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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무장> 신각(申恪)

Bawoo 2015. 7. 13. 22:22

신각(申恪, 생년 미상 ~ 1592년)은 조선 중기무신이다. 본관은 평산.

생애

본관은 평산(平山). 아버지는 신경안(申景顔)이다. 작은아버지 신경민(申景閔)에게 입양되었다. 무과에 급제하고 선조 초에 연안·영흥의 부사를 거쳐, 1574년(선조 7) 경상좌수사, 1576년에 경상우병사를 역임하였다.

1586년 강화부사를 거쳐 이듬해 경상도방어사가 되었으나, 영흥부사 재직 시에 신창현감(新昌縣監) 조희맹(趙希孟)이 그의 첩에서 난 아들을 납속(納粟)시켜서라도 벼슬길에 나갈 수 있게 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관의 곡식을 꺼내 그 납속을 충당해주었다가 파직되었다.

임진왜란이 터지자 부원수로 임명되어 도원수 김명원, 도검찰사 이양원과 함께 한강 방어선에 주둔하였다.[1] 불과 1천여 명으로 4만명의 일본군을 당해낼 수는 없었고, 방어선이 무너지는 가운데 김명원, 신각, 이양원은 모두 흩어진다.[2] 현재의 동두천시, 연천군 일대로 후퇴한 신각은 가토 기요마사의 선발대 70명을 몰살시켰는데 이것이 임진왜란 때 조선군 최초의 승리였다.

 

그러나 신각은 후퇴하는 와중에 김명원 및 조정과의 연락이 두절되고 한양의 정북쪽인 양주로 후퇴했기 때문에, 임진강(장단) 방어선에서 싸우던 김명원에게 합류하지 못했다.[3] 음력 5월 17일 임진강 방어선이 무너지자 비변사는 신각을 적전도주자로 간주하고 정법하여 참형에 처했는데, 《징비록》에 따르면 이를 주도한 것은 우의정 유홍이다. 이날 오후 양주에서 다시 첩보가 도착하여 왕이 그를 죽이지 말라고 선전관을 뒤따라 보냈으나, 이미 처형된 뒤였다. 당사자에게 해명의 기회도 주지 않고 지나치게 성급하게 이루어진 처리였다.[4]

사후

무인이었으나 청렴, 근신했으므로 비명에 죽은 것을 모두 애석해하였다. 그의 처 정씨(鄭氏)는 남편이 죽자 장사를 지낸 뒤 자결했는데, 정조 때 열녀문이 세워졌다. 연안의 현충사(顯忠祠)에 배향되었다. 2년 뒤인 1594년 음력 12월 21일 상소가 올라와 신각의 억울함이 밝혀졌고, 복권되었다.[5]

각주

  1. 이동 선조실록 26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4월 29일(무오) 2번째기사
  2. 이동 선조실록 26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5월 3일(임술) 9번째기사
  3. 이동 선조실록 26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5월 23일(임오) 3번째기사
  4. 이동 선조실록 26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5월 18일(정축) 4번째기사
  5. 이동 선조실록 58권, 27년(1594 갑오 / 명 만력(萬曆) 22년) 12월 21일(갑자) 2번째기사
  6. * 정보- 책;징비록/ 자료 수집-위키백과 및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