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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초상화가로 유명한 존 레버리 경(Sir. John Lavery)

Bawoo 2013. 12. 7. 22:48

 

 

 

초상화가로 유명한 존 레버리 경(Sir. John Lavery)

 

 

(1856~1941)

 

 

 

 

템즈강의 뱃놀이 Boating On the Thames / 53cm x 64cm / c. 1890

 

뱃놀이 하는 여인들에게는 이 곳이 바로 천국일 것 같습니다. 일본풍의 큰 양산을 든 여인은 세상에서 가장 편한

자세로 몸을 뉘었습니다. 반대편에 있는 또 한 여인도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있군요. 강이라고는 하지만 마치

잔잔한 호수처럼 보입니다. 강 건너편 녹색 숲을 보니 한 여름입니다. 회색이 가득한 계절을 넘다 보니 문득 이런

숲이 그리워집니다.

 

흔들리는 물에 조각 조각으로 떠 있는 그림자는 모두 비슷하지만 어느 시대이고 최상위층 사람들은 당대의 사회와

관계없이 살았지요. 그림에서 화려하지만 씁쓸함이 느껴지는군요.

존 레버리는 벨파스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가난한 정치인이었습니다. 요즘도 정치를 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지요. 그래서 세상이 더 좋아지지 못하는 것일 겝니다.

 

그렇다면 그의 집안 사정이 어떠했는지 짐작이

됩니다. 그가 세 살이 되던 해 아버지는 배를 타고 미국 이민 길에 오릅니다. 아마 먼저 미국에 자리를 잡고

식구들을 부를 생각이었던 것 같은데 그만 미국으로 가는 도중에 물에 빠져 죽고 맙니다.

그리고 얼마 후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라베리는 졸지에 고아가 되고 맙니다.

세상에 이런 경우가 다 있습니다.

 

그레의 다리 위에서 On the Bridge at Grez / 1884

 

화가가 다리 난간에 세워 놓은 캔버스가 궁금합니다. 그림을 그리기 전일까요? 아니면 한참 그리는 중이었까요?

여인을 바라보는 남자의 자세를 보면 그림을 그리는 중이었던 것 같습니다. 난간에 캔버스를 놓고 그림을 그렸겠지요.

그런데 여인 두 명이 다리를 건너오고 있었습니다. 본인이 생각해도 그다지 자랑할 만한 솜씨가 아니었던지

여인들이 볼까 봐 얼른 그림을 다리 난간에다 돌려 세워 놓은 모습입니다. 빨리 지나가 주었으면 좋겠는데

여인들은 아예 자리를 잡고 강물을 내려다 보기 시작했습니다. 남자의 마음은 급하지만 흐르는 강물에 수다를

실어 보내는 여인들은 급할 것이 없습니다.

 

그건 그렇고 남자의 서 있는 자세가 예술이군요.

스코틀랜드 친척집에 맡겨져 자라던 레버리는 열 일곱이 되던 해 글래스고우에 있는 화가이자 사진가의 도제가

되었고 글래스고우 미술학교에 입학,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합니다. 몇 년간의 미술 공부를 끝낸 그는 런던으로

자리를 옮겨 전문 화가로 출발하지만 곧 1881, 파리로 자리를 옮겨 줄리앙 아카데미에 입학해서 공부를

계속합니다. 파리에 머무는 동안 르파주와 파리 근처의 그레쉬르로완에서 외광파 기법을 이용, 작업하는 화가들을

만나 그들의 영향을 받기도 합니다.

 

화실을 찾은 방문객 A Visitor in the studio / 1885

 

잠시 주인을 기다리는 동안 책을 펴 들었습니다. 의자 위에 놓인 책은 그 크기가 큰 것으로 봐서 미술 도판과

관계 있는 책이거나 화가의 스케치 북처럼 보입니다. 검은색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감싼 여인의 얼굴에도 얇은

망사 베일이 걸렸습니다. 큰 그림이 걸려있고 피아노가 있는 방에서 책을 펴든 여인의 모습은 그 자체로 교양이

풍부한 느낌을 주는데, 이 그림이 그려질 무렵이면 상류층 여인들의 독서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고 하지요.

이런 자세라면 주인이 오던, 오지 않던 관계가 없을 것 같군요.

