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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출신 예학자(禮學者),시인-촌은(村隱)유희경(劉希慶)과 기생 매창, 허균 관련 이야기

Bawoo 2015. 7. 9. 22:46

[가계]
본관은 강화. 자는 응길(應吉), 호는 촌은(村隱). 할아버지는 유도치(劉道致)이고, 아버지는 유업동(劉業仝)이다. 유희경(劉希慶)[1545~1636]은 천인 출신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유몽인(柳夢寅)[1559~1623]이 지은 「유희경전(柳希慶傳)」에 따르면 그를 정확히 노비라고 지칭하지는 않지만 ‘미천(微賤)’한 신분이라는 단어를 썼다. 그의 아버지 이름이 ‘업동’인 것으로 보아 노비 혹은 천인 신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처는 허씨(許氏)이다. 슬하에 아들 다섯을 두었으니 유순민(劉舜民)·유우민(劉禹民)·유성민(劉聖民)·유사민(劉士民)·유일민(劉逸民)이다.

 


[활동 사항]
유희경은 서울 대묘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훈정동]에서 태어나 오랫동안 종로구 원서동에서 살았다. 어려서부터 효자로 이름이 났으며, 13세에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예(禮)를 다하자 이 소문을 들은 사대부 남언경(南彦經)이 유희경을 돌보고 가르치면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유희경의 벼슬살이는 임진왜란 때에 의병으로 나가 싸운 공으로 선조로부터 포상과 교지를 받으면서 시작되었다. 이때 사신들의 잦은 왕래로 호조의 비용이 고갈되자 그가 계책을 내놓아 그 공로로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를 받았다. 광해군 때에는 이이첨이 모후인 인목 왕후(仁穆王后)를 폐하기 위한 상소를 올리라고 협박하였지만 거절하였다. 인조반정 이후 절의를 인정받아 가선대부(嘉善大夫)의 품계를 받았고, 80세가 되면서 가의대부(嘉義大夫)를 받았다.

평소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의 어짊을 흠모하였던 유희경은 남언경(南彦經)이 도봉 서원을 창건하는 데 도움을 주고는 실질적으로 서원을 다스려 나갔는데, 사람들은 유희경이 도봉의 산수(山水)를 사랑하였기 때문에 노년(老年)을 마칠 계책을 마련한 게 아닌가 생각하였다고 한다. 도봉 서원 앞 계곡에서 유희경이 읊은 시도 전해 온다.

이곳은 수석(水石)의 경치가 뛰어났으며, 바위와 바위 사이에 침류대(枕流臺)가 있고, 그 위에 누헌(樓軒)이 있어 자연과 인공이 조화를 이루었다. 유희경은 84세 되던 1628년(인조 6) 경기 감사와 양주 목사 일행을 따라 도봉 서원에 왔다가 침류대 누상(樓上)에서 시를 짓기도 하였다. 또한 성해응(成海應)의 『동국명산기(東國名山記)』를 보면, “동구(洞口)에 들어가면서부터 수석문(水石門)의 승경이 많은데 유희경이 차지하고 있었다.”라는 구절이 있는 것으로 보아 한때 이곳에 거처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학문과 저술]
유희경은 문인들과 교유하면서 한시를 잘 지었다. 자신의 집 뒤쪽[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원서동] 시냇가에 돌을 쌓아 대를 만들어 침류대라고 하고 그곳에서 차천로(車天路)·이수광(李晬光)·신흠(申欽)·김현성(金玄成)·홍경신(洪慶臣)·임숙영(任叔英)·조우인(曺友仁)·성여학(成汝學) 등의 문인들과 시로써 화답하였으며, 이 시를 모아 『침류대 시첩(枕流臺詩帖)』을 만들었다. 그는 당시 같은 천인 신분으로 시에 능하였던 백대붕(白大鵬)과 함께 풍월 향도(風月香徒)라는 모임을 만들어 주도하였는데, 이 모임에는 박계강(朴繼姜)·정치(鄭致)·최기남(崔奇男) 등 중인 신분을 가진 시인들이 참여하였다.

