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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유신의 단초가 된, 도쿠가와 막부 세력과 천황제 지지 개혁세력간의 내전> 보신전쟁

Bawoo 2015. 6. 2. 01:04

보신 전쟁
전선의 변천
전선의 변천
날짜 1868년 1월1869년 5월
장소 일본
결과 막부의 종말과 메이지 유신의 시작
교전국
1868

삿초동맹

도자마 다이묘

1868

Flag of Ouetsu Reppan Domei or the Northen Alliance in Japan.svg오우에쓰 열번 동맹

1869 1869
지휘관
Flag of the Japanese Emperor.svg교토 어소

Maru juji.svg사쓰마 번

Alex K Hiroshima Mori kamon.svg조슈 번

Japanese crest Tosa kasiwa.svg도사 번

Japanese Crest Daki hana Gyouyou.svg사가 번

Tokugawa family crest.svg도쿠가와 막부

Flag of Aizu domain.svg아이즈 번

Mitsubaaoi.svg미토 번

Flag of Ouetsu Reppan Domei or the Northen Alliance in Japan.svg오우에쓰 열번 동맹

Flag of the Republic of Ezo.svg에조 공화국




보신 전쟁(무진전쟁 일본어: 戊辰戦争 (ぼしんせんそう))은 1868년부터 1869년 사이에 도쿠가와 막부의 세력과 교토 어소에 정치 권력을 반환하기를 요구하는 세력과의 싸움으로, 일본에서 일어난 내전이다.

 

전쟁은 도쿠가와 막부의 개항 정책에  따라 맺은  불평등 조약에 대하여 불만을 가진  수많은 귀족들과 젊은 사무라이들 때문에 일어났다. 이에  서쪽 번국의 사무라이(특히 사쓰마 번, 조슈 번, 도사 번) 및 법원 관계자들은 황실의 통제와 젊은 메이지 천황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해 나아갔다. 1866년 사쓰마 번조슈 번 사이의 삿초동맹이 체결되자 군사적인 위협을 느낀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정치 권력을 천황에게 반환하여 도쿠가와 가문의 보존과 미래의 정부에 참여할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에도에서 교토 어소측이 군사적인 움직임을 하는 한편 사쓰마 번, 조슈 번, 도사 번을 비롯한 반막부 세력들이 12월 9일 쿠데타를 일으켜 조정을 장악하고, 대정봉환을 계기로 도쿠가와 막부의 폐지와 신정부를 수립할것을 선언했다. 그 결과로, 무진년인 게이오 5년(1868년)에 일본 전토에서 전쟁이 발발한다. 사쓰마조슈를 비롯한 반막부측 군대가 막부측보다 비교적 현대적이었기 때문에 도바 후시미 전투를 서막으로 여러 전투에서 승리를 따낼수 있었고, 결국 에도까지 후퇴한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개인적인 항복을 선언한다. 이후 오우에쓰 열번 동맹군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도쿠가와 가문에 끝까지 충성한 잔당들과 북부 혼슈 세력들은 훗카이도까지 후퇴하여 에조 공화국을 설립했으나, 하코다테 전쟁을 마지막으로 전쟁은 반막부 세력의 승리로 막을 내리게 되고, 그 결과 일본 전체를 걸쳐 메이지 유신을 완료 시킨다.

 

전쟁에서 승리한 반막부 세력의 신정부는 일본에서 외국인들을 추방시키고, 과거에 막부가 외국과 체결한 불평등 조약을 협상하려고 했으나, 장기적인 근대화 정책을 채택하기 위하여 목표를 포기했다. 사이고 다카모리를 비롯한 신정부의 지도자들은 도쿠가와 충신들에게 관용을 배풀었고, 옛 도쿠가와 막부의 수많은 지도자들에게 신정부의 책임있는 직위를 수여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 전쟁은 일본인들에 의해 낭만적으로 묘사되었고, 이 전쟁에서 비롯된 수많은 사상자가 났음에도 불구하고 메이지 유신을 "무혈 혁명"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이들도 있다.

