아름답고 신비스런 존재여서 말도 해보고 싶고 곁에 가서 응석도 부려보고 싶은 내게는 그런 의미로 존재하는 여인이었다.

나는 이 양색시 누나의 옆에 얌전한 여학생처럼 다소곳이 앉았다. 말은 한마디도 못하고 책가방을 무릎 위에 올려 놓고 가방 끈을 그 어느 때보다 꼬옥 쥔 채로.

"엄마 잘 계시지. 숙이도 잘 있고?"

나는 그냥 고개만 끄덕거렸다. "네"라고 말하자니 너무 공손한 것 같았고 "응" 그러자니 너무 친밀감이 드는 말투인 것 같아서. 이 누나는 이런 나의 마음을 읽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저 이른 아침에 뜻하지 않은 곳에서 나를 만난 것이 뭔가 좀 당황스러운 표정이었다. 그 표정의 의미를 알게 되는 것 역시 내가 여자 몸을 알게 된 10여년 뒤의 일이다. 20중반으로 접어들려고 하는 스물넷 나이의  가을인, 제대 특명을 받고 예비사단으로 갈 날짜만 기다리고 있던 그 어느 토요일.  내가 군수과에 근무할 때  조수였던, 그 때 3종으로 분류되고 있는 유류 관련 업무를  담당하고 있어서  그 기름을 빼돌려 넉넉하게 용돈을 만들어 쓰고 고 있던 김상병 덕분에.

                   

김상병은 내가 내친 졸병이었다. 조수로 데리고 있으면서 일을 가르치다가 내 눈에 나는 짓을 한 탓에. 대신 그 자리에 도상병이란 친구를  앉힌 뒤 실수했다고 후회를 했지만 그때는 이미 되돌릴 수가 없게 된 뒤여서  어찌해보는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하면 되돌리나 고민만 하며 시간을 보내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피교육생들을 관리하는 부대내 다른 대대로 발령이 나는 바람에  되돌릴 기회를 놓쳐버렸다. 이게 두고두고 미안한 마음에 부대 안에서 김상병을 마주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관심을 표시하면서 "지금 맡고 있는 보직은 뭐냐? 무슨 애로 사항은 없냐?" 등등 관심을 표시한게 전부였다. 그런 그가  제대 축하 송별회를 해주겠다고 내가 근무하고 있는 부대장실로 찾아 온 것이다. 인사과에 가서 내 외박증까지 자기가 직접 끊어가지고 와서. 정작 송별회를 해주겠다고 나서도 될, 내 보직이던 주부식을 다루던  1종 업무를 넘겨 준 도상병 이 놈은 꼬빼기도 안 보이고 있는데.

 

 김상병을 내친 이유는 내가 제일 싫어하는 짓을 하지말라고 지시를 했는데도 다시  한 것이 발단이 되어서였다. 직접 확인을 한 것이 아니고 도상병 이 놈의 고자질을 곧이 곧대로 믿은 탓이었는데 나중에 도상병  이놈이 혹 거짓말을 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었지만 그때는 이미 때가 늦어 있었다. 도상병에게 이미 넘겨준 창고 열쇠를 다시 돌려받으려면 어떤 명분이 있어야 되는데 그럴 명분을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아무리 군대이고 졸병이지만 마구잡이로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김상병도 이런 나의 마음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애초에 원인 제공을 김상병이 한 것이니 그것으로 위안을 삼고 넘어갔지만 마음이 편할 수는 없었다. 애초에 조수로 키우려고 한 건 김상병이었었으니까.