그는 박순(朴淳)으로부터 당시(唐詩)를 배웠는데, 허균(許筠)의 『성수시화(惺叟詩話)』에서 그를 “천인으로 한시에 능통한 사람”으로 꼽고 있다. 그의 시는 한가롭고 담담하여 당시에 가깝다는 평을 듣는다. 또한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이던 남언경에게 문공 가례(文公家禮)를 배워 상례에 특히 밝았으므로 국상이나 사대부가의 상(喪)에 집례하는 것으로 이름이 났다. 저서로 『촌은집(村隱集)』과 『상례초(喪禮抄)』가 전한다.


[묘소]
도봉 서원 아래에 부인과 함께 같이 장사지냈다 하였으나 현재 묘의 위치를 알 수 없다.


[상훈과 추모]
아들 유일민(柳逸民)의 원종훈(原從勳)으로 인하여 자헌대부 한성 판윤에 추증되었다.

 

[상훈과 추모]
아들 유일민(柳逸民)의 원종훈(原從勳)으로 인하여 자헌대부 한성 판윤에 추증되었다.

 

[참고문헌]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촌은집(村隱集)』
『도봉 구지』(서울특별시 도봉구, 1999)
서신혜, 『조선의 승부사들』(역사의 아침, 2008)
곽정례, 「『승가수창록』과 위항 시사의 연원」(『어문 연구』33, 한국 어문 교육 연구회, 2005)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유희경, 매창, 허균에 관한 이야기.1>

 

매창(梅窓)
1573(선조 6)∼1610(광해군 2). 조선 중기의 여류시인. 본명은 향금(香今), 자는 천향(天香), 매창(梅窓)은 호이다. 계유년에 태어났으므로 계생(癸生)이라 불렀다 하며, 계랑(癸娘·桂娘)이라고도 하였다.
아전 이탕종(李湯從)의 딸로서, 시문과 거문고에 뛰어나 당대의 문사인 유희경(劉希慶)·허균(許筠)·이귀(李貴) 등과 교유가 깊었다. 부안(扶安)의 기생으로 개성의 황진이(黃眞伊)와 더불어 조선 명기의 쌍벽을 이루었다.
부안에 있는 묘에 세운 비석은 1655년(효종 6) 부풍시사(扶風詩社)가 세운 것인데, 1513년(중종 8)에 나서 1550년에 죽은 것으로 잘못 기록되어 있다. 그의 문집 《매창집》 발문에 기록된 생몰연대가 정확한 것으로, 그는 37세에 요절하였다.
유희경의 시에 계랑에게 주는 시가 10여편 있으며, 《가곡원류》 에 실린 “이화우(梨花雨) 흣날닐제 울며 $잡01고 이별(離別)한 님”으로 시작되는 계생의 시조는 유희경을 생각하며 지은 것이라는 주가 덧붙어 있다.
허균의 《성소부부고》에도 계생과 시를 주고받은 이야기가 전하며, 계생의 죽음을 전해듣고 애도하는 시와 함께 계생의 사람됨에 대하여 간단한 기록을 덧붙였다. 

 

매창의 죽음을 슬퍼하며                

                                   허균 

 

아름다운 글귀는 비단을 펴는 듯하고          

맑은 노래는 구름도 멈추게 하네                

  복숭아를 훔쳐서 인간 세계로 내려오더니      

 불사약을 훔쳐서 인간 무리를 두고 떠났네    

  부용꽃 수놓은 휘장엔 등불이 어둡기만 하고  

 비취색 치마엔 향내가 아직 남아 있는데       

   이듬해 작은 복사꽃 필때 쯤이면                   

   그 누구와 설도의 무덤 곁을 지나려나            

 

매창이 사랑한 사람은 유희경 뿐이라고 했지만 현감이던 인조반정의 공신 이귀(1557~1633)와  홍길동의 저자 허균(1569~1618)과도 교우 했다. 허균은 매창이 죽을때까지 정신적인 사랑, 즉  플라토닉 러브(Platonic Love)만 했다고 한다. 허균의 누나 허난설헌은 조선 중기의 여류시인이다 천재라고도 불렸던 그는 불행한 삶을 살다 27세의 나이에 요절했다. 허균은 그런 누이의 기억을 매창을 통해서 다시 떠 올렸을수도 있다. 허균과 매창이 처음 만나 밤을 밝히던 날 매창은 허균의 침소에 조카를 들여 보냈다. 둘은 이미 서로의 마음을 알았으리라.            
계생의 시문의 특징은 가늘고 약한 선으로 자신의 숙명을 그대로 읊고 있는 것이며, 자유자재로 시어를 구사하는 데서 그의 우수한 시재(詩才)를 엿볼 수 있다.

