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음악 감상실 ♣/<음악사(略史)>

[음악사의 라이벌] 베토벤과 베버

Bawoo 2015. 8. 15. 22:47

음악의 일을 말로 다 표현할 수는 없다. 음악가들의 관계를 살펴보면 그들이 음악을 통해 하려던 이야기가 더 생생하게 들리곤 한다. 오성과 한음 같은 친구가 있는가 하면, 개와 원숭이 같은 사이도 있다. 토끼와 거북이의 달리기에서 누가 이겼을까. 그해 여름 새 부대에 담은 술과 해묵은 술 가운데 어느 쪽이 맛이 들었을까. 음악사에 등장했던 우정과 경쟁, 질투와 동경의 관계를 따라가 본다.

베토벤과 베버

오라스 베르너가 그린 하나우 전투
오라스 베르너가 그린 하나우 전투


1813년 12월 8일 빈에서 자선 음악회가 열렸다. 치열한 나폴레옹 전쟁 가운데 하나인 하나우 전투의 부상병들을 돕기 위한 자리였다. 베토벤은 이 공연을 위해 이렇게 적었다. “우리는 오직 순수한 애국심 그리고 그런 많은 희생을 감수한 분들에 대한 우리의 기껍고 헌신적인 노력에 감동했습니다.” 베토벤의 연주회 프로그램은 <웰링턴의 승리>라는 전쟁묘사 음악과 그의 일곱 번째 교향곡이었다. 1808년에 5번과 6번 교향곡이 발표되고 꽤 오랜만에 나온 기대작이었다.

때가 때인지라 오케스트라에는 당시 최고의 음악가들이 모였다. 루이 슈포어, 요한 네포무크 후멜, 자코모 마이어베어, 안토니오 살리에리와 같이, 베토벤만 없었더라면 서로 최고를 다퉜을 작곡가들이 바이올린 파트에 앉았다. 베토벤이 극찬한 도메니코 드라고네티가 더블베이스를, 기타의 명인이기도 했던 마우로 줄리아니가 첼로를 맡았다. 비유하자면 ‘어벤저스 오케스트라’라고 부를 수 있겠다.

베토벤은 한껏 고무되어 과장된 행동으로 지휘했고, 감동적인 2악장의 도약부분에서는 실제로 공중으로 껑충 뛰어 올랐다. 오늘날도 교향곡 7번은 ‘영웅’, ‘운명’, ‘전원’, ‘합창’ 등 부제가 있는 그의 교향곡들과 나란히 가장 사랑 받는다.

 

그런데 늘 베토벤에게 딴죽 거는 사람이 있었으니 후배 작곡가 카를 마리아 폰 베버였다. 베버는 앞서서도 베토벤의 교향곡 4번을 비꼬는 글을 쓴 적이 있었다. 곡을 초연한 연주자들이 자기 파트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는 장면을 묘사한 이 풍자는 “조용하지 않으면 ‘영웅’(베토벤의 교향곡 3번)을 연주하게 하겠다”는 극장 관계자의 경고로 웃음짓게 한다. 급기야 베버는 애국적인 교향곡 7번에 대해 “베토벤이 정신병원에 갈 때가 되었다”라고 비아냥거렸다. 도대체 베버는 누구인가.

1786년생으로 베토벤보다 열여섯 살 어린 카를 마리아 폰 베버는 독일 맨 북쪽 슐레스비히 홀슈타인의 오이틴이라는 작은 도시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극단을 이끌며 여러 곳을 전전한 아버지 때문에 그에게 연고지는 큰 의미가 없다. 아버지 프란츠 안톤 폰 베버는 또한 음악가였고, 아버지 이복형의 딸 가운데 하나는 모차르트에게 시집을 갔다. 카를 마리아는 모차르트의 사촌 처남이었던 셈이다. 프란츠 안톤이 아들을 조카사위처럼 신동으로 키우려고 했던 마음은 보통의 음악 가정보다 클 수밖에 없었다.

