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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전쟁 당시 도쿄 공습 아이디어를 내고 지휘한 지휘대장 두리틀 중령 관련 이야기

Bawoo 2015. 5. 31. 21:49

▲ 호넷33

최신형 항공모함 기동대를 운용, 세상에 없던 전쟁을 일으켜 진주만을 유린한 날. 이날은 미국 시각으로는 12월 7일이고 일본 시각으로는 12월 8일이었다. 이날 이전에는 항공모함이 보조함으로 간주되기도 했지만 하와이를 불시에 기습해 놓고 보니 항공모함은 그동안 전시에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던 전함의 역할을 능가하는 주력함임을 스스로 입증했다.

이날 히로히토는 비겁하게도 진주만 기습 30분 뒤에 미국에 대한 최후통첩을 날린 뒤, 이어서 2시간 뒤에는 싱가포르를 폭격하고 다바오와 괌, 상하이에 있던 미국 포함 웨이크에 대한 공습까지 해치운다. 히로히토는 아침 7시 10분에 전황의 개요를 보고 받았고 이어서 5분 뒤에 군령부의 전황을 보고 받는다. 7시 30분에는 참모총장의 전황보고가 있었다. 계속해서 추밀원 임시회의 참석과 선전조칙발표, 육해군 칙어 하달, 주축국인 일본 독일 이탈리아의 3국 군사협정에 대한 보고, 하와이 공습성과 보고, 2번의 기도시간 등 쉴 틈도 없이 바쁘게 전황을 챙기면서 보냈다. 

“오늘 하루 종일 해군복 차림으로 흐믓하게 배알을 받으시다.” 해군시종무관 조 에이이치로의 일기가 기록한 이런 자료를 보면 히로히토가 전쟁에 반대했다거나 허수아비라서 개전의 실상을 잘 몰랐다는 식의 과거 태평양전쟁 자료의 이야기가 허구였음을 알 수 있다. 히로히토는 인류 첫 항공모함 기습전쟁의 가장 수뇌부에서 지휘한 부대장이었다. 

선전포고 없이 비겁하게 평화로운 일요일의 새벽을 뒤흔든 하늘의 닌자들은 이후 16일이 걸려서 일본으로 돌아갔다. 12월 23일 크리스마스 직전이었다. 이들은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이후 한동안 일본은 연합군을 상대로 불패의 신화를 떠들면서 자만에 빠지게 된다.

● 항공모함에는 항공모함으로 보복한다 

이에 비해 미국은 큰 혼란과 공포에 뒤덮이게 된다. 일본이 미국 본토에 대한 공격을 할 수 있다는 공포였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도 벌렁댄다’는 속설을 입증하듯이 1942년 2월 24일 새벽 LA상공 미확인 미행물체를 향해 수백 발의 대공 포탄을 쏘아대는 헤프닝도 벌어졌고, 이날엔 일본의 대형 잠수함이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산타 바바라 엘 우드 석유 제유소를 포격하는 사건이 겹쳤다. 당연히 유언비어로 '일본군은 시카고까지 폭격한다'라는 말도 돌았다. 

미국으로서는 전세와 국민의 사기를 반전 시킬 특단의 대책이 필요했다. 루즈벨트의 도쿄 폭격 방안을 내놓으라는 닦달이 이어졌지만 우선 해군이 보유한 함재기는 작전거리가 500㎞가 안되었다.고민 끝에 해군성 작전참모 로우 대령이 제시한 항공모함을 일본 근처까지 접근시켜서 행동반경이 1,000㎞가 넘는 육상폭격기로 일본 본토를 폭격한다는 계획을 채택한다. 바닥까지 떨어진 미국의 전체적인 사기 상승을 위해서 세운 작전 내용이었지만 항공모함을 일본 근해까지 접근시켜야 하므로 기습 전에 들켜서 당할 확률이 많아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래도 폭격기는 항속거리가 길기 때문에 멀리서 발진시킬 수 있었고 최악의 경우 작전이 실패하더라도 항공모함을 비롯한 함대는 살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륙하면 폭격기는 착륙거리가 길어서 항공모함에는 다시 돌아올 수도 없고 공격 이후에는 최대한 일본에서 먼 동맹국에 착륙 또는 비상 탈출하는 것으로 작전 컨셉을 잡았다. 거의 죽으러 가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자살 특공대였던 셈.