 

매창(梅窓)과 유희경(劉希慶)에 얽힌 이야기2.

 

전북 부안군 부안읍 성황산 서림공원입구에 매창시비(梅窓詩錍)가 있다.

이 비는 1974년 4월27일 매창기념사업회에서 다시세운 것이다.

시비의 주인공 매창은 선조 6년 1573년 부안현 아전 이탕종(李湯從)의 소실에게서 태어났다.

그해가 계유년이라서 계생(癸生) 또는 계랑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본인은 스스로 매창이라고 이름지었다.

매창은 허난설헌과 함께 조선시대 대표적 여류시인이다.

어려서 부친께 한문을 배웠고 시문과 거문고를 익혀 기생이 됐다.

아마도 어머니가 기생이 아니었나 싶다.  

 
조선시대 여자들은
이름조차 없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매창은 이름과 자(字),호(號)까지 가진 기생이었다.

기생신분인 매창에게 수많은 남자들이 찝적댔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함부로 몸을 굴리지 않았으며

겁없이 앙탈부리는 남자들을 멋진 시구절로 물리쳤다.

 

매창과 유희경의 사랑 

 

매창은 죽은 후 부안읍 남쪽 봉덕리 공동묘지에 분신처럼 아꼈던 거문고와 함께 묻혔다.

이 고장 사람들은 이 언덕을 지금도 ‘매창이 뜸’이라 부른다.

그녀가 죽은지 45년이 지나 후세사람들이 무덤에 비석을 세웠고 그후 13년이 흐른 후 매창의 시 수백편을

모아고을 사람들이 목판을 깎아 ‘매창집’이라 이름짓고 인근사찰 개암사에서 시집을 간행했다.

전세계 어느나라를 둘러봐도일개 여인, 그것도 화류계에 몸담았던 여성의 글을 단행본으로 발간한 기록은 없다고 한다.


이시집이 나오자
너무 많은 주문이 몰려 발행처 개암사의 재원이 바닥날 정도였다.

그후 세월이 흘러 1917년 부안시인 모임인 부풍시사(扶風詩社)에서 높이4척의 비석을 세웠다.

지금도 음력 4월이면 부안사람들이 제사를 모시고 있다.

 

시조계의 대부 가람 이병기(李秉岐)선생은 매창의 무덤을 찾아 이렇게 노래했다.

 

'돌비는 낡아지고 금잔디 새로워라
덧없이 비와 바람 오고 가건만
한줌의 향기로운 이 흙 헐리지 않는다.

이화우(梨花雨) 부르다가 거문고 비껴두고
등 아래 홀로 앉아 누구를 생각는지
두 뺨에 젖은 눈물이 흐르는 듯 하구나

비단적삼 손에 잡혀 몇 번이나 찢었으리
그리던 운우(雲雨)도 스러진 꿈이 되고
그 고운 글발 그대로 정은 살아남는다.'

 

매창과 유희경 천년 사랑


 

매창의 묘는 부안읍 사람들이 돌보기전에는 나무꾼들이 돌아가면서 벌초도 하면서 돌봤다고 한다.

또 유랑극단과 가극단이 부안에서 공연할 때는 먼저 매창의 무덤을 찾아 한바탕 신명나게 놀면서

선배 대시인의 넋을 기린다고 한다.

 그녀의 묘는 1983년 지방기념물 65호로 지정됐다.

 

 

 매창과 유희경 천년 사랑

 

 

당대의 여류시인 매창이 살았을때 한 연인이 있었으니 바로 촌은(村隱) 유희경(劉希慶)이다.

유희경(劉希慶)은 자를 응길(應吉), 호를 촌은(村隱)이라 하며

본관은 강화로 조선조 대시인이요 유명한 학자다. 효자로 유명했고 예(禮)와 상례(喪禮)에 밝아 국상에서부터 평민들의 장례에 이르기까지  그에게 문의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관군을 도운 공으로 통정대부가 됐고 광해군 때는 폐모상소 올리기를 거부한 후 은거, 후학을 가르쳤다.

