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커바이트의 난(Jacobite risings)은 1688년에서 1746년에 걸쳐 브리튼 제도에서 일어난 폭동이자 반란, 전쟁이었다. 반란은 제임스 2세 의 복위를 목표로 하였으며, 그가 명예혁명에 의해 폐위되자 스튜어트 왕가 후계자의 복권을 시도했다. 재커바이트(영어: Jacobite)라는 이름은 제임스(영어 James)의 라틴식 이름인 야코부스(라틴어 Jacobus)에서 온 것이다. 여러 차례에 걸쳐 일어난 이 반란은 발생한 연도를 따 "15년의 재커바이트 반란"(1715년) "45년의 재커바이트 반란"(1745년)과 같이 불렸다.
개요
여러 차례에 걸쳐 일어난 재커바이트 반란의 동일한 목표는 스튜어트 왕가를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왕좌에 앉히는 것이었다.(1707년 이후에는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의 왕좌를 목표로 했다.) 이들은 명예혁명을 통해 집권한 메리 2세와 네덜란드 출신인 그녀의 남편 오렌지공 윌리엄의 통치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들은 하노버 왕가가 성공적으로 영국의 왕좌를 양위받은 1714년 격렬한 반란을 일으켰다. 최후의 재커바이트 반란은 1745년 7월에 찰스 에드워드 스튜어트를 옹립하여 일어났으며 1746년 4월16일의 컬로든 전투에서 패배함으로써 반란은 완전히 진압되었다.
군복
재커바이트 군은 군복을 똑같이 맞춘 것이 아니라, 푸른 보닛(bonnet = 챙 없는 모자)과 흰 코케이드 (꽃 모양의 리본 장식)으로 재커바이트 군임을 식별하였다.
관련 문화
재커바이트의 반란과 관련된 스코틀랜드의 고전 및 현대 포크송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관사는 모두 생략하였다.
- 블루 보니츠(Blue Bonnets)
- 화이트 코케이드(White Cockade)
- 셰라무어 파이트(Sherramuir Fight)
- 컴 이 바이 어솔(Cam ye by Atholl)
- 킬리크랭키(Killiecrankie)
- 보니 던디(Bonnie Dundee)
- 조니 코프(Johnny Cope)
- 컴 오버 더 스트림 찰리(Come over the Stream Charlie)
- 오버 더 워터(Over the Water)
- 보니 무어헨(Bonnie Moorhen)
- 윌 이 노 컴 백 어게인(Will ye no Come Back Again)
- 사운드 더 피브로크(Sound the Pibroch)
- 스카이 보트 송(Skye Boat Song)
- 스카이의 뱃노래(영어: The Skye Boat Song)는 스코틀랜드 전통 민요로 젊은 왕위요구자[1] 찰스 에드워드 스튜어트와 많은 스코틀랜드인의 죽음에 대해 노래하고 있고, 노래의 내용은 1746년 영국 정부군과 재커바이트간의 컬로든 전투에서 정부군에 패배해 망명길에 오른 찰스 에드워드 스튜어트를 그리고 있으며, 이때 찰스는 플로라 맥도널드라는 여성의 도움으로 위스트 섬에서 스카이 섬을 거쳐 국외로 탈출한다. 또, 찰스는 하녀로 변장했었다. 재커바이트의 반란을 포함한 이러한 일련의 사건은 스코틀랜드 지역 사람들에게 있어 스코틀랜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심어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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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의 가사는 해럴드 볼턴 경이 지은 것과,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이 지은 것 두 가지가 있다. 곡은 1870년대 애니 맥클리오드는 스카이 섬 인근에서 뱃사공의 노래를 듣고 구전곡을 취합해 만들어졌다. 노래는 1884년《Songs of the North》에 출판되어 실리게 된다. 최근 편집된 책에는 애니 맥클리오드의 이름이 빠지고, 대신 “말콤 로손이 옛 하일랜드 뱃노래에서 곡을 편곡함”이라고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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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재커바이츠 바이 네임(Ye Jacobites by Name)-로버트 번스 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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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지스 어브 프린스 찰리(Roses of Prince Charlie)스코틀랜드의 2인조 셀틱 포크 그룹인 더 코리스의 멤버 로니 브라운이 작사 및 작곡한 대중가요이다. 1973년경에 작사 및 작곡되었고, 1974년에 처음 발표되었다.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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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곡에 나오는 찰리 왕자, 곧 프린스 찰리(Prince Charlie)는 명예혁명으로 쫓겨난 제임스 2세(잉글랜드 기준. 스코틀랜드 기준으로는 제임스 7세)의 손자인 찰스 에드워드 스튜어트를 가리킨다. 찰스 에드워드 스튜어트는 1745년에 일어난 마지막 재커바이트의 반란을 주도한 인물이며, 1746년에 스코틀랜드의 재커바이트 군과 잉글랜드군이 맞붙은 마지막 전투인 컬로든 전투를 지휘하였다. 1절에 나오는 'Bonnie Prince' 는 찰리 왕자의 별명이다.(bonnie는 스코트어로 아름답다는 뜻이다.) 찰리 왕자의 상징물은 흰 장미꽃이었다. 후렴구에 나오는 'White is the blossom' 은 이 장미꽃의 색깔을 나타낸 것이다.