그래서 선택된 항공모함이과 폭격기는 CV-8호넷과 B-25 미첼(Mitchell) 중폭격기였고 지휘는 두리틀 중령이 맡았다.   

B-25를 싣고 항해 중인 호넷과 호위함
● 전설로 남은 80인 두리틀 특공대

 

짧은 거리의 항공모함 갑판에서 이륙하려니 조종사들은 육군을 통틀어서 최정예의 에이스들을 뽑았다. 이 작전의 책임자 두리틀(1896~1993) 중령. 그는 이미 1920년 슈나이더 수상기 대회 우승 등으로 명성을 얻은 인물이었다. 슈나이더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할 정도면 비행기 조종에 대해서는 최고급 전문가로 통하던 시절이다. 

두리틀 중령. 준장으로 특진했다.
우선 그는 대원들을 상대로 플로리다주의 한 공군기지에서 3주간 150m 활주로에서 뜨는 훈련에 돌입한다. 폭격기는 최대한 중량을 가볍게 개조에 들어갔다. 무전기도 버리고 기관총도 기체 상부의 것과 기체 전면의 것만 남기고는 전부 떼어버렸다. 대신 나무로 된 가짜 기관총을 달아 놨다. 또한 어차피 작전상 목적을 달성한 후에도 비행기를 버려야 하므로 기체가 격추 당하거나 포획 당할 경우를 대비해 최첨단 노던 폭격용 조준기 대신 간이형 육안 폭격조준기를 달았다. 뜰 수만 있도록 했다. 승무원도 원래 6명이지만 기관총을 버리니 5명으로 줄었다. 80명의 조종사들과 승무원들은 혹독한 이륙 훈련을 받았다.

 

한편 노퍽 해군기지에 정박 중이던 항공모함 호넷에는 함재기들이 치워지고 대신 육군의 B-25 중폭격기가 실린다. 함재기와 육군의 항공기는 구조부터 달랐다. 후크도 없는 육군의 B-25를 본 승조원들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아무도 말을 안해주니 알수 없는 일. 이어서 육군 항공대의 조종사들이 배에 올랐다. 그저 폭격기를 수송하러 가는 줄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1942년 4월 2일, 순양함 2척과 구축함 4척의 호위를 받으며 미국의 8번째 항모 호넷은 의장대나 군악대의 환송도 없이 조용히 샌프란시스코 항구를 빠져나갔다. 

이어서 4월 8일에는 항모 엔터프라이즈와 2척의 중순양함과 3척의 구축함으로 구성된 미 제 16기동 부대가 진주만을 출항한다. 호넷을 호위하기 위한 부대였다. 핼시 중장이 지휘를 맡았다. 4월 13일 태평양 상에서 호넷과 엔터프라이즈가 만나 강화된 16기동대는 16노트의 속력으로 발진 지점을 향해 은밀한 항해를 시작한다. 

4월 18일 새벽 3시 경, 엔터프라이즈의 레이더엔 일본의 순시선이 잡혔으나 조금 더 도쿄에 접근하기 위해 서쪽으로 23노트의 속력으로 항진을 해나간다. 일본 본토에 다가 올수록 일본의 감시선 활동은 더욱 빈번해졌고 마침내 아침 7시 38분 북위 35도 45분, 동경 153도 40분 호넷 견시의 눈에 일본 감시선의 마스트가 들어왔다. 일본의 수도 도쿄까지의 거리는 약 1,070km. 당초 계획보다 300km 가까이 더 먼 거리였다.  

곧바로 핼시 제독은 두리틀 중령에게 “두리틀 중령과 그의 용감한 지도력에게 행운과 신의 가호가 있기를 - 핼시”라는 전문으로 발진 명령을 내린다.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날 아침 해상엔 시속 30km가 넘는 풍랑이 세차게 몰아치고 있었다. 모의훈련 이외에는 항공모함에서 이함한 적이 없는 두리틀 특공대 조종사들은 쌍발 폭격기의 엔진을 최대한 가속한 채 맞바람을 헤치면서 항공모함의 갑판을 질주했다. 육중한 중형폭격기들은 1,141갤런의 연료를 만재하고 225kg 짜리 폭탄 4개씩을 실은 상태였다. 그때까지 항공모함에서 이함한 항공기들 중 가장 크고 무거운 항공기로 기록을 남겼다. 