 

 

배경

막부에 대한 초기 불만

1854년 이전의 두 세기 동안 일본은 도쿠가와 막부에 의해 데지마를 통한 네덜란드와의 무역, 류큐를 통한 중국과의 무역을 제외하고는 외국과의 교역을  엄격하게 제한했다.  그러다가 1854년 막부미국에게 문호를 개방하게 되면서 대외 무역이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막부가 외국과 맺은 굴욕 조항으로 인해 많은 부분에서 불평등 조약이 맺어지자, 외국인 혐오감정과 함께 반막부 감정이 커지게 되면서 사쓰마 번조슈 번을 비롯한 여러 지방 번국에서 존왕양이 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고메이 천황은 그러한 정서에 동의했고, 기회가 있을때마다 불평등 조약을 맹렬히 비판하면서 막부를 연속적으로 질타했다. 막부 정치에 대해서도 발언력을 가지고 있었던 고메이 천황이이 나오스케미·일 수호 통상조약을 비롯한 조약 추진 및 체결 과정에서 천황의 칙허도 얻지 않고 조약을 맺은 사실에 대해 불신을 드러냈고, 분큐 3년(1863년)에는 양이의 칙명을 내리기도 했다(분큐 3년 3월의 양이 칙명). 그 영향으로 일본 내에서 외국인 습격 사건 등의 양이 운동이 발발한다.

 

그러나 이러한 양이 운동은 외세에 의해 사쓰에이 전쟁과 다국적 시모노세키 전쟁으로 어느정도 완화되었다. 동시에 조슈 번의 존왕양이 세력이 교토를 장악하기 위해 반란을 제기했으나, 도쿠가와 막부 세력에 의해 격퇴되었다. 막부조슈 번을 더욱 압박하기 위해 제1차 조슈 정벌을 감행했으나 실제 싸움은 무산되었다. 조슈 번천황측 지도자들의 저항은 가라 앉았지만, 이후 수많은 다이묘들이 막부의 명령을 무시하기 시작하면서 도쿠가와 막부는 전국을 완벽하게 제어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 입증된다.

외국과의 군사 교류

사쓰마 번을 비롯한 여러 지방 번국에서는 육군과 해군의 근대화를 추구하였다. 영국 스코틀랜드계 프리메이슨 상인 토머스 블레이크 글러버는 서쪽 번국에게 군함과 총기류를  판매했으며, 영국 대사 해리 스미스 파크스(Harry Smith Parkes)는 일본내에서 프랑스의 영향력을 견재하기 위해 반막부 세력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이 기간동안 사쓰마 번사이고 다카모리조슈 번이노우에 가오루등 서쪽에 위치한 번국의 지도자들은 어네스트 새이토(Ernest Mason Satow)를 비롯한 영국의 외교관들과 관계를 맺기도 한다.

 

에도시대 말기 도쿠가와 막부의 보병부대 훈련 모습

 

도쿠가와 막부 또한 충돌을 대비해 군사적인 근대화를 추진해나갔다.  나폴레옹 3세의 군사 프로젝트에 감명받은 도쿠가와 막부는 주로 프랑스의 전문 지식에 의존했으며,  크림 전쟁이탈리아 전쟁에서의 성공을 통해 교훈을 획득했다.

막부는 현대적이고 강력한 군대를 건설하기 위해 단계적으로 나아갔다.  신식해군을 구축해 나아갔으며,

8척의 최신식 증기군함을 보유하게 되면서 아시아에서 가장 근대적이고 강력한 해군력을 보유하게된다.

1867년, 1월 나폴레옹 3세도쿠가와 막부의 요청으로 막부육군의 재구성을 위한 프랑스 군사 고문단을 파견하였고, 신정부 세력은 미국의 남북 전쟁에서 사용되었던 철갑함 코테츠(Kotetsu)를 구입하는데 성공한다.

쿠데타

조슈 번내에서 막부에 반대하는 과격 세력들이 속론파를 누르고 쿠데타(시모노세키 거병)를 일으키자, 도쿠가와 막부조슈 번을 토벌하기 위해 제2차 조슈정벌을 감행한다.  1866년 여름 조슈정벌에 나선 막부군은 최신식 무기로 무장한 조슈 번 군대에 의해 무참히 격파되었고 이로인해 도쿠가와 막부는 일본내에서의 명예와 발언권이 크게 실추된다.  이것은 사쓰마 번조슈 번을 크게 자극시켜 삿초동맹(사쓰마-조슈 동맹)이 맺어진다. 1866년 말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가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도쿠가와 막부는 휴전 협정이 불가피해지게 된다.

 

한편 도사 번삿초동맹을 견제하고 신정권을 수립하고자 도쿠가와 막부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에게 '천황에게 국가 통치권을 돌려달라'고 권고하는 타협안을 제시했다. 힘이 약해진 쇼군은 국가 통치권을 돌려준 뒤에도 새로운 정치체제 아래서 권력을 장악해 실질적인 통치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때문에 이 방안을 수용했다. 그리하여 11월 10일 쇼군천황에게 통치권 반환을 신청했고, 마침내 반막부 세력들은 쇼군을 사임시키고 대정봉환을 성공시킨다.

