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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대전 당시 일본계 미국인으로 구성된 부대>제 442 연대전투단 (442nd Regimental Combat Team)

Bawoo 2015. 9. 2. 23:05

제 442 연대전투단 (442nd Regimental Combat Team)


1941년 12월 미국은 군국 일본이 화와이에 있는 진주만을 공습하자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를 했다. 본격적인 전쟁에 돌입한 것이다.  1942년 2월에 미국정부는 미국 서해안에 거주중이던 일본인 및 일본계 미국인 약 12만 명의 재산을 몰수하고 각지의 강제수용소로 보냈다. 이것은 미국내 일본인들이 적국인 일본과연합하여 내란을 일으키는 것을 방지한다는 목적이었다.

하와이에 거주하던 일본인은 전체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꽤 많은 숫자였기에 하와이 당국은 일본인 연합회의 간부 및승려 수백 명 정도를 호놀룰루의 세인트 아일랜드(일부는 미 본토)에 강제수용했다. 미군은 일본군의 하와이 침공 및 본토진격을두려워하여 일본인 사회의 동향을 불안한 요소로 여겼다.

그러던 중 1942년 6월에 하와이 주재 일본인 2세로 구성된 육군병사 약 1,400명은 <하와이 긴급대대>로 편성되어위스콘신 주로 보내졌다. 현지의 맥코이 캠프에서 이들 부대는 재편되어 제 100 보병대대(100th infantry battalion)라 명명되었다.대대장 이하 3명의 간부는 백인이었지만 그외 사관 및 병사는 일본계 미국인으로 구성되었다.

이 부대는 엄격한 훈련을 받은 뒤 1943년 1월에 미시시피 주의 셀비 캠프로 이동했다. 태평양전쟁이 일어나기 이전에도미국에선 약 3,500명의 일본계 미국인들이 미군에서 여러가지 임무를 맡고 있었다. 일본은 제 2차 세계대전의 슬로건으로<아시아에서 백인지배를 타도>를 내 걸고 미국에서 일본인들이 수용소에 잡힌 것을 백인들의 폭거라고 선전했다.

미국은 여기에 반격할 필요성을 느껴 일본계 부대를 편제하게 되었는데 높은 사기를 가진 제 100 보병대대가 군사훈련에서매우 우수한 성적을 거둔 것도 이를 뒷받침했다. 1943년 1월 28일에 일본계 미국인에 의한 연대규모의 부대창설이 발표되어강제수용소에서는 지원병의 모집이 시작되었다.

이에 구성된 부대명은 제 442 연대였지만 보병대대인 제 442연대를 핵심으로 포병대대, 공병부대를 더해 독립전투가 가능한연대전투단으로 편성되어지게 되었다. 하와이에서 2,600명, 미 본토의 강제수용소에서 800명의 지원자가 입대했는데,미 본토에서의 입대자가 적었던 이유는 강제수용소에서의 반미 분위기도 있었지만 하와이와 달리 모집정원의 차이와 입대가능한 연령대상자가 적었기 때문이었다.

편성초기 반미경향이 강했던 본토출신자들과 하와이 출신자들의 대립은 심각하여, 하와이 출신자들은 본토출신자들을돌대가리라 부르며 매우 싫어했는데 이러한 경향은 부대내 폭력사태로 번져 제 100 대대의 폭행사건은 종종 상부에 보고되었다. 그러나 이 폭력은 미국 정부의 적극적인 상벌징계 및 노력으로 단기간에 해결되었다.

한편 일본계 부대의 구호였던 것은 Go for broke! (사력을 다해라)였는데 이것은 원래 하와이 이민자들이 돈을 걸고 즐기던 도박게임시 자주 외치던 구호로 오리지널 영어가 아닌 혼용영어였다.

 


강제수용소에서의 일본인 어머니와 미군에 입대한 아들.


