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
오키나와 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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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 | |
위치 | 류큐 제도 |
좌표 | 북위 26° 30′ 00″ 동경 127° 56′ 30″ / 북위 26.50000° 동경 127.94167° |
면적 | 1,201.03㎢ |
행정 구역 | |
일본 | |
현 | 오키나와 현 |
군 | 나하 시 |
인구 통계 | |
인구 | 1,384,762명 |
오키나와 섬(沖縄島) 또는 오키나와 본도(沖縄本島)은 동중국해와 태평양의 사이에 위치하는 난세이 제도 최대의 섬이자, 오키나와 현의 정치, 경제의 중심지이다. 면적은 1206.49 km²이고, 일본의 주요 4개 섬을 제외한 면적이 가장 넓은 섬이다.[1] 오키나와 현의 45개의 시정촌 중 현청 소재지인 나하 시를 포함한 30개의 시정촌이 있고, 오키나와 현의 인구 약 135만 명 중 약 120만 명이 오키나와 섬에 집중되어 있다.
기후
오키나와의 기온은 최고 33도에서 최저 9도 이다. 온난 습윤 기후와 아열대 기후가 나타난다.
역사
오키나와는 원래 류큐 왕국(琉球王國)이란 독립국이었다. 류큐왕국은 일본, 조선, 중국과 대만등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밀접한 무역을 통해 번성했다. 중국에 조공을 바치고 있었다. 1609년 일본 가고시마의 사쓰마 국이 침공하여 정복했다. 이후 류큐왕국은 사쓰마에게도 조공을 바치게 되지만 이로 인해 중국과 일본 토쿠가와 막부 양쪽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기게 되었다. 하지만 이 이후에도 사쓰마의 지배력이 계속 미치게 된다. 메이지 유신(1868년) 이후 1872년, 일본은 류큐왕국을 식민지로 병합하게 된다.
제2차 세계 대전 막바지인 1945년, 미군에 의해 점령되고 이후 27년간 미국에 의해 통치된다. 이 기간 동안 미군은 군사기지를 오키나와에 건설하였고 현재까지 운영하고 있다.
1972년 5월 15일 오키나와는 다시 일본 영토가 되었다.
미군 기지
오키나와에는 동북아 최대 미군기지인 가데나 공군기지(Kadena Air Base)와 후텐마 미 해병대 기지(MCAS Futenma)가 있다.
미국 해병대는 1996년 일본과 합의하에, 한반도 유사시, 미 해병대의 비행기 300대가 후텐마 기지에 배치되어 작전을 하기로 정했다. 공중 급유기 21대와 280여대의 해병대 전투기, 공격기 등이 동원될 예정이다.
오키나와에는 일본 내 미군 기지의 75%가 들어서 있다. 오키나와 섬의 20%가 미군 기지이다. 여러가지 사건으로 인하여, 오키나와 주민들은 미군 기지를 철수하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일본 영토인 오키나와에 주둔하고 있는 미 해병 8천명이 2014년까지 미국 영토인 괌으로 재배치 될 예정이다. 괌에 새로운 기지를 세우는 비용의 60%인 60억달러를 일본이 지불하기로 하였다. 2008년 5월 현재, 일본 영토인 오키나와가 아닌 미국 영토인 괌에 F-22 랩터 전투기가 배치되었다.
동서로 1천km에 달하는 오키나와 열도는 제주도 남쪽으로 평균 780~800km 정도 떨어져 있다.
반면에, 미국 영토인 괌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까지는 직선거리로 4000㎞ 정도 된다.
지역
오키나와 섬은 류큐 왕국 성립 이전의 작은 지방국가인 北山(호쿠잔), 中山(츄산), 南山(난잔) 북부, 중부, 남부인 세 개의 나라로 구분된다.(13c~14c) 나중에 中山(츄산)이 통일하고 1879년까지는 조선과 청나라에 계속 조공을 바치면서 독립을 유지한다.