맨 처음 이륙에 나선 1번기는 다른 B-25가 항모 갑판에 주기해 있었기 때문에 이륙 거리도 짧았다. 힘껏 튕겨져 나간 1번기는 아슬아슬하게 갑판을 박차고 올랐다. 항공모함에서 중폭격기가 이룩한 첫 이륙이었다. 1번기의 조종간은 두리틀 중령이 직접 잡았다. 이를 모범을 따라서 2번기, 3번기가 이륙을 한다. 무거운 중량탓에 일부는 수면에 꽂힐 뻔했지만 모두 이륙에 성공했고 기수를 일본 본토를 향했다.

오전 9시 20분, 16기의 B-25 의 발진을 끝낸 항모 호넷과 엔터프라이즈를 비롯한 제16기동부대의 함선들은 즉시 항로를 변침, 동쪽을 향하여 최대속도로 달아나기 시작한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 도쿄 상공의 단 30초, 짧지만 큰 공포 남기다 

두리틀 공격대는 고도 60m 의 초저공으로 서쪽을 향했다. 긴장어린 장시간 비행 끝에 이윽고 해안선이 보였고 12시 30분 경에 목표 상공에 도달하자 고도를 360m로 높이면서 폭격을 시작했다. 

정밀 조준기 마저 떼어낸 터라 육안 폭격에 의존 할 수밖에 없었던 B-25였지만 우선 공장으로 보이는 산업시설을 골라 폭격을 개시하였다. 16대 가운데 13대는 도쿄의 유류 저장소, 강철 공장, 발전소 등에 폭격을 가했고 나머지 3대는 나고야 및 한신 공업 지대와 요코스카 군항을 폭격하여 나고야의 미쓰비시 조립공장에 피해를 주고 요코스카에서 건조 중이던 경 항공모함 류호에 폭탄을 명중시켰다. 

그러나 1기당 단 4개의 폭탄을 떨어뜨리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30초였다. 엄청난 폭발음과 연기가 하늘을 뒤덮고 마른 하늘에 날 벼락을 맞은 일본인들은 순식간에 공황상태에 빠졌다. 사상자 363명, 가옥파괴 약 350동으로 피해는 크지 않았다. 커다란 전술적인 폭격 효과를 기대하기는 힘들었지만 불침의 하늘이라 호언장담하던 일본의 군부, 특히 일본 해군 상부에 준 충격은 엄청났고, 이 폭격은 진주만으로 실의에 빠진 미국인들에게 큰 희망을 안겨 주었다.  

80인의 두리틀 특공대
폭격을 마친 B-25들은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약 3,700km를 비행한 후 대부분 중국 동부 지역에 불시착하거나 낙하산으로 탈출하였다. 그 과정에서 4명이 사망했고 불행하게도 일본군 점령지역에 떨어진 승무원들 중 8명이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장교 3명은 처형되고 나머지 5명 중 1명은 포로생활 중에 사망했다. 총 80명의 승무원들 중 이들 12명과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한 1대의 승무원 5명을 제외한 63명의 승무원들은 중국인들의 도움으로 모두 안전하게 연합군 지역으로 탈출, 다시금 전선으로 달려갔다. 80인의 두리틀 특공대는 전설로 남았다. 

● CV8 호넷, 영웅으로 지다

 

뉴포트 조선소에서 탄생한 호넷은 1939년 3월 30일 발주에 들어가 기공은 6개월 뒤인 9월 25일에 이루어진다. 그리고 거의 1년 만인 1940년 12월 14일에 진수한 이 배는 이듬해인 1941년 8월 20일 일본이 미국을 상대로 진주만 공습을 하기 4개월 전에 취역했다. 