 

김상병은 나보다 1년반 이상 군생활을 늦게 시작한 졸병이었지만 나이가 나와 같았다. 대학에서 축구선수로 운동을 하다가 늦게 입대한 것이었는데 첫 눈에 마음에 들었었다. 첫 눈에 마음에 든다는 것이 꼭 이성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닌 것이라는 게 입증되는 경험을 한 것인데 동성의 경우는 그 이유가 이성의 경우와는 좀 다른 것 같다. 이성일 경우는 대개 외모가 크게 작용하는 법인데 동성의 경우는 외모보다는 자기와 비슷한 성격이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 같은. 편견인지는 몰라도 운동을 한 친구들은 대부분 의리가 있다는 느낌을 받는 편이었다.  잔머리를 굴리며 이해득실을 따지는 다른 대부분의  인간들보다는 훨씬 의리가 있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그 이유가 운동을 하는 환경이 선후배 사이가 엄격한 수직적 구조에 있고 육체를 쓰는 운동에 전념하느라 생각 구조가 단순한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머리를 많이 쓰는 친구들에 비하면 그렇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이 친구를 내 후임으로 키워야겠다고 생각하고 선임하사에게 조수로 데리고 있으면서 일을 가르치겠다고 했었다. 나를 전적으로 신임하고 있던 선임하사는 그러라고 흔쾌히  승낙을 해줬고 그때부터 주부식 수령을 할 때면 꼭 데리고 다니고 창고 열쇠를 맡겨 취사장에 주부식도 내주게 하는 식으로 일을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이런 와중에 내 눈에 나는 일을 한 것이 눈에 뜨여 주의를  한번 주었었다.

과의 졸병 전체를 집합시켜 주의를 주는 방식으로. 이런 일을 다시 안 일어나게 막으려면 졸병 전체를 불러 주의를 주는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

 

내가 근무하는 군수과에는  방위병이 두명 배치되어 있었다. 출퇴근하며 1년만 복무하면 군복무 의무를 마친 것으로  인정받는, 3년을 꼬박 부대 안에서 근무해야 하는 현역들에 비하면 큰  행운을 얻은 친구들이어서 처음에는 부정한 방법으로 방위로 빠진 것이 아닌가 생각했었다. 실제로 그런 친구들이 내 주변에도 있었으니까. 그런데 이 친구들은 그런 케이스는 아니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실제로  집안 형편이 어려워서  현역 복무를 면제 받은 케이스였다. 어쨌던 계급이 하사고 과의 제일 고참인  내가  이 방위병들에게 관심을 가질 일은 없었다. 방위병들은  서열상 무조건 현역 밑일 수밖에 없어서 내 밑에 있는 김상병이나 도상병 통제 아래 있었다. 실제 통제는 아마 과 제일 졸병인 김상병이 주로 담당하고 있었던 것 같고.  

그런 어느 날 김상병이 이들을 혼내는 것을 우연히 목격하게 되었다. 군수과 창고 뒤 공터에서 기압을 주는 것을 본 것이었는데 안 좋은 마음에 나중에 불러 이유를 물어보니 군기를 잡는 중이었다는 것이었다. 방위병들이 하는 일은 주로 보급품 수령을 하러 가거나 부대내 사역을 하는 것이었는데 이 과정에서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있었거나 아니면 그냥 선임 노릇를 하려고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유가 무엇이던 간에 군대 생활을 더 한 선임이라고 졸병들을 괴롭히는 군대 문화가 이해가 안 돼 넌덜머리를 내고 있었던 탓에  내 힘이 미치는 범위 안에서만이라도 그런 일은 없이하겠다는 생각을 하며 과 졸병들에게 잘 해주고 그랬는데 이런 장면을 목격하게 된 것이었다. 평소 내 생각과는 안 맞는 일을 바로 내 밑의 졸병들이 하는 것을.  그래서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 과 졸병들을 다 집합시켜 놓고  "그 친구들 집안 형편이 어려워서 방위로 빠진 불쌍한 친구들 같으니 너무 괴롭히지 말아라. 복무 방식은 다르지만 다들 한창 좋은 시절인 젊은 나이에 국방의 의무라는 허울좋은 미명아래 군대와서  썩는 것은 마찬가지이니" 라고 주의를 줬었다. 그런데 어느 날 도상병이 내게 와서는 김상병이 또 방위병들을 혼내고 있다고 고자질- 나중에 알고보니 진짜 고자질이었다- 을 하길래 그 길로 일 가르치는 것을 중지하고 도상병으로 바꿔 버렸었다. 그때 아무런 말 한 마디도 없이 맡겼던 창고 열쇠를 뺐는 나를 보며 황당해하던 김상병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는데 그런 나를 원망도 않고 이젠 과 선임도 아닌 나를 송별회 해주겠다고 한 것이니 의외라면 의외랄 수밖에 없었다.