 

1885년 글래스고우로 돌아 온 레버리는 그 이 전에 그렸던 농촌의 모습에서 도시의 중류 계급 사람들의 모습으로

주제를 옮깁니다. 또 자연주의의 이상을 그림에 담고자 했던 글로스고우파의 리더가 됩니다. 글래스고우파는 그림 속

이야기는 조금 부족하지만 거대한 에너지를 담고 있었던 화가들의 비공식 조직이었습니다.

귀국 한 다음 해. ‘로열 아카데미의 테니스 파티 (Tennis party at Royal Academy)’ 라는 작품을 발표, 첫 성공을

거두지만 진정한 화가로서의 성공은 2년 뒤에 일어 났습니다.

 

서튼 코트니 부두의 집필실 A Writing Room At The Wharf, Sutton Courtenay / 50.8cm x 61cm

 

천정이 낮은 작은 방입니다. 벽에는 책이 가득하고 큰 창 앞에 놓인 책상에 앉은 노인이 글쓰기 삼매경에 빠졌습니다.

열어 놓은 문으로는 연두 빛이 가득합니다. 방안 깊숙이 빛이 들어 왔습니다.

새소리도 들려 올 것 같고 부드러운 바람도 잠시 들렀다 갈 것 같습니다. 뼈대를 드러낸 천정은 작지만

단단해 보입니다. 친구가 오면 얼굴을 마주 보고 한 잔 할 수 있는 작은 테이블도 있습니다.

이런 방 하나 갖는 것이 모든 사람들의 꿈 아닐까요? 나이 들어 그림 속의 남자가 저였으면 좋겠습니다.

 

1888년 서른 두 살의 레버리에게 글래스고우 국제 전시회에 참석하는 빅토리아 여왕을 그려 달라는 주문이 들어

왔습니다. 이 작품에는 250명의 사람이 등장했다고 하니까 대단한 작품이었죠. 이 작품을 완성하고 난 후

그의 명성은 전국에 알려졌고 당대에 가장 잘 나가는 젊은 화가라는 이름이 뒤따랐습니다. 또 그 후 50년의

화가로서의 그의 가치가 결정된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읽다 보면 인생에는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때까지 노력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따라 그 때를 만날 수 있는지가 결정 되는 것이겠지요.

 

10월 저녁 An October Evening / 1887

 

10월의 저녁, 불을 밝히지 않은 방은 어둠에 젖었습니다. 활활 타오르는 듯한 붉은 색 소파에 검은색 실루엣으로

남은 여인은 얼굴마저 모호합니다. 혹시라도 눈물이 나오는 것을 애써 참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렇다면 어둠이

차라리 좋습니다. 창을 등지고 앉아 어둠을 바라보는 것은 마음 어딘가에 끝내 녹지 않고 덩어리로 남아 있는

슬픔이 있기 때문입니다. 유리창 밖, 노랗고 붉게 빛나는 10월의 화려한 풍경이 그래서 더욱 처연합니다.

 

작품이 성공을 거두고 난 후 레버리는 런던으로 무대를 옮깁니다. 글래스고우의 젊은이가 드디어 런던으로 진출한

것이지요. 그 곳에서 휘슬러를 알게 되고 두 사람은 친구가 됩니다. 또 휘슬러의 그림으로부터 영향도 받았습니다.

그의 작품은 런던보다도 파리와 로마, 베를린에서 더욱 인기가 있었습니다. 유럽의 모든 주요 살롱에서 그의

작품 전시회가 열렸다고 하니까 화가로서 정점에 서 있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크로케 파티 The Croquet Party / 1890

 

보기만 해도 눈과 머리가 맑아 지는 것 같습니다. 초록의 잔디 밭 너머에는 짙푸른 바다가 끝없이 펼쳐졌습니다.

나무들이 던져 놓은 그림자는 풀밭을 지나 여인들의 옷에도 올라 앉았습니다. 지금은 크로케 경기가 거의 사라졌다고

하는데 나무 망치로 나무 공을 쳐서 골 문에 넣는 경기였습니다. 요즘의 게이트볼이 크로케의 변형이라고 하지요.

외광파 기법에 충실한 라베리의 작품은 화려하면서도 맑은 느낌이 있습니다.