 

당대의 대시인이요 풍류객인 유희경을 흠모하는 여인이 있었으니 바로 기생 매창이다. 매창은 유희경의 시에 매료돼 한번 겨뤄보고 싶었다

 

어느날, 부사 이귀(李貴)로 부터 촌은이 부안에 온다는 소식을 듣는다.

정말 뜻하지 않은 영광이요 기쁨이었다. 당시 매창은 기생생활을 청산하고 서해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한적한 곳에 초막을 짓고 거문고와 시로 조용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매창은 즉시 부안으로 달려간다.

유희경은 닷새 후 부안에 도착했다.

매창을 본 유희경은 술자리에서 거문고를 재촉한다.

청아한 목소리와 함께 울려 퍼지는 거문고의 음률은 50대에 접어든 유희경의 가슴속을 헤집고 다닌다.

유희경은 지긋이 눈을 감고 무릎을 치며 감탄한다. 유희경은 시한수를 짓고 거문고를 탄다.

"일찍이 남국(남쪽)의

계랑(매창의 다른이름) 이름을 들었는데 그녀의

시와 노래가 서울까지 들리더라
오늘 가까이서

얼굴을 대하니 선녀가 지상에 내려온 듯 하구나

나에게 신비의 선약(仙藥)이 있어

찡그린 얼굴도 고칠수 있는데 금낭속 깊이

간직한 이 약을 사랑하는 네게 아낌없이 주리라"

계량이 화답한다.

"내게는 오래된 거문고 하나 있다오
한번타면 온갖 정감 다투어 생기는데도
세상사람들이 이곡을 아는이 없으나
임의 피리소리에 한번 맞춰보고 싶소."


신기로운 선약,
금낭 속에 감춰둔 묘약은 과연 무엇일까.

쉽게 표현하면 사랑이지만 은유를 좋아하는 천재들의 표현 속에 감춘 의미는 무얼까.

한번 타면 온갖 정감이 생기고 아무도 그 의미를 모르는 거문고 소리, 계랑이 말하는 그 의미는

또 어떤 것일까. 사랑하는 연인에게 아낌없이 줄 수 있는 선약, 금낭 속에 감춰둔 그 약을 요즘 의미로

섹스라고 해도 좋다.‘세상사람들이 모르는 노래’를 계랑자신의 육체로 해석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아무에게나 헤프게 내돌리지 않은 은밀한 자신의 몸이라 생각하면 어떠랴.

임의 피리소리에 한번 맞춰보고 싶다는 것을

당신의 요구에 따르겠다는 의미로 넘겨짚어도 좋다.

 

무어라 해도 좋다.

이날 밤 두사람은 원앙금침에 들었다.

계랑의 나이 열아홉. 유희경은 50세.

50평생 근엄한 선비의 지조가 무너지고

오랫동안 굳게 닫쳤던 계랑의 문이 열렸다.

문풍지는 두 사람의 거친 호흡에 펄럭이고

방안의 촛불은 정열의 열기에 녹아내렸다.<펌글>

 

매창과 유희경의 사랑- 부안 매창기행 

  

 

 

 

 
 
梨花雨 / 매창
이화우(梨花雨) 흩날릴제

울며잡고 이별한님 추풍 낙엽(秋風落葉)에

저도 날 생각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라. 겨우내 언 땅도 녹아 작은풀도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는 봄 배꽃이 비처럼 하얗게 날리는 날에 이별을 해야 했던 매창 그 잔인했던 봄이 가고 여름이 가고

세월은 흘러 낙엽지는 가을이 올 때까지 님 생각 떨쳐 버릴수 없는데 배꽃 몰고간 바람처럼 떠난 님은 날 생각이나 하시는지....
  
매창을 생각하며 / 유희경(劉希慶)
娘家在浪州 我家住京口  
낭가재낭주 아가주경구
相思不相見  腸斷梧桐雨
상사불상견 장단오동우
그대의 집은 부안에 있고 
나의 집은 서울에 있어 
그리움 사무쳐도 서로 못 보니 
오동잎에 비 뿌릴 제 애가 탄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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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책-조선노비열전조선노비열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