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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시대의 번-메이지유신 주도 인물 출생지>조슈번 관련 이야기

Bawoo 2015. 6. 12. 00:08

 

조슈 번(일본어: 長州藩 (ちょうしゅうはん) 조슈한[*])은 지금의 야마구치 현에 해당하는 스오노쿠니나가토노쿠

 

의 2개 구니를 지배했던 일본 에도 시대이다. 번주는 토자마 다이묘인 모리 가문(毛利氏)으로, 가격(

家格)은 국주격(国主格)에 해당되었다.

번청은 오랫동안 하기 성에 두었기 때문에 하기 번(萩藩)으로 표기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막부 말기에는 스오노쿠니의 야마구치에 있었던 정사당(政事堂)으로 번청을 옮겼기 때문에 스오 야마구치 번(周防山口藩)으로 표기하는 경우도 있다. 일반적으로 하기 번・야마구치 번 시대를 통틀어 「조슈 번」으로 표기하는 경우가 많다.

에도 막부 말기에는 사쓰마 번과 함께 막부 타도 운동의 중심이 되었고,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많은 정치가를 배출하여 「초슈바츠(長州閥)」를 형성했다. 「초슈바츠」는 당시 일본의 정치를 지배한 한바츠 정치(藩閥政治)의 영향으로 형성된 정치 세력이었다.

역대 번주

  1.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 재위 1600년 ~ 1623년
  2. 모리 히데나리(毛利秀就) 재위 1623년 ~ 1651년
  3. 모리 츠나히로(毛利綱広) 재위 1651년 ~ 1682년
  4. 모리 요시나리(毛利吉就) 재위 1682년 ~ 1694년
  5. 모리 요시히로(毛利吉広) 재위 1694년 ~ 1707년
  6. 모리 요시모토(毛利吉元) 재위 1707년 ~ 1731년
  7. 모리 무네히로(毛利宗広) 재위 1731년 ~ 1751년
  8. 모리 시게타카(毛利重就) 재위 1751년 ~ 1782년
  9. 모리 하루치카(毛利治親) 재위 1782년 ~ 1791년
  10. 모리 나리후사(毛利斉房) 재위 1791년 ~ 1809년
  11. 모리 나리히로(毛利斉熙) 재위 1809년 ~ 1824년
  12. 모리 나리모토(毛利斉元) 재위 1824년 ~ 1836년
  13. 모리 나리토(毛利斉広) 재위 1836년
  14. 모리 타카치카(毛利敬親) 재위 1837년 ~ 1869년
  15. 모리 모토노리(毛利元徳) 재위 1869년

지번

같이 보기

 

시모노세키가 속해 있는 야마구치 현은 모리씨(毛利氏)를 번주로 한 에도시대의 조슈번(長州藩)에 해당한다. 무로마치시대까지 이 지역을 할거했던 오우치(大內)를 멸망시키고 모리 모토나리(毛利元就, 1497~1571)가 패권을 잡은 이래, 모리씨는 오다 노무나가(織田信長)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집권기를 거치며 주코쿠(中國) 지방 8개국 120만 석 규모를 호령하는 전국 다이묘(戰國大名)로 성장했다. 그러나 모토나리(元就)의 손자 테루모토(輝元)는 1600년 세키가하라(關ヶ原) 전투에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동군에 맞서 서군의 총대장으로 출진했다가 패배했다. 그 결과 방대한 영지를 몰수당하고 나가토(長門)ㆍ스호(周防) 2개국 36만 석으로 감봉(減封)을 당했다. 거점이었던 히로시마에서도 쫓겨났다.

 

1603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쇼군(將軍)으로 임명된 이후 다이묘(大名)들은 쇼군과의 친소관계에 따라 신판(親藩)ㆍ후다이(譜代)ㆍ도자마(外樣)로 분류되었다. 도쿠가와 가문의 근친인 신판이나 세키가하라 전투 이전부터 도쿠가와씨의 가신으로 신임을 받았던 후다이와 달리, 도자마 다이묘는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에 복종한 다이묘였기에 막부로부터 경원시되었으며 시코쿠ㆍ큐슈 등 변경에 배치되었다. 모리씨 역시 화려했던 과거를 뒤로하고 도자마 다이묘가 되어 변방으로 밀려났다.

