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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웅치전투 관련>정담(鄭湛)/변응정(邊應井)

Bawoo 2015. 7. 11. 20:47

정담(鄭湛) ?~ 1592(선조 25).
조선 중기의 무신. 김제군수

본관은 영덕. 자는 언결. 아버지는 창국이다.

1583년(선조 16) 무과에 급제해 니탕개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으며, 1592년 김제군수가 되었다.

그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순찰사 이광(李洸)을 따라 공주까지 북상했는데, 이광이 그대로 돌아갔기 때문에 전투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해 7월초 권율의 지휘에 따라 나주판관 이복남(李福男), 의병장 황박과 함께 전주 점령을 위해 웅치로 북상해오는 일본군을 막고자 했다. 7월 7~8일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격렬한 공방전을 벌이다가 이복남·황박 등과 함께 전사했다. 그때 일본군은 그 전투에서 조선군의 충절에 감동받아 죽은 사람들의 시체를 모아 큰 무덤을 만들어놓고 그 위에 '弔朝鮮忠肝義膽'(조선의 충인 의사들의 영을 조산한다) 이라는 표목을 세웠다.

1690년(숙종 16) 정문이 세워졌으며, 뒤에 병조참판으로 증직되었다. 영해 충렬사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국조명신록(國朝名臣錄)』
  • 『징비록(懲毖錄)』
  • 『난중잡록(亂中雜錄)』
  • 『간옹집(艮翁集)』

 

*변응정(邊應井, 1557년 ~ 1592년)은 조선 중기의 무장으로 임진왜란 당시 해남 현감으로 여러 전투에서 전과를 올렸다.

본관은 원주, 자는 문숙, 시호는 충장으로 문예에 탁월했으나 문과에 낙방하고 선조 때 무과에 급제해 월송만호와 선전관 등을 거쳐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해남 현감으로 웅치 전투에서 전과를 올려 수군절도사가 되었다.

제2차 금산 전투에서 함께 공격하기로 약속했던 조헌이 따로 싸우다 전사하자 이를 갚기 위해 김제 군수 정담과 함께 금산성을 기습해 싸우다 전사했다.

적장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도 그의 충의에 감복하여 큰 무덤을 만들고 '조선국충간의담'이라 써서 표목을 세웠다. 그리고 사후 조정에서도 병조판서에 추증하고 고향에 정문을 세워 기리고 금산종용사에 배향되었다.<위키백과>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문숙(文淑). 원양군(原陽君) 사겸(士謙)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경력(經歷) 윤계(胤季)이고, 아버지는 공조좌랑 열(悅)이며, 어머니는 병사 이흔(李昕)의 딸이다. 문예에 능하였으나 과거에 실패하고 무예에 열중하여 1585년 무과에 급제하였다.

월송만호(越松萬戶)·선전관 등을 거쳐 해남현감으로 재직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관내의 소요를 진정시키는 한편, 격문을 돌려 의병을 규합하였다. 또 대군으로 침입한 적의 본토가 비어 있을 것을 들어 이를 공략하면 왜는 저절로 무너질 것이라고 주장, 일본 정벌을 상소하였다.

금산에서 조헌(趙憲)과 합류하여 공격할 것을 약속하였으나 행군에 차질이 생겨 조헌이 전사한 뒤에 도착, 육박전으로 왜적과 싸워 큰 전과를 올렸으나 적의 야습을 받아 장렬히 전사하였다. 이에 앞서 조정에서는 전라수군절도사에 임명하였으나 이를 알지 못하고 죽은 것이다.

적은 그의 충의에 탄복하여 큰 무덤을 만들고 ‘조선충간의담(朝鮮忠肝義膽)’이라는 표목을 세웠다. 그는 싸움에 나서기에 앞서 동생에게 글을 보내 ‘주욕(主辱 : 임금이 욕을 당함.)에 신사(臣死 : 신하로서 죽음이 마땅함.)’라 하여 비장한 결의를 보이고 노모와 작별하는 뜻을 고하며 입던 옷과 머리카락·손톱을 함께 보내 죽은 뒤 이것으로 장례를 치르도록 당부하였다. 후에 정문(旌門: 충신을 표창하기 위하여 본인의 집앞이나 마을에 세우는 붉은 문)이 세워지고 병조참판에 추증되었다. 금산의 종용사(從容祠)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송자대전(宋子大全)』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삼강록(三綱錄)』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 정보-책;징비록/자료 수집: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