호넷 위의 B-25
이전의 항공모함에 비해 대공방어 무기가 추가되었고 고속 생산 공정에 의해 빠른 시일 내에 건조된 호넷은 요크타운 급으론 3번함으로서 최고 속력 32.52 노트, 항속거리 23,200 km를 자랑했다. 함재기는 90기를 실을 수 있었고 항공장비로는 승강기 3기와 캐터펄트 3기를 운용한 당시론 최신형 항모였다. 다행히도 일본의 기습 때엔 진주만에 있지 않아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진주만의 굴욕을 설욕이라도 하듯 이 배는 두리틀 공습으로 명성을 떨친 뒤 세계최초의 항공모함끼리의 해전인 산호해해전과 미일양국의 운명을 뒤바꾼, 미드웨이 해전에 참가해 무공을 과시했다.

전속 항진 중인 호넷에서 이륙하는 두리틀의 B-25
그러나 1942년 10월 27일 과다콰날 공방전에서 다시 맞붙은 일본의 항공모함들과의 산타크루즈 해전에서 일본함재기들의 공격에 의해 폭탄과 어뢰공격, 일본기들의 자폭공격으로 비행갑판 아래쪽의 격납고가 대파되었고 견인이 시도되었지만 실패했다. 일본의 항공모함 기동부대의 접근으로 호넷에 어뢰를 명중시켜 격침시키려 했으나 그마저도 실패했다. 결국 호넷은 일본의 항모기동부대에 노획되었다. 야마모토는 호넷을 전리품으로 일본으로 가져가려 했지만 호넷의 파손 정도가 너무 심해 견인이 불가능하자 어뢰를 쏘아 호넷을 격침했다. 그 때 시간이 1942년 10월 27일 오전 1시 35분. 일본의 수도 도쿄를 B-25폭격기로 공습해 일본인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 준 한편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의 주력항모 4척을 태평양 심연으로 수장시키는 등 미 해군에 있어 영웅적인 전투를 벌여왔던 항모 호넷의 장엄한 최후였다.                                      

 

SEA& 강승철기자ds5bsn@busan.com 

 
TIP 

일본 본토 최초폭격 B-25 미첼(Mitchell) 

1942년 4월 18일의 두리틀 공습에 출격한 폭격기가 바로 노스아메리칸 항공이 개발한 쌍발 중형 폭격기 B-25 미첼(Mitchell)이었다. 애칭인 미첼은 미국 ‘전략폭격의 아버지’라 불리는 윌리엄 빌리 미첼 준장의 이름을 딴 것이다. 미국의 군용기 중 개인명이 애칭으로 사용된 것은 이 B-25 미첼뿐으로 알려져 있다.  

B-25 미첼
노스아메리칸사가 1937년 미 육군항공대의 중폭격기 개발 요구안에 맞추어 제작한 시제기 NA-40는 1939년 1월 29일 첫 비행에 성공하였고 이후 비행성능을 개량한 NA-62가 1939년 3월 11일 B-25로 미 육군항공대에 제식 채용되고 1939년 9월 158대가 발주되며 양산에 들어간다. 마침내 1940년 8월 9일 B-25 양산 1호기가 첫 비행한 뒤 1941년 2월부터 폭격비행대에 배치되었고 도중에 생산계획이 변경되면서 158대 가운데 120대는 무장을 강화한 B-25B로 바뀌어 1941년 8월부터 미육군에 인도되었다. 

 

B-25 시리즈는 모두 1만여 대가 생산되어 세계대전 중의 모든 전역에서 이용되어 독일과 일본에 큰 타격을 주었다. 

주 날개는 중익 배치이며, 왕복기관을 2기 장비하고 있다. 뒷날개는 쌍수직꼬리인 B-25는 너비 20.6m,  길이 16.1m, 높이 5.0m, 전비중량 1만5천880㎏, 최대속도 시속 438㎞, 실용상승한도 7,380m, 항속거리 2,170㎞, 승무원 6명, 기관총 5정. 폭탄 1,360kg을 실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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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리틀 공습( Doolittle Raid, 1942년 4월 18일)은 제임스 해롤드 두리틀(James Harold Doolittle,  Jimmy Doolittle) 중령이 지휘하는 B-25 미첼 경폭격기 16대가 항공모함 USS CV-8 호넷을 출발하여 일본을 폭격한 사건이다. 이 공습으로 사상자 363명, 가옥파괴 약 350동의 손해를 주었다. 피해는 크지 않았지만 불침의 하늘이라 호언장담하던 일본의 군부, 특히 일본 해군 상부에 준 충격은 엄청났고, 미국은 비록 일본에 큰 피해를 입히진 않았지만 이 사건은 미국인들에게 큰 희망을 주었다. 그리고 이 둘리틀 공습을 토대로 그해 6월 초에 미일양국의 운명을 뒤바꾼, 진주만 공격 후 두 번째로 대규모 전투인 미드웨이 해전이 벌어지게 된다.