1889년 서른 세 살의 레버리는 캐터린과 결혼, 딸 에이린을 얻습니다. 그러나 아내가 결핵으로 2년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아마 두 사람은 같이 살 운명이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1904, 레버리는 브르타뉴로 그림 여행을 갔다가 하젤 (Hazel)이라는 여인을 만납니다. 그의 나이 마흔 여덟이었죠.

하젤은 시카고 사업가의 딸이었는데 캐나다 의사와 결혼을 했지만 남편이 금방 죽는 불행한 경우를 당했습니다.

미모와 감각이 뛰어 난 하젤은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었습니다. 5년 뒤 두 사람은 결혼을 합니다. 늦은 나이였지만

앨리스라는 딸을 낳았죠. 이런 것을 보면 운명이라는 것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우연을 가장한 필연을 운명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오러스양과 붉은 책 Miss Auras The Red Book

 

깔끔하지만 아주 강렬한 느낌의 작품입니다. 여인의 옷 색깔과 소파, 얼굴과 짙은 배경까지 같은 계열의 색이

사용되어서 차분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는데 손에 든 붉은 색 표지가 모든 시선을 당기고 있습니다.

살짝 벌어진 입술을 보니 책의 내용이 여인의 마음을 마구 흔들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녀의 시선도 이미

책 속으로 빨려 들고 있습니다. 책의 내용이 무척 궁금합니다. 생각해보면 저도 그림 속 소녀의 나이였을 때

책을 읽다가 밤을 세워 본 적이 있습니다. 물론 철학이나 역사와 같은 고급 책은 아니었지요.

 

하젤은 레버리의 작품 속에 모델로 자주 등장합니다. 400점이 넘는 작품에 등장했다고 하는데 레버리의 작품 수가

그렇게 많은지 저는 확인 할 길이 없습니다. 훗날 아일랜드 정부가 레버리에게 아일랜드를 상징하는 그림 제작을

요청했을 때 모델 역시 하젤이었습니다. 그녀의 얼굴은 1928년부터 아일랜드 화폐에 등장합니다.

2002년 유로화가 사용될 때까지 계속 등장했다고 하니까 개인으로 봐서는 대단한 영광입니다.

남편을 잘 만나면 이럴 일도 있을 수 있군요. 반성이 필요한 순간입니다.

 

사과 과수원에서의 요양 Convalescence in the Apple Orchard / 1885

 

사과 꽃이 피었습니다. 그렇다면 5월 하순쯤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린 소녀가 풀밭에 앉아 책을 읽고 있습니다.

혼자만 있었다면 따뜻한 내용이었을 것 같은데, 소녀의 옆에 앉아 있는 여인을 보는 순간 가슴이 철렁합니다.

사과나무 그늘에 의자를 놓고 온 몸을 모포로 둘러 싼 여인은 잠이 들었습니다. 화사한 봄인데도 검은색 모자를 쓴

여인은 지금 요양 중입니다. 그렇다면 여인 옆에서 책을 펴고 있는 소녀는 그런 엄마를 간호하는 중인 모양입니다.

모든 것이 새롭게 살아나는 봄, 이 모녀에게도 생명의 기운이 흠뻑 부어졌으면 좋겠습니다.

 

1911년 쉰 다섯의 나이에 레버리는 로열 아카데미의 준회원이 됩니다. 어려서 고아가 되어 화가의 길로 들어선

한 화가의 성공담이 완성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1914 1차 대전이 일어나자 그는 종군화가로 임명됩니다.

그러나 건강이 안 좋아 서부전선으로 파견될 수 없었습니다. 대신 해군의 종군화가가 되어 군함과 배, 비행기를

그리게 되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레버리는 작위를 받습니다.

 

붉은 부채 The Red Fan / c.1885 / 51cm x 61cm

 

이렇게도 해먹에 누울 수 있었군요. 다소 민망할 수 있는 자세이기는 하지만 보는 사람을 의식하지 않는

가장 편한 자세이기도 합니다. 붉은 부채와 목에 달린 붉은 꽃 장식이 흰 옷과 기가 막히게 어울렸습니다.

가볍게 부채를 흔들던 여인의 시선이 갑자기 한 곳에 집중된 것처럼 보입니다. 뭔가 인기척을 느꼈을까요?