성장기 내내 이사가 잦았지만 베버는 아버지와 함께 각 지를 돌며 자신의 음악적 재능을 키워나갔다. 한 때 아버지 프란츠 안톤이 영주의 돈을 유용해 체포되면서 가족은 위기를 맞기도 했다. 베버는 프라이부르크와 다시 잘츠부르크를 거쳐 빈, 아우크스부르크, 브레슬라우(오늘날 폴란드의 브로추아프)를 거치는 동안 착실히 오페라 작곡가로 성장해 간다. 프라하, 베를린 그리고 1817년부터 극장 감독으로 재임하면서 이탈리아와는 다른 독일 오페라의 근간을 세우려 했던 드레스덴이 가장 중요한 곳이었다.

베버의 작품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무도회의 권유>(1819, 아마 일본을 통해 건너온 듯한 이 곡의 제목은 ‘춤 신청’쯤으로 이해하면 쉽다)에 이어 대표작인 오페라 <마탄의 사수>(1821)가 차례로 발표됐다. 1824년에 베버는 바다 건너 영국으로부터 초대받았고, 오페라 <오베론>을 작곡해 초연했다. 런던에서 과로와 폐렴으로 고생하던 그는 1826년 39세의 나이로 객사했다. 베토벤보다 한 해 이른 죽음이었다. 베버 사후 드레스덴 극장의 책임자가 된 리하르트 바그너는 영국에서 베버의 유해를 송환해 다시 장례를 치르며 추도사를 읽었을 정도로 그를 존경했다.


 (무도회의 권유 - Carl Maria von Weber/Hector Berlioz - Invitation to the Dance, Op. 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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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왜 베버는 베토벤을 우습게 봤을까. 우선 베버와 베토벤은 작곡 여건이 전혀 달랐다. 베버는 베토벤이 30대 초반에 <피델리오> 단 한 작품만을 남긴 오페라가 주무기였다.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가, 베토벤은 본이 고향이었고, 그보다 빈에서 보낸 시기가 가장 중요했지만, 베버에게는 앞서 말했듯이 그런 고향의 의미가 희박했다. 베버는 떠돌이 음악가 생활에서 체득한 서민들의 희로애락을 민중극으로 만들고자 했다. 반면 베토벤은 세련된 음악의 안목을 갖춘 빈의 귀족들에게 갈고닦은 음악을 통해 인정받고자 했다. 베토벤에게 베버의 음악이 너무 거칠고 조악했다면, 베버에게 베토벤은 보통 사람의 삶에 귀를 막은 작곡가 귀족이었을 것이다. 즉 베버가 선을 그은 것은 베토벤이라기보다는 권위적인 빈의 음악풍토였다. 오히려 베버는 베토벤의 위대함을 모르지 않았고, 그가 자신을 지지해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베토벤은 베버가 하찮은 노랫말에 곡을 붙이는 것을 싫어했다. 베토벤이 존경한 괴테는 한술 더 떴다. 로맹 롤랑에 따르면 베버는 죽기 한 해 전에 괴테를 방문했다. 몸이 아픈 그가 대기실에서 기다리며 시성(詩聖)을 알현하고자 했지만, 괴테가 그를 들인 것은 이름을 두 번이나 더 대고 난 뒤였다. 더욱이 만남은 지극히 형식적이었다. 괴테는 베버에게 음악에 대한 얘기는 전혀 하지 않고 차갑게 대했다. 베버는 숙소로 돌아와 끙끙 앓다가 이틀 뒤에 겨우 바이마르를 떠났다.

괴테는 야위고 코를 훌쩍거리며 옷차림도 형편없는 베버를 홀대했다. 또한 그는 매너가 거칠고 언사는 거침이 없었다. 괴테는 귀족 혈통도 아닌 베버 가문이 ‘폰’(von)이라는 전치사를 이름에 거짓 사용한 것도 못마땅했으리라(베버의 부모는 괴테가 책임졌던 바이마르 극장에서 일한 적이 있다). 무엇보다 괴테는 베버의 음악이 시끄럽고 떠들썩한 것이라고 치부했다.