 

그러나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사임은 형식적인 것에 불과했으며,  실질적으로는 내대신(内大臣)에 오른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정권 장악이 계속되었다.  이를 견디지 못한 사쓰마 번을 비롯한 강경파들은 12월 9일에 쿠데타를 일으켜 쿄토를 장악하고, 막부 폐지와 함께 신정부 수립을 선포한다.

 

게이오 3년 (1867년) 말 사쓰마 번사무라이오쿠보 도시미치사이고 다카모리, 그리고 공경가 이와쿠라 도모미왕정복고의 대호령에 의해 요시노부의 내대신(内大臣)관직 사임과 막부의 영지를 조정에게 반납하기를 요구한다. 요시노부는 막부의 영지를 반납하기를 거부했으나, 신정부에 순순히 복종한다는 의사를 표시하기 위해 니조 성을 나와 오사카 성으로 퇴거하였다.

 

보신전쟁에서 신정부가 하사한 금기(錦旗)

 

한편 이를 못마땅해 한 사쓰마 번도쿠가와 막부 세력과의  전쟁의 단초를 만들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폭동공작을 실시했다. 마쓰다이라 슌가쿠도쿠가와 요시카쓰가 사자로 가서 도쿠가와 요시노부에게 이를 통고하자 요시노부의 주위에선 ‘토벌 사쓰마’를 바라는 소리가 높아졌고 이에 요시노부는  사쓰마 정벌을 명목으로 막부 보병·아이즈 번·구와나 번을 주력으로 한 군대 을 교토로 출정시킨다.

물리적 충돌의 시작

도바 전투

 

게이오 4년 (1868년) 1월 26일 저녁, 막부의 군함이 효고 앞바다에 정박하고 있던 사쓰마 번 의 군함을

공격하면서 사실상 전쟁이 시작된다. 도쿠가와 요시노부오사카의 외국 공사들에게 사쓰마 번과의 교전이 시작됨을 통보하였고, 이날 밤, 오사카사쓰마 번 저택을 습격한다. 이날 교토의 남교 도바 및 후시미에서 사쓰마·조슈로 구성된 삿초동맹군과 막부군이 충돌하면서 도바 후시미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 날 막부군은 약 15,000명으로 프랑스식 신식 훈련을 받은 이들이었고, 사쓰마조슈 군대의 병력은 3:1로 열세였지만, 최신예의 미녜총엔필드총으로 무장하고, 암스트롱 곡사포와 약간의 개틀링 포를 보유하는등 완전히 현대화된 군대였다. 첫날, 막부군은 서전의 혼란과 지휘 및 전략의 불비등에 의해 고전을 면치못했다.

 

조슈 번 군대와 요도성에서 후퇴하는 막부군

 

다음날 1월 4일, 막부군의 후퇴는 계속되었고, 이날, 신정부는 닌나지노미야 요시아키 황태자( 仁和寺宮嘉彰親王 )를 정벌 대장군으로 금기(錦旗)·절도(節刀)를 하사하고 출동 명령을 내렸다. 사쓰마군이 공식적으로 관군이 된 이후 도사 번도 신충대(迅衝隊)·호접대(胡蝶隊)·단금대(断金隊) 등을 편성하여 금기(錦旗)를 하사받고 관군에 임명되었다. 반대로 도쿠가와 막부군은 반란세력으로 규정되어 좌막파제번(佐幕派諸藩)들은 크게 동요했다. 이러한 배경으로 인해 요도 번은 막부군의 입성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국 막부군은 요도 번의 성곽도시를 방화하고 야와타 방향으로 후퇴했다. 1월 6일, 막부군은 야와타·야마자키에서 삿초동맹군과 싸우지만, 야마자키 포대에 배치되어 있던 츠 번이 막부군을 포격하기 시작했다. 결국 막부군은 야마자키 이동(以東)의 쿄자카(京坂) 지역에서 패배하고 오사카로 철수하였다.

 

1월 6일 밤, 막부군은  총병력에서 여전히 우위를 점하고 있었으나,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아군을 버리고

오사카 성을 떠나 측근만을 대리고 바다를 통해 에도로 철수하였다(오사카 성의 가을). 이는 적군과 아군을 불문하고 요시노부의 철수작전으로 인식되었다. 요시노부의 후퇴에 의해 막부군은 전의를 상실했으며, 각 번국들 또한 전투를 중단하고 병사를 돌렸다.  전력의 일부는 에도 방면으로 철수했다.