 

 

- 누구도 마시려 하지 않는 브랜디.-

 

플로리다 포트왈톤 비치에서의 화요일 (2013, 4,17), 살아남은 두리틀 공습 요원들은 공적으로 마지막 모임을 가졌다. 그들은 한때 미국에서 최고로, 세계적으로도 존경받는 사람들에 속하였었다. 1942년 4월, 미국 역사상 가장 용감하고 가장 가슴 설레는 작전을 수행한 80인이었다. 당시에는 단지 그들의 이름만 들어도 미국인들은 감사의 눈물을 바치곤 했다.

 

지금 그들은 4명만 살아 남아있다.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한 이후, 상처받은 미국은 전쟁을 수행해 나가기 위해 어떤 드라마틱한 전기가 필요할 때였다. 일본에 보복을 감행할 수 있을 만큼의 거리내에는 우방국 비행장이 없는 상황에서 무시무시한 계획이 기안되었다.  16대의 B-25가 항모로 부터 이륙할 수 있도록 개조되었다. 전에 단 한번도 시도해 본적이 없었던 작전, 항모로 부터 크고 무거운 폭탄을 보내는 작업이었다.

 

16대에 5명씩 나눠 탔다. 지휘관은 제임스 두리틀 중령, 그는 직접  USS Hornnet 의 장기에 올라탔다. 그는 항모로 돌아올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일본을 폭격한 후, 중국으로 가서 안전하게 착륙할 수 있기를 바랐다. 모두들 그렇게 생각하고 갔다.

공습 당일, 일본 해군에게 항모의 운행이 발각되었다. 공습자들은 예정된 거리보다 훨씬 먼 거리에 있는 태평양 상에서 이륙을 명받았다. 돌아올 연료가 없는 것을 알면서도 명에 따라 이륙했다. 그들은 무조건 나아갔다.

 

 도쿄를 폭격하고 나서는 각자 할수 있는 한 최대한 멀리 도망쳤다. 4대가 crash 되었다. 11명은 베일아웃했다. 3명은 죽었다. 8명은 체포되었다. 그중 3명은 탈출했다. 나머지는 일본군 포로수용소에서 아사했다. 한명은 러시아로 탈출했다.

 

이 두리틀 공습은 미국과 미국의 적과, 그리고 세계만방에 다음과 같은  미국의 멧시지를 보냈다.

 

 "우리는 싸운다.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우리는 이긴다."

 

80명 중에 62명이 전후까지 살아 남았다. 그들은 국가적 영웅이 되었고, 용감함의 표본이 되었다. MGM (Metro-Goldwyn-Mayer)사는 이 공습에 대해 영화를 만들었다. "도쿄상공의 30초" 라 불린 이 영화는 애국적이고 감동적인 이야기로  BOX- Office 를 쳤고, 그 이름은 국가적 이름이 되었다. 영화시사회에서  MGM 회사는 "이 영화는 가장 자랑스러운 실제 이야기" 라고 선전했다.

 

1946년 부터, 공습 참여자들은 해마다 4월에 재회의 시간을 가지고 당시의 임무를 함께 기억했다. 재회는 매년 다른 도시에서 열렸다. 1959년, 아리조나주 툭슨 시에서는 존경과 감사의 표시로,  80개의 은 술잔을 두리틀 공습 참여자 들에게 수여했다. 각 잔에는 공습참여자의 이름이 하나씩 새겨져 있었다.

 

80개의 술잔을 전시하는 목판 (사진)은 매년 재회의 도시로 운반되었다. 공습 참여자가 타계하면, 이 전시목판 안의 그의 술잔은 그 다음해 부터 뒤집어져 전시되었다.