 

패장 모리 테루모토(毛利輝元, 1553~1625)는 갓 신축한 히로시마성을 넘겨주고 변방 중의 변방인 하기(萩)로 거점을 옮겨야 했다. 당시 새로운 성지의 후보로 오우치시대 이래 번성했던 야마구치, 세토 내해에 접해 있는 교통요지 호후(防府), 그리고 궁벽한 하기(萩) 세 곳이 거론되었다. 다이묘의 거성(居城)은 조카마치(城下町) 발전의 핵심요건이었다. 따라서 그 위치는 단순히 군사적 측면만이 아니라 교통, 물자운집 등 정치적ㆍ경제적 중심지로서의 발전 가능성을 가진 요충지여야 했다. 그럼에도 막부는 세 후보지 가운데 가장 궁벽진 하기를 새로운 성지로 지명했다.

 

그로부터 약 250년 뒤에 새 시대의 물결이 들이치는 가운데, 외진 이 항구도시에서 막부를 무너뜨리고 메이지유신을 성공으로 이끄는 혁신의 주역들이 연이어 배출됨으로써, 파란만장한 역사의 아이러니는 극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하기(萩), 메이지 유신의 발상지


시모노세키에서 한적한 도로를 약 2시간가량 달려 하기시에 도착하더라도, 사람 구경하기가 쉽지 않다. 이곳이 메이지유신의 명망가들을 배출한 혁신의 도시였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도시는 고요하다. 개항 후 번청(藩廳)을 야마구치로 옮긴 이래, 하기는 다시 이전의 궁벽진 고요 속으로 침잠해버린 것일까.

 

조슈번의 중심부가 된 하기는 개항기까지 약 260년간 울분과 수치 속에서도 조카마치(城下町)로서 번성했다. 지금도 하기성터를 비롯해서 에도시대 무사가옥이나 상가 등의 거리 모습이 잘 보존되어 있다. 현지 주민을 만나기 어려운 대신 유적지에는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다. 그러나 하기의 영광은 과거에 속한다. 깃발 든 관광가이드를 따라 발자국 소리조차 없이 고요히 움직이는 일본인 관광객들은, 오늘의 하기가 아니라 오늘의 일본을 있게 한 역사 속의 하기를 본다.

 

하기는 일본 역사 최대의 정치변혁이라 할 메이지유신이 태동한 땅이다. 에도막부체제를 무너뜨리려는 존왕양이(尊王攘夷)운동과 토막(討幕)운동을 거쳐 왕정복고와 근대국가 수립이라는 격동의 소용돌이가 시작된 곳이 이곳이다.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을 비롯하여 다카스키 신사쿠(高杉晉作), 가쓰라 고고로(桂小五郞, 뒤에 기도 다카요시) 등 메이지유신의 주역은 물론이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가쓰라 타로(桂太郞) 등 메이지시대를 이끌어간 주역들이 모두 하기 출신이다.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1830~1859)

요시다 쇼인
나가토국(長門國, 지금의 하기시)에서 하급무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스무 살이 되던 1850년에 번주의 허가를 받아 큐슈로 유학을 떠났다. 그곳에서 아편전쟁의 전말을 알게 되어 큰 충격을 받았다. 이듬해에는 에도로 가서 사상가 사쿠마 쇼잔(佐久間象山)에게 서양학문을 배웠고, 번주의 허가도 없이 각지를 돌아다니며 견문을 넓혔다. 그는 무단으로 번을 이탈한 죄로 처벌당할 처지에 놓였지만, 그의 재능을 아낀 번주의 도움으로 다시 에도 유학길에 오를 수 있었다. 1853년 페리함대가 내항했을 때 미국 함대의 정세를 탐색한 그는 무조건적인 주전론의 무모함을 깨달았다. 외국사정을 널리 알아야 한다는 필요성을 통감하고 외국유학을 결심했다.