일본계 부대는 원래 백인부대의 짐꾼부대 정도로 생각한 미군 상층부의 생각에 의해 전투에 투입되지 못했다.
1943년 8월에 북아프리카의 올랑에 위치한 제 100 보병대대는 현지에 눌러앉게 되면서 아무런 임무도 주어지지 않자 대대원들이 스스로 자청해 9월 22일에 제 34 사단 제 133연대에 편입된 후 이탈리아의 살레르노에 상륙했다.

29일에는 독일군과 조우해 첫 전사자가 나왔는데 1944년 1월부터 2월에 걸쳐 독일군의 방어선인 구스타프 라인에서 혈전을 벌인 일본계 부대는 5월에 로마 남쪽의 방어선인 카에살 라인의 돌파에도 활약했다. 로마로 진군하던 도중에 격전지였던 몬테 캇시노에서 참전해 막대한 희생을 치루었다.

부대는 베네벤토에서 병력보충을 받고 로마로 향했지만 군 상부의 의향으로 도중에 진군이 정지되어 이들 후미에 있던 백인부대가 1944년 7월 4일에 로마로 입성하는 영광을 누렸다. 결국 일본계 부대는 로마진군이 허락되지 않고 도로 로마를 우회하여 북진하라는 진격명령이 내려졌다.

이탈리아에 도착한 제 442연대는 제 1대대가 해체되었기 때문에 1개 대대가 빠진 채 편성되었기에, 6월에 제 100 보병대대를 제 442연대에 편입하여 제 442 연대전투단으로 구성한 뒤 피사 등 이탈리아 북부에서 전투에 참가했다. 1944년 9월에 부대는 프랑스로 이동해 제 36사단에 편입되었다.

10월에 프랑스 동부의 알자스 지방의 산악지대 전투를 벌인 후 10월 15일 이후엔 브뤼에르 거리를 공략하기 위해 주변의 고지에 진을 친 독일군과 격전을 벌였다. 전장은 산악과 수풀지대여서 전차를 이용할 수 없었기에 병력의 힘으로만 상대해야 했다.
20일에 마을을 공략하면서 제 36사단장이던 J. 덜키스트 소장의 명령에 의해 다시 마을 동쪽의 공략에 일본계 부대가 나섰다.

전후 브뤼에르 거리엔 일본계 부대의 활약을 기념하여 <제 442 연대거리>라는 이름이 생겼다. 그리고 1994년 10월 15일엔 제 442 연대의 퇴역군인들이 모여 해방 50주년 기념행사를 가지기도 했다. 한편 1944년 10월 24일에 제 34사단 제 141 연대 제 1대대(통칭 텍사스 대대 - 텍사스주 출신들로 이루어진 부대)가 독일군에게 포위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들의 구출가망은 희박하여 미군들은 이 부대를 잃어버린 부대라 부르며 희망이 없다고 여겼다. 그러나 10월 25일에 제 442 연대전투단은 루즈벨트 대통령으로부터 이들 부대의 구출명령을 받고는 출동했다. 휴식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채 제 442 연대전투단은 보쥬 숲에서 매복중이던 독일군과 격렬한 공방전을 주고 받았다.

10월 30일에 텍사스 부대를 구출하는데 성공했지만 이들 부대 211명을 구출하기 위해 제 442 연대전투단은 약 800명이 사상했다.
구출직후 제 442부대와 텍사스 대대는 서로 얼싸안고 기뻐했지만 텍사스 대대의 번즈 소령이 경멸하는 말투로 <잽 부대였나>라고 말하자 제 442부대의 한 소위가 그를 향해 <우리들은 미육군 제 442부대다, 말 똑바로 해>라고 고함쳐 소령이 사죄했다는 일화가 남아있다.

이 전투는 후에 미육군의 10대 전투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잃어버린 대대를 구출한 뒤 제 1차 대전 휴전기념일인 11월 11일에 제 36사단장이던 덜키스트 소장이 관병식 도중 이들 전투단을 보고는 <부대전원이 정렬되지 않았다>라고 불쾌감을 드러내자 연대장 대리이던 밀러 중령은 <보신 것이 부대 전원입니다>라고 답했다. 이것은 제 36사단으로 편제시 약 2,800명이던 대원이 1,400명 정도로 줄어들었기 때문이었다.