 

목판안에는 1896년 산 Hennessy Very Sprcial cognac 꼬냑이 들어 있다. 1896이란 숫자는 우연한 숫자가 아니다. 재임스 두리틀 중령이 태어난 해이다. 그들은 나름의 계획을 가지고 있다. 공습 참여자가 2명만 남게 되면, 그들은 목판안의 병을 꺼내서 마실 것이다. 그리고 먼저간 친구들을 위해 건배할 것이다.

 

 2013년 초, 5명의 공습 참여자가 남았다. 2월에 톰 그리핀이 96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그는 도쿄공습 이후 중국의 산악지역 숲속에 낙하했다. 말라리아에 걸려 죽을 뻔 했지만 살아남아 유럽으로 보내졌다. 계속 전투 비행에 참여하다가 독일군에 격추되고 체포되어 독일군 포로수용소에서 22개월을 보냈다.

 

이 분들의 헌신적 정신은, 신시내티 엔쿼러 에서 있었던 그의 사망 추도사에 인용된 구절에 나타난다. 추도사에는 전쟁얘기는 단 한마디도 없고, 그들의 의무감과 헌신에 관한 얘기만 있다.

 

"그의 부인이 병들어 요양원으로 보내 졌을 때, 매일 아침 요양원까지 걸어와서는 밥을 먹이고, 저녁에는 그녀의 옷가지를 챙겨서 집으로 돌아와서, 밤내 세탁하고 다림질했다. 다음날 아침이면 다시 옷가지들 챙겨서 그녀의 병실로 가서 하루를 보냈다. 2005년 그녀가 죽을 때까지 3년을 그렇게 살았다." -이것이 추도사 내용이다.

 

이제 80명 중에 4명만 남았다. 딕 코올(두리틀 중령과 동승한 조종사), 로버트 하이트, 에드워드 세일러, 대이빗 대처, 4분은 모두 연세가  90대이다. 그들은 재회행사를 공식적으로 계속 하기엔 생존자가 너무 적다고 판단했다.

 

포트 왈톤 해변가에서 이번 주에 열릴 재회행사가 마지막이 된다. 플로리다의 에글린 필드는 도쿄임무를 위해 비밀리에 훈련을 받던 곳이니, 이 곳으로 돌아왔음은 미국을 한 바뀌 일주한 것이다.

 

이 소규모 도시에선 이 영웅들을 명예롭게 해 주기위해 할수 있는 것은 다 할 계획이다. 6일간의 행사기간, 정찬과 연회와 퍼레이드가 진행될 것이다.

만약 당신이 이번주에 포트 왈턴에 있으면서 공습 참여자들을 만나게 된다면, 당신은 그들에게 감사의 말을 하게 될 지도 모른다. 나는 그분들이 그 감사의 말을 듣고, 자신들이 기억되고 있다는 사실을 좋아 하는 것을 직접 봤다.

 

그분들은, 이번의 공식적 마지막 재회 후에 다시 한번더 모일 것을 결정했다. 올해 안으로 비공식적으로 한번 더 모여서, 브랜디 병을 딸 것이다. 세월은 너무 빨리 지나간다. 그래서 그분들은, 자기들 중의 두 사람만 남게 되는 날을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이제 모든 행사를 여기서 종료하려 한다.

 

B - 25 16 대(가로 16개의 술잔), 1대에 5 명 (세로 5개의 술잔) 탑승. 총 80 명(80개의 술잔)의

승무원이 이 작전에 참가하였다. 죽은 자의 술잔은 거꾸로 엎어 걸어 둔다. 사진은 두리틀 중령

 

 

 

 

 

  It's the cup of brandy no one wants to drink.

On Tuesday, in Fort Walton Beach, Florida, the surviving Doolittle Raiders gathered publicly for the last time.

They once were among the most universally admired and revered men in the United States. There were 80 of the Raiders in April 1942, when they carried out one of the most courageous and heart-stirring military operations in this nation's history. The mere mention of their unit's name, in those years, would bring tears to the eyes of grateful Americans.

Now only four survive.

After Japan's attack on Pearl Harbor, with the United States reeling and wounded, something dramatic was needed to turn the war effort around. Even though there were no friendly airfields close enough to Japan for the United States to launch a retaliation, a daring plan was devised. Sixteen B-25s were modified so that they could take off from the deck of an aircraft carrier. This had never been tried before -- sending big, heavy bombers from a carrier.