 

 

1854년 3월 ‘미일 화친조약’의 체결을 위해 다시 내항한 미국함대를 이용, 해외밀항을 기도했으나 실패하고 투옥되었다. 그는 고향에 칩거한다는 조건으로 출옥한 뒤 하기로 내려가 사설학교인 쇼카손주쿠(松下村塾)를 개설하고 하급무사들을 가르쳤다.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를 비롯,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晉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등 그의 문하생들은 후에 조슈번의 실력자로 성장했고 이후 막부를 전복시키고 왕정복고를 실현한 메이지유신의 주역으로 활동하게 된다.

 

1858년 막부가 천황의 칙허를 얻지 않고 미일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자, 열렬한 존왕론자였던 요시다 쇼인은 막부를 비판하는 한편 로쥬(老中) 마나베 아키카쓰(間部詮勝)에 대한 암살 계획을 세웠다. 그는 막부에 의해 1859년 에도로 호송 투옥되었으며, 심문과정에서 암살계획이 드러나 사형에 처해졌다. 그의 나이 30세였다. 이러한 청년 요시다 쇼인의 강렬한 삶과 죽음은 일본사의 운명을 결정한 메이지유신과 겹쳐지며 일본의 ‘성공한’ 근대와 혁신을 상징한다. 그 때문에 지금도 많은 일본인들이 그의 유적지와 기념관을 찾아와 혁명을 추구하며 뜨겁게 살다간 그의 삶을 돌아보고 기억한다.

 

[요시다 쇼인 유적지]

 

[쇼카손주쿠]

 

 

요시다 쇼인의 구택과 쇼카손주쿠(松下村塾), 쇼인진자(松陰神社), 요시다쇼인역사관 바로 옆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가 청년기를 보냈던 가옥이 남아 있다. 이토는 스호국(周防國, 지금의 야마구치현 야마토쵸)에서 평민의 장남으로 태어났지만, 부친이 하기번(萩藩) 하급무사의 양자로 들어간 것이 계기가 되어 하기로 이주해왔다. 이토는 십대에 요시다 쇼인 문하에서 교육을 받고 존양운동의 지사로 활동했다. 그는 1863년에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등과 함께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지만, 영국 등 4개국 함대와 조슈번 사이에 전투가 있자 급거 귀국하여 화의를 성사시켰다. 지금 보존되어 있는 가옥은 전형적인 하급무사의 집으로, 28세 때인 1868년에 메이지 정부의 효고현 지사로 부임할 때까지 십여 년 간 거주했던 곳이다.

 

이토의 구택 바로 옆에는 이토가 도쿄에서 살았던 고급저택이 자리하고 있다. 이 가옥은 1907년, 그가 권력의 최정점에 있던 시기에 건립된 것으로 1998년에 이 자리로 옮겨졌다. 당시로서는 최고급 건축재와 장식재를 사용한 고급저택이었지만, 1909년에 하얼빈 역두에서 안중근에게 암살당함으로써 저택은 주인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토 히로부미가 청년기를 보낸 집, 쇼카손주쿠 바로 옆에 있다]

 


요시다 쇼인의 문하생으로,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와 함께 메이지유신 삼걸로 꼽히는 기도 타카요시(木戸孝義, 1833~1877) 역시 하기 출신이다. 조슈번 번의(藩醫)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10대에 번에서 세운 학교인 명륜관(明倫館)에서 요시다 쇼인에게 배웠다. 30대에는 번의 요직을 차지하는 한편 교토로 나가 중앙정치에도 개입했으며, 1866년 사쓰마번(薩摩藩, 지금의 가고시마)과 조슈번이 동맹을 맺어 도막(倒幕)세력을 형성하게 만든 주역이다. 메이지유신에 성공한 이후, 조선 정부가 기존 외교관례를 어겼다는 이유를 들어 메이지 정부가 보낸 국서의 접수를 거부하자 ‘정한론(征韓論)’을 주창했다. 세이난(西南) 전쟁이 한창이던 1877년에 45세를 일기로 교토에서 병사했다. 그가 고향을 떠나 중앙으로 나가기 전까지 약 20년 동안 살았던 가옥이 지금까지 보전되어 관광객에게 공개되고 있다.

