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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관련>조호익(曺好益 )

Bawoo 2015. 7. 14. 21:31

 

조호익(曺好益 )1545(인종 1)∼1609(광해군 1).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사우(士友), 호는 지산(芝山). 창원 출생. 사옹원정 치우(致虞)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예조정랑 효연(孝淵)이고, 아버지는 증좌참찬 윤신(允愼)이다. 어머니는 인동 장씨(仁同張氏)로 선략장군(宣略將軍) 중우(仲羽)의 딸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75년(선조 8) 경상도도사 최황(崔滉)이 부임하여 군적(軍籍)을 정리할 때 그를 검독(檢督)에 임명, 한정(閑丁) 50명을 독납(督納)하게 하였다. 그러나 병을 핑계로 거절하자 토호(土豪)라고 상주(上奏)하여 다음해평안도 강동현에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 계속 학문에 정진, 많은 후진을 양성하여 관서 지방에 학풍을 진작시켰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유성룡(柳成龍)의 청으로 풀려나와 금오랑(金吾郎)에 특별 임명되어 행재소(行在所)가 있는 중화로 달려갔다. 그 뒤 소모관(召募官)이 되어 군민(軍民)을 규합, 중화·상원 등지에서 전공을 세워 녹비(鹿皮)를 하사받았다. 이어 형조정랑·절충장군(折衝將軍)에 승진되고, 1593년 평양싸움에 참가하는 등 전공을 세웠다.

그 뒤 대구부사·성주목사·안주목사·성천부사 등을 역임하고, 1597년 정주목사가 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였다. 1604년 선산부사, 1606년 남원부사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나가지 못하였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영천(永川)의 지봉서원(芝峰書院)과 도잠서원(道岑書院)<관련자료-http://blog.daum.net/kumho1983/18310740 >,

성천의 학령서원(鶴翎書院), 강동의 청계서원(淸溪書院)에 제향되었다. 경상북도 영천시 대창면 신광리에 고택이 남아 있다

 

저서로 『지산집』·『심경질의고오(心經質疑考誤)』·『가례고증(家禮考證)』·『주역석해(周易釋解)』 ·『역상추설(易象推說)』·『논위학지요(論爲學之要)』·『이기유석등변(理氣儒釋等辨)』·『대학동자문답(大學童子問答)』·『소황이두시가구주(蘇黃李杜詩家句註)』가 있다. 시호는 정간(貞簡)이었으나, 뒤에 문간(文簡)으로 개시되었다.

 

[묘소]
조호익의 묘소는 경상북도 영천시 대창면 대재리 송청산(松靑山)에 있으며, 허목(許穆)의 갈문(碣文)이 있다.

조호익 묘소
조호익 묘소
조호익 묘갈
조호익 묘갈

 

<조호익 선생 시-출처:漢詩房:http://cafe.daum.net/hansibang>

 

逢友(봉우)-曺好益          친구를 만나-曺好益(조호익)

松壤曾新面(송양증신면) : 송양 땅에서 일찍이 처음 만났으니
平原卽故人(평원즉고인) : 평원엔 친구가 있다네.
共思由十載(공사유십재) : 서로 지난 십년동안 그리워하다
相會始三春(상회시삼춘) : 이제 서로 만나니 봄이로구나

 

 

詠竹(영죽)                      대나무를 노래함-曺好益(조호익)

獨步篩金夜(독보사금야) : 나 홀로 달 빛 속을 걷는 밤
時聞敲玉風(시문고옥풍) : 때때로 북 울리는 바람소리 듣는다.
與君成一笑(여군성일소) : 그대와 웃음을 나누지만
吾道未全窮(오도미전궁) : 나의 도는 완전히  궁함을 면치는 못했다네 

 

 

 

 *출처: 정보 -책:징비록 (명문당 판) 243쪽/ 자료수집-디지털영천문화대전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