북부
중부
남부
주석
같이 보기
오키나와 전투 (태평양 전쟁의 일부) | |||
전투를 치르는 미군들 | |||
날짜 | 1945년 4월 1일 ~ 6월 23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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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 일본 오키나와 | ||
결과 | 미군의 승리, 일본의 패망 촉진 | ||
교전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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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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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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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 규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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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전투(일본어:
이 전투에서 미군은 최초로 태평양 전쟁에서 가장 커다란 피해를 냈으며, 일본 측은 사령관, 군인 뿐만 아니라 그곳 주민들까지 전원 옥쇄해 가족끼리 서로를 죽이거나 수류탄으로 자결하는 등의 비극이 일어났다.
배경
미군은 이오지마 점령 후에 일본 영토 내로 쳐들어가기 위해 미군 탈환 지역에서 가장 가깝고 일본 규슈 지역을 폭격할 수 있는 오키나와 섬을 골랐는데 미군은 사이먼 B. 버크너 중장의 지휘 아래에 18만 3000명에 달하는 대군을 이끌고 상륙 준비를 했다.
그리고 상륙 지역에 일본군을 공격해 많은 피해가 나지 않도록 상륙 전 한 달 동안 3만 발에 달하는 포탄을 상륙 지역에 쏟아부었다.
일본군은 이에 우시지마 미쓰루 중장과 조 이사무 소장 등을 보내 방어 진지를 구축하게 했다.
전투 과정
미군은 상륙 당일인 1945년 4월 1일 오전에 주력 4개 사단이 오키나와 가데나 만으로 순조롭게 상륙하였다. 미군은 일본군의 아무 저항 없이 광대한 오키나와 북부 지역을 장악했고 상륙 며칠 동안은 일본군은 나타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일본군들은 주로 남쪽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4월 5일부터는 미군이 방심을 한 사이에 일본군의 사령부 슈리 성에서 무수한 동굴 진지가 미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미군은 수류탄과 화염발사기로 동굴 진지를 하나 하나 제거했고 제거하는데에도 많은 시간이 걸렸다. 4월 7일에는 이토 세이이치 함장이 이끄는 7척의 남은 연합 함대와 그 당시 가장 큰 전함 야마토가 오키나와 보우노사키 해협에서 미군 전투기들과 급강하폭격기에 의해 격침 당했다. 일본군은 미군이 방어선을 뚫을때가지 싸우고, 뚫으면 다음 방어선 으로 후퇴를 했다. 즉 미군은 하나씩 점령을 해야 했다.
미국은 남쪽을 점령하기가 너무 어려워지자 섬의 남쪽에도 상륙을 했다.
미군과 일본군 양측 모두 처참한 전투 끝에 5월 29일 미군이 슈리 성을 함락시켰고 5월 31일에 일본군은
전력의 85%를 잃었다.
일본군 사령부는 섬 남쪽 지역의 마부니 고지 동굴로 퇴각했고, 결전을 준비를 했다. 6월 11일에 오로쿠 지구에서는 일본 해군 사령관 오타 미노루와 군대 대부분이 전멸했고 6월 15일에 일본군의 남은 병력 6천 명이 미군의 화력에 견디지 못하고 붕괴됐다.
6월 18일 지휘관이던 사이먼 B. 버크너 중장이 일본군의 포격으로 급작스럽게 전사하지만 전세는 되돌려지지 않았다. 6월 19일에는 일본군 사령부 참모까지 전사했으며, 우시지마 미쓰루 중장과 조 이사무 소장이 6월 23일 오후 4시 30분에 할복 자살함으로써 전투는 종결되었다.
결과 및 영향
이 전투에서 일본 제국군은 군인, 사령관뿐만 아니라 그곳 주민들에게도 할복 자결을 명해 수많은 주민들이 수류탄으로 자결하거나 가족끼리 서로 목졸라 죽이는 비극이 일어났고 주민 사망자는 대략 12만 명으로 추산된다.
