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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관련>김명원(金命元)

Bawoo 2015. 7. 16. 22:40

김명원(金命元):1534(중종 29)∼1602(선조 35). 조선 중기의 문신.

 

승지 김만균의 아들이자 이황의 문인으로 1558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561년 식년문과에 급제해 1569년 종성 부사가 되고 내외직을 거쳐 1587년 좌참찬으로 의금부지사를 겸했다. 1589년 정여립의 모반 사건을 수습해 평난공신 3등에 책록되고 경림군에 봉해졌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순검사로 임명되었고, 이어 음력 4월 29일 도원수에 임명되어 한강에 주둔하였다.[1] 그러나 탄금대 전투에서 조선의 정예군인 경군 기병대가 전멸하고 도순무사 신립이 자살한 것이 이미 하루 전인 음력 4월 28일이었는 바, 김명원과 부원수 신각, 도검찰사 이양원의 한강 배치는 선조를 비롯한 조정이 한양을 포기하고 몽진할 때까지 한강 방어선에서 시간을 끌기 위함이었다.

 

불과 1천여 명으로 4만명의 일본군을 당해낼 수는 없었고, 방어선이 무너지는 가운데 김명원, 신각, 이양원은 모두 흩어진다.[2] 이때 김명원은 임진강까지 후퇴해 거기에 방어선을 치기로 하고 다른 지휘관들에게 음력 5월 18일까지 집결하라 명했다. 그러나 전쟁 와중의 혼란으로 인해 양주 쪽으로 후퇴했던 신각, 이양원과의 연락이 두절되어 버렸고,[3] 이일, 김억추 등의 장수들도 행방이 불명인 상태에서[4] 김명원은 혼자 임진강에서 싸우다가 음력 5월 17일 다시 패배(임진강 전투), 부장 신길, 유극량 등이 전사하고 겨우 살아 북쪽으로 후퇴한다. 이 와중에 신각은 적전도주자로 오해를 받아 비변사에 의해 참형에 처해졌다가,[5] 나중에 억울함이 밝혀져 복권되었다.[6]징비록》에 따르면 이때 조정에서 신각의 참수를 주도한 것은 우의정 유홍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후 김명원은 몽진한 조정에 합류하였고, 명나라 원병을 지휘한 조승훈, 순찰사 이원익과 함께 평양을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했다.[7] 음력 11월 1일 이일을 순변사로 삼게 되었는데 김명원이 혼자 반대했다.[8]

1593년 송응창, 이여송이 지휘하는 명나라 원병이 오자 명나라 장수들의 자문에 응하고 이후 체직되어 도원수직을 권율에게 넘겨주었다.[9] 이후 호조판서, 예조판서, 공조판서를 역임했다. 판서 재임 중이었던 음력 7월 14일, 임진왜란 초기의 패전 책임을 지고 사간원에게 탄핵을 당했는데, 이때 실록을 보면 “김명원은 사람됨이 지나치게 순후하여 원수에는 적임자가 아니었다”는 주석이 달려 있다.[10] 선조는 김명원이 공을 세우지는 못했으나 고생을 많이 했다며 탄핵을 기각했다.[11]

 

1597년 요시라의 공작으로 파직된 이순신이 감옥에서 풀려나자 정탁, 유성룡, 심희수, 노직 등과 함께 그를 위로하였다.[12] 같은 해 칠천량 해전으로 원균이 지휘한 조선 수군이 전멸하자 비변사의 여러 신하들이 당황하여 대답할 바를 모르는데 김명원과 이항복만이 이순신을 다시 통제사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자 왕이 이에 따랐다.[13] 이후 병조판서, 유도대장을 겸했고 좌찬성, 이조판서, 우의정을 거쳐 1601년 부원군에 진봉되고 좌의정에 이르렀다가 이듬해 음력 11월 1일 죽었다. 졸기에서는 때에 따라 이랬다저랬다 부침이 심하다는 비방을 받았으나 풍도가 뛰어나 재상의 그릇이라고 평가받았다.[14] 정승에 오른 뒤에도 이룬 것은 없었으나 마음이 아름다워 남을 해치려 하지 않았다 한다. 김명원은 성품이 선량하여 남과 잘 지냈고 풍의가 온아하여 그의 인품을 좋아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15]

가족 관계

  • 할아버지 : 김천령(金千齡)
    • 아버지 : 김만균(金萬鈞)
    • 어머니 : 순흥 안씨, 안준의(安尊義)의 딸
      • 형님 : 김경원(金慶元)
      • 부인 : 청주 한씨, 한관(韓綰)의 딸
        • 장남 : 김수개(金守愷)
        • 차남 : 김수인(金守仁) - 형님 김경원에게 양자로 감
          • 손자 : 김남정(金南挺)
          • 손녀 : 황곤재(黃坤載, 장수 황씨)에게 출가
        • 삼남 : 김수인(金守仁)
          • 손자 : 김남헌(金南獻)
        • 사남 : 김수렴(金守廉)
          • 손자 : 김남중(金南重)
          • 손녀 : 심동구(沈東龜, 청송 심씨)에게 출가
        • 장녀 : 남복시(南復始, 의령 남씨)에게 출가
        • 차녀 : 문성군(文城君) 이건(李健, 전주 이씨)에게 출가
        • 삼녀 : 최상진(崔尙鎭, 삭녕 최씨)에게 출가