 

반면 도상병은 정반대였다. 내가 귀도 여리고 사리 판단을 정확히 하기에는 너무 순진한 탓이었는지는 몰라도 이 놈의 고자질에 넘어가 조수 역할을 바꾸어버린 것인데 결과는 참담했다.   들리는 이야기가 이 친구 부정이 너무 심하다는 것이었다. 주로 취사병이나 군수과 다른 졸병들로부터 넌지시 암시를 받는 형식이었지만 이미 내 손을 떠나 있는 일이기에 되돌릴 수는 없었다. 도상병의 부정이  그러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고 마지 못해 조금씩 부정을 했던 나를  기준으로  생각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고.   도상병이 아닌 누구라도 그 자리에 있으면 그럴 것이라는, 오히려 별로 부정을 못한 나와 일을 했던 취사병들이 나하고 도상병을 비교하다보니 그런 말이 나온 것이 아닌가 싶기도 했었으니까. 문제는 이 친구  그리 부정을 해서 용돈을 만들어 쓰면서도 사수인 나에게 술한잔 사겠다고 말조차 꺼낸 적이 한번도 없었다는 것이었다. "너 사수한테 술 한잔도 안 사냐"라고 대놓고 이야기를 하는 성격은 못 되었지만 "뭐 이런 놈이 다 있지. 자기에게 일을 가르쳐 준 사수에게 술 한잔 사겠다는 말 조차 깨내지 않는 놈이라니. 용돈이 생기는 것을 뻔히 알고 있는 제 사수였던 나에게."라는 생각은 늘 했었다. 

그런데 내가 내친 김상병이 송별회를  해주겠다고 그러는 것이었다. 안 해준다고 섭섭해 할 일이 전혀 없는데도. 해 준다면 도상병이 해줘야 되는데 이 놈은 코빼기도 안 보이고 있는데도.

 

 김상병이 나를 데리고 간 곳은 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도시의 유명한 유흥가였다. 세칭 말하는 방석집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는. 군인들을 교육시키는 교육 부대가 많은 도시여서 이 부대를 거쳐가는 많은 군인들 때문에 아마도  번창했을 것으로 생각이 드는. 김상병은 이 곳에  단골 술집이 있었다. 떳떳한  돈은 아니지만 주머니는 늘 두둑하게 용돈이 있는 탓에 자주 드나들었을. 단골 아가씨도 있었다. 마치 애인과 같이 스스럼 없는 사이로 보이는.  김상병은 이 아가씨에게 " 내 사수님이셨어. 이번에 제대하시게 돼서 모시고 나왔으니 예쁜 아가씨 한 명 붙여 줘. 맥주도 박스째로 가지고 오고."라고 말했다. 사수였다는 말이 너무 미안하게 들려 많이 머쓱해하는 나의 마음과는 상관없이 아주 기분 좋은 표정을 하고서.  김상병은 그날, 나는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 맥주를 박스로 마시게 하고는 내 옆에서 시중들던 아가씨를 내가 자는 여관방으로 들여보냈다. 긴머리가 잘 어울리던,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여자를 옆에 앉혀보는 경험을 하게 해 준 아가씨를, 유흥업소 아가씨여서 남자들은 신물나게 겪었을, 그렇지만 나는 옆에 앉히는 것도, 안아보는 것도 처음이었던 아가씨를.  