에도의 항복

에도에 도착한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1월 15일 막부 주전파의 중심인물 오구리 다다마사(小栗上野介)를

파면시킨다.  2월 12일에는   에도성을 나와 우에노의 간에이지에 근신하여 메이지 천황에게 반항할

의사가 없는 것을 나타냈다.

한편, 메이지 천황에게서 조적(朝敵) 선고를 받은 마쓰다이라 가타모리는 아이즈로 돌아왔다. 가타모리는 신정부에  탄원서를 제출하고 천황에게 순순히 복종하는 자세를 보이지만, 신정부의 권위는 인정하지 않고, 무장을 해체하지 않을것을 요구했고, 출두도 사죄도 하지 않았다. 한편 에도에서 사쓰마 번의 소란 행위를 단속하면서 신정부에 적의를 품고있던 쇼나이 번의 다이묘 사카이 타다즈미(酒井忠篤)와 아이쇼우동맹(会庄同盟)을 결성하고 삿초동맹에 대항할 준비를 진행한다. 막부에 속한 사람들은 구니모토(国許)에서 근신하거나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따라 동북지방으로 달아나거나,  반신정부 입장에 서 있던 아이즈 번에 의지하여 동북지방으로 달아났다.

니시키에『카츠 누마의 곤도 이사미 그림』

 

신정부는 아리스가와노미야 타루히토 친왕(有栖川宮熾仁親王)을 총독으로한 동정군(東征軍)을 편성하고, 도카이군(東海道軍)·토산도군(東山道軍)·호쿠리군(北陸道軍)으로 에도를 향해 진군했다. 막부군은 코요진무대(甲陽鎮撫隊)를 만들어, 고후 성을 방어 거점으로 하려고했다. 그러나 토산도(東山道)를 끼고 신쥬(信州)에 있던 도사 번이타가키 타이스케, 사쓰마 번의 이지치 쇼우지가 이끄는 부대가 고슈(甲州)로 가서 코요진무대보다 먼저 고후 성에 도착하여 성을 접수했다. 코요진무대는 고후분지(甲府盆地)에서 진군을 계속했지만, 게이오 4년(1868년) 3월 6일, 신정부군과의 전투에서 완패했다.

 

샤구마(赤熊)를 쓴 도사 번의 사무라이

 

한편, 토산도(東山道)로 나아간 토산도군 본대는 3월 8일 부슈우쿠마가야(武州熊谷)숙소에 도착, 3월 9일에 가까운 야나다(梁田)에서 숙박하고 있던 막부군의 충봉대(衝鋒隊)를 기습하여 격파했다.

슌푸(駿府)로 진군한 신정부는 3월 6일, 군 회의에서 3월 15일에 에도성 총공격을 감행할것을 계획했다. 그러나 내전이 조약을 체결한  국가들과의 관계나  무역에 악영향을 줄 것이  우려됐고, 영국 공사 해리 스미스 파크스(Harry Smith Parkes )는 신정부에게 에도 총공격을  중지해 줄 것을  요구했다. 신정부는 외국과의 좋은 관계 유지가  필요했기 때문에  에도 총공격 계획을 중지하는 결정을 내린다.

 

공순파(恭順派)로서 막부의 육군 총재였던 가쓰 가이슈는 동정대 총독부(総督府) 참모의 사이고 다카모리에게 사신을 보내 회담을 요청했고, 항복 조건으로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비젠(備前)을 맡기고, 무기·군함의 인도를 권했다. 사이고는 3월 13일, 다카나와(高輪)의 사쓰마 번 저택에 들어가 이날부터 가쓰와 사이고 사이에  개성(開城)에 관한  협상이 이루어졌다. 다음날 3월 14일, 사이고는 총독부에서 혐상 내용을 검토했고  15일에정되었던 에도 총공격은 중단되었다. 요시노부는 미토로 출발했고, 4월 21일에는 아리스가와노미야 타루히토 친왕(有栖川宮熾仁親王)이 입성하면서 에도무혈개성(江戶無血開城)이 이루어지고, 에도 성은 마침내 신정부의 지배하에 들어간다.