각주

  1. 이동 선조실록 26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4월 29일(무오) 2번째기사
  2. 이동 선조실록 26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5월 3일(임술) 9번째기사
  3. 이동 선조실록 26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5월 23일(임오) 3번째기사
  4. 이동 선조실록 27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6월 23일(신해) 3번째기사
  5. 이동 선조실록 26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5월 18일(정축) 4번째기사
  6. 이동 선조실록 58권, 27년(1594 갑오 / 명 만력(萬曆) 22년) 12월 21일(갑자) 2번째기사
  7. 이동 선조수정실록 26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8월 1일(무자) 1번째기사
  8. 이동 선조수정실록 26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11월 1일(정사) 23번째기사
  9. 이동 선조수정실록 27권, 26년(1593 계사 / 명 만력(萬曆) 21년) 6월 1일(갑신) 4번째기사
  10. 이동 선조실록 40권, 26년(1593 계사 / 명 만력(萬曆) 21년) 7월 14일(병인) 1번째기사
  11. 이동 선조실록 40권, 26년(1593 계사 / 명 만력(萬曆) 21년) 7월 15일(정묘) 4번째기사
  12. 이동 《난중일기》정유년 1권
  13. 이동 선조수정실록 31권, 30년(1597 정유 / 명 만력(萬曆) 25년) 7월 1일(경인) 3번째기사
  14. 이동 선조수정실록 36권, 35년(1602 임인 / 명 만력(萬曆) 30년) 11월 1일(무오) 3번째기사
  15. 이동 선조실록 157권, 35년(1602 임인 / 명 만력(萬曆) 30년) 12월 10일(정유) 2번째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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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몰 1534(중종 29)~1602(선조 35) 2. 급제 - 24세 1558년(명종 13)사마시에 합격 - 27세 1561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 3. 암행어사 연보 - 홍문관정자가 되고 이어 저작(著作)ㆍ박사(博士)에 승진하였으나, 이량(李樑)에게 미움을 사 형 경원(慶元)과 함께 파직 - 부수찬, 헌납ㆍ지평ㆍ교리ㆍ수찬 등을 역임 - 34세 1568년(선조 1)순무 어사로 함경도의 군무를 순안할 때 산천의 형편을 두루 다니며 살펴보고 요해지(要害地)의 방비 등을 자세하게 보고, 공납의 폐단을 치계하다 - 1569년 종성부사 역임 4. 관련 기록 ≪선조 002 01/06/04(임오). 순무 어사 김명원이 함경도의 공납의 폐단을 치계하다≫ 함경도 순무 어사(咸鏡道巡撫御史) 김명원(金命元)이 치계(馳啓)하였다. “신이 각처 군민(軍民)이 정소(呈訴)한 일을 가져다 살펴보고 직접 듣고 본 것으로 참작하건대 가장 고통스럽게 여기는 것으로서 그대로 존속시켜서는 아니될 것이 네 조항이었습니다. 첫째는 육진(六鎭)의 군사들이 소금을 고아 양곡을 무역해야 하는 폐단이고, 둘째는 삼수(三水)·갑산(甲山)의 초서피(貂鼠皮)와 삼수의 청밀(淸蜜)을 공납하는 고통이고, 셋째는 명천(明川) 이남(以南)이 사재감(司宰監)에 6척 4촌의 대구어(大口魚)를 진상해야 하는 괴로움이고, 네째는 함흥 동궁(咸興東宮)의 별차(別差)가 제멋대로 이익을 독차지하는 폐단이었습니다.” 【원전】 21 집 195 면 【분류】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재정-공물(貢物). *군사-병참(兵站) (자료 : 조선왕조실록, 원문번역 민족문화추진회)

 

김명원선생 묘(1602)

지 정 번 호 : 향토문화재 제10호

                              소 재 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관산동 산71-1

 

김명원선생묘(金命元先生墓)는 관산동 경주김씨 묘역에 서향(西向)으로 위치하고 있으며 정경부인 청주한씨(貞敬夫人 淸州韓氏)의 묘와 쌍분(雙墳)을 이루고 있다.

묘 앞에 세워져 있는 신도비는 숙종 21년(1695) 5월에 건립된 것으로 장방형 비좌와 옥개, 비신을 갖추고 있습니다. 비의 앞면에는‘평란공신 좌의정 경림부원군 증시충익 김공신도비명(平難功臣左議政慶林府院君贈諡忠翼金公神道碑銘)’이라 전자되어 있다. 비문은 이정구(李廷龜)가 짓고 김종연(金宗衍)이 썼으며 김창협(金昌協)이 전(篆)을 하였다. 비문은 대체로 판독이 가능할 정도로 보존 상태가 좋으나 곳곳에 총탄 자국이 나 있으며 훼손된 곳도 있다. (고양시 자료에서 발췌)

 

* 자료 출처: 정보-책 '징비록"/자료 수집- 별도 명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