물론 롤랑은 괴테와 베토벤 사이의 긴장감도 잘 지적했다. 신분 질서에 대한 상이한 생각과 시와 음악에 대한 의견 차로 두 사람 역시 친분을 맺지는 못했다. 그러나 괴테는 베토벤의 음악을 높이 샀고, 다만 그의 압도적인 음악이 자신의 문학을 넘어설까 경계했을 뿐이었다. 반면 베버의 오페라는 괴테가 볼 때 시에 대한 용서할 수 없는 모독이었고, 이에 대해서는 베토벤의 생각도 같았다.

베버의 편은 아무도 없었을까. 앞서 말한대로 후배 바그너는 베버를 ‘독일 오페라의 아버지’로 생각했고 아홉 살 때 베버가 지휘하는 <마탄의 사수>를 본 이래 생애 전 작품을 통해 베버의 모범을 따랐다. 프랑스의 베를리오즈 또한 베버를 존경해서 피아노곡인 <무도회의 권유>를 관현악으로 편곡했다. 베를리오즈의 절친한 친구이자 뒷날 바그너의 장인이 되는 리스트 또한 베버의 단악장 피아노 협주곡 <콘체르트슈튀크>를 자기 피아노 협주곡들의 모델로 삼았다.

나아가 바그너, 베를리오즈, 리스트 모두의 공통점은 베토벤을 자신들의 궁극적인 예술가상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이들에게는 괴테도 같은 위상이었다. 또 한 사람, 베버와 독일음악의 부흥을 함께 꿈꿨던 밤베르크 오페라 극장의 감독이자 작가 E.T.A 호프만은 베버가 그렇게 깎아내렸던 베토벤의 교향곡을 예찬해 마지않았다. 결국 같은 하늘 아래 앙숙처럼 보였던 베토벤과 베버는 각각이 독일 음악의 양대 기둥이었던 셈이다.

프리드리히의 '안개 바다 위의 나그네'
프리드리히의 '안개 바다 위의 나그네'

낭만주의가 아름다움을 공감각으로 이해했음에 비추어 두 사람의 간극을 그림에 빗대보면 재미있다. 베토벤, 베버와 같은 시기의 대표적인 독일 화가는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1774-1840)이다. 대표작 ‘안개 바다 위에 선 나그네’을 비롯해 그가 그린 회화의 주제는 고독, 초연함, 기다림과 같은 낭만주의의 본질을 담고 있다.

그런데 프리드리히가 가장 많이 그린 것은 사실 숲이다. 모든 것을 빨아들일 듯한 마성(魔性)으로 가득 찬 신비의 숲은 분명 프리드리히의 독창적인 소재였다. 또 그런 마성과 신비가 같은 시기 베토벤에게는 없으면서 베버 음악을 지배하는 가장 큰 분위기였다.

프리드리히가 그린 '달을 생각하는 두 남자'
프리드리히가 그린 '달을 생각하는 두 남자'


베버의 대표작 <마탄의 사수>에는 악마의 힘을 빌려 마법의 탄환을 만드는 숲속 장면이 나온다. 사랑하는 남자가 비뚤어지지 않기를 기원하는 여주인공은 자신의 등 뒤에 감도는 어두운 그림자를 두려워하며 거울 앞에 선다. 마치 프리드리히의 안개산 정상에서 속세를 바라보는 듯한 은둔의 현자도 말미에 등장한다.

<영화로 만든 마탄의 사수 예고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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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적으로 베버는 19세기 전반 음악사 전체를 지탱하던 베토벤에게 유일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만일 그가 없었더라면 베토벤은 자신이 책임진 독일음악 전체와 함께 블랙홀이 되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베버가 ‘자처한 악역’은 베토벤이 만장일치가 되는 것을 막아주었다. 그것은 단지 베토벤의 위대함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는 데에서 더 나아가 뒤따르는 작곡가들에게도 생각할 과제를 주었다. 바로 음악이 고관대작이나 숭고한 영혼을 가진 사람만의 것이 아니라, 조악하고 보잘 것 없는 민중의 마음에 다가갈 때가 되었다는 점이다.

당대에 베토벤의 라이벌을 자처하는 것은 당연히 무모한 일이었지만, 베버는 훨씬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기에 서슴지 않고 그 역할을 맡았던 것이다.

 

정준호 음악칼럼니스트

조선일보에 연재된 정준호 음악칼럼니스트님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