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미스타드호(스페인어: La Amistad, 영어: Friendship)사건은 1839년 쿠바 아바나에서 쿠바의 푸에르토 프린씨뻬로 이동하던 노예 수송선 아미스타드호에서 일어난 노예들의 점거농성이다. 1839년 7월, 아프리카계 노예들이 아미스타드호를 점거하였으며 표류하던 중에 미 군함인 USS 워싱턴호에 의해 나포되었다. 이후 아미스타드호는 노예제 폐지 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1808년 이후 미국으로의 노예 수입이 금지되었었기에 1841년에는 아미스타드호에 탑승했던 흑인 노예의 지위에 대한 미국 연방 대법원의 유명한 판결이 있기도 했었다.
점거농성
1839년 7월 2일, 셍베 피에(미국에서는 조셉 싱게로 알려짐)는 아바나에서 아미스타드호를 이용해 수송되던 56명의 아프리카사람들(52명의 어른, 4명의 어린이)을 이끌고 배를 점거하는 점거농성을 하였다. 데크 아래의 감옥에 있던 수감자들은 녹슨 줄을 찾아내 스스로 탈출에 성공했고, 계단을 통해 데크로 올라갔다. 줄기베는 칼(cane knives)을 들고 무장한 이들은 배를 점거하고 자신들을 아프리카의 집으로 보내줄 것을 요구했다. 배의 항해사인 돈 페드로 몬테즈는 이들을 속여 북쪽으로 향했고, 뉴욕 주 롱아일랜드의 동쪽 해안가를 항해했다. 해양 국경 감시대(US Revenue Cutter Service)는 이 스쿠너선을 발견했고,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을 체포했다. 이들은 아프리카인들을 노예로 팔기 위해 코네티컷 주로 끌고 갔다.
재판
코네티컷 주, 뉴헤이븐에서는 이 배와 아프리카인들의 법적 지위에 대한 유명한 재판이 이뤄졌다.[1] 아미스타드 사건 당시 아프리카에서 미국으로 노예를 수송하는 것은 불법이었고,배 주인들은 거짓으로 아프리카인들이 쿠바에서 태어났다고 말했다. 이 재판에서는 첫째, 이 아프리카인들이 구조된 조난자로 고려되어야 하는지 또는 해군 장교의 소유로 봐야 하는지, 둘째, 이 아프리카인들이 쿠바 상인들의 것인지 스페인의 이사벨 2세 여왕의 것인지, 또 마지막으로 이들의 나포 상황에 따라 아프리카인들이 자유인지를 판결해야 했다.
결국 아미스타드 사건은 미국 연방 대법원에서까지 다뤄졌으며, 1841년에 결국 이 아프리카인들은 불법적으로 이동되고 있었으며, 자유의 몸이 되어야 한다고 판결했다. 생존자들은 1842년 아프리카로 돌아갔다.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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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9년 7월2일 새벽, 서인도제도 해상. 길이 37m짜리 스페인 범선 ‘아미스타드’호에서 노예로 팔려갈 53명의 흑인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사투 끝에 배를 접수한 흑인들은 백인들을 처형하고 두 명만 남겼다. 아프리카로 돌아가는 뱃길과 항해술을 몰랐기 때문이다.
백인 선원들이 낮에는 동쪽으로 항해하고 밤에는 서쪽으로 되돌아가는 통에 바다 위를 맴돌던 아미스타드호는 거사 한달 보름 후 미 해군에 발견돼 미국 땅에서 재판을 받았다. 재판의 논점은 흑인들의 지위. 뉴헤이븐 지방법원은 ‘흑인들은 불법 납치된 자유인으로 백인에 대한 저항과 살인도 정당방위’라는 판결을 내렸다.
판결은 국내외적 갈등을 낳았다. 스페인은 ‘화물’인 노예의 인도를 요구하고 남부 농장주들은 백인을 죽인 유색인종에 대한 일벌백계를 주장했다. 아미스타드호를 발견한 미국 해군조차 연방법의 규정을 들어 재산(노예) 분배를 요구하고 나섰다. 결정적으로 재선을 위해 남부의 지지가 필요했던 밴 뷰런 대통령이 항소해 재판은 원점으로 돌아갔다.
최종심에서 흑인들의 변호를 맡은 사람은 전직 대통령인 존 퀸시 애덤스. 결국 연방 대법원은 1841년 ‘스페인 법에서도 흑인들은 자유인’이라는 판결을 내리고 이듬해 흑인들은 자유인 신분으로 아프리카에 돌아갔다.
영화로도 제작됐던 아미스타드호 사건은 흑인과 소수인종에 대한 탄압으로 일관한 초기 미국사의 한 줄기 빛으로 남아 있다. 당시 스페인 대사는 ‘대통령의 뜻이 통하지 않는 법원은 자격이 없다’며 항변했다. 과연 그럴까. 소수를 위해 변호에 나서는 전직 대통령의 존재와 살아 있는 권력을 넘을 수 있었던 법원. 19세기 중반 미국의 양식과 양심 앞에 21세기를 사는 한국인이 부끄럽다. 권력에 종속되지 않는 법이 국가의 융성을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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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선 아미스타드호 선상 반란 “무죄” 평결로 정의 지킨 미 법원
1839년 7월 2일, 쿠바에서 32㎞ 떨어진 해상에서 노예로 팔려가던 53명의 아프리카인이 반란을 일으켜 아미스타드호를 장악했다. 그들은 백인 2명만 살려두고 선원들을 모두 살해했다. 목적은 오직 고향 아프리카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항해 기술이 없었기에 그들은 살려둔 백인 2명에게 키를 맡기고 아프리카로 가는 중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백인들의 속임수로 흑인들은 두 달 뒤 북쪽 코네티컷 해안에서 미 해군 함대에 붙잡혀 살인 혐의로 감방에 갇혔다. 이 사건은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아미스타드’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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