 

 우리에게는 가쓰라-테프트 조약의 주역으로 낯익은 가쓰라 타로(桂太郞, 1847~1913)도 이곳 출신이다. 그는 하기시에서 태어나 세 살 때 현재의 구택이 있는 하기시내 동쪽 가와시마(川島)로 이주했다. 어린 시절 명륜관에서 수학했으며, 구막부군과 메이지 신정부군 사이의 내전인 무진(戊辰) 전쟁 때는 신정부군의 참모로 활약했다. 1898년에는 육군대신이 되었으며, 1900년에는 척식대학을 창설했고, 1901년 이후 세 차례나 수상을 역임했다. 1902년에 영일동맹이 체결될 당시 수상이었으며, 1905년 7월 29일에 맺어진 가쓰라-테프트 비밀협약의 주역이기도 하다. 지금 남아 있는 가옥은 1909년에 신축된 것으로, 마당에는 척식대학 창설 100주년을 기념해서 대학 측에서 건립한 동상이 있다.


[하기시 지도]

 

 


하기성은 1604년에 모리 테루모토가 시즈키 산록에 축성했기 때문에 시즈키성이라고도 불린다. 메이지 7년(1874)에 천수각 등의 건물이 모두 해체되고 지금은 돌담과 도랑 등에서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있을 따름이다. 하기성터 바로 앞에는 일본에서도 명성이 높은 하기야키(하기도자기) 공방들이 있다. 일 년에 한두 차례는, 뒤로 갈수록 높아지는 계단식 가마에서 도자기를 굽는다고 한다.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하기야키의 기원 역시 조선이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으로 출병했던 모리 테루모토에 의해 조선 도공 이작광(李勺光)ㆍ이경(李敬) 형제가 히로시마로 끌려왔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의 패전 이후 거성을 하기로 옮길 당시 이씨 형제도 하기로 와서 가마를 설치하고 도자기를 만들면서 하기야키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하기야키는 조선식으로 경사지게 만든 가마에서 낮은 온도로 장시간 열을 가하여 굽기 때문에 보습성이 뛰어나고, 소박한 모양과 장식을 특징으로 한다.


[하기성터]

 


하기는 근대국가 일본에 대한 일본 국민의 집합적 기억을 응축하고 있는 도시이다. 그러므로 필연적으로

이곳에서 배출된 혁명의 풍운아들 대부분이 우리에게 익숙한 침략자들과 겹친다. 역사는 단순한 제로섬이 아닐 터인데, 한일 양국의 근대사는 팽창과 침략의 이분법으로 잘 짜여 있는 퍼즐 같다. 한쪽이 오목이면

다른 한쪽은 볼록인 동아시아의 역사는, 가해와 피해, 성공과 실패, 공격과 저항의 구분을 따라 정교하게

구축되고 재생산되어왔다. 일본인의 영웅이 한국인에게 원수가 되는 식의 이 관계는, 너무나 엄연하고 객관적인 것이어서 달리 파악할 수는 도저히 없는 것일까. 동아시아의 근대사를 국가를 주어로 한 근대국가의 성립과정으로 파악하는 한, 그러한 틀을 벗어나기는 어려워 보인다. 동아시아의 평화와 공존을 말하지만, 그것을 이루기 위한 기초를 형성하는 것은 지금과 같은 인식틀 아래에서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기존의 지배적인 역사인식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대안이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나마 가능한 시도는 주변인의 시점, 이방인의 관점을 도입해보는 것이다. 변방 중의 변방이었던 조슈의 지배층, 지식인, 민중들에게 천황이나 에도 막부나 서양세력이 어떻게 인식되었는지를 상상해보면, 그것은 메이지 일본의 ‘성공’을 평가의 기준으로 삼는 결과론적 관점과는 사뭇 다를 것이다. 조슈번은 막부에게 ‘조정의 적’으로서 타도의 대상이었지만, 왕정복고 이후에는 오히려 막부가 ‘조정의 적’으로 규정되어 토적의 대상이 되었다. 승리한 근대 일본의 역사에는 침략을 당했던 한국만이 아니라 패배하고 진압당한 무수한 내부의 일본이 있다. 이처럼, 공식화된 역사와는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려는 시도를 통해 정교한 이분법의 역사이해와는 좀 다른 상상력을 만들어 가는 것이 새로운 인식을 위한 출발점이 아닐까.