재편성을 마친 제 442 연대전투단은 이탈리아로 이동해 그곳에서 종전을 맞이했다. 예하의 제 522 야전포병대대는 프랑스로 이동한 후 독일 국내로 침입해 뮌헨 교외와 다카우의 포로수용소를 해방시켰다. 그러나 일본계 부대가 강제수용소를 해방한 사실은 1992년까지 공표되지 않은채 묻혀있었다.

 


제 442 연대전투단을 관병중인 해리 트루먼 대통령.

유럽전선에서 전투를 끝낸 후 제 442 연대전투단은 활동기간에 비해 미육군 사상 가장 많은 훈장을 받은 부대였다. 특히 부상자가 많았기에 명예전상전투단(Purple Heart Battalion)이라고도 일컬어졌다. 전투단은 합계 18,000개에 가까운 훈장과 상장을 수상했는데 그 내용은 아래와 같았다.

1) 명예훈장(의회 영예장) - 1개 (미군 최고훈장, 수류탄으로 동료를 구하고 산화한 사다오 무네모리 상등병이 수상)
2) 육군 수훈십자장 - 52개 (이 중 20개는 2000년 6월 재조사에서 명예훈장으로 격상되었다)
3) 은성훈장 - 560개
4) 훈공장 - 22개
5) 동성훈장 - 400개(후에 백엽추가 1,200개)
6) 명예 전상훈장 - 9,468개 (몬테 캇시노에서 속출한 동상환자들의 수여가 많다)
7) 대통령부대감사장 - 7개 (트루먼이 직접 7매를 연대기에 달아주었는데 이것은 미육군사상 최초로, 7개란 숫자를 넘어선 부대는 없다)

2000년에 훈장에 대한 격상이 이루어진 것은 미국의 일본인 경시풍조 탓으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부대원들의 재평가가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다. 미국은 1960년대에서야 비로소 공민권에 관한 법이 만들어졌기에 이전까지 인종차별정책이 고쳐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일본계 부대의 빛나는 전공에도 불구하고 전후 미국의 백인사회는 일본계 주민들에 대한 차별과 편견이 여전했다.
부대해산 후 미국의 고향으로 되돌아간 병사들을 둘러싸고 <잽을 용서하지 마라>, <잽을 쫓아내라>라고 냉대를 받아 귀환병들은 일자리도 찾을 수 없었고 전쟁전에 몰수당한 재산과 가옥도 돌려받지 못한채 내팽개쳐졌다.

이러한 반일분위기의 변화는 1960년대에 인권의식의 성장과 공민권 운동의 고양으로 점차 없어졌는데 이는 일본인 사회의 조용한 대처도 한몫했다. 제 442 연대전투단은 1946년에 해체되었지만 1947년에 예비역 부대로 제 442연대가 재편성되어 베트남 전쟁이 일어나자 1968년에는 부족했던 병사보충을 위해 주병단(州兵團)에 편입되었다.

현재 제 442연대는 해체되었고 연대 예하의 제 100 보병대대만이 예비역 부대로 남겨져 있다. 부대는 본부를 하와이에 두고각 기지를 미국령 사모아, 사이판, 괌에 두고 있다. 이들 부대는 지금도 여전히 일본인을 포함한 아시아계 미국인들이 많은 것이특징이다.

2004년 8월에 제 100 보병대대는 제 29 독립보병여단(하와이 주병)의 대대기동부대의 일원으로 이라크의 재건임무에 파견되었다. 이 부대는 2005년 3월에 이라크에서의 임무를 마치고 2006년에 귀환했다. 한편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은 강제수용소의 피수용자를 포함한 일본계 미국인들로 구성된 제 442 연대전투단의 성과에 대해 <제군들은 파시스트와 인종차별이라는 두가지 적과 싸워 승리했다>라고 노고를 치하하기도 했다.


출처 : 야노 테츠 <442 연대전투단, 공격! 일본계 2세부대>, 사진은 상업적 사용이 제한된 공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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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베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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