 

 

게이오 4년(1868년) 4월 11일에는 에도무혈개성(江戶無血開城)을 따르지않는 막부의 신하중 일부가 치바(千葉)방면으로 도망쳤고, 후나바시 신궁(船橋大神宮)에 진을 쳐, 5월 24일에 이치카와 후나바시 주변에서 양군이 충돌했다. 이 싸움은 처음에는 막부군이 유리했지만, 최신무기를 가지고있던 신정부군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한편 에도성 개성 이전, 막부 잔당 세력들은 도쿠가와 막부의 성지인 닛코우뵤유(日光廟)에서 병사를 모집하여 신정부군과 충돌하기 위해 대거 에도를 탈출했다. 오토리 게이스케 전습대(伝習隊), 막부 보병 제7연대, 회천대(回天隊)등 총 2,000명의 군사가 2군으로 나뉘어 닛코로 향했으나, 가가와 게이조가 이끄는 신정부군과 4번의 전투끝에 결국 패하였다. 막부군의 선봉부대는 4월 19일 우쓰노미야 성을 공격했고 다음날 성을 점령하지만 성을 탈출한  토산도군(東山道軍)이 약 20,000명의 원군과 합류하였고 오야마 이와오가 이끄는 신정부군은  성을 재탈환했다. 막부군은 닛코에서의 결전을 대비하기 위하여  퇴각했다.

 

한편 도호쿠·훗카이도·니가타에서는 센다이 번의 영주 다테 요시쿠니(伊達慶邦)에 의해 오우에쓰 열번 동맹이 수립되었고 그  2주일 후인 7월 4일, 신정부는 막부군의 쇼기대(彰義隊)를 공격하여 우에노 전쟁이 시작되었다. 조슈 번오무라 마스지로사가 번이 제조한 신병기 암스트롱 곡사포를 활용하여 쇼기대(彰義隊)를 공격했다. 쇼기대(彰義隊)는 속수무책으로 붕괴되었고, 우에노 전쟁은 단 하루만에 신정부군의 승리로 끝난다.

오우에쓰 열번 동맹의 저항

게이오 4년(1868년) 1월 17일, 도바 후시미 전투에서 승리한 신정부군은 센다이 번에게 아이즈 번을 추격할것을 명령했으나, 센다이 번은 움직이지 않았다. 2월 25일, 신정부는 쇼나이 번에게 도쿠가와 요시노부아이즈 번의 토벌군에 참여할것을 강요했지만, 사자(使者)는 이를 거절했다. 아이즈 번은 청원을 통해 천황에게 순순히 복종할것을 표명했지만, 신정부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무장해제도 하지 않았다.

 

4월 23일, 오야마 쓰나요시(大山綱良)가 이끄는 신정부군은 쇼나이 번을 공격했으나, 쇼나이 번이 신정부군을 이기고 덴도성(天童城)을 함락시켰다. 비슷한 시기에 관동에선 오토리 게이스케가 이끄는 막부군이 우쓰노미야 성을 점령했다. 이러한 사실이 동북지방에 전해지자 센다이 번에서는 아이즈 번, 쇼나이 번과 협력하여 신정부군에 대항해야 한다는 의견이 다수를 이루었다. 마침내 동북지방의 다이묘들은 신정부군에 대항하기위해 동맹을 결성한다. 오우에쓰 열번 동맹군의 병력은 약 50,000명으로, 주로 센다이 번, 아이즈 번, 쇼나이 번, 요네자와 번등으로 구성되었다.

 

센다이 번의 군대

 

한편 구보타 번이 신정부에게 접근했다는 것을 감지한 센다이 번은 사자(使者) 7명을 파견했다. 그러나 구보타 번의 존왕양이파는 7월 4일에 센다이 번의 사자(使者)와 모리오카 번의 수행원들을 모두 살해했다.  구보타 번은 끝내 오우에쓰 열번 동맹에서 이탈했고, 동북지방에서 신정부군의 거점이되었다. 구보타 번에 이어 신조 번·혼조 번·야지마 번·카메다 번이 신정부군에 순순히 복종했다. 그러자 7월 14일, 쇼나이 번은 신정부군에게 복종한 신조 번을 공격해 신조 번 다이묘의 거점인 신조 성(新庄城)을 함락시킨다. 또한 쇼나이 번, 센다이 번은 연전연승에 가까운 상태로 구보타 성(久保田城)의 눈앞까지 다가왔다. 모리오카 번은 나라야마 사도(楢山佐渡)가 귀국하면서 오우에쓰 열번 동맹측에 가담할것을 결정했고, 8월 9일에 모리오카 번은 구보타 번에 쳐들어가 오다테 성(大館城)을 공략했다.