토막(討幕) 운동의 중심지, 야마구치


오우치시대에 ‘서쪽의 수도’라고 불릴 만큼 번성했던 야마구치시는 에도시대에 침체상태에 빠졌다가 개항 이후 다시 역사의 중심무대로 부상한다. 당시의 번주 모리 다카치카(毛利敬親)가 1863년 번청(藩廳)을 하기에서 야마구치로 전격 이전시켰다. 막부에 대해서는 ‘하기가 편벽된 곳에 있고 교통이 불편하여 만일 외국의 공격을 받게 되면 대처하기 어렵다. 번의 중앙에 위치한 야마구치로 번청을 옮기는 것이 양이(攘夷)정책을 추진하기에 용이하다’는 논리를 폈다. 조슈번에서는 다카스키 신사쿠(高杉晉作), 가쓰라 고고로(桂小五郞, 뒤에 기도 다카요시) 등 존왕양이(尊王攘夷)를 추구하는 급진파가 실권을 장악했다. 그들은 보수파를 제압하고 개혁을 이루기 위해 호농과 호상의 세력을 배경으로 갖고 있던 야마구치를 새로운 정치무대로 선택했던 것이다.

 

야마구치로의 번청 이전이 진행 중이던 1863년 5월, 조슈번은 시모노세키 해협을 통과하는 미국 상선과 프랑스 군함, 네덜란드 군함을 포격했다. 이 사건은 전국적으로 존왕양이세력의 사기를 드높였고 존왕양이운동은 최고조에 달했다. 그러나 교토를 장악하고 있던 존왕양이파는 막부정치의 개혁을 추진하던 공무합체파가 일으킨 8ㆍ18정변으로 세력을 잃었다. 1864년에는 존왕양이파의 중심인 조슈번이 세력만회를 모색하면서 막부 및 공무합체파와 군사적 충돌까지 일으켜 많은 지도자를 잃고 조적(朝敵)이라는 낙인까지 찍혔다. 막부는 조정의 적을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조슈번 정벌에 착수, 서남의 각 번에 대해 출병을 명령했다. 게다가 조슈번은 전년도의 포격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영국ㆍ프랑스ㆍ미국ㆍ네덜란드 4개국 함대의 공격까지 받아 3일 만에 패하고 말았다. 이에 조슈번에서도 존왕양이파가 실각하고 보수파가 권력을 잡았다. 보수파의 사죄로 막부도 조슈번 정벌을 중지했다. 그러나 정벌군이 철병한 뒤인 1864년 말~1865년 초에 다카스키 신사쿠(高杉晉作) 등이 반란을 일으켜 다시 조슈번의 실권을 장악함으로써 막부와의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어갔다.

 

서남 지역을 대표하는 조슈번과 사쓰마번은 모두 막부에 반대하면서도 상호대립했다. 1863년의 정변과 1864년 막부의 조슈번 정벌에서도 사쓰마번은 막부의 편을 들었다. 그러나 양 번(藩)의 실권자들 사이에 제휴가 형성ㆍ발전되면서 1866년 1월에는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의 주선으로 조슈번의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와 사쓰마번의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가 6개조의 맹약을 체결, 조슈와 사쓰마는 공수동맹을 맺었다. 1866년 6월, 막부는 제2차 조슈정벌을 개시, 막부의 군함이 조슈번을 포격했다. 그러나 사쓰마번의 지원 속에 조슈번은 우수한 무기로 무장하고 강력하게 대응했다.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德川家茂)가 병사하자 막부군이 전투를 중지하고 철병함으로써 전쟁은 조슈번의 일방적 승리로 끝났다.