미군은 많은 피해를 내면서도 오키나와를 점령하면서 가까운 규슈 지역 등을 폭격할 수 있게 되었고 일본의 패망을 앞당겼다. <위키백과>
* 오키나와 관련 책
원본출처 http://book.daum.net/detail/book.do?bookid=KOR9788936485894
이 책은 15세기부터 번성하는 해상왕국이었던 류우뀨우(流球)왕국의 역사에서 시작해 2차대전 이후 미국의 군사점령을 겪고 일본에 ‘반환’되었지만 여전히 일본과 미국의 전략적 군사기지로 사용되고 있는 현재까지의 오끼나와 역사를 총정리한다. 미일동맹의 패권주의적 팽창과 오끼나와 저항운동의 역사를 한눈에 살필 수 있는 이 책은, 동북아시아의 지역질서를 알고자 하는 이들과 평화운동에 관심이 있는 독자 모두에게 주요한 참고서적이 될 것이다. 책소개: 2014년 7월, 일본이 각의에서 집단자위권 행사를 결의했다. 평화헌법 아래 무력 사용을 금지받았던 일본이 70년 만에 ‘전쟁국가’로 돌아가겠다는 것이다. 아베 신조오(安倍晋三)와 자민당이 평화헌법을 재해석하겠다는 강경한 의지를 내비쳤지만 만만치 않은 여론의 반발에 입법 처리는 갑작스레 내년으로 미루어졌다. 일본 정권의 ‘전쟁국가’ 선언에 일본 내에서도 가장 격렬하게 반발하고 있는, 일본 평화운동의 구심점이 바로 ‘저항하는 섬’ 오끼나와다. 『저항하는 섬, 오끼나와』(원제 Resistant Islands: Okinawa Confronts Japan and the United States)는 호주국립대학 명예교수 개번 매코맥(Gavan McCormack)과 평화운동가 노리마쯔 사또꼬(乘松聰子)가 오끼나와 저항운동 70년사를 집대성한 저서다. 개번 매코맥은 『종속국가 일본』 『범죄국가, 북한 그리고 미국』 『일본, 허울뿐인 풍요』 등을 저술한 바 있으며 일본과 동아시아의 정치·사회문제를 역사적 지평에서 고찰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기다리고 있던 것은 미군의 토지수탈과 생활파괴였다. 종전 이후 27년간 오끼나와는 미군의 직접적인 군사지배를 받았다. 1952년 4월 28일, 대일강화조약이 발효되어 본토는 미군정에서 벗어났지만 오끼나와는 일본에서 ‘분리’되어 그대로 군사식민지로 남았다. 오끼나와인들은 이 날을 ‘굴욕의 날’로 기억한다. 매코맥은 대일강화조약 이후 일본은 명목상으로는 평화헌법을 가진 ‘평화국가’가 되었지만 실질적으로는 미국의 속국으로 남았다고 주장한다. 1960년 본토의 미군기지는 1952년에 비해 4분의 1로 축소되었지만 오끼나와의 기지는 오히려 두배로 증가했다. 본토의 부담을 오끼나와로 떠넘기는 이러한 관행은 이때부터 정착되었다. 일본은 오끼나와를 국가의 일부가 아닌 군사적 거점으로 보았고, 본토 일본은 헌법상으로 ‘평화국가’였던 반면 오끼나와는 1960년대 초반부터 미국의 베트남전쟁을 추진하고 세계대전을 대비하는 위헌적인 기지 역할을 해왔던 것이다.
오끼나와 저항운동은 “세계적인 군사기지제국인 미국의 전략적 계획에 대해 의문을 던지는 것”이자 비폭력 시민운동의 요체를 보여준다고 저자들은 역설한다. 일본의 군국주의적 야망과 미국의 패권질서에도 불구하고 “한국과 오끼나와는 민주적이며 협력적인 전후 및 패권 이후의 질서가 이 지역 전체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을 보여준다”라는 저자들의 희망적인 메시지처럼, 한국에서 오끼나와를 이해하는 것은 단순한 연대를 넘어서 한반도 문제에도 직결되는 것이다. 오끼나와를 이해하는 것은 한국을 이해하는 것이다. 저자소개: 개번 매코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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