아니면 흔들던 부채에서 뜻밖의 기억이 흘러 나왔을까요? 계단을 오르다 문득 떠 오른 기억 때문에 걸음을

멈췄던 그런 경우처럼 말입니다. 움직이는 것 같으면서도 정지되어 있는 여인의 자세에서 아직 사리지지 않고

여인을 감싸고 있는 상념들을 봅니다.

 

1921, 마침내 레버리는 로열 아카데미의 정회원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이 무렵 오늘날 아일랜드 공화국과

북아일랜드로 나뉘는 아일랜드 독립 전쟁이 일어나는데 레버리 부부는 아일랜드에 관해 흥미를 갖게 됩니다.

영국과의 협상을 위해 런던에 있는 자신의 집을 아일랜드 협상단에게 내어 주기도 했습니다.

따져보면 그가 태어난 벨파스트는 아일랜드에 있고 오늘날에는 영국의 땅인 북아일랜드 소속이죠.

 

탕헤르 만, 하루의 끝 The End of the Day, Tangier Bay / 1902

 

꼭 그 날이었다고 단정 짓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런 날이 그 뒤로도 몇 번 더 있었기 때문입니다.

해는 바다 너머로 졌고 그 끝에서부터 바다 안개가 조금씩 다가 오기 시작했습니다. 세상은 수 많은 색들을

버리고 한 두 가지 색으로 물들기 시작했습니다. 모래밭 끝에 서자 바닷물이 발을 적셨습니다.

제발 부탁인데 이 저녁이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입 안에서 쉬지 않고 맴도는 바램은 그러나 입 밖으로는

단 한 번도 꺼내지를 못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꺼내지 않기를 잘 했습니다. 참았기 때문에 그 바램은 지금도

유효하거든요.

 

레버리는 스코틀랜드, 로마, 안트워프, 밀라노, 브뤼셀, 스톡홀름 아카데미의 회원이었습니다. 더블린 대학과

벨파스트 대학으로부터는 명예학위를 수여 받았습니다. 한 인간으로서 최고의 정점에 이른 순간이 아닌가

싶습니다. 1935, 아내 하젤이 먼저 세상을 떠납니다. 미국에서도 이름이 높았던 레버리는 새로운 스타 모델

찾아 미국의 헐리우드를 찾습니다. 그의 시간이 저물어 가는 것이었을까요? 결과는 셜리 템플과 함께 한 자화상

한 점뿐이었습니다. 셜리 템플의 사진입니다.

 

사람 사는 것이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다리 위에 내리는 달빛 Moonlight on the Bridge / 1912

 

얼마나 밝은 달이기에 이렇게도 환하게 길을 비출까요? 길은 멀리 마을로 굽어 들고 있고 다리를 가로 지르는

강물도 머리를 마을로 행했습니다. 흰 옷을 입은 두 사람, 작은 그림자를 이끌고 밤 길을 걷고 있습니다.

왼쪽 나무 옆에 있는 붉은 점은 원 작품에도 있는 것인지 아니면 파일로 담다가 생긴 오류인지 알 수 없습니다.

집에서 흘러 나오는 작은 불빛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온통 어두운 색으로 가득한데 마치 등대처럼 보이거든요.

 

오늘 호인수 신부님께서 우리 동네를 떠났습니다. 멀지 않은 곳으로 가셔서 자주 뵐 수 있게 되어 그나마 다행입니다.

예수께서 가셨던 길이라면 어디든지 가시는 신부님에 대한 생각 때문에 그림 속 사람들에게서 좀처럼 눈을 뗄 수 가

없습니다. 밤길을 혼자 걷고 계시는 모습이 떠 올라서 말입니다.

신부님, 늘 건강하세요. 자주 놀러 갈게요.

 

1940년 레버리는 한 화가의 생애 The Life of A Painter’라는 자서전을 남깁니다. 그리고 그 다음 해 여든 다섯의

나이로 세상을 떠납니다. 처음에는 고아 아닌 고아로 자랐지만 나중에 자신의 생을 멋지게 장식한 레버리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남 부끄럽지 않은 자서전을 쓸 수 있을 정도로 인생을 살아야 하는데하는 생각이 듭니다.

너무 늦은 것은 아닐까? 레버리가 제게 던져준 질문입니다.

출처 : 장계인의 그림 이야기
글쓴이 : 장계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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