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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14세 치세 모든 전투에 참가한 성 공격, 방어 전문가]보방( Sébastien Le Prestre de Vauban )

Bawoo 2015. 8. 26. 21:30

 

요약

 

루이 14세 재위기간(1643~1715)중 프랑스가 참전한 모든 전쟁에서 싸웠으며, 성을 공격하는 전술과 방어요새를 건축하는 방법을 전문적으로 연구하여 탁월한 성과를 보였다.
가난한 소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1651년 콩데 공 루이 2세 드부르봉의 연대에 사관후보생으로 들어갔다. 1655년 방어공사와 공성술을 전담하는 장교단에 '국왕 전속기사' 자격으로 가입했다. 이 장교단은 요새와 포위 공격술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며 정규군 계급제도와는 별개의 체제로 서서히 증강되고 있던 부대였다. 그는 1655~57년 여러 요새와 도시의 공격작전에 참여한 후 1658년 그라블린 공격 때 공병대장이 되었다. 마스트리히트 공성전(1673)에서 그는 완전한 '평행선' 방식을 이용했다. 그것은 방어시설 주위에 평행이나 동심원으로 참호들을 파고 그 참호들을 파격적인 지그재그형의 참호들로 연결하여 수비군의 포화로부터 비교적 안전하게 적의 요새로 접근할 수 있도록 한 방식이었다. 1684년 룩셈부르크 공격을 지휘한 후에는 이 도시의 방어시설을 재설계하기도 했다. 바이에른의 란다우 요새 설계가 그의 최대 업적(1687)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개요

    루이 14세 재위기간(1643~1715)중 프랑스가 참전한 모든 전쟁에서 싸웠다.

    초기생애

    보방은 소귀족에 속하는, 수입이 매우 적은 집안에서 태어났다.

    1651년 콩데 공(公) 루이 2세 드부르봉의 연대에 사관후보생으로 들어갔다. 콩데 공은 얼마 지나지 않아 어린 국왕 루이 14세에게 반기를 들었다. 그의 재능은 금방 드러났다. 콩데 공 휘하에서 아르곤 지방 도시들을 방어하고 생트메네울을 공격하여 함락하는 데 있어 괄목할 만한 활약을 보였다. 1653년 그는 정부군에 포로로 잡혔다. 그러나 정중한 대우에 감복해 정부편이 되어 달라는 권유를 받아들여 왕당파의 생트메네울 탈환작전을 도왔다.

     

    1654년의 공성전에서 그는 2차례 부상을 입었다. 1655년 방어공사와 공성술을 전담하는 장교단에 '국왕 전속기사' 자격으로 가입했다. 이 장교단은 요새와 포위 공격술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며 정규군 계급제도와는 별개의 체제로 서서히 증강되고 있던 부대였다. 그는 1655~57년 여러 요새와 도시의 공격작전에 참여한 후 1658년 그라블린 공격 때 공병대장이 되었다.

     

    그의 늘어나는 임무 가운데는 '요새병참감'의 임무도 있었지만 그 직함은 1677년까지 명목상의 공직 보유자에게 부여되어왔다. 그는 정기적으로 여행하면서 국왕 및 육군장관인 드루부아 후작과 많은 편지왕래를 했다. 보방의 기술에 관련된 기록문으로 인해 그의 요새 건설방식들은 1세기 이상이나 유럽 군사학의 중심이 되었다. 1668~72년 평화시에 그는 루시옹, 북해 연안의 프랑스령 저지대, 피카르디, 로렌의 방어시설들을 점검했다.

    뿐만 아니라 피에몬테에 파견되어(1671) 사보이 공작에게 베루에·베르첼리·토리노의 방어시설에 관해 조언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조언은 추후에 프랑스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공성술의 혁신

    루이 14세가 일으킨 1672~79년의 네덜란드 전쟁은 보방에게 대단한 영광을 안겨주었다.

    그가 지휘하는 공성작전에 국왕이 최고사령관으로 지휘했기 때문이다. 마스트리히트 공성전(1673)에서

    그는 완전한 '평행선' 방식을 이용했다. 그것은 방어시설 주위에 평행이나 동심원으로 참호들을 파고 그 참호들을 파격적인 지그재그형의 참호들로 연결하여 수비군의 포화로부터 비교적 안전하게 적의 요새로 접근할 수 있도록 한 방식이었다.

     

    마스트리히트에서의 성공으로 그는 승진과 함께 하사금을 받아 그의 일가가 있는 보방 영지 근처 바조슈 성(城)을 구입했다. 그후에도 잇달아 성공을 거둔 결과 1676년 오늘날의 준장 계급에 해당하는 '마레샬 드 캉'으로 승진했다. 1677년의 발랑시엔 공격 때는 왕이 그의 진언을 받아들여 루부아와 5명의 원수의 조언을 물리치고 주간에 공격할 수 있는 권한을 그에게 위임했다.

     

    재래식 야간공격에서는 실수로 아군끼리 포격전을 벌이는 사태가 종종 발생한다는 것이 그가 주간공격을 주장한 이유의 하나였다. 발랑시엔을 점령한 공으로 그는 또다시 하사금을 받았다. 1680~81년 보방은 또 1차례 프랑스 국경을 순회하면서 요새들을 점검 또는 보수했다(→ 참호전). 1681년 스트라스부르의 방위를 위해 가장 진보된 방식의 멋진 요새를 설계했다.

     

    1684년 룩셈부르크 공격을 지휘한 후에는 이 도시의 방어시설을 재설계하기도 했다. 바이에른의 란다우 요새 설계가 그의 최대 업적(1687)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프랑스가 네덜란드, 영국, 신성 로마 제국과 그밖의 소국들의 연합군을 상대로 싸우게 된 아우크스부르크 동맹전쟁의 초기인 1688년 9월 보방은 육군중장으로 승진되었다. 10월에는 황태자 루이의 지휘 아래 라인 강 우안(右岸)의 스파이어 남쪽에 있는 필립스부르크를 점령했다.

     

    이 공성전에서 그는 도탄(跳彈)포격을 선보였다. 그것은 포탄이 흉벽 위로 스쳐나는 돌멩이처럼 튀어 날아가면서 그 힘이 다할 때까지 여러 개의 목표물을 맞추도록 고안된 포술이었다. 동시에 그의 또하나의 발명품인 소켓 총검의 사용을 주장하고 있었다. 이것은 총검을 총구 위쪽의 소켓에 꽂아놓고 소총 사격시에만 제거하도록 한 것이었다. 그는 1691년 몽을 점령하고, 1692년 나무르를 극소수의 사상자만 내고 신속히 점령했다.

     

    1693년 샤를루아 공성 때 처음으로 보병 1개 사단을 지휘했다. 1694년 영국의 브르타뉴 침공위협에 대비하여 브레스트로 갔다. 그후 1695년 나무르의 방어를 위해 저지대로 돌아왔지만 이 도시를 구하지는 못했다. 1697년 그는 아트의 공성과 점령에 참가했지만 또다시 부상당했다. 1698~1701년 평화시에 보방은 알자스 지방에 있는 뇌프브리자슈의 방어시설을 개축했는데, 이것이 그가 손질한 160개 요새 가운데 마지막 요새였다.

    *정보 - 책 159쪽