내용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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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 윌리엄슨의 '스코틀랜드의 꽃' (Flower of Scotland)와 마찬가지로 자연물을 통해 시상을 펼쳐 나가고 있다. 곡의 시작과 끝, 각 절의 사이사이에 나오는 후렴구에서는 찰리 왕자의 장미꽃에 대해 묘사하고 있으며, 청자에게 스코틀랜드를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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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연의 1행에서는 '스코틀랜드의 꽃' 에서도 다루고 있는, 1314년에 배넉번에서 스코틀랜드 왕 로버트 1세가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2세를 물리친 배넉번 전투의 승리를 상기시키고 있다. 배넉번 전투는 한국으로 따지자면 이순신 장군이 일본군을 격퇴한 한산도 대첩이나 김좌진 장군이 일본군을 크게 이긴 청산리 대첩에 견줄 수 있는, 잉글랜드에 맞서 스코틀랜드가 거둔 대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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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행과 3행에서는 1513년에 제임스 5세가 이끈 스코틀랜드군이 아라곤의 캐서린이 이끈 잉글랜드군에 참패한 플로든 전투와, 1746년에 찰리 왕자가 이끈 스코틀랜드 재커바이트 군이 잉글랜드군에 참패한 컬로든 전투를 상기시키며 설욕을 권유(Fight again)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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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행의 'Roses of Prince Charlie' 는 이 곡의 소재인 동시에 시상의 중심에 놓여 있는 자연물이다. 2연에서는 새로운 세계(new world)를 만들어 낸(Carved out) 원동력으로 먼 곳으로 쫓겨난 사람들의 품고 있던 정신(Spirits of the banished in far and distant lands)을 들고 있으며, 뒤이어 땀(sweat), 피(blood), 손(hand)을 들고 있는데, 이는 노력과 희생, 헌신과 실천 등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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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연은 스코틀랜드의 미래를 위해 필요한 성장 아이템들을 언급하고 있는데, 1행의 이탄과 석탄(peat and coal), 2행의 선박(ships), 3행의 생명의 물(water of life), 4행의 검은 황금(black gold)과 물고기(fishes)가 그것이다. 생명의 물은 스코틀랜드의 명주인 스카치 위스키를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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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스키의 어원은 게일어로 '생명의 물' 이라는 뜻이다. 4행의 검은 황금은 석유를 비유할 때 흔히 쓰이는 표현이다. 스코틀랜드는 산유국으로, 북해에 매장된 엄청난 양의 석유를 통해 경제적 이익을 얻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스코틀랜드의 항구 도시인 애버딘 근해의 북해 유전에서 생산되는 북해산 석유를 뜻한다. 여기에 언급된 것들은 모두 스코틀랜드가 보유한 소중한 아이템들로, 한국의 자동차, 반도체, 조선, 이동통신, 인삼 등과 마찬가지로 스코틀랜드 경제에 큰 뒷받침이 될 수 있는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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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의 꽃' 과 마찬가지로, 이 곡도 스코틀랜드의 과거를 상기시키고, 미래, 곧 광복(잉글랜드로부터의)에 대한 희망을 노래함으로써 스코틀랜드의 민족 감정을 자극하고 있다. '스코틀랜드의 꽃' 과 다른 점은 밝은 미래를 위해 필요한 구체적인 성장 아이템들을 언급하고 있으며, 훨씬 더 밝은 미래에 대한 희망이 강조되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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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에 나온 'Live from Scotland Volume 1' 에 처음 등장하며, '스코틀랜드의 꽃' 등 다른 포크송들과 함께 들어 있다. 최근에는 백파이프로도 많이 연주된다. (이상 모든 괄호 및 따옴표 안에 인용된 단어 및 문장의 저작권: ⓒ The Corries (Music) Ltd.)
- Come now gather now here where the flowers grow
- White is the blossom as the snow on the ben
- Hear now freedom's call we'll make a solemn vow
- Now by the roses o' Prince Charlie
- Fight again at Bannockburn your battle-axe tae wield
- Fight wi' your grandsires on Flodden's bloody field
- Fight at Culloden the bonnie prince tae shield
- Fight by the roses o' prince Charlie
- Spirits of the banished in far and distant lands
- Carved out the new world wi' sweat, blood and hand
- Return now in glory and on the silver sand
- Fight by the roses o' Prince Charlie
- Tak' your strength from the green fields that blanket peat and coal
- Ships from the Clyde have a nation in their hold
- The water of life some men need to make them bold
- 보니 블루(Bonnie Blue)-로이 윌리엄슨 작사, 작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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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백과-재커바이트 [Jacobi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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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1688년 영국 명예혁명으로 왕위에서 축출된 스튜어트 왕가의 제임스(라틴어로 Jacobus) 2세 및 그 후손의 추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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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커바이트 운동은 1688~1745년에 정치적으로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다.