 

사라카와 고미네 성 유적

 

시라카와 지역에서도 양군이 충돌했다. 시라카와는 관동과 동북지방의 경계점이어서  시라카와 성은 두 지역 사이의 교통을 관리할 수있는 거점이었다. 이 곳은 에도무혈개성(江戶無血開城) 이후  신정부가 관리하고 있었으나, 6월 20일 아이즈 번과 센다이 번으로부터 탈환당했다. 그러나 7월 1일, 이지치 쇼우지(伊地知正治)가 이끄는 신정부군 500명은 오우에쓰 열번 동맹군으로부터 시라카와 성을 탈환했고, 이후 100여일에 걸쳐 신정부군과 오우에쓰 열번 동맹군간에 공방전이 이루어졌다. 아이즈 번·센다이 번을 주력으로하는 동맹군 4500명은 7차에 걸쳐 시라카와 성 탈환을 시도했으나 실패로 끝난다. 이 전투에서 양군은  약 1,000명의 사망자를 냈다.

 

에치고에는 게이오 4년(1868년) 3월 9일에 개항된 니가타 항이 있었다. 신정부는보신 전쟁 발발에 따라 

개항 연기를 요청했지만, 이탈리아와 프로이센은 신정부의 요청을 무시하고 오우에쓰 열번 동맹군에게 무기 판매를 시작했다. 따라서 니가타 항은 오우에쓰 열번 동맹군의 무기 공급지였다. 신정부군의 이와무라 세이치로우(岩村精一郎)는 공순 공작(恭順 工作)을 중개한 오와리 번의 소개로 나가오카 번의 가와이 쓰구노스케(河井継之助)와 회담했다. 가와이 쓰구노스케(河井継之助)는 신정부가 타번들에게 둔 각종지원의 수락을 거부하고, 독립특행(獨立特行)의 자세와 아이즈 설득의 유예를 간청했지만, 이와무라 세이치로우(岩村精一郎)는 아이즈 번의 신정부 권위 부정을 이유로 들어  즉시 거부했다. 이에따라 나가오카 번과 호쿠에쓰의 제번 총 6곳이 오우에쓰 열번 동맹에 가담하면서 신정부군과 동맹군 사이에 전쟁의 발단이 된다.

 

나가오카 번은 가와이 쓰구노스케(河井継之助)의 헤이세이개혁을 통해 신무기로 새롭게 무장했다. 동맹군은 가와이 쓰구노스케(河井継之助)의 지휘하에 선전했지만, 7월에 나가오카 성을 함락당했다.  7월 25일, 동맹군은 나가오카 성을 다시 탈환하고 신정부군을 패주시키는데 성공했으나, 이때 지휘를 했던 가와이 쓰구노스케(河井継之助)는 부상을 입어 사망했다. 신정부군이 나가오카 성을 다시 장악하자 7월 29일에 나가오카 번은 군대를 철수시켰다. 한편, 신정부군이 군함을 이끌고 상륙하여 요네자와 번과 아이즈 번이 지키는 니가타를 함락시켰기때문에 8월에는 에치고의 전역이 신정부군의 지배하에 들어간다. 이에따라 오우에쓰 열번 동맹은 주요 무기 공급지를 잃고 심각한 위기에 몰렸다.

 

 이타가키 다이스케가 이끄는 신정부군의 신충대(迅衝隊)는 사라카와와 히라카타의 중간에 위치한 나구라 성(棚倉城)을 접수하고, 미하루 번을 무혈개성 시키는데 성공했다. 신정부군은 계속 진군하여 니혼마쓰 성(二本松城)을 점령하자, 8월 7일에 소마 번이 신정부군에 항복했다. 이때 시라카와 주변에서 군대를 주둔시키고 신정부군의 남하 소식을 듣고 있던 오우에쓰 열번 동맹군은 북쪽의 해안가와 나카도리(中通り)가 신정부의 지배하에 들어간 것에 경악했고, 아이즈 번의 영내를 통과하여 영지(国許)로 퇴각했다. 또한 오우에쓰 열번 동맹의 맹주였던 센다이 번은 공순파(恭順派)의 기세가 강해지고 있어 영지 외부로 진군을 취소했다.