 

태어나  처음 안아본 아가씨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다. 술자리에서 술이 취하기 전에는 말 한마디도 제대로 못하다가 술이 취한 뒤에는 어디서 생긴 용기인지 모르지만, 생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모습이 영화 졸업에 나오는 여배우 닮았다고, 배우  이름도 잘 못 알고 있었으면서, 그 긴 머리를  신기한 듯 만지며  빈 말이 아닌 진심으로 그런 말을 한 기억은 있는데 얼굴은 전혀 기억이 안난다. 여자라는 존재를, 비록 돈을 목적으로 남자들을 접대하는 여자였지만 옆자리에 앉혀 보는 것도 처음이어서 그 자체만으로도 마음이 설레던 나였다. 이런  나와는 달리  이미 수도 없이 많은 남자를 몸으로 겪었을 아가씨는 '뭐 이런 남자가 다 있지' 하고 속으로 생각하며 신기해했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난 태어나서 처음인 경험을 한 것이고, 체력이 왕성하던 20중반이 채 안 된  젊은 나이이고 처음 겪어보는 여자의 몸이 신기해서  밤새 아가씨를 괴롭혔고, 아가씨는 워낙 세상 때가 안 묻어 보였을 나에게 상처를 주기 싫어서 자기 몸이 고단할 터인데도 싫다는 표정 안 짓고 밤새 시달리면서 나를 받아 준 것이고 그랬을 것이다. 그 받아 준 이유가 "이 남자 내가 처음이네. 참 순진하게도 살았네" 뭐  그런  생각이 들어 잘 해줘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인지도 모르겠고. 

이, 내 삶에서 처음 여자를 알고 난 아침에 같이 밤을 보낸 아가씨의 모습은 전날 밤 술집에서 본 아름다운 모습은 아니었다. 술집 조명 불빛 아래서 긴 생머리를 늘어뜨리고 내 옆에 앉아 있을 때 모습은 진짜 캔디스버겐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밤새 나에게 시달리느라 한 잠도 못 자  부석부석해지고 화장이 다 지워진 얼굴은 정말 다시는  보기 싫은 그런 모습이었다.  긴 생머리를 한 아가씨들  모습을 유난히 좋아한 나의 착시 현상이었구나 라는 생각을 머릿속으로는 했지만 입밖으로는 내지 않고 "고마웠다"는 말을 하고 헤어졌다. 해장국 한 그릇 같이 하고서. 아가씨는 "제대하고 나서  이곳에 내려올 기회가 있으면 연락하라"고 빈 말이 아닌 진심이 엿보이는 표정으로 말을 했다. 내가 살아야 될 서울에서 거리가  너무 멀기도 한 곳이기도 하고, 

제대 뒤의 내 삶은 먹고 사는 문제 해결을 위해 일분일초의 여유도 없이 돌아가게 정해져 있었는데. 설사 시간이 있더라도 이 아가씨를 다시 볼 생각은 들지 않았었다. 이 아가씨가 내가  태어나 처음 안아본  여자라는 추억을 안겨는 준.

                                          *****

 