The 16 five-man crews, under the command of Lt. Col. James Doolittle, who himself flew the lead plane off the USS Hornet, knew that they would not be able to return to the carrier. They would have to hit Japan and then hope to make it to China for a safe landing.

But on the day of the raid, the Japanese navy caught sight of the carrier. The Raiders were told that they would have to take off from much farther out in the Pacific than they had counted on. They were told that because of this they would not have enough fuel to make it to safety.

And those men went anyway.

They bombed Tokyo, and then flew as far as they could. Four planes crash-landed; 11 more crews bailed out, and three of the Raiders died. Eight more were captured; three were executed. Another died of starvation in a Japanese prison camp. one crew made it to Russia.

The Doolittle Raid sent a message from the United States to its enemies, and to the rest of the world:
We will fight. And, no matter what it takes, we will win.

Of the 80 Raiders, 62 survived the war. They were celebrated as national heroes, models of bravery. Metro-Goldwyn-Mayer produced a motion picture based on the raid; "Thirty Seconds Over Tokyo," starring Spencer Tracy and Van Johnson, was a patriotic and emotional box-office hit, and the phrase became part of the national lexicon. In the movie-theater previews for the film, MGM proclaimed that it was presenting the story "with supreme pride."

Beginning in 1946, the surviving Raiders have held a reunion each April, to commemorate the mission. The reunion is in a different city each year. In 1959, the city of Tucson, Arizona, as a gesture of respect and gratitude, presented the Doolittle Raiders with a set of 80 silver goblets. Each goblet was engraved with the name of a Raider.
Every year, a wooden display case bearing all 80 goblets is transported to the reunion city. Each time a Raider passes away, his goblet is turned upside down in the case at the next reunion, as his old friends bear solemn witness.

Also in the wooden case is a bottle of 1896 Hennessy Very Special cognac. The year is not happenstance: 1896 was when Jimmy Doolittle was born.
There has always been a plan: When there are only two surviving Raiders, they would open the bottle, at last drink from it, and toast their comrades who preceded them in death.

As 2013 began, there were five living Raiders; then, in February, Tom Griffin passed away at age 96.
What a man he was. After bailing out of his plane over a mountainous Chinese forest after the Tokyo raid, he became ill with malaria, and almost died. When he recovered, he was sent to Europe to fly more combat missions. He was shot down, captured, and spent 22 months in a German prisoner of war camp.

The selflessness of these men ... there was a passage in the Cincinnati Enquirer obituary for Mr. Griffin that, on the surface, had nothing to do with the war, but that captures the depth of his sense of duty and devotion:
"When his wife became ill and needed to go into a nursing home, he visited her every day. He walked from his house to the nursing home, fed his wife and at the end of the day brought home her clothes. At night, he washed and ironed her clothes. Then he walked them up to her room the next morning. He did that for three years until her death in 2005."

So now, out of the original 80, only four Raiders remain: Dick Cole (Doolittle's co-pilot on the Tokyo raid), Robert Hite, Edward Saylor and David Thatcher. All are in their 90s. They have decided that there are too few of them for the public reunions to continue.

The events in Fort Walton Beach this week will mark the end. It has come full circle; Florida's nearby Eglin Field was where the Raiders trained in secrecy for the Tokyo mission.
The town is planning to do all it can to honor the men: a six-day celebration of their valor, including luncheons, a dinner and a parade.

Do the men ever wonder if those of us for whom they helped save the country have tended to it in a way that is worthy of their sacrifice? They don't talk about that, at least not around other people. But if you find yourself near Fort Walton Beach this week, and if you should encounter any of the Raiders, you might want to offer them a word of thanks. I can tell you from firsthand observation that they appreciate hearing that they are remembered.

The men have decided that after this final public reunion they will wait until a later date -- some time this year -- to get together once more, informally and in absolute privacy. That is when they will open the bottle of brandy. The years are flowing by too swiftly now; they are not going to wait until there are only two of them.

They will fill the four remaining upturned goblets.
And raise them in a toast to those who are gone.

                                                

< 출처 >

내용-윗글:부산일보/ SEA&강승철기자ds5bsn@busa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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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군사관학교 12기 동기회(은성회)정보- 책" 진주만 공격 총대장의 회심" 중 118~ 123쪽 두리틀 중령 관련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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