 

신정부군의 총사령관 오무라 마스지로(조슈 번)는 센다이 번을 우선 공격할 것을  주장하고 있었지만, 현지(現地) 사령관인 이지치 쇼우지(伊地知正治)(사쓰마 번)와 이타가키 다이스케(도사 번)는 아이즈로 진격하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아이즈 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아이즈 전쟁
손실된 아이즈 와카마쓰 성

 

게이오 4년(1868년) 8월 22일, 니혼마쓰 주변까지 북상하고 있던 신정부군은 오우에쓰 열번 동맹군의 방비가 허술한 아이즈분지에 침공하여 교전이 일어난다. 현지에는 오토리 게이스케등 막부군이 방어하고 있었지만 병력의 규모가 작아 신정부군의 와카마츠 진격을 허용했으며, 당시 아이즈 번 군대의 주력은 관동에서 가까운 영내 남부에 위치한 닛코(日光)와 영지로부터 먼곳에 위치해있어 와카마츠로 진격해오는 신정부군을 저지하는데 부족했다. 또한 신정부군을 측면에서 견제하지도 않고 귀환하는 것을 우선시했기때문에 결국 아이즈 번과 막부군의 잔당 세력은 와카마쓰 성에서 농성(籠城)을 해야만했다.

 

마침내 9월 4일, 요네자와 번이 신정부에게 항복을했고, 요네자와의 다이묘 우에스기 나리노리는 센다이 번에게도 항복을 권고했다. 그 결과 9월 10일, 센다이 번은 신정부에게 항복했으며 잇따라 아이즈 번도 신정부군에게 항복한다. 아이즈 번이 항복하면서 쇼나이 번도 구보타 영내에서 일제히 퇴각했고, 결국 9월 24일, 신정부에게 항복을 선언한다.

홋카이도 작전

에조 공화국의 성립

일본인 장교들과 프랑스 군사 고문관

 

혼슈에서 도쿠가와 막부가 신정부군에게 패배함에 따라 에노모토 다케아키는 막부 함대를 이끌고 프랑스 군사 관계자들과 함께 홋카이도로 달아났다. 이들은 홋카이도의 발전에 전념하고 독립국가를 세울 목적으로 정부를 수립했다. 공식적으로 12월 25일에 에조 공화국을 건국했으며, 이는 일본 역사상 유일의 공화국이었다. 에조 공화국은 미국, 프랑스, 러시아등 하코다테에 있는 외국공관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며, 프랑스는 이에 화답했으나, 메이지 정부는 끝까지 공화국을 부정했다. 초대 대통령 에노모토 다케아키는 홋카이도를 개발하여 자체적인 정권을 유지할 수 있도록 허락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메이지 정부의 국회에 의해 곧바로 거절되었다.

 

1868년 겨울 동안, 에조 공화국은 고료카쿠 요새를 필두로 하코다테의 남쪽 반도에 대한 방어를 강화했다. 군대는 프랑스와 일본의 공동지휘하에 조직되었다. 총사령관은 오토리 케이스케(大鳥圭介)였다. 이들은 군대를 4여단으로 나누어 각각 프랑스군 장교의 지휘를 받도록 했으며, 군대는 다시 8여단으로 나누어 일본인 장교의 지휘를 받도록 했다.

결전과 항복

하코다테 해전

 

신정부군의 함대는 3월 20일에 미야코 항구에 도달하지만, 새로운 선박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고, 에조 공화국은 신정부군의 군함인 코테츠(Kotetsu)를 포획하겠다는 대담한 계획을 세웠다. 그들은 기습 공격을 하기위해 신선조 사령관 히지카타 토시조의 주도로 세 척의 전함을 미야코로 보냈다. 그러나 이 전투는 나쁜 날씨로 인해 도쿠가와측의 전함에 엔진 고장이 일어났고, 전함에 탑승하고 있던 사무라이에 대한 신정부군의 막강한 신무기 공격으로 인해 도쿠가와측의 패배로 끝났다.

 

하코다테 전쟁

 

신정부군은 곧바로 일본 본토에서 그들을 파악하는 역량을 기울였고  8,000명의 군인을 집결시키고, 각 제번의 군함을 모아 함대를 편성하여 에조로 출병했다. 그리하여 하코다테 전쟁이 시작되었다. 한편 에조의 상황이 절망적이라는 것을 파악한 프랑스의 군사 고문관들은 하코다테 만에 주둔해있던 프랑스 선박을 타고 도망쳤으며, 요코하마를 통해 프랑스로 수송되었다. 일본측은 프랑스에게 군사 고문관들을 심판할것을 요청했으나,  민중의  지지를 받은 이들은  자신들의 비겁한  행동에 대한 처벌을 받지 않았다.