 

조슈와 사쓰마의 동맹은 막부 타도를 추구하는 토막(討幕)운동을 격화시켰으며 결국 메이지 신정부 수립으로 귀결되었다.

 

[가메야마하치만구(龜山八幡宮)의 포대 자리.

조슈번은 양이(攘夷)정책의 일환으로 이곳을 비롯해 여러 곳에 포대를 설치했다. 이곳의 포대는 1863년 5월 서양의 상선과 군함을 목표로 포격을 가했다. 그 직후 번주는 이 신사에서 이적(夷敵)의 항복을 기원했지만, 1864년 서양 함대의 공격에 항복하면서 일본의 저항은 막을 내렸다.]


1867년 10월, 17세기 이래 일본을 통치해왔던 막부의 15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는 천황에게 정권을 반환했다. 그러나 형식적인 반환일 뿐 내심으로는 실질적인 권력을 그대로 유지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천황은 이러한 막부의 희망을 좌절시키면서 12월에 막부의 폐지와 왕정복고를 공표했다. 막부군은 신정부의 영지반환 요구에 반발하면서 1868년 1월 천황이 머물고 있는 쿄토를 공격했다. 이에 조슈번과 사쓰마번이 중심이 되어 구성한 신정부군과 구막부군 사이에 내전이 벌어졌다.(무진전쟁) 이 전쟁은 이듬해에 구막부군의 항복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내전이 한창 진행 중이었던 1868년 3월에 메이지 천황은 친정의 개시와 개국의 정치이념을 공표했다.

 

메이지유신이라는 정치 프로젝트의 성공에는 사쓰마와 조슈 간의 연합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한 삿쵸(薩長)동맹을 비밀리에 성사시켜 메이지유신의 계기를 마련했던 자는 도사번(土佐藩)의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 1835~1867)였다. 그는 메이지유신 직전인 1867년에 막부가 보낸 자객에 의해 교토에서 암살되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33세였다. 한편, 사쓰마번 출신으로 무진전쟁 당시 막부 토벌군의 참모장으로 야전군을 총지휘했던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1827~1877)는 1873년 ‘정한론(征韓論)’을 둘러싼 갈등으로 낙향했다. 그는 1877년에 옛 무사들이 주축이 되어 일으킨 세이난(西南)전쟁에서 신무기로 무장한 정부군에 패퇴하여 할복자결했다.

 

오우치시대에 번성했던 도시답게 야마구치시에는 당시에 피어났던 문화를 보여주는 유적이 많다. 루리코지(瑠璃光寺) 경내에 남아 있는 5층탑은 15세기 중엽에 완성되었다고 전해지며, 오우치문화의 최고걸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수려한 탑의 모습에 취해서 중세의 야마구치를 상상하며 주변을 둘러보다가 코잔(香山)공원으로 들어서면, 다시 격동의 시대가 펼쳐진다. 이곳에는 막말 조슈번주 모리 다카치카(毛利敬親)가 막부토벌을 획책했던 로산도(露山堂)라는 다실(茶室)이 있고, 사쓰마와 조슈의 동맹을 위해 양측 인사들이 모여 밀의를 한 친류테이(枕流亭)라는 2층 건물이 옮겨져 있다. 좁은 실내에는 일본 근대사를 주름잡은 풍운아들의 이름과 사진이 전시되어 있는데, 당대 역사의 무거움과 묘하게 대조를 이루는 건물의 소박함에 오히려 충격을 받게 된다.

 

[친류테이]

 

[루리코지 5층탑]

 

* 출처: 블로그-화이부동 원글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