특히 윌리엄 3세와 앤 여왕 치하에서 재커바이트는 왕권 교체의 가능성을 보여주었으며 프랑스(나중에는 이탈리아)에 망명해 있던 제임스 2세 진영에는 불만을 품은 군인들과 정치인들이 빈번히 찾아들었다. 1714년 이후 휘그당의 권력독점으로 토리당의 여러 인사들이 재커바이트와 음모를 꾸미기도 했다.
이 운동은 스코틀랜드와 웨일스 및 아일랜드에서 강력했는데 스코틀랜드와 웨일스에서의 지지기반은 주로 왕조적인 것이었으며 아일랜드에서는 종교적인 성향이 강했다.
가톨릭 세력과 국교회를 신봉하던 토리당은 당연히 재커바이트였다. 토리당에 속한 국교도들은 1688~89년의 사건(명예혁명)에 대한 정통성에 회의를 품고 있었으며, 한편으로 가톨릭 세력은 제임스 2세와 '늙은 왕위요구자' 제임스 에드워드, 그리고 '젊은 왕위요구자' 찰스 에드워드에게 더욱 많은 기대를 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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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에드워드는 확고한 가톨릭교도였으며, 찰스 에드워드는 정치적 이유로 갈팡질팡했으나 적어도 관용적인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명예혁명 후 60년 동안 망명한 스튜어트 왕가의 왕정복고를 꾀하는 시도가 5차례 있었다. 1689년 3월 제임스 2세는 직접 아일랜드에 상륙했으며 더블린에서 소집된 의회는 그를 왕으로 인정했다. 그러나 아일랜드와 프랑스 연합군은 1690년 7월 1일 보인 강 전투에서 윌리엄 3세의 군대에 패배했으며 제임스 2세는 프랑스로 돌아갔다. 1708년 프랑스군의 2번째 침공계획은 완전히 불발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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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1715) 반란'이라고 하는 3번째 왕정복고 시도는 위협적이었다.
원래는 명예혁명을 지지했다가 환멸을 느낀 마 백작 6세 존 어스킨이 1715년 여름 '제임스 3세와 제임스 8세'(늙은 왕위요구자 제임스 에드워드)를 위해 재커바이트 파벌과 북동부의 감독파 세력을 주축으로 봉기를 일으켰다. 과단성 없는 지도자인 마 백작은 단지 퍼스까지 나아갔을 뿐이며 아가일 공작이 이끄는 소규모 부대와 대면할 때까지 상당한 시간을 허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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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5년 11월 13일 셰리프무어에서의 전투는 승부가 판가름나지 않은 채 끝났으며 이와 동시에 남부지역에서의 봉기에 걸었던 희망도 프레스턴에서의 패배로 무산되었다. 제임스는 너무 늦게 도착했기 때문에 주요지지세력들을 이끌고 프랑스로 달아나는 일 이외에 달리 할 일이 없었다. 4번째 재커바이트 시도는 스코틀랜드 서부 고지대에서 스페인의 지원을 받은 봉기였는데 1719년 글렌쉴에서의 패배로 단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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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년(1745) 반란'으로 일컬어지는 5번째 시도는 가장 낭만적인 성격의 반란이었으며 가장 위력적인 봉기였다.
그해에 앞서 마련된 프랑스의 또다른 침공계획은 제대로 실현되지 못했으며 이제 프랑스 측으로부터는 별다른 도움을 기대할 수 없는 실정이었으나, 젊은 왕자 찰스 에드워드의 매력과 대담함, 그리고 정부군의 부재(당시 유럽 대륙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었음)라는 상황은 좀더 위협적인 봉기를 발생시켰다. 찰스는 수주일 만에 스코틀랜드의 주인이 되었으며 프레스턴팬스 전투(9. 21)의 승리자가 되었다.
잉글랜드에서 반란 기운이 없는 데 대해 매우 실망했지만 찰스는 12월 4일 남쪽으로 잉글랜드 더비까지 진군했으며 스코틀랜드 고지대로 퇴각하기 전 1746년 1월 17일 폴커크 전투에서 한 차례 더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4월 16일 컴벌런드 공작 윌리엄 오거스터스가 인버네스 근처 컬로든 전투에서 재커바이트를 격파함으로써 사태는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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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여 명의 반란 가담자가 처형당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추적당한 끝에 무자비하게 살해되거나 추방당했다. 수개월 동안 정부군 수색대에 의해 추적을 받아오던 찰스는 9월 20일 가까스로 유럽으로 탈출했다. 이후 위협적인 정치 세력으로서의 재커바이트 운동은 쇠퇴했으며 다만 감상적 차원에서 존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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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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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cobite risings (재커바이트의 난) -영어 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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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15
4043730 결전 전야 폴커크의 참패 직후 정부군은 철수하여 전열을 재정비하였다. 재커바이트는 여세를 몰아 스털링성을 포위하였으나, 이는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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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 출처: 정보-책"역사가 기억하는 혁명의 물결
54~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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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집-각 내용에 표기. 음원-유튜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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