 

5월 13일, 신정부군의 참모 구로다 기요타카는 타카마츠 료운(高松凌雲)의 중개로 에노모토 다케아키에게 항복을 권고했다. 에노모토는 이에 응하지 않았지만, 회진(灰塵)되기에는 아까울 것으로 여긴 「만국해율전서」라는 책을 구로다에게 전해 주었다. 이는 해사(海事)에 관한 국제법과 외교에 관한 책으로 에노모토 자신이 번역한 책이었다. 이를 본 구로다는 에노모토가 국제법에 정통(精通)하고 있는 것에 감명받았고, 이후, 에노모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노력한다.

한편 벤텐 다이바는 신정부군의 함포 사격과 상륙 부대의 맹공을  잘 버텨내고  있었지만, 식량이 바닥나는 바람에  5월 15일에 나가이 타카시(永井尚志)를 비롯한 무리들이 신정부군에게 항복했다.

 

구로다는 「만국해율전서」의 답례로, 편지와 함께 술통 5통, 참지 5마리를 고료카쿠에 보내었다. 에노모토는 이 호의를 배수(拝受)하였고, 답례로 군사를 파견해 다음 날 아침 7시까지 휴전을 부탁했다. 신정부군은 그것을 인정하고 고료카쿠에 대한 총공격 개시 일시를 통보했다. 휴전 동안에 막부군 지도자들은 합의하여, 항복과 고료카쿠 개성을 결정한다. 에노모토는 패전의 책임과 패잔병들의 구명 탄원을 위해 자결하려다 우연히 근처를 지나가던 오쓰카 카쿠노죠우(大塚霍之丞)에 의해 제지되었다.

5월 18일 새벽, 에노모토를 비롯한 간부들은 약속에 따라 출두하였고 낮에는 고료카쿠를 개성했다. 이 날 무장 해제도 완료됐고  이로써 하코다테 전쟁과 보신 전쟁은 종결되었다.

전후 처리

게이오 4년 5월 24일, 신정부는 도쿠가와 요시노부에게 사일등(死一等)을 감했으며, 다야스카메노스케(田安亀之助)에 도쿠가와 종가를 상속하고, 슨푸(駿府) 70만 석을 하사한다고 발표했다.

또한, 여러 제번에게 전공(戦功)을 하사하였고, 반대 세력에게는 쇼분(処分)을 감행했다.

전공상전(戦功賞典)
식읍(永世禄)
쇼분(処分)
  • 센다이 번 - 28만 석 감봉(62만 석). 다이묘 다테 요시쿠니는 사일등(死一等)에 감해지고 근신. 가신 6명 중 2명 처형, 2명 할복.
  • 아이즈 번 - 무쓰 토나미 번에 3만 석 전봉(23만 석). 다이묘 가문은 에도에서 금고(후일 해제). 가로(家老) 1명 처형.
  • 모리오카 번 - 옛 센다이령(仙台領)의 시라이시(白石)에 13만 석 전봉(20만 석). 가로(家老) 1명 처형.
  • 요네자와 번 - 14만 석 전봉(18만 석)
  • 쇼나이 번 - 12만 석 전봉(17만 석)
  • 야마가타 번 - 오미노쿠니(近江国) 아사히야마(朝日山)에 전봉, 아사히야마 번을 립번(立藩). 석고(石高)는 5만 석을 유지. 가로(家老) 1명 처형.
  • 니혼마쓰 번 - 5만 석 전봉(10만 석)
  • 다나구라 번 - 6만 석 전봉(10만 석)
  • 나가오카 번 - 2만4천 석 감봉(7만4천 석).
  • 조자이 번 - 카이에키(1만 석), 번의 중신 사형. 다이묘 하야시 타다타카(林忠崇) 투옥.
  • 이치노세키 번 - 2만7000 석 감봉(3만 석)
  • 가미노야마 번 - 2만7000 석 감봉(3만 석)
  • 후쿠시마 번 - 미카와노쿠니(三河国) 시게하라 번에 2만 8000석 전봉
  • 가메다 번 - 1만8000 석 감봉(2만 석)
  • 덴도 번 - 1만8000 석 감봉(2만 석)
  • 이즈미 번 - 1만8000 석 감봉(2만 석)
  • 유나가야 번 - 1만4000 석 감봉(1만5000 석)
  • 시모테도 번 - 옛 영지인 치쿠고노쿠니(筑後国) 미이케(三池)에 전봉. 석고(石高)는 1만 석을
  • 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