내가 사는 동네에서 양색시 누나가 버스를 탄 곳 쪽으로는 기차역이 있는 M읍뿐이 마을이 없었다. 결론은 이 누나 M읍에서 버스를 탄 것이라는 추리가 가능한데 그 이른 시간에 왜 M읍에서 버스를 탄 것인지 그 당시에는 생각을 못했다. 그냥 "이 이른 시간에 이 버스에는 웬 일이지. 얼굴은 어디 아픈 사람처럼 왜 저렇게 누렇게 떠 있고. 미국에는 아직 안 갔나보네. 혹시 주인여자처럼 결혼하겠다고 한 미군이 자기 나라로 돌아가 마음이 변한건가" 정도만 생각했었다. M읍에 내국인도 드나드는 창골이라는 이름의 커다란 사창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열차 통학을 하던  고등학교 시절에 같이 통학하던 동네 친구에게서 들은 기억이 어렴풋이 있고, 그 곳에 가봤다는 이야기를 같은 방에서  입시공부를 하던 중학교 동창한테 들은 것은  대학 입시 합격 통지를 받은 뒤이니 내가 양색시 누나를 마지막 본 그날 버스 안에서는 전혀 모르고 있을 때이다. 그런데 이 글을 쓰면서 이 양색시 누나가 이른 아침에 버스를 탄 이유가, 밤새 한 잠도 못 잔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이유가 그 창골과 관련이 있는 것 아닌가 싶은 생각이 아주 자연스럽게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침 이른 시간에 살고 있지도 않은 곳에서 버스를 탄 이유가 뻔한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우리 가족에게 결혼해서 미국에 같이 갈꺼라며 집에 들였던 미군은 귀국을 해서는 마음이 변했을 가능성이 많은 것이고 이 누나는 그런 남자를 무한정 기다리며 지내기에는 주변 배신당한 아가씨들을 많이도 봐와서 자기도 그녀들과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되는 것이구나 생각을 했을테고. 그런 남자를 기약없이 기다리며 독수공방을 하기는 생계를 위해서도,  한창 주체 못할 정도로 넘치는 성욕 해소를 하기 위해서도 불가능했을테고. 

 

양색시 누나는 Y골에서 내렸다. 양색시들이 가장 많이 모여 살고 있는 곳. 우리 가족과 같이 살았던 집에를 가려면 더 가야 됐는데.  내리면서  "잘 가. 공부 열심히 하고 엄마한테도 안부 전해드려"라는 말을 그리 당당하지 못한 모습으로 내게 남기고. 

나는 그런 그 누나에게 아무런 말도 못하고 고개만 애매한 정도로 끄덕이면서 "이리로 이사를 왔나"  생각하며 눈으로 배웅을 했다. 아마도 다시는 볼 기회가 없을 것임을, 어떻게 우연이라도 만날 기회조차  앞으로는 절대 없을 것임을 짐작은 하면서도.

"잘 가 누나. 그리고 잘 살아"  마음 속으로만 그리 말을 하면서...

 

그로부터 몇 달 뒤 나는 중학교를 졸업했고 동시에 소년기도 저절로 끝났다. 아주 신기하게도. 그러곤 본격적인 사춘기에 접어 들었다. 이성을 보면 저절로  눈 길을 주게 되고 좋아하게  되는. 단순한 호감이 아닌 사귀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된. 이 때 열차 통학을 하면서 본, 첫 눈에 반한 아이 때문에 가슴앓이하는 사랑을 하게 되었다. 내게는 처음이었던 사랑. 그렇지만 마음으로 혼자만 좋아한 그런 사랑. 짝사랑.

그 뒤로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인연이 되거나 그냥 스쳐만 가는 일들을 제법 겪게 되지만, 이 모두 나름대로 의미가 있어 내 삶의 한 자락 추억으로 남아 있지만, 이 추억들에 대한  무게의 가볍고 무거움을 굳이 따진다면 아마 이 아이에 대한 마음만큼은 절대 못 미칠 것이다. 말 한마디 건넬 용기만 있었어도 짝사랑은 결코 안 되었을 그런 사랑이었는데. 그러나 그 말 한마디 할 용기가 없어서 사춘기 고등학생 시절을 고스란히 가슴앓이 하면서 보낸 참 바보같은 짓을 한. 그래서 지난 내 삶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는. 만약에 말 할 용기가 있어 그 아이와 현실에서 만났다면  이리도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울 수는  결코 없을 것임을 세월을 한참 살아낸 뒤에서야 비로서 알게 된...

 

                                                            

                                                         2015. 4.2일부터 쓰기 시작해서 5. 16 아침에  1차 마무리하다.

                                                                                                     5. 31 아침에  2차 마무리하다.

                                                                                                     6. 4